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에 의로운 왕이 나타나며, 그로 인하여서 엄청난 축복이 임하게 되는데,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고 있다. 과연 그 나라의 통치 방법은 어떤 것이며, 지금의 통치와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는 어떤 기쁨이 충만한지를 생각해 본다.
1. 멸망과 구원의 차이(사28-30)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사망과 언약했기 때문에 재앙이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리라고 하며, 거짓과 허위가 그들의 피난처라고 말한다(사28:14,15). 또한 그들은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을 믿는 자들이다. 여기의 견고한 돌은 모퉁이 돌과도 연결된다. 슥10:4과 엡2:20은 모퉁이 돌이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견고한 기초돌은 직접적이진 않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1) 멸망과 구원
성경은 먼저 전자에게 '재앙이 유행한다'고 언급하며, 후자에게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전자에게는 재앙이 유행하듯 그들에게 덮쳐도 하나님께서 돌아보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이며, 후자에게 적용되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한다는 표현 속에서는 그들이 급절하게 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돌보셔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돌보심의 근거는 바로 견고한 기초돌을 믿는 믿음이다. 이 돌은 아다윗의 주권이 아니라 다윗의 진정한 씨(자손)이다. 이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에서 난 것이라는 바울의 말을 입증 하는 듯하다(롬1:17). 여기서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인이 서야 할 자리
모든 사람은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 전에 문제가 되었던 종교다원주의이다. 여기 본문의 내용도 '견고한 기초들'인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함을 강조했고, 행4:12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라고 못박고 있다. 인간사의 모든 주체가 하나님임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설 자리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좁은 문인 것이다.
2. 의로운 왕과 회복의 약속(사31-33장)
사32:1에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라고 언급한다. 물론 문장의 문법상 미래에 있을 내용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는 의로 통치하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당시 통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장차 다스릴 의의 통치는 어떤 모습인가? 그 두 모습은 어떤 다른 두가지의 모습을 나타낼 것인가? 그리고 장차 그 통차자는 누구인가? 이 통치자는 인간의 통치 방법이 아닌 다른 통치 방법을 보일 것이다.
1) 예수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
먼저 당시의 통치 방법(모습)은 사33:1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학대와 속임이 그 대표적 내용을 담고 있다. 사33:1-6은 구원을 바라는 기도인데, 이러한 학대와 속임에서 해방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이 학대와 속임 속에서는 공의와 사랑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장차 의로 통치하는 곳은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사32:2), 사랑의 의미를 간직하신 분이 다스릴 곳이다. 그리고 "공평으로 정사할 것"(사32:1)을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광풍을 파는 곳"(사32:2)이라 했는데, 이는 어려움을 당한 자에게 큰 사랑을 베풂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분은 예수그리스도뿐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서 공생애 기간에 이러한 통치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결코 불의와 타협치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2)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공의
미6:8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공의를 베풀고자 정직을 행하면 오히려 그 소속 단체에서 따돌림을 받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정직히 행하고자 공무원이 뇌물을 거절하면 저만 똑똑한 척한다고 배척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한 기독교인은 온전한 하나님의 공의를 사회에 희생적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3. 이스라엘에게 임할 축복(사34,35장)
하나님께서 새롭게 한 왕국은 육적 중심의 모습이 아니라 영적 중심의 모습이다. 이스라엘에게 임할 이 왕국은 과연 어떤 모습이며, 그곳에서 살 백성은 어떤 자들인가? 영원한 희락과 즐거움을 얻을 이들은 무엇을 얻은 자들인가? 그리고 이들에게서 사라질 것은 무엇인가?
1) 사막의 백합화
먼저,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사35:1)라고 했다. 여기서 광야가 주는 의미는 온 세상을 의미한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기쁨이 넘침은 엄청난 변화를 말해 주는 것이다.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고생한 이스라엘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었다면 그들의 생명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한 고난의 장소가 광야인데, 그 광야에서 기쁨이 그리고 사막이 백합화를 피운다. 이는 창조 질서의 변화를 예고한 듯 싶다. 사막에는 물기가 없기에 백합화와 같은 연약한 식물은 견딜 수 없다. 그러나 그곳에 백합화가 핀다. 이곳이 하나님의 새 왕국이다. 그리고 영영한 희락을 얻을 자들은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을 자들이다. 여기에는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
사막의 백합화는 만물의 회복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에 의해 그 선취함을 보았다. 그리고 오직 그분만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며 본연의 질서에로 회복시키신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회복의 나라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치유의 역사로 모든 영적 병든 자들에게 희망의 빛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설 자리를 확인하라고 말씀하신다. 요셉이 결코 범죄의 편에 서지 않았듯이 우리도 예수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공의가 가득한 곳이며,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곳이다. 이런 그리스도의 왕국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목소리를 더 높여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