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트의 역사(1) |
울리히 필무트(Ulich Vielmuth) 카메라맨과 작가(Kameraman und Autor) 비디오를 이용한 예술적 작업은 미리 이행된 새로운 유행의 등장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비디오 아트는 지금 이미 짧은 기간 동안에 확고한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항상 강한 주의를 끌고 있다. 사람들은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이미 60년대 초반에 새로운 미디어를 들고 나온 작가들이 있었다. 1963년에 오늘날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백남준과 볼프 포스텔(Wolf Vostell)의 전시가 열렸다. 뉴욕에 있는 스몰린 화랑(Smolin Gallery)에서 텔레비젼과 카메라를 이용한 포스텔의 해프닝이 발표되었다. 부퍼탈(Wuppertal)에 있는 갈레리 파르나스(Galerie Parnass)에서는 "음악의 확장--전자 텔레비젼"이란 제목 아래 흑백 텔레비젼으로 구성된 백남준의 첫 개인전을 볼 수 있었다. 조작된 텔레비젼 수상기들은 추상적으로 변형되고 그러한 노이즈가 섞인 TV 프로그램의 첫 시도를 보여 주었다. 그 첫 시도들은 두 예술가들에 의해서 텔레비젼이 변형된 오브제로 보여지는 방식이었는데, 포스텔이 파괴적(Destruktion)이었다면 백남준은 구성적(Konstruktiv)인 변형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반-고급예술'이라는 플럭서스 미학의 규범 아래에서, 백남준과 포스텔은 일상과 밀접한 텔레비젼을 자신들의 퍼포먼스와 설치 작업에 끌고 들어 왔다. 60년대의 확실한 충격파였던 백남준은 최초로 소위 과학기술적 설치(technoide Installation)를 만들었다. "1962년에 나는 13대의 중고 텔레비젼을 사들였다. 나에게는 미리 정해진 작품 구상이 없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두개의 주파수를 동시에 설정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그냥 쉽게 해버렸고 그 수평과 수직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실수와 실수를 거듭했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항상 긍정적이었다. 그것이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의 전부이다." 대중 미디어인 텔레비젼의 경계를 넘는 변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의 발명은 비디오 아트의 도구를 눈이 띄게 확장시켰다. 1965년에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 장비가 소개되었고 같은 날 뉴욕의 카페 오 고고(Café AU GoGo)에서는 촬영된 비디오 테입이 상영되었다. 초창기 10년인 60년대에는 단지 적은 수의 몇몇 미디어 아트 작가들만 존재했다. 1965년 소니 아메리카에서 포르타팩(Portapak)이라는 첫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를 시장에 발표한 전자 산업상의 진전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독일에서도 70년대가 시작되면서 일정 수준에 이른 비디오 테크닉이 젊은 예술가 그룹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그리고 휴대가 가능한 심지어 독립적이기까지한 미디어를 개인적인 표현의 도구로 확립시켰다. 개별적인 예술적 실험들로부터 독자적인 예술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서독과 미국으로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몇몇의 다른 예술가들이 비디오 테입의 창조적 제작에 몰두하는 가운데 다른 예술가들은 60년대에 이미 텔레비젼 수상기를 조각의 형식으로 바꾸고 있었다. 70년대 중반에 예술가들의 비디오는 최초로 전성기를 구가했는데, 1977년 카셀의 '도쿠멘타 6(Dokumenta 6)'에서 그들의 입지를 인상 깊게 남겼다. 전자 그림(Elektronische Malerei) 요헨 게르츠(Jochen Gerz), 페터 봐이벨(Peter Weibel), 볼프 칼렌(Wolf Kahlen)과 함께 1970년대 말 즈음에는 클라우스 폼 브룩(Klaus vom Bruch)과 마르셀 오덴바흐(Marcel Odenbach) 등 게다가 많은 수의 다른 예술가들 즉, 낸 후버(Nan Hoover), 레베카 호른(Rebecca Horn), 발리에 엑스포트(Valie Export), 프리데리케 페촐트(Friederike Pezold) 또는 울리케 로젠바흐(Ulrike Rosenbach) 또,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와 울라이(F. Ulay 본명 Uwe Laysiepen) 그리고 슈타이나와 우디 바줄카(Steina & Woody Vasulka) 같은 커플 예술가들까지도 새로운 미디어를 가지고 작업했다. 예를 들어 바줄카 커플의 경우, 뉴욕의 유명한 실험적 퍼포먼스 센타인 더 키친(The Kitchen)의 설립자로서 오랫 동안 함께 작업을 같이 한 이래 비디오 아트의 베테랑으로 손꼽히고 있다. 특수 기술에 대한 예술적 개발과 실제와 디지털 그림 사이의 연결은, 그들의 시각적 창조의 개성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제는 긴 시간에 걸쳐 이미 미디어로서의 비디오가 각 개인들을 위한 대중 미디어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디오 아트의 개념이 정립될 만큼의 강제성을 갖는 흐름이 아니다. 그래서 넓은 스펙트럼을 갖는 예술적 행위와 상호작용은 중간자적인 시간의 스타일 내에서 조형예술 밖으로 나오고 종사되어야 하며, 그래서 변화된 형식을 비디오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 갈 수 있어야 되고, 가장 넓은 의미 안에서 전자적 그림으로서 보여질 수 있어야 한다. 1982년에 르네 베르거(Rene Berger)가 언급한 내용은 지금까지도 원칙적으로 유효하다. "그런데 알맹이 없는 신생 비디오 아트는 오늘날까지 회화와 조각의 친숙한 경지에 다다를 수는 없다. 예술가들 주위에 있는 적게 어림잡아서 수천명의 독립적인 미술 애호가들이라는, 오직 대중에 의해서만 그것이 예술로써 인정될 것이다. 그 사람들은 하나의 인상적인 예술 형식에 감격했을지라도 여전히 한계 안에서만 머무르려 할 것이다." 그렇지만 혼성 예술로서의 비디오 아트는 강한 주목을 끌고 있다. 예술적으로 만들어진 비디오 테입 작업들과 비교해서, 80년대 중반 이후의 비디오 조각 영역과 비디오 설치, 비디오 오브제 작업은 그 의미 수용에 성공했다. 그래서 1989년에 쾰른 미술협회(Kölnische Kunstverein)는 처음으로 1963년 이후 비디오 조각의 발전 성과들을 새로운 설치 작품들처럼 미술사적인 작품들로 분류해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곧 순회전으로 들어간 그 전시에서는 세계적인 45명의 예술 대표주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Marina Abramovic/F.Ulay), 다라 비른바움(Dara Birnbaum), 클라우스 폼 브룩(Klaus vom Bruch), 피터 캠퍼스(Peter Campus), 더글라스 데이비스(Douglas Davis), 프랭크 질레트(Frank Gillette), 그라프(Graf)/ZYX, 댄 그레이햄(Dan Graham), 인고 귄터(Ingo Günther), 알렉산더 한(Alexander Hahn), 게리 힐(Gary Hill), 미셀 자프레노(Michel Jaffrenou), 볼프 칼렌(Wolf Kahlen), 디이터 키슬링(Dieter Kiessling), 베릴 코로(Beryl Korot), 시게코 쿠보다(Shigeko Kubota), 마리 호 라퐁텐(Marie-jo Lafontaine), 바바라(Barbara)와 마이클 리스건(Michael Leisgen), 레스 레빈(Les Levin), 메리 루시에(Mary Lucier), 헬무트 마르크(Helmut Mark), 달리보어 마티니스(Dalibor Martinis), 안토니오 문타다스(Antonio Muntadas), 리타 마이어(Rita Myers), 브루스 노만(Bruce Nauman), 마르셀 오덴바흐(Marcel Odenbach), 토니 아워슬러(Tony Oursler), 백남준(Nam June Paik), 프리데리케 페촐트(Friederike Pezold), 파브리찌오 플레시(Fabrizio Plessi), 앨 로빈(Al Robbins), 울리케 로젠바흐(Ulrike Rosenbach), 세르바스(Servaas), 제프리 쇼(Jeffrey Shaw), 이라 슈나이더(Ira Schneider), 리디아 샤우튼(Lydia Schouten), 부키 슈바르츠(Buky Schwartz), 바바라 스타인만(Barbara Steinman), 스튜디오 아쭈로(Studio Azzurro), 로스 테우프스(Roos Theuws), 빌 비올라(Bill Viola), 볼프 포스텔(Wolf Vostel), 안나 빈텔러(Anna Winteler), 케이고 야마모토(Keigo Yamamoto), 레미 조그(Remy Zaugg) 등. 인간의 새로운 표현 가능성은 미디어를 통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는 말은, 그것이 기술적인 매체에 의한 해석에 있다는 말이다. 그 사이에서 한눈에 조망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미디어 아트는 예술의 장을 보편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전자 기술은 표현 가능성의 파장을 광범위하게 넓혔고, 예술가들은 함께 새로운 내용물을 정립해 나아갔다. 장비 기술상의 급격한 발전들은 80년대의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조형 가능성들을 제공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에게는 다채로운 표현 방법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즉, 화면전환 효과, 색채 조작, 전자적 각인처리, 컴퓨터 애니메이션, 신디사이저를 통한 전자적 화면 변형 등. 예술적으로 영화의 드라마투르기와 유사한 방법, 그리고 전자적인 화면 조형 가능성과 내러티브가 함께 조합을 이루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비디오 아트 (2)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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