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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3 빌닷의 변론(욥8-10,19,25-31장)

은바리라이프 2008. 4. 25. 20:19
연구 3 빌닷의 변론(욥8-10,19,25-31장)
연구 3 빌닷의 변론(욥8-10,19,25-31장)

엘리바스의 점잖고도 권위 있는 예언적 훈계에 욥이 전혀 수긍하지 않고 오히려 가슴을 찢을 듯 안타깝게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자 이번엔 빌닷이 나섰다. 빌닷은 고대 조상의 전통과 역사를 통하여 욥의 부정을 조명하려 한다. 빌닷의 편견적 공론에 욥은 예레미야의 애가보다 더 진한 비통한 노래로 답변한다.

 

1. 친구의 공론

 

빌닷은 수아 사람으로서 엘리바스보다는 나이가 약간 적고, 소발보다는 좀 많은, 그들 중 중간 위치의 사람이다. 그는 엘리바스보다 진술의 요령이 부족하고 상당히 직선적이다. 그는 자기가 진리라고 신봉하게 된 것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언어의 화살을 쏘아붙이는 좁은 소견의 소유자이다. 그럼에도 그는 당대의 현인을 대표하는 자였다고 볼 수 있다. 빌닷의 노의의 새로운 면은 은유를 사용한 것과 과거의 교훈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빌닷의 신앙관은어떠한가? 그리고 빌닷이 욥에 대해 오해한 부분은 무엇인가?

 

1) 빌닷의 신앙관

빌닷은 엘리바스보다는 덜 민감한 감성을 소유했다. 그는 조상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진 전통주의 신앙자로서 자기 주장의 권위를 전통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 진리성에 대해 조그만 의심도 없이 그의 신학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다른 이들에게 속담과 금언을 인용하여 전달하려고 애쓴다. 이와 같이 공론가들은 형식과 선례를 중요시하고 일정한 룰의 적용을 즐겨한다. 우리는 실제적인 사실에 직면 할 때 전통이라 하더라도 오류가 발견되면 가차없이 버려야 한다. 그것은 전통이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진리만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 빌닷의 오해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되에 붙이셨나니"(욥8:4)라고 빌닷은 마치 자기가 욥의 자녀들의 죄지으니 현장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욥을 정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첫마디부터가 심한 질책으로, 욥의 말이 광풍처럼 헛되고 가증스럽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욥이자녀 양육의 방법을 옛 시대 사람, 열조에게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하다. 빌닷은 예 것에 대한 존경을 남용하고 있다. 우리를 지키는 최선의 것은 옛 규칙이 아니라, 항상 그의 백성 가운데서 살아계신 그리스도이다.

 

2. 생명의 법칙

 

빌닷이 그의 좁은 소견속에서도 :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는 위대한 예언을 하였다. 이 예언은 어떤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가?

 

1) 창대한 열매

이 말은 욥의 이전에 누렸던 축복은 별 것 아니라고 얕잡아 봄이 있는가 하면 '지금가지의 네 고난은 미약한 시작에 불과하다'는 협박의 의미도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빌닷이 부당하고 그릇된 견해로서 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예언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안내문이 된다. 성도는 작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할 줄  알아야 한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마25:21,23)라는 말씀처럼 우리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에게 큰 열매를 맺게 해주시고 주님의 즐거움에 동참케 해주신다.

 

2) 결실의 은총

성장은 생명의 법칙이다. 성도가 작은 시를 심었다면, 즉 작은 일에 충성했다면 성장해야만 하고 반드시 창대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라는 말씀에서 불 수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자기는 보잘 것 없은 작은 씨를 심었을 뿐이고, 아볼로는 소리 없이 물을 주는 헌신을 하였으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밝히며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다. 복음의 승리는 창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 비통 속에 부르는 찬송

욥은 빌닷의 공격적이며 직선적인 변론에 대해, 그를 저주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욥의 자신에 대한 애가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어떠한가?

 

1) 불행의 견고함에 대한 애가

욥은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욥9:27) 그의 고통이 워낙 심하고 사라지지 않음으로 떨면서 비통해 한다. 그의 육체의 고통은 "옷깃처럼 내 몸에 붙었구나"(욥30:18)라고 말할 정도로 병들어 헤어진 피부 조각을 친구들에게 보이며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욥9:21)고 애절하게 노래한다.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욥30:29)며 사람으로서 사람 취급을 못받고 어린아이와 비천한 자들에게조차 침뱉음과 조롱을 당하는 인격적 모멸의 참을 수 없음 토로한다. 이 불행은 단순한 회답만으로는 그 무게가 줄어들 수 없다.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주님께 벗어 놓아야만 그 짐이 가벼워진다(마11:28). 주님 앞에 짐을 완전히 맡길 때 쉼을 얻게 된다.

2) 특별한 찬양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6).욥은 심한 좌절에 빠졌으면서도 반드시 그의 영이 하나님을 만나고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소망을 노래한다. 침체의 병에 소망의 노래는 어떤 의사보다 낫다. 그는 "내 수금은 애곡성이 되고 내 피리는 애통성이 되었구나"(욥30:31)하면서 눈물 어린 찬양을 부른다. 그리고 폭풍처럼 밀어닥친 환난의 와중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라는 특별한 찬송을 불렀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사랑하는 자의 찬송받기를 즐겨하신다. 흔히 기쁠 때에만 찬송을 하지만 괴로울 대의 찬양이 더 큰 위로와 능력이 된다. 우리의 찬송은 천사도 흠모하며, 찬송 소리에 사단은 힘을 잃는다. 욥은 불행 속에서 흐느껴 우는 연약한 자가 아니었다.

 

기독교는 모든 종교 가운데서 뛰어난 특별한 종교이다. 예배를 드릴 때 늘 찬양과 함께 드리다. 후에 욥이 갈망하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은 바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며 소망의 찬송을 드렸기 때문이었다. 견실한 신앙인은 하찮은 공론가의 규칙이나 예견에 속박되지 않는다. 기독교의 모든 교의는 역사적 교훈이다. 우리는 이 교훈을 속박의 틀로 볼 것이 아니라 발달하는 사회와 지식, 변화되는 환경과 역동적인 관계로 이끌어서 적용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