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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디어 아트의 지향성의 문제들

은바리라이프 2007. 11. 12. 10:35
스크랩] 미디어 아트의 지향성의 문제들
정용도(미술비평)

들어가는말

이 글은 전시에 대한 예술적인 리뷰가 아니다. 그렇다고 미디어 아트에 대한 미학적 명제들을 쏟아놓고자 하는 철학적 성찰도 아니다. 일본 ICC 미디어 아트 센터에서 열린 전시를 보고 현재의 미디어 아트의 방향과 특성 그리고 미디어 아트 형식의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해 미학적으로 탐색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는 글이다.


비디오 아트에서부터 미디어 아트의 연원을 산정한다면 한국 국내에서 미디어 아트의 역사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박현기 선생 이후 어느덧 30년 정도가 되었다. 한국의 미디어 아트는 30년의 역사동안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미디어 아트라는 예술의 영역을 특별히 부각시킬만한 시스템이 조성되지 않고 있다. 즉 그동안의 미디어 아트의 인프라 조성을 위해 시도되었던 수많은 행사들이 별다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1990년대 후반까지 별로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지 않던 한국과 세계 미디어 아트계의 예술적 편차가 커지고 있다는 직관적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미국의 MIT 미디어 랩은 물론, 일본의 ICC, 독일의 ZKM과 여타 신설 미디어 아트 Institute들, 그리고 최근 신설된 기타 유럽의 여러 미디어 아트 관련 연구소 및 Institute 등등은 상대적으로 한국 미디어 아트의 사회적, 문화적 지향성과 예술적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이런 면에서 미디어 아트의 새로운 미학적 지평의 탐구에 대한 모색이 절실한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I. 예술적 발상과 상상력의 범위

미디어 아트의 경우 영상기기의 기술적인 진보와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고, 이런 기술적이고 형식적 기반에서 미디어 아트의 의미론적 영역이 확대되는 경우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미디어 아트의 미학은 기술과의 연관성 보다는 미디어 아트의 존재론적 정당성과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문제들에 더 많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는 아무리 미디어 아트가 기술과의 관련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기술은 예술일 수가 없고, 예술은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의 기원에서 볼 때 만일 예술이 지금껏 기술의 시녀로서 존재해 왔다면 현재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많은 부분들은 분명히 인간의 감성적 부분들에 비추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예술작품의 창조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지향성의 문제와 관련될 것이다.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지향성의 근저에는 인간적인 욕망과 꿈과 희망 등의 것들이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은 영화나 연극 혹은 음악을 감상하면서 그들 감성이 발견할 수 있는 미지의 영역의 것들에 감동을 받는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단순히 영화나 음악이 주변에 있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서적인 영역을 위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찾으려 하는 것, 즉 인간적 활동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또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과 관련되어 성립될 수 있는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예술작품이 생산되는 과정에 존재하는 기본 조건들이다. 예술의 절대성 혹은 예술작품의 자율성이 언급되기도 하는 것은 예술작품의 창조가 인간의 정신적 활동과 긴밀히 연관된다는 전제 때문이다.


만일 예술작품이 예술적 발상과는 관계없는 기술예속적인 인과성에 집중하게 되면 관객들은 그 같은 생산물로부터 논리적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예술의 영역을 즐길 수 있는 만족감 - 칸트적인 의미에서 예술을 즐거움과 만족감을 준다는 쾌(pleasure)와 관련된 - 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많은 미디어 아트 작가들의 작품과 그들이 이용하는 미디어의 기술적, 논리적 법칙성과 예술적 감동 사이에서 논리와 감성의 영역이 미학적으로 해소되지 못하는 현상적인 갈등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연출하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미디어 아트의 정체성이 아직도 시각적 차원에서 예민하게 정리되지 않은 그런 상황 때문일 것이다. 즉 미디어 아트가 아직 전개의 상황에 있고, 그런 면에서 미디어 아트의 작가들이 아직 그들의 예술적 발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충분히 역사적이고 의미론적인 모멘텀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ICC 전시에 초빙된 5명의 큐레이터 중 1명으로 총 12명의 작가중 3명의 작가를 추천한 아베 카주나오(Chief Curator and Artistic Director, Yamaguchi Center for Arts and Media)는 “미디어 아트가 역사비판적 정신을 결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아이콘을 활성화시키는 안정적이고 비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정한 기술적 역사에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생래적인 비판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1]고 말하는데, 이는 아베 역시 자신의 기획자와 이론가로서의 경력에서 목격했던 미디어 아트의 비예술적 속성들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미디어 아트의 접근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작가들 작품을 보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느끼는 것은 작가들 자신이 미디어 아트의 방법론적이고 기술적인 상황에 몰입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내러티브 혹은 기록적 특성들을 미디어 아트의 주요 구조로 도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미디어 아트는 기존의 회화적 전통에 근본적인 환영(Illusion)에 기반을 둔 이미지의 생산이 아니라 축적된 이미지 혹은 기타 감각적인 데이터들의 무작위적 전개를 통해 우리가 그동안 비기호적인 것들로 간주해 왔던 환상(fantasy)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디어 아트에 접근하는 방식은 기존의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적 매체에 접근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즉 미디어 아트와 관련되어 예술의 패러다임이 변화되어 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II. 예술생산 방식의 패러다임

사회적 아이콘으로서 예술의 존재는 문화 생산의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뉴미디어의 발생은 예술적 의미의 또 다른 방식으로의 표현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즉 예술의 역할과 문화적 특성, 그리고 예술적 내용을 기계적 이미지 생산이라는 의미에서 글로벌리즘의 표준과 연결되는 표출상황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창조물이 뛰어난 예술성이나 미학적인 탁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새로운 기계매체를 다룬다 하더라도 예술적인 지향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첨단의 디지털 기계장비를 가지고 단순히 형상을 만들거나 촬영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정신적인 의도 없이 오락적인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향성이라는 것은 예술에 대한 진지하고 심각한(serious)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참여적 예술 형식에 대한 전망을 비롯해 다양한 양태의 새로운 예술적 특성들이 반영되어야만 한다. 이런 상황을 보조해줄 수 있는 예는 바로 이미지, 사운드, 텍스트 등의 다양한 문화적 표현의 형식들이 아무런 제한이나 한계를 가지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표현의 영역으로 들어와야만 한다. ICC의 n_ext: New Generation of Meida Artists(2004.4.23 ~ 6.27) 전시는 예술적인 수준의 문제를 떠나 이런 시도를 적절히 반영하고 있는 구도를 보여준다. 이 전시의 출품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생산해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뉴미디어 아트라는 영역에서 바라본 예술적 발상의 다양성과 미래지향적 태도가 이 전시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작품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입력 자료와 방법들의 다양성 측면에서 의미론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 전시의 출품작들은 기존의 이미지 기록적 특성보다는 관객들의 행위에 의존하는 감각 요소들의 입력에 의해 산출되는 사운드와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무작위적 결과물들에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감각 기관에 입력되는 다양한 요소들이 우리의 예측치 못한 반응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닮아있다. 여기서 미학적 특성이 어떤 방식으로 예술의 영역에서 주제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기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질료와 형상이라는 개념을 대입한다면 해석의 여지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즉 아직은 질료적 특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그래서 예술의 의미론적 차원보다는 실험적 차원에서 여러 가지 관점의 생각들을 보여주는 시도들은 예술적 발상과 상상력의 차원으로의 어떤 일정한 지향점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탁월한 사회적 생산물의 존재론적 특성은, 그 생산물들이 앞에서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식의 차원에서 새로운 예술적 아우라(Aura)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총체적인 상황이 야기 시키는 변화(transformation)의 양태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의 양태들은 예술의 기원에서 추적될 수 있는 재현(representation)의 양식적 특성들과 예술작품에 대한 인식의 범주를 다른 방향에서 숙고할 수 있게 해준다. 미술의 역사에서 이런 것을 예술작품의 감상이나 해석의 과학적 속성들과 연결되는 도상학적인 분석의 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도상들의 새로운 발명은 다양한 사회적 동력들은 우리 삶의 새로운 지평을 확장시킬 뿐만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폐쇄회로 비디오 작품을 통해 우리가 동영상 이미지를 보아야 한다면, 그것은 우선적으로 비디오 작품이 어떤 특정한 상황을 기반으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이미지 생산을 의도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상황과 현실은 의미를 창조할 수 있지만 의미는 상황을 해석할 뿐이다. 두 가지 요소가 만들어내는 이런 비함수적인 관계는 예술작품을 언급하면서 예술작품의 자율성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예술작품, 새로운 매체들, 새로운 시각과 관점들을 통해 기존의 미학적 판단들을 개선시켜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산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예술작품의 이런 종합적인 특성이 예술작품의 존재에 새로운 역동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III. 참여로의 범주적 지향성

새로운 예술작품에 적용될 수 있는 인식론적인 패러다임을 가장 특징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형식의 변화인데, 전통매체 작품들과 비교해 관객들에게 훨씬 더 개방되어 있는 미디어 아트 분야의 예술작품들에서 이 형식적 변화의 근거는 ‘참여’ 가 될 것이다. 물론 참여는 이미 아티스트 퍼포먼스를 통해 계속 주장되어 온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참여는 관객이 작품의 결과적인 창조에 기여한다는 물리적 특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예술의 변화된 상황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는 좀더 강력한 미학적 특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초기 컴퓨터의 기능은 인간과 기계의 1:1 함수적인 관계를 통해 일정한 산출물을 생산하는 것이었지만, 이후 좀더 발전적인 컴퓨터의 형식에서는 일정한 인풋을 투입한 이후 예상되는 결과가 우리 생각의 범위를 넘어 전혀 새로운 특성들을 생산한다는 의외성의 측면이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요소들의 입력과 그에 따르는 산출물이 비례적인 관계가 아니라 산출된 결과물들이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시각과 인식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기계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는 물론 참여의 구조틀(framework)이 새로운 패러다임과 관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패러다임이 변화한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의 인식의 틀을 형성해주던 정신적 장치들(devices)이 제공하는 물리적 관점들 혹은 현실적 특수성이나 개별성들이 더 이상 인간의 정신적 확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기존 구조의 균형을 해체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비전을 제공해줄 수 있는 동력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예술작품들이 줄 수 있는 미학적 가능성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기존의 회화나 조각 등의 전통매체 미술에서 생산되던 작품에 따른 개별적 아이콘들이 사회의 분위기가 반영되는 종합적인 아이콘(문화적 상황)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고전적인 영화에서 보면 특정한 상황이나 오브제들이 아이콘으로 우리의 정신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기 보다는 영화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어떤 것이 있다.

이것은 의미가 개별적인 도상들에 의존하여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좀더 포괄적인 인상과 느낌, 즉 직관적인 인식의 차원에서 판단되는 진행적인 상황인 것이다.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 Concerning the Spiritual in Art 에서 “미래의 정신에 속하는 것은 오직 느낌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고, 그리고 이 같은 느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예술가의 재능”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좁게 보면 예술가의 재능이 단지 형상의 창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시각문화 전반에 대한 영향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넓게 말한다면 정신의 이성적 작용에 의해 기능해 왔고 그리고 기능해 왔다고 생각되던 것들이 미래에는 그 실현의 방식이 다른 차원의 패러다임, 즉 정서적인 것들에 의해 완성될 것이라는 주장일 것이다. 이것은 미디어 아트의 작품들을 통해 그리고 인터넷을 이용한 멀티미디어 생산물들의 자유로운 교류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이미지 생산의 용이성을 통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

물론 여기서 참여의 특성을 예술작품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인터넷에 떠도는 대부분의 이미지들이 예술로서의 범주적 구속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예술작품인가 아닌가의 차원에 경험적이고 미학적인 검증을 받아야 할 것이기는 하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예술이라는 특수성의 영역에서 미디어 아트의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기 보다는 문화라는 좀더 넓은 영역에서 접근해야만 할 것이다.

에필로그; 길고 어두운 좁은 길을 나서면서

미디어 아트의 속성상 새로움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즉 새로움이라는 것이 미지의 전혀 우리 인식의 영역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기보다는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가 말하는 1차 감각들의 교류와 종합을 통해 생산되는 2차 감각의 응용적 특성 속에서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완벽하게 새로운 것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연역적으로 미디어 아트 역시 예술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현재 미디어 아트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 열려있는 어둡고 좁은 길 -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인해 생산되는 최근의 다양한 기술적 응용물들에 대한 사람들의 맹신과 그리하여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 지는 미디어 아트라는 예술의 분야에 쉽게 벗어나기 힘든 보이지 않는 우상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의미에서 - 을 지나 어떤 방식의 예술적 차원의 지평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미디어 아트를 이야기 할 때 매체의 기술적 탁월함과 기계적인 편리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술개념의 전개와 발전상황을 돌이켜 보면 매체의 중요성이 무시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좀더 본질적으로 예술적 감성의 표현과 의미의 생산에 대한 탐구가 최고의 가치로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예술적 컨텐츠의 생산이 될 것이다. 미디어 아트에서 예술 컨텐츠의 생산은 매체의 기술적 차원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매체를 이용해 생산된 상부구조적 결과물들이 가지고 있는, 즉 인간 삶의 근본적(예술적) 속성들을 반영하는 것들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예술적 속성들은 미술의 역사에서 도제 시스템 속에서 생산되어 왔다. 근대 이전까지 도제 시스템이 담당해 왔던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생산은 대학이라는 아카데미 시스템에 의해 수행되어져 왔다. 그리고 이제 미디어 아트의 경우는 최근에 설립된 전문예술기관, 즉 미디어 아트 센터나 미디어 관련 전문 연구소들이 담당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예술에 있어 전문성이 점점 더 심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유럽과 미국, 일본의 유수한 미디어아트 센터의 예들을 통해 목격되는 현실이다.


최근 2000년 들어 세계적으로 다양한 지향점을 가지고 설립된 미디어 아트 센터들은 미디어의 특성에 맞게 그동안의 문화적 생산물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종합하고 재정의 하는 과정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하는 그런 작업들이 소위 ‘진보’의 표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새로운 예술교육과 작품의 생산기지를 설립하여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문화적 패러다임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산을 통해 기존의 데이터들을 종합하고 또한 앞으로의 예술적 방향성을 적극적으로 개진한다는 것은 한국 문화의 미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다.

미디어 아트에 대한 이야기는 그 어떤 것들보다도 빈번하게 회자되고 있지만 변변한 미디어 아트 연구소가 한 곳도 없는 한국의 상황과 또 우려와 염려를 떠나 쉽게 생각하고 로우테크 마인드를 가지고 용감하게(?) 버틸 수 있는 사람들, 예술작품의 본질보다는 미디어 아트를 비롯한 문화적 생산을 돈벌이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국 미디어 아트와 문화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이 인식할 수 있는 현상 밖의 일일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산을 외면하게 될 때 그것은 스스로의 삶과 행복을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고, 그리하여 기존의 패러다임에 안주하게 되는 것은 앞으로 멀지 않은 미래에 시작될 어떤 알지 못할 역사적 비극의 계기들을 축적해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출처: art and discour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