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시가서

연구 4 소발의 변론(욥11-14, 21장)

은바리라이프 2008. 4. 25. 20:20
연구 4 소발의 변론(욥11-14, 21장)
연구 4 소발의 변론(욥11-14, 21장)

선견자와 공론자에 이어 세속적인 언동으로 소발이 등장한다. 그는 인간을 연구하였고, 인생에 대해 많은 상식을 가졌다고 뽐내는 자이다. 위대한 진리에 대해서는 어두운 시력을 가졌으면서도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전제하는 것은 오산이다. 친구들의 격앙된 충고에 욥도 점점 말이 많아지고 전능자에 대한 몰이해와 원망이 도를 넘어가고 있다. 소자인 인생들은 혀를 악에서 금하며,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해야 한다(시34:13).

 

1. 다변의 허구성

나아마 사람인 소발은 세 친구 중에 아마도 연령이 가장 적어서 세 번째로 말한 것 같다. 그는 노기가 섞인 말로 난폭하게 자기 생각을 발표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저급한 기준으로도 능히 능히 욥을 정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발언의 골자는 엘리바스와 빌닷의 입장에 동의하면서도 환상이나 공론을 멸시한다. 그는 형식주의자로서 당대의 선인이라 자처한다. 또한 자신을 당시의 가장 근대적인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소발이 말한 내용 중 어떠한 허구성을 찾아볼 수 있는가?

1) 말의 잔치

소발은 욥의 불평을 막고자 하는 성급함으로 신앙적인 열정이 결여된 과격한 발언을 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염려만을 앞세우느라 친구에 대한 온정은 잊고 만다. 그는 욥을 '말이 많은 떠벌이'라고 멸시한다. 욥이 말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도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며 말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요11:2)면서 소발은 다변자의 모순을 욥에게만 덮어씌우려고 한다. 인간은 흔히 가까운 사람에게 공정치 못하며 완고하고 매정하게 대하는 일이 많다. 애통하는 자의 탄식을 비웃고 힐책하는 일은 상처에 불을 대는 것처럼 잔인한 행위이다. 말은 항상 조심성 있게 선정하여 간결하게 구사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인의 지혜이다.

 

2) 다변의 허구성

자기를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려고 하는 맹목적 노력이 적절한 어휘와 심도 깊은 표현 없이 망발될 때에는 더 악화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면 말로써 말을 이기고자 하는 언쟁 외에는 얻을 것이 없다. 다변으로써 상대를 제압하고자 함은 오산이다. 오히려 이성을 제어하는 능력이 무디어지고 감정만 더 부풀어 올라 결국은 의도하지도 않았던 지나친 말까지 쏟아 놓게 된다. 욥과 세 찬구가 언쟁을 통해 얻은 것은 우정에 금이 가게 할 정도의 적개심과 모멸감뿐이었다.

 

2. 인간의 무지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욥11:6)고 소발은 욥에게 핵폭탄 같은 저주를 부었다. 그는 자기 지식이 확실한 것처럼 주저없이 입술의 범죄를 저지른다. 도대체 욥이 얼마나 대단한 죄를 지은 것으로 오판했으면 현재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보다 더 중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가?

1) 무지로 인한 말

욥은 "주께서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신다"고 하며 까닭 모르는 고난으로 인한 혼돈되 분별력으로 하나님을 오도하고 있다. 욥과 세 친구는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열렬한 신앙인이면서도 무지로 말미암아 불신앙과 같은 발언을 남발하였다.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욥14:19),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구박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대적이 되어 뾰족한 눈으로 나를 보신다"(욥16:9)고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진술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단의 참소를 완전히 봉하시고 욥의 의로움을 돋보이게 하시려 정금같이 연단하시는 기간에 인내로 잠잠했더라면 그의 고통의 기간이 단축되었을 것이다.

2) 무지로 인한 고난

노아의 고달픔을 보시고 20년을 단축하신 하나님이셨다. 반대로 가나안 정탐꾼의 부정적 발언과 그 백성의 불평은 광야 기간을 40년으로 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나님의 힘과 지혜는 무한하고 광대하다. 인간은 하나님을 보고 알지만 그것은 부분적이다. 욥도 후에 하나님에 대해 미약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욥38-40). 이처럼 불완전한 시야의 적은 지식으로 진리를 해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3. 소발의 어리석은 판단

 

소발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욥20:3)라며 자신을 부추긴다. 그러나 그는 영혼의 내적 동요를 숨기기 위해 가장된 만용을 부린다.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욥20:7)고 조잡한 언어로 삭고한 자를 정죄한다. 이 말이 보편성과 타당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지적하는 욥에게는 해당되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1) 공의의 하나님

이 말은 악인의 결국이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만큼의 완전한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는 뜻이다. 즉 이 세상에서 똥이 매우 천대받는 것처럼 인간 중심의 악한 계획과 명예는 끝내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발의 언행으로 욥은 언어의 화살 공방전에 극단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기 의를 누차 강요함으로 겸손하고 경건한 본연의 자세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을 향하여 그들이 하는 것처럼 공격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의문으로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욥이 가장 괴로워하고 항변하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공평하게 취급하셨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그러나 욥은 악인이 번영하고 형통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현세적 심판을 반드시 받는다고 친구들을 공격한다.

 

2) 하나님의 심판

사도 바울이 인간의 세상적인 자랑과 정욕을 배설물로 여긴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러한 신앙이 필요하다. 그리고 악이 형통한 것 같지만 결국은 패망과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욥은 하나님의 공의를 보고 깊이 뉘우친다.

진실한 신자는 사람들로부터의 신임이나 위로가 없이도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선명한 교통과 은혜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욥은 친구들의 논박에 그들을 원망하거나 동일한 비난을 하기 위해 흥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이 막히고 은혜의 햇살이 거두어진 데 대한 의문이 너무 사무쳐 괴로운 것이며 누구에게라도 그 까닭을 물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신실한 자에게 닥치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불의한 박해가 아닌 하나님 섭리와의 불일치 문제이다. 성도는 어려울 대 영적인 성실성을 가지고 꾸준히 그리고 조용히 기도하며 해답을 하나님께 간구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