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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메타 비판에서 환상적 현실 재구성으로 - 석성석의 작품세계.

은바리라이프 2007. 11. 12. 10:36
미디어 메타 비판에서 환상적 현실 재구성으로 - 석성석의 작품세계.   
이병희

0. 환영의 도래

석성석의 작품세계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밟아오는 과정과 그리 다르지 않게 사진, 필름, 비디오, 디지털매체 등의 뉴미디어를 차례로 사용해온 기록을 볼 수 있다. 통상 기록매체로서의 미디어를 사용하는 작가들에게 있어, 시간의 흔적을 담는 그릇이자 기억의 재생장치로 여겨졌던 미디어는 현실과 그 재현에 관한 여러 의문들을 던져주는 화두가 되어왔다. 미디어에 있어서의 재현의 문제는 문학을 비롯한 전통적인 장르들의 예술영역에서 제기된 재현에 관한 일반적 문제뿐만 아니라 미디어의 특수성에 기반한 중요한 문제들 또한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의 미디어를 통해 재현의 문제를 제기하는 미디어 아트는 현실과 상상 사이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보는 방식, 사유하는 방식 등에서 몇 가지 획기적인 변화들이 생겨나기도 한 것이다.
미디어 아트가 재현의 문제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던지는 의문들은 미디어가 재현하는 현실이 과연 진짜 현실인지에 관한 의문으로부터 현실, 혹은 실재를 재현하는 방식, 재현의 대상, 재현의 주체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무엇보다 미디어 아트는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실재 차원에서의 진실의 문제를 더욱 더 진지하게 성찰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디어 아트의 초창기 역할 중 하나는 관객에게 미디어를 통한 현실의 단편들의 진실성, 확실성을 의심하도록 하는 미디어 메타 비판 작업으로 나아간 것이었다. 이 작업은 미디어의 물질성을 노출하고 미디어적 재현이 본질적으로 왜곡 및 변형 과정임을 폭로하는 메타적 태도 속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미디어 아트는 이런 자기 부정성의 운동 내에 국한되지만은 않는다. 비록 모든 재현들의 진정성, 투명성에 대한 논박과 부정에서 출발했지만 이제 그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미디어 아트는 충실한 기록 매체로 보였던 현대의 미디어를 통해서조차도 재현 대상 혹은 기억의 원상태의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멜랑꼴리적 굴레를 넘어선다.
미디어 아트는 미디어의 변형과 왜곡이라는 특성을 필연적인 것으로 긍정하고 나아가 그런 조작의 극대화 속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려는 노력으로 자기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이미지가 소통의 대상으로써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이미지 생산자나 작가의 발언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왜곡, 변형된 상태의 이미지 자체를 대상으로써 마주하는 관람 주체의 역할에 의해서 이 새로운 이미지는 관람주체의 환상과 공명하는 대상이 된다.

관람 주체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미디어 아트가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선형적 발전이라는 신화와는 전적으로 무관한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미디어 아트는 테크놀로지의 변화를 보다 나은 재현의 충실성을 보증하는 혁신이 아니라 현재적 현실과 더욱 더 동떨어진 불가능한 이미지 생산을 가능케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미디어 아트는 이제 미디어의 환영적 리얼리즘을 비판하고 재현에 있어서 미디어의 물질적 과정들을 공공연하게 폭로하고 각인하려는 1단계의 역할을 마치고 제2의 다른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것은 마치 애초에 비난의 대상이었던 환영적인 것을 다시 강조하는 퇴행적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환영은 더 이상 기존 현실을 자연화하는데 봉사하지 않고 그 현실을 근본적으로 무효화시키고 전적으로 다른 현실을 창조하도록 촉구한다. 이는 미디어의 환영성 비판에서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미디어와 예술의 기존 내러티브를 해체하는 방법이다.

1. 석성석의 작품 군, 하나 : 미디어에 관한 메타 비판
석성석의 작품은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왜곡에 관한 진실을 폭로하고 나아가 폭로된 사실을 목격함으로써 그것을 다시 새로운 진실로 믿고자 하는 희망의 지점에 위치한다. 우선 석성석의 작품 군에는 테크놀로지의 조작, 미디어 왜곡에 관한 진실을 폭로함으로써 보는 시선을 재고하게끔 하는 작업들이 있다. 여기서 작가는 카메라와 필름 조작, 그리고 노출 조건 조작, 편집과정에서의 작가의 의도적 개입과 조작 등의 복합적인 제작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가하는 의도적인 조작들은 미디어 에 관한 메타적인 관심과 기존 매체적 접근에 관한 비판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매체 메타적 관점들은 <Illusion>(베를린 지하철 프로젝트), <무제>(대중문화와 대중문화매체의 폭력성에 관한 비판적 작업), <Sei solo>와 <Vision>(퍼포먼스 기록작업> 등의 작품들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무제>는 작가가 독일 TV방송프로그램의 일부를 재조작한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티브이프로그램에서 말하는 아나운서의 상투적인 문구, 스펙타클함을 강조하고 감각적인 부분에 호소하려는 대중매체의 상투적 영상을 재구성하였다. 마치 매우 극적인 장면인 듯 아나운서는 흥분하여 이야기하지만, 석성석의 작품에서는 그것이 반복됨으로써 오히려 대중매체의 진부함이 노출된다. 대중매체를 둘러싼 시선들, 대상으로써만 존재하는 대중-군중들의 수동성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였다. 여기서 시선의 문제는 제작 당시인 2001년 논란이 되고 있었던 감시카메라 이야기라든가 코소보전쟁과 같은 사회적 시선의 일방향성에 대해서도 재고를 요청한다. 작품에서는 군중심리를 이용한 로데오 경기장에서의 시선, 훔쳐보기의 시선, 성적이미지의 노출로 유인하는 시선, 정치와 전쟁 등의 사회적 사건들에서 나타나는 시선에 존재하는 매체의 폭력성에 관한 의문들을 던진다.

<Vision>은 후에 <Sei solo>의 모태가 된 작품이다. 이 두 작업에서 석성석은 보다 적극적으로 현존하는 시간개념에 관하여 실험하였다. 두 작품 모두 연주퍼포먼스를 관람하는 관람객이 보고, 듣고 있는 현장에서의 연주와 과거연주(한 곡을 2-3차례 연주하여, 관람객에게 같은 시간대에 동시에 보여줌)사이에서의 간극을 동시에 노출시킨다. 이 서로 시간대가 다른 연주장면들과 연주음은 미디어를 통해서 합쳐지기도 하고, 차이를 보이기도 하며, 그것이 관람의 현장에서 갖가지 우연들을 연출해낸다. 이 두 작업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기록되는 이미지들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우연적 요소들이 어떻게 미디어를 통해 제거되거나 전형화되어 단일한 재현으로 동질화될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석성석은 미디어를 통한 소통에 얽혀있는 시선의 문제와 재현의 문제에서 등장한 미디어 중심주의의 환영적 리얼리즘에 대한 강한 비판을 보인다. 미디어 자체의 물질적 특수성에 관한 작가의 메타적 작업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미디어 전체에 대한 생각들을 재고하게끔 하는 것이며, 기존 재현 방식에 대한 지속적인 의문을 품게 하는 방식이다.

2. 석성석의 작품 군, 둘 : 미디어의 새로운 환상 형성의 지점들
보다 흥미로운 작업은, 석성석의 작품들 중에서 현실의 부분들을 기록하고 기억해내는 과정을 암시하는 제목으로 위장되어있는 작품들이다. <밤>, <1998>(이것은 정확히 기억이 거슬러 올라가 마주치는 지점과 그 과정을 지시한다), <전자초상>(작가 자신의 초상 연작이다), <일기>(새로 시작한 일상의 기록 연작) 등과 같이 몇 년에 걸쳐 제작되는 개인 프로젝트성 작업들은 일차적으로는 위에서 설명한 미디어 메타 비판을 유지하고, 미디어 조작을 폭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성 작업들은 동시에 작가 개인의 일상에 관한 차분하고 지속적인 기록이라는 점, 그리고 매우 개인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갖게 된다는 점 등에서 관람객의 주목을 받는 작품군이다.

<1998>은 1998년 2월부터 10월까지 각기 다른 지역(베를린, 파리, 대구, 옥산)을 필름으로 촬영하고 5년이 지난 2002년에 15개의 단편영화로 편집한 것이다. 촬영내용은 대부분 가족과 관련된 장소나 가족들의 모습, 친구와 산책하면서 만나게 된 낯선 풍경, 고향 대구의 풍경과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과정에서 머물게 된 파리의 공항과 거리풍경, 베를린의 일상 등이다. 하지만 작가의 소개대로 <1998>에서 우리가 현실의 장면이라고 믿고 있는 몇몇 장면들을 단서로 삼아 15편의 단편영화의 장소들을 재구성해내려고 시도해본다면 금방 그것이 불가능함을 그리고 쓸데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1997년에서 1999년 사진작업에서 필름작업으로의 이행에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 작품인 <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선 이 작품 제목에서처럼 일말의 재현성에 관심이 있는지에 대해서부터 의문을 갖게 된다. <밤>은 우리가 보는 사진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얼마동안 빛에 노출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우연에서 출발한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테크놀로지 조작에 의한 입자들 즉, 시간과 노출 조건에 의해 확대된 부분들이다. 물론 이는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이다.

석성석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입자와 색 등, 사진, 필름, 비디오, 디지털 매체들이 재현 대상에 대해서 조작을 가하는 과정에서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역할이 증폭된 구성요소들일 뿐이다. 이 구성요소들을 속의 일부 이미지들이 비록 현실에 관한 단서들과 몇몇 지표들을 담고 있다 할 지라도, 이들로부터 우리가 작가의 지난 몇 년 동안의 생활의 단편들을 재조합내는 것에 동참하기에는 충분히(!) 불충분하다. 한마디로, 이들 작업의 제목에서 기대할 수 있는 초상, 일기, 기억의 부분들, 즉 우리는 우리가 기대했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일상을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이러한 불가능함의 순간은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작가의 일상이라든가, 우리의 일상을 재구성해내려는 일종의 재현성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한 개인의 일상을 재구성하고, 재조립하는 데 기여하는 기록매체가 과연 개인의 기억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실험하는 것으로 나아가기보다는, 그 한계의 불가능의 지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 불가능성에 부딪친 후에야 그것을 긍정함으로써 오히려 기록과 기억, 시간의 경계들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지점을 찾으려는 새로운 욕망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눈 앞에서 빠른 속도로 재생되는 영상에서 언뜻 언뜻 마주치는 우연한 장면들은 현실의 단편일 수도 있고, 그것과는 거리가 먼 꿈과 같은 세계를 연출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지극히 현실의 그것일 수도 있다. 또는 그 밖의 어떤 것, 즉 우리가 기존에는 무의미하고, 가치 없다고 생각하여 보여도 보지 않았던 부분들 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각종의 부분들이 해체되고 편집되어 고속으로 재생되는 석성석의 일련의 기록을 보면서 그 속에서, 인간의 역사에서 현실로 복원되지 않고, 현실의 먼 미래 혹은 현실의 단편적 증상으로만 존재하는 무의식의 편린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무리일까?
석성석의 작품을 보통의 내러티브 구조로 읽어내려는 시도는 이미 별 볼일 없어진 것이다. <전자초상>, <1998> 등과 같이 다년간에 걸쳐 제작되는 프로젝트의 경우에도 애초의 재현 대상(작가 자신, 촬영 장소 등)은 기록 시간을 제외한 여타의 모든 지표적 흔적을 상실하고 만다. 이러한 상실은 계속해서 우리가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노력 자체를 무효화시키고 교란시킨다.

이미지가 재현을 위한 지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그 순간, 기억을 재구성해내려는 관람 주체 역시 무기력해질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관람주체는 불가능하고 무효화된 시점에서 시각과 상상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내러티브로 기억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환상과 공명하는 지점을 찾고자 하는 것은 의문들로부터 출발한다. 지속적인 읽기와 보기가 무효화되고 불가능해지고 무력해지는 지점에 도달하여, 우리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석성석의 기억 속의 장면들은 정말로 어떤 특정 로프라든가, 색이라든가, 볼 수 없는 장면들로 편집되어있단 말인가? 그 기억속의 장면들을 ‘현실로’ 재구성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여기서 또 다시 질문들은 이어진다. 이제 그 질문은 작가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주체 일반에게 제기되는 질문이다. 과연 당신은 당신의 기억속의 장면들을 믿는가? 그것이 사진이나 비디오, 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름대로 재구성해낸 또 다른 허구의 하나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재구성된 기억이나 기록에서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빈 틈들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 기억 속에 개입하는 것이 기억 속에서 누락된 무의식의 부분이어서 죽을 때까지도 어떤 징후로서만 나타나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질문은 여기서 다시 그 실재차원에 있는 기억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그렇다면 도저히 만날 가능성이 없는 기억과 허구 사이에서 우리가 왜 계속 혼란을 겪어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주목할 만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억의 재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서 역사적 기억의 재구성이라든가 역사적 내러티브를 기술하는 주체의 문제가 얼마만큼 중요한 지에 관한 것, 그것의 윤리에 관한 것이며, 그 윤리를 재고하면서 기존의 역사기술, 기억을 사실로 인지하게 만들고자 했던 주체들에 대한 폭로와 해체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혼란의 지점에서 무엇을 긍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기억의 재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던져주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현실임을 긍정하고, 모든 것이 일종의 시뮬라크르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해진다. 그 과정에서 시뮬라크르를 단지 허구로서 인지하고, 버려야할 것 등으로 인식한다면 매우 곤란하다. 오히려 시뮬라크르라는 실재의 징후를 단서로 하여 우연적인 환상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새로운 우리의 현실로 재구성하는 적극적인 주체가 될 필요가 있다.

3. 현실의 흔적으로부터 불가능한 실재의 각인으로

오랫동안 미디어 아트가 미디어 재현을 둘러싸고 제기해온 문제는 주로 미디어의 환영성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는 미디어가 그 자신의 물질적 기반을 은폐함으로써 투명한 현실을 무매개적으로 재현하려는 경향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시도들이었다. 이 시도들에서 전경화된 것은 미디어의 물질성, 왜곡, 변형으로서의 재현 과정, 그리고 대상이 미디어에 남긴 물질적 흔적이었다. 여기서 일어난 변화는 도상적 리얼리즘에서 지표적 리얼리즘으로의 변동으로 압축될 수 있다. 하지만 환상이 현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증대되고 디지털 기술 혁신이 현실의 기록을 넘어선 불가능한 이미지 생산을 촉진함에 따라 미디어 아트의 비판적 문제제기는 또 다른 방향 전환을 앞두고 있다. 현실의 우연성, 자의성에 대한 자각을 촉진할 것으로 보였던 물질적인 지표적 흔적 또한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현존하는 현실의 재생산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그 요소들이 여전히 우리의 현실 인식에 있어 ‘가능한 것’의 범주에 속하는 한 그 우연성은 제한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미디어가 우리의 일상 곳곳에 편재하는 오늘날, 과거에 우연적인 것처럼 보였던 그 모든 현실의 단편들은 이제 너무나 익숙한, 심지어는 진부한 현실의 일부로서 재각인된다. 이런 인식과 미디어 테크놀로지 환경의 변화 속에서 미디어 아트는 이제 근본적으로 우연적인 것에 대한 탐색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려 하고 있다. 더 이상 가능한 것의 범주에 들지 않는 불가능한 우연성에 대한 탐색.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의 가장 깊은 심연, 혹은 더 정확히 말해 무의식에조차 씌여지지 않은 무의식 내의 공백에 다가가는 일이다. 그 요소들은 물론 환상적 요소들이지만 상상적인 환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실재적인 환상, 불가능한 환상에 속하는 요소들이다.

물론 석성석의 이제까지의 작업들은 미디어의 환영성 비판이라는 모더니즘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 몰두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기억의 편린들을 기괴한 이미지로 왜곡, 변형시키는 그의 두 번째 작품군은 미디어 아트의 새로운 비판적 과제로 이행하려는 그의 시도를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미디어의 물질성을 미디어 내에 각인하려는 시도 속에서 재현 대상의 최소한의 지표성마저도 제거하고 그로부터 도출 불가능한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상들이 그의 사적 기억과 관련되어 있는 한 이런 시도는 개인사를 ‘영점에서’ 다시 씀으로서 새로운 주체로서 재탄생하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이런 재탄생은 또한 미디어 작가로서의 석성석에서 미디어 관람자로서의 석성석으로의 이행이기도 하다. 그는 미디어에 대한 메타적 비판 작업에서 관람 주체의 불가능한 기억 재구성 행위로 그의 문제의식을 변화시키려는 전환점에 와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