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망이라는 것은 어떤 잘못이 드러날 때에 있게 되는 것으로서 책망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본문에는 이방과 유다에 대한 책망이 나오는데, 이 책망이 그들에게만 임한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 책망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도록 우리에게도 각성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은혜에 대해 항상 감사해야 할 것이다.
1. 바벨론에 대한 책망의 교훈(사13-16장)
바벨론은 일찍부터 하나님 대신 큰 우상을 경배하는 행위가 많은 곳이었다(창11:1-9). 그리고 계시록에는 대혼란 속에서도 이곳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중심 장소로 상징된다(계 17,18장). 이러한 바벨론이 이사야를 통하여 책망을 받게 되는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어떤 죄로 인하여 책망을 받게 되는 것인가? 이들의 죄악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1) 오만과 거만
사13:6-16까지의 전반적인 내용의 흐름은 여호와의 날에 야기되는 큰 혼란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무분별한 파괴가 아니라 죄인들(사13:9)과 사악하고 교만한 자들(사13:11)을 구별하여 멸한다고 한다.
결국 이 메시지를 통해 볼 때 바벨론의 중심적인 죄악은 바로 '교만'이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인류의 상징인 바벨론은 그들의 힘을 믿고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2)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다고 하는 자들
인간이 헛된 자만심으로 우쭐거린다면, 필연코 주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배운다. 이사야가 선포한 내용의 교만 속에는 인간들이 스스로 뭐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자신의 권력이나 재물을 자랑하면서 남을 낮추어 보는 등의 행동이 포함되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러한 교만을 간과하시지 않을 것이다.
2. 책망과 교훈(사17-20장)
북왕국 이스라엘(에브라임)은 앗수르의 공격에 대비하여 아람과 연합했다. 그런데 이들 두 나라는 유다를 자기들과 합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망시키려 한다(왕상22:31). 이런 에브라임과 아람의 성읍 다메섹에 대하여 이사야는 폐허더미가 될 것을 예언하였고, 에브라임에 대하여도 견고한 성읍들이 황폐하리라고 한다(사17:9). 이러한 심판을 불러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죄악을 우리는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을 잊어번린 죄
먼저 에브라임이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렸다고 사17:10은 지적한다. 그리고 다메섹은 이러한 에브라임과 합세하여 에브라임에게 우상의 씨앗을 심어준다(사17:10,11). 여기서 "네가 기뻐하는 식물을 심으며"는 육욕적인 구행으로 예배하는 이방인의 기질을 말한다. 암7:13을 보면, 여로보암의 우매한 판단으로 이방 기질의 예배 수행을 국가 종교로서 인정해 준다. 즉 음란한 육욕적 예배 형태를 보장한 것이다. 이것의 근원은 모두가 '자기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까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2)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확고한 신앙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선하심의 기쁨을 맛보게 하셨을 때 그 기쁨이 확고하게 우리들의 마음에 자리잡는다면, 어떤 것에도 끌리지 않는 굳건한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신앙의 기쁨이 확고히 자리하지 못한 자는 에브라임이 하나님을 잊어버린(망각함)것과 같은 죄에 빠지게 될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능력의 반석'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항상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도록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예루살렘에 대한 책망과 교훈(사21-23장)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읍을 둘러싸고 있었을 때, 이 성읍은 그 군대를 대항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백성들은 적군이 이 성읍을 진격할 때가 여호와의 심판의 날임을 인식하고 있었다(사22:12,14,15,25). 이런 와중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참회의 기도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했는가? 하나님의 원하는 바를 그들은 어떤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죄악을 범했는가?
1) 하나님의 뜻을 떠난 즐거움
예루살렘의 임박한 어려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사22:12)고 하셨는데, 이들은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워"(사22:13)했다. 아마도 "내일 죽으리라"는 문구로 봐서 자기들의 처지에 자포자기하고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다가 죽자는 것이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정신을 가다듬어 자신의 신앙의 위치를 찾아야 할 백성들이 오히려 자포자기로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인하고 있는 모습이다.
2) 웃을 때와 울 때
'기쁨'은 신앙인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기쁨은 빌4:4에 언급하듯이 '주 안에서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여기 예루살렘의 기쁨은 일반적으로 '회개에서 우러나오는 슬픔'(고후7:10)에 위배되는 기쁨이다. 즉 우리 신앙인들은 웃을 때와 울 때의 의미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회개할 자가 슬픔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 거만하게 보일 것이다. 더욱이 오늘 예루살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슬퍼할 때라고 명령함에도 그 시기를 깨닫지 못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연후에 베개가 젖도록 슬퍼함과 같이 회개의 슬픔이 신앙인들에게 필요하다. 오늘의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는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교만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하나님께 가장 큰 죄악이다. 예수님께서도 겸손한 모습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강조하셨다(막10:42-45). 만약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있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죄는 범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교만과 하나님을 망각하는 죄악은 서로의 연관성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잊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