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2:1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
-이 말씀은 술람미 여인(교회 혹은 신자)의 말이라고 하는 해석도 있으나, 그 보다는 그리스도를 비유하는 신랑의 말이다.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아름다우심을 꽃에 비유하신다. 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미(美)를 상징한다(사 35:1-2). 특별히 "사론의 수선화"는들꽃(사론이란 들에 피는 꽃)이니, 이것은 사람의 재배로 말미암아 자란 것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꽃이다(St. Bernard). 그리스도는 순전히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시다.
"골짜기의 백합화"는 겸손한 자를 비유한다. 골짜기는 깊은 곳으로서 높은 자세 곧, 교만과 정반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잘 드러낸다. 사 53:2; 고후8:9; 빌 2:6-8 참조.
아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
-이 말씀은, 신랑으로 비유되신 그리스도께서 술람미 여인(교회 혹은 신자를 비유함)의 미덕(美德)을 칭찬함이
다. 뷜트바인(E. Wurthwein)은 말하기를, "여기서 술람미 여인을 가리켜 '일천 여자 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고,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하여 그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그녀의 겸손을 진술한다."라고 하였다(Handdbuch zum Alten Testament, Das Hohelied, 1969, p.43).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를 비유한 말씀이다.
"가시나무." 이것은 교회를 핍박하는 악한 세력을 비유한다. 성경에서 교회를 핍박하는 악한 세력은 가시나무로 표현된다(창 3:18). 삿 9:15 참조.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란 말은 역시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를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백합화"를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다(마 6:28-29). 여기서 술람미 여인(교회를 비유함의 미(美)를 백합화의 아름다움으로 비유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받은 신자의 의(義)가 아름답다는 것을 비유함이다. 계 19:8 참조. 그리고, 그 꽃의 향기는 교회의 기도를 비유한다(계 5:8).
아 2: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 이것은 신부로 비유된 교회의 고
백이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다른 이들과 다른 그의 특수하신 점을
드러낸다. 곧, 열매를 맺지 않는 보통 나무들과는 달리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다는 것
이다(E. Wurthwein, Audh er ist so einzigartig unter seinen Genossen, wie ein
Fruchtbaum unter lauter Waldbaumen, die keine Frucht tragen.-Handbuch Zum Alten
Testament. 1969, s.43). 교회(혹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음에 있어서 크게
두가지를 받는다. (1) "그늘"이 태양의 열기를 막아 그 아래 있는 자를 보호함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이 세상에서부터 영적(靈的)으로 하늘에 앉은 것과 마찬가
지의 보호와 평안을 누린다(엡 2:6). 시; 36:7 하반에 말하기를,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시 17:8, 57:1, 121:5; 사 4:6, 25:4, 32:2; 눅
13:34 참조. (2) "실과"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말씀을 비유한다. 계 22:2에 말하기를,
"강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드 실과를 맺히고 그 나
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한다. 우리가 현세에서 그 열매를
먹는 방법은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음이다. 요 6:53-54; 렘 15:16 참조.
아 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 여기 "잔
치집"은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사랑을 알려주는 말씀 전파의 장소를 비유한다. 여기
이른바 "기"란 말(* )은, 겔레만(G.Gerleman)에 의하면 구분(區分)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민 1:52), 알델스(G.Ch. Aalders)는 이것이 보호함을 의미한다고 하였다(출
17:15). 깃발을 중심하여 사람들이 한 곳으로 모임 같이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사랑응
을 중심하여 신자들은 한곳으로 모인다.(눅 13:34; 살후 2:1). 거기서 그들은 하나님
의 말씀과 성령으로 얻으며 기쁨을 얻는다(시 63:5, 81:10; 롬 14:17).
아 2:5
너희는 건포도로 내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났음
이니라 - 여기 이른바 "건포도"란 말(* )은 포도떡(grape-cakes)를 의미한
다(삼하 6:19; 대상 16:3; 사 16:7; 호 3:1). 여기서는 이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
한다. 또한 "사과"도 역시 신랑으로 비유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비유한다. 2;3 참조.
자유주의 신학자 뷜티바인(E. Wurt-hwein)은 말하기를, 이 두 가지는 연애의 상징이라
고 한다(beides vollero-tischer Symbolik.- Handbuch zum Alten Testament, Erste
Reihe, 1969, p.44). 그러나 이런 잘못된 해석은 아가서를 순전히 연애시(戀愛時)로
오해한 테서 나온 것이다. 계 3:20의 말씀을 보면,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노래로 멎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 관계를 보여주는 거룩
한 교훈이다. 거기에 말하기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
으리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분명히 아 5:2-8을 반영시킨 말씀이다. 성 버나드(St.
Bernard)는 벌겟역(Vulgate)이나 시마쿠스역(Symmacus)과 달리 "건포도"란 말을 꽃으
로 번역하 영해(靈解)하기를, 꽃은 신앙을 가리키고 사과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하였
다. 그러나"건포도"란 말(* )을 꽃으로 번역할 만한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Lange).
"내가 사랑함으로 병이 났음이니라." 이것은 일종 시문학적 표현인데, 술람미 여인
이 솔로몬을 사랑하여 늘 사모하는 뜨거움이 그 마음에 자리잡고 있음을 나타낸 말이
다. 술람미 여인은 잠시 동안 사랑하는 자와 떠나 있으면서 그의 사랑을 회고하며 연
모한다. 고드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라고 한다(3절). 여기 사용된바 "앉아서"란 말(* ), "기뻐하였고"란 말(*
), 또는 4 절의 "들어갔으니"란 말(* )이 모두 과거 동사임을 보아서, 술
람미 여인의 말(5절)이 과거의 사건을 회고한 것임에 틀림 없다. 옛날 근동 지방에서
는 애인을 사모하는 간절한 심리를 가리켜 "사랑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곧, 애굽의
시문학에 기록된 대로, "칠일 동안 사랑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더니 나는 병이 났도다.
내 마음은 무겁도다. 나는 나 자신을 잊엇도다."라는 시귀가 있다(Gillis Gerleman,
Biblischer Kommentar Alte Testament, Ruth. Das Hohelied, 1965, s. 119).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영적 의미를 발견한다. 곧, 교회(혹은 신자)가
영적 기갈을 당한 때에 과거에 체험했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한다는 것이다. 시
42:1-4에도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
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라고 하였다.
아 2:6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 어떤 학자에 의하
면, 여기 이른바 "왼손으로 ...베게하고"란 말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칭
의(稱義)된 것을 비유한다고 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라고 함은 신자에게 대
하여 때를 따라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는 여기 언급된 "왼손"과 "오른손"이 각각 특수한 뜻을 가졌다고 하기 어렵다. 이 귀
절의 말씀은 신자에게 대한 주님의 보호와 사랑이 매우 자세하고 유력함을 비유하는것
뿐이다. 시 37:24에 말하기를,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하였고, 시 63:8에는 말하기를,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라고 하였다. 이렇게 신자에게 대한 하나님
의 간섭은 매우 자세한 것으로 비유되었으니, 이와 유사한 말씀이 시 41:3에도 있다.
거기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라고 하였다. 시 91:1-15 참조.
아 2: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 여기 이른바 "예루살렘 여자들"이란 말은 기독
신자란 이름을 가졌으되 육적으로 행하는 피상적 신자들을 말한다. 그런 자들은 주님
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진실한 신자들을 괴롭히는 일이 많다. "노루와 들 사슴"은 놀래
어 도망하기 잘 하는 짐승들이다. 그와 같이 신자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교제
도 얼른 상실되기 쉽다, 그러므로 신자는 조심하여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신 말씀(살전 5:22)에 순종해야 된다.
아 2:8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 신랑으로 비유된 그리스도를 사모하던 교회(혹은 신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임재(臨在)를 체험한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사랑하는 자의 소리)"
을 들음으로 영적 체험을 얻기 시작한다. 맏음은 들음으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
씀으로 말미암는다(룸 10:17). 그리고 그리스도는 산에 달리듯이 모든 장애물을 문제
시 하지도 않으시고 화급히 신자를 찾아 오신다.
아 2: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
로 들여다 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이는구나 -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곧, 노루가 빨리 달림 같이 신랑으로 비유되신 그리스도의 찾아오심도 빠르다는 뜻이
다(삼하 2:18). 그리스도는 신자에게 빨리 찾아오셔서 그를 돌보아 주신다(시 70:5).
겔레만(G. Gerleman)도 그런 뜻을 지적하고, 노루와 같이 빨리 찾아와 주기를 원한다
는 애굽의 사랑의 노래를 인용하기고 하였다(Der Jungling eilt schnell wie Gazelle
dem Madchen entgegen.-Biblischer Kommentar, Ruth. Das Hohelied, 1965, s.124).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 봄"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많은 장애물들(육에
속한 것들과 죄악) 틈으로라도 우리 신자들과 영적으로 교제하려고 하심을 말해 준다.
(1) 우리는 죄 있는 육적 장벽 때문에 가까이 계신 주님을 몰라 보기 쉽다(창 28:16).
그래도 주님은 게속하여 우리를 찾아 오신다.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하는 말을 할 때에
도 그는 베드로를 돌아다 보셨다.(눅 22:61). (2) 우리가 현세에서는 주님을 알아본다
하더라도 이육적 장벽 때문에 주님을 아는 지식이 희미하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에게
대한 이만한 지식이라도 더 흐리워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된다. 고전 13:9-12에
말하기를,"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
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든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
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
굴과 얼굴을마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하였다.
아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 신랑으로 비유된 그리스도(계3:20)는 신부로 비유(고후 11:2)된 교회(혹
은 신자)를 향하여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한다. 이 말씀으로 시작된 이 아래 부분
(11-14)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곧, (1) 그리스도께서 신자를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하여 하늘 세계의 광경을 보여준다고 하며(G. Burrows, A commentary on the Song
of Solomon, 1958, p.219), (2) 주님과 가까이 교제하던 신자가(7절) 주님에게서 멀어
졌을 때에 그를 다시 찾아 회복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가리킨다고 하며(Hudson Taylor,
Union and Communion, 1914 pp.27-33), (3) 그리스도의 초림(初臨)으로 말미암은 신약
시대의 복스러운 구원 운동을 보여준다고 하였다(John Gill, An Exposition of the
Song of Solomon, 1854, pp.92-93). 이 세가지 해석 중에서 세째 해석에 찬동한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인간은 이 세상주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결단을 내
겨야 한다. 그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난 아브라함의 결단을 가져야 한다(창
12;1). 시 45:10-11에 말하기를,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
시니 너는 저를 경배 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즐길 수 없
다. 마 6: 24; 고후 6:14-18 참조.
아 2:11,12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
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 구나 - 팔레스틴에는 겨울에 비가 온다. 기후가 차고 흐
리며 비 오는 이 시절은 주님을 모르는 심령 상태를 비유한다. 이런 때에는 사람의 마
음이 열리지 않고 어두워지며 기쁨도 없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순
간부터는 상황는 달라진다. 이제는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게"
된다. "꽃이 핀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을 상징하는데(사 35:1). 은헤를
받은 심령에는 모든 굳은 것들 곧 죄악들이 녹아져서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하다. 사
람의 힘으로 항거할 수 없이 찾아오는 봄철과 같이 주님의 역사는 그의 백성에게 힘있
게 임한다. 그 때에는 새의 노래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쁜 소리로 느껴진다. 주님과
함께 한 자에게는 만물이 은혜로 화한다. 룸 8:32에 말하기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한다.
아 2: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
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곧,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 심령에서 새로운 향기를 토하는 것 같은 새로운 역사가 일어남을 비유한 말씀이다. 그것은 곧, 복음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는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을 비유한다(시 80:8; 렘
24:1-7; 호 9:10). 이런 나무들은 동시에 신약의 교회를 비유하는 것이다. 눅 13:6-9;
요 15:1 참조. "일어나서 함께 가자." 그리스도께서 찾아 주실 때에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요 5:25; 엡 5:14). 성 버나드(St. Bernard)는 13-14 절에서 다음
과 같은 신령한 뜻을 관찰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역사가 이중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것
이다. 그것은,(1)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인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로 상징된 것이며,
(2)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반구의 소리"로 상징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요
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하늘에서 소리가 났고 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
려오셨으니, 그것도 이중으로 확증되는 역사였다(마 16-17).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
게 신앙을 주시기 위하여 음성과 표상을 함께 나타내신다(Thus God in His bounty
makes the voice and the sign to concur in founding the Faith.-On the Song of
Songs, 1952, p.192).
아 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 "바위 틈"은 비둘기의
둥지 트는 곳이기도 하며(렘 48:28), 독수리 같은 큰 새를 피하여 숨는 피난처이기도
하다. 또한 "바위 틈"은 영적으로 기독 신자의 피난처 곧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시
11:1 참조.
"비둘기"는 순결하고(마 10:16), 또 두려움이 많은(호 11:11) 새인데, 여기서는 순
결하게 사아야 되며(마 5:8)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될 신자를 비유한다. "얼굴"은 인격
을 대표하고, "소리"는 사상의 표현을 가리킨다. 신자의 진실한 신앙 인격과 및 복음
을 증거하는 그의 언사는 주님의 기뻐하시는 바이다.
아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하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 이 말씀은 교회를 표상하는 술람미 여자의 소원이다. 우리가 이 귀절
의 말씀을 보아도 아가서가 연애시가 아니고 신령하고도 거룩한 시(聖詩)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단순한 연애시라면 "여우를 잡으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옛날에 팔
레스틴에는 여우가 많았는데(삿 15:4; 애 5:18), 그 새끼는 땅에 구멍을 뚫으면서 포
도원을 파괴시겼다고 한다(느 4:3).
"포도원"은 성경에서 교회(혹은 하나님의 백성)를 상징하고(시 80:8-16; 오 15:1),
"여우"는 교회를 해롭게 하는 대적을 비유한다(겔 13:4-7; 눅 13:32). 여기에 "작은
여우"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신자를 해롭게 하는 모든 작은 죄악을 가리킨다. 죄는 큰
것만이 신자를 망케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죄들도 그들의 신앙을 파괴시킨다. 우리는
동물계에서도 이와 같은 원리를 볼 수 있다. 호랑이와 같은 맹수나 세균(細菌)같은 것
도 사람을 공격하며 죽이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로 위험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작은 죄악을 방어함에 있어서도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한 말
을 보니, 그 때에 교회가 거짓 스승이나 혹은 개인 신자들의 죄 때문에 주님에게서 멀
어졌던 것이 분명하다.
아 2: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야 떼를 먹이는구나 - 이 때에 교회(혹은 신자)가 주님과 멀어졌으나(15절 주석 끝 참
조)그의 약속을 믿었으니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약속을 믿는다(요 6:37-39, 10;:26-29).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이것은 주님을 사모하는 교회의 탄원(嘆
願)이다. 곧, 주님은 은혜로우신 목자라는 뜻이다. "백합화"는 은혜를 비유하는데(사
35:1-2), 주님은 백합화 같은 은혜의 목장에서 그의 양떼(신자들)의 영혼을 먹이신다
는 것이다. 그가 양 떼를 인도하시는 곳은 사막과 같은 황무지가 아니고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 가와 같은 곳이다(시 23:1-2).
아 2: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
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 이것은 교회(혹은 신자)가 주님을 멀리 떠났다가 뉘우치고
속히 그를 찾기 원하는 말씀이다. 그는 주님을 잃은 그 날이 다 가기 전에 "베데르산"
(이별산이란 뜻)곧, 산과 같이 막혔던 이별이 해소되기를 원한다. 그는 주님의 찾아
오시는 걸음이 노루와 어린 사슴의 걸음처럼(삼하 2:18; 대상 12;8) 빠르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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