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시가서

연구 5 엘리후의 변론(욥 32-37)

은바리라이프 2008. 4. 25. 20:21
연구 5 엘리후의 변론(욥 32-37)
연구 5 엘리후의 변론(욥 32-37)

엘리바스, 빌닷, 소반이욥과 격한 논쟁을 벌이고 나자 이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양상으로 대단히 설득력 있게 논술한다. 그의 긴 진술 속에서나 앞뒤의 다른 곳에서도 그 자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마침 멜기세덱이 아브람 앞에 나타나고, 아브람은 그에게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창14:18-20)는 것 외에는 전호 어디에도 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을 삽입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느끼듯 엘리후를 통하여 주님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1. 중재자의 그림자

 

엘리후는 다름 사람의 말을 인내하여 끝까지 경청한 후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충동으로 인한 말을 감갔고, 자기가 해야 할 말을 미리 준비하고 정리하여 지혜롭게 은유적으로 이야기 한다. 엘리후는 어떠한 인물이며, 욥과의 변론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1) 엘리후의 변론

엘리후는 자신의 말이 신적인 감화력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욥32:8). 그는 환상이나 격언이나 과장된 경구가 아닌 순수하고 단정한 말로서 확실한 사실 위에 입증된 경험을 진술하며, 사악한 목적을 품지도 않았고, 웅변적으로 진리를 가장하려고 하지다 않았다. 그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담대히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엘리후로부터 전능자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욥33:4). 그는 전능자의 숨결에 의해 불이 밝혀졌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성령의 빛과 뜨거움으로 인간들의 마음을 비추시고, 감화시킨다고 알려준다.

 

2) 인격적인 도전

욥은 친구들이나 누가 하는 비난이든지 모두 다 반박할 수 있는 당당함이 자기에게 있다고 반박할 수 있는 당당함이 자기에게 있다고 큰소리친다(욥13:22; 욥23:4-7; 욥31:35-37). 그리고 자기를 고난으로 몰아넣은 적대자는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주장한다(욥9:32).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후라는 인물을 준비하셔서 하나님과 직면해야 할 욥의 곤경을 완화시켜 주신다(욥33:6,7). 엘리후는 간간이 욥에게 변론할 기회를 주며 당당하게 반박하단 욥의 대답을 기다려 주었으나 욥은 한마디의 답변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욥을 협박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욥의 잘못을 지적하되 부당성을 확신시키며 전능자의 초월적인 위대성을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은 결코 몰인정하고 비인격적인 심판자가 아니시다.

 

2. 하나님의 계시방법과 목적

 

해석자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재자 또는 사자를 의미한다. 사자의 사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하나님의 섭리를 특별히 지정된 자에게나 구속의 범위 안에서 일반인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죄성에 둘러싸여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지하다. 하나님께서 창조해 보내신 한 사람 한사람을 공평과 정의로 대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해석자를 보내시어 무지한 영혼을 교화하신다. 여기서 엘리후는 특수한 해석자의 완전한 위치로 보기에는 자만이라는 흠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욥에게도 교만한 마음이 있었는가?

 

1) 고난을 통한 겸손

인간은 교만이라는 사단의 유혹에 잘 걸려든다(창3:5). 엘리후는 해석자로서 오류의 가능성이 짙고, 한계가 제한적인 자신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욥을 판단하고자 했던 교만이 있었다(욥34:3,4). 그리고 욥도 하나님이 인정하실만큼 순전한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에 대한 자만심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혼이 구덩이에 빠질 정도로 육체의 고난이 극심함에도 자기 의를너무 앞세웠고, 무지한 말로 전능자를 비방했다(욥33:8-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의 확고한 신앙심과 인내를 높이 평가하시어 엘리후를 통하여 욥을 부드럽게 일깨워 그의 고난을 겸허함 안에서 얻어지는 평안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셨다.

 

2) 꿈을 통한 선한 계시

흔히 심리학자들은 꿈이 개인의 심적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외적인 꿈이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 듯 교훈하실 때 기원의 심리적 기초에 기반하지 않는다(욥33:14-17). 느부갓네살, 바로, 아비멜렉과 같은 이방인에게도 꿈을 통하여 계시로 훈계하셨듯 하나님은 꿈이라는 초자연 계시를 통하여 인간을 범죄와 죽음의 길에서 보호하시고 선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3. 욥이 느낀 모순성

 

인간이 범하기 쉬운 큰 잘못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을 대적하신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의롭다는 사실뿐 아니라, 모든 섭리가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믿음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오는 고난의 조종자도 하나님이신 것으로 알고 그 하나님의 진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하나님을 괴팍한 횡포자로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욥은 어떻게 인식하게 되었는가?

 

1) 깨달음의 침묵

엘리후는 욥에게 연설 중간 중간에 대답할 기회를 주지만 욥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욥이 그 동안의 많은 변론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의자가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여태껏 자기가 너무 흥분 상태에 있었으며, 본심보다 과장되게 하나님을 비방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신뢰

자신의 의와 무죄만을 주장하던 욥은 엘리후의 긴 연설 속에서 하나님의 한없는 의와 사랑을 느낀다. 그 동안 자신이 하나님을 어리석게 비난했으며, 원망하였던 일이 얼마나 무지한 행동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오래 참으시며, 우리의 불평과 원망 가운데서도 인자하심으로 다가오신다. 이러한 사랑과 존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늘 감사함으로 그분을 따라야 할 것이다.

 

신앙인들은 언행에 있어서 진지하고 솔직해야 하며, 특히 목회자들은 성실하게 연구하고 기도하여 성령의 감화력으로 무지에서 깨어나야 한다. 지도자가 무지한 채로 그의 열정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인도한다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처럼 모두를 구덩이에 빠뜨리고 만다. 그것은 대단한 죄악이다. 소자 하나에게라도 실족케 한다(마18:6; 막9:42)를 반드시 심문하시는 하나님 앞에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