성경역사/성경세계사

제목 : 예수 안에 갇힌 자 되어

은바리라이프 2008. 5. 10. 17:35
제목 : 예수 안에 갇힌 자 되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2-05-13
전세계의 온갖 뜨내기들이 모여드는 항구 도시답게 고린도의 수호신은 소위 「사랑의 여신」으로 미화된 음란의 여신 아프로디테였다.
아프로디테의 신전에서 일하는 여제관들은 창녀의 일을 겸업하고 있었는데 그들과 즐기기 위해서 찾아오는 장사꾼들이며 여행객들 때문에 신전은 언제나 초만원을 이룰 정도로 번창했다. 제단에는 항상 제물이 넘치도록 들어와서 신전의 제관들과 종사자들이 다 먹고도 오히려 많이 남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 남는 고기들은 다시 시장으로 흘러나가서 팔리게 되었다.
고린도 시민들은 누구나 시장에서 흔히 싼 값으로 팔리고 있는 고기들을 사다 먹었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경우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회개하고 열렬하게 예수를 믿게된 사람들 중에서 이에 관한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우상의 재단에 바쳤다가 나온 고기를 어떻게 성도들이 먹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이 만일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라면 결론은 뻔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다만 그의 마음과 생각이 문제라고 이미 밝혀 놓으신 적이 있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막 7:15-16)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의 보고를 들었던 것은 AD55년경으로 추정되므로 이 때에 그는 아직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을 가지고 있지는않았겠지만 사도들이나 예루살렘 출신의 성도들로부터 예수의 가름침을 다 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사람을 죄(罪)로부터 구원하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먹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AD50년경, 안디옥교회에서는 교회 안의 이방인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에 불안을 느낀 유대인 출신의 성도들이 이방인 출신의 교우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지 못하게 해야 하며 유대인과 동석하면 안된다고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 때에 바울은 구원이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갈 2:16)이라 주장하여 이 문제를 예루살렘총회에 제소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예루살렘총회르 주재했던 야보고는 이일을 원만히 수습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주장과 바울의 주장을 절충했다.
즉 할례는 받지 않아도 좋으나 다만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삼가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다시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를 거론했을 때 바울은 신중한 태돌로 이에 대처했다. 예루살렘총회에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며 당당하게 외쳤던 바울의 강경한 태도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근 비록 총회의 논쟁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감히 예수의 사도들을 몰아세웠던 일에 대해서는 적잖이 뉘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그는 먹는 것이 구원과 관계 없음을 이미 「알고」있었으나 앞서 예루살렘총회의 절충식 결정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완곡한 표현을 썼다.
어차피 구원과 관계 있는것이 아닌데 교만으로 자기 「지식」을 주장하는것보다는 오히려 너그럽게 포용하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식물(食物)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아나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고전 8:8)
그러면서 바울은 오히려 먹는 것이 구원과 관계없다는 지식을 자랑하며 마구먹는 것에도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지식이 있는 자가 우상의 집에 않아서 그 제물ㅇ르 먹다가 아직 믿음이 약한 자가 그것을 보게 되면 먹는 것과 우상 섬기는 일ㅇ르 혼돈하여 미혹의 함정에 빠질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 8:9)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다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짖는 것이니라』(고전 8:11-12)
바로 이것 때문에 오늘날 여러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진취적인 생각을 가진 성도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자기의 지식대로 행동하다가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마침내 그들을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목회자나 장로 같은 교회 지도자들의 경우가 더 그래서 사소한 일들까지도 흉을 잡히는 꼬투리가 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개고기를 너무 즐겨 먹게 되면 대번에 화젯거리가 되어버린다. 「영양식」이 순식간에 「정력제」로 인식되어 묘한 연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더구나 일부 진보적인 목회자들은 구원과 관계 없다는 이유로 교인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도 부작용은 나타나게 마련이다. 함께 술을 마셔가며 잡담을 할 때에는 멋진 목사라고 추켜주면서 막상 몸에 병이라도 나게되면 어쩐지 그 목사님에게 안수받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다. 또한 요즈음 교회의 규모가 커지다보니 고급 외제승용차를 타고다니는 목회자도 있고 건강을 위하여 골프를 치는 성직자들도 볼수 있게 되었다. 개고기나 술 담배 그리고 외제승용차와 골프 등이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목회자들의 그런 모습을 바라볼때 문제는 달라진다. 그것은 곧 교회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나타나게 되고 구원이라는 명제에 대한 회의까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상의 제단에서 나오는것밖에 다른 고기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먹음으로써 믿음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할 염려가 있다면 바울은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까지 말했다.(고전 8:13).
비록 구원과는 관계 없는 일이지만 믿음이 연악한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쪽에서 먼저 절제를 했던 바울의 심경을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그가 늘 말하던 「예수 안에 갇힌 바울」(엡 4:1)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늘 바울이 그랬듯이 예수 안에 갇힌 것을 행복하게 여기면서 아직 믿음이 연약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즐거이 자신을 죽여가야 할 것이다.

<김성일님의 "성경대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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