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아가서 자료

아가서1장(박윤선)

은바리라이프 2019. 1. 22. 11:14

아 1:1

솔로몬의 아가라  


이 말씀의 뜻은 이 책을 솔로몬왕이 저술하였다는 것이다. 

"아가"란 말 (* )은 "노래 중의 노래"란 의미로서 가장 고상한 영적 의미를 가진 노래라는 뜻이기도 하다

(Brockelmann, schdnstes Lied).


아 1: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긴스버그(C.D.Ginsbrg)의 주장에 의하면 솔로몬왕이 술람미 여자를 납치해 왔기 때문에 그녀가

자기의 애인 목자를 사모하는 의미에서 "입맞추기를"원하였다고 한다(The Song og Song and Koheleth, 1970, p.129). 그러나 우리는 이 해석을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귀절 말씀은 3:11이 보여주는 대로 술람미 여자가 애인 솔로몬의 사랑을 사모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신부로 비유된 교회(혹은 신자)가 주님과 연합하기를 원

하는 탄원이다. 교회(혹은 신자)의 가장 사모할 만한 분은 주님 한 분 뿐이시다(시16:2,42:1, 73:25).


하나님께서 인간과 연합하시는 일은 다음과 같은 일들로 성취한다고 할 수 있다.

곧, (1) 그리스도의 화육(化肉)의 일로, 성 버나드(St. Bernard)는 입맞추어줌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화육으로 성취되었다고 하였으니, 우리로서 채택할 만한 해석이라고 본다(On the Song of Song, 1779, pp.24-25). (2)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으로. 이 사건에 대한 신약 교회의 대망(待望)이 여러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교회(혹은 신자)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로서 속으로 탄식하며 몸의 구속(救贖)을 사모한다고 하였고(롬 8:23),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義)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하였고(갈 5:5),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그곳으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린다고 하였고(빌 3:20-21), 

또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 전진한다고 하였다.(빌 3:13). 


이와 같은 의미에서 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될 대종말의 혼인(the great eschatological marriage 계 19:7-8)을 지향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은 두 가지 단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 한 단계는 교회의 현세적 혼인이고, 다른 한 단계는 주님의 재림 때에 성취될 혼인이다. 

바울은 그 현세적 혼인을 가리키는 의미로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하였다(고후 11;2). 신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벌써 그리스도의 신부이다(엡 5:28-32). 

그러나 장차 이루어질 최후적 완성의 혼인은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될 일이다.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성도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내적(內的) 교제를 가져보면 그의 거룩한 사랑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쾌락보다 그것을 더 좋아하며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시 4:7에 말하기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하였고, 합 3:17-18에는 말하기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받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기뻐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중국 오지 선교 사업의 창립자 였던 허드슨 테일러(J.Hudson Taylor)는 특별히 아가서를 사랑하였고, 그 말씀 내용대로 체험한 바 있다. 그는 주님과 결혼한 자처럼 살았다. 그는 우리 본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현재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게끔 되어진다. 누구든지 한 번 이 체험을 가진 다음에는 전에 만족하게 생각하던 이 세상 쾌락들이 다시 생각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Union and Communion, 1914, p.9).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

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빌 3:7-9).


아 1:3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기름"은 성령을 비유한다. 

요일 2:27에 말하기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

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하였다. 

여기 이른바 "기름 부음"은 분명히 성령주심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특수하게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그는 왕의 자격으로(행 3:23) 기름 부음을 받으셨으니, 곧, "성령을 한량 없이" 받으셨다(요3:34). 


그리고 여기 이른바 "네 이름"이란 말은 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성호를 말함이 아니고 그의 인격과 실상을 가리킨다. "이름"이란 말에 대한 성경의 개념은 이렇게 실질과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창 2:19-20 참조.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이름"이란 것은 아름다운 실상을 가리킨다. 겔레만(G. Gerleman)도 말하기를, "이름이란 것은 언제나 그 소유자의 본질을 내포한다."고 하였다(Der Nameen-thalt immer etwas won Wesen des Tragers.-Biblischer Kommentar, Ruth.Das Hohelied,1965, s.97).


"향기름 같다"고 함은 가장 귀하다는 뜻이다. 

출 30:23-25; 시 133:2; 막 14:3; 요 12:3 참조. 

교회가 가지는 소원은 이렇게 주님 제일주의여야 한다. 교회가 사실주의에서 행한다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보고서 이 세상주의에 머무르랴? 

허드슨 테일러는 말하기를, "교회는 그 심령과 손과 모든 영향력과 소유와 심지어 그 자신의 생명까지 주님에게 드리기를 기뻐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She will hield her very self to Him, heart and hand, influence and

possessions.-Union and Communion. 1914, p.13). 


벧전 2:1-3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하였다.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여기 이른바 "처녀들"이란 말은 일반 신자들을 가리킨다. 고후 11:2 참조.


아 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 여기 "침궁"이란 말(* )은 내실(內室)을 가리키는데 가장 사랑 받는 자들만이 거기 들어갈 수 있다.(G,Ger-Leman,* ist derdunkle Innenraum,wo die Liebenden allein sein konnen.-Biblischer Kommentar, Ruth.Das Hohelied, 1965, s.98). 


이는 영적으로 주님과만 깊이 교제할 수 있는 자리를 비유한다. 신자들이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개인적인 긴장은 없이 군중 심리에만 끌려서 움직이면 안된다. 그는 단독으로 주님과 깊이 교제하는 생활을 이루어야 한다.

즉 12:12-14을 보면, 사람들이 각기 "따로...따로"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한 사실이 중요시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 "침궁으로 이끌어 들어간다"는 것은 신자가 그 심령 속에 주님의 현림(現臨)을 체험하게 되는 사실을 가리킨다. 


요 14:23에 말하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하였다. 물론 이런 일은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사랑하게 되고(요일 4:9-11), 또 믿게 되어진다. 

구약 성경에는 성도가 받은 이와 같은 은총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즐 아래 거하리로다"라고 하였다(시 91:1).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이 말씀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영적 인도를 갈망하여 한 말씀이다. 우리가 기도하는데 있어서도 성령의 이끌어 주시는 역사가 임하기 전에도 기도하기를 힘써야 된다(골 4:2 상반). 그러나 기도가 유력하여지고 활발해지는 순간은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는 때이다. 그 때의 기도는 그야말로 달려감과 같이 순조로와 진다. 


그러므로 엡 6:18에 말하기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라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도에 순종하면 그가 다스려주시고, 그가 다스려 주시면 우리의 마음은 평안하다(J.Hudson Yaylor, When the heart submits, them Jesus reigns. And when Jesus reigns, there is rest.)라고 하였다.


아 1: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로 솔로몬의휘장과도 같구나 


- 이 귀절 초두에 나오는 "예루살렘 여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 점에 있어서 아가서의 말씀을 신앙 생활로 체험한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의 해석을 취하고자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물론 예루살렘 여자들은 신부는 아닌데... 그들이 그의 아름다움을 진술하나 그 자신과 함께 있지 않는다. 그들은 외부적인 것과 땅에 속한 것을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만족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둔다. 그들은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처지에 있지 아니하다."라고 하였다(Union and Communion, 1914, pp.83-84).


그러나 진실한 성도는 자기 자신을 "게달의 장막"처럼 여기면서도 낙심하지 않고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자기의 받은 축복을 높이 평가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술람미 여인은 자기를 솔로몬의 휘장과 같다고 한다. "솔로몬의 휘장"은 물론 아름다운 휘장이다. 언제든지 겸손하여 죄감에 강하고, 자기를 "계달의 장막"같이 천하게 보는 진실한 성도만이 그 받은 구원의 위대하심을 실감한다. 

"게달"은 아랍의 유목 민족(遊牧民族)인데 그 장막을 검은 염소 털로 만든다. 


성도는 성령에 의하여 자기를 바로 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소망을 가지지 못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대한 경고로 달게 받는다. 곧,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한 말씀이다(렘 13:23). 그는 자기에게 있는 죄악 때문에 자기를 게달의 장막 같이 보며, 또한 자기의 당하는 모든 비참한 고통들 때문에도 그렇게 본다. 그는 자기의 겉 사람의 후패한 사실을 늘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은혜로 받은 그리스도의 의(義)를 극히 영화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즐거워한다. 따라서 그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와진다(고후 4:16).


아 1:6

교회가 예수님의 존귀와 귀중성을 진술하고, 영적 교제로 말미암아 오는 기쁨을 표현함


아 1:12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벧화 송이로

구나 


- 여기서는 신부되는 교회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셨을 때에 그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향기로운 은사를 찬양한다. 참으로 향기로운 은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왕이 상에 앉았다"는 것은 왕이 연회석에 나아온 것을 말함이다. 신자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로 더불어 가장 친밀한 교제를 가진다는 뜻이다(계 3:20).

이와 같은 영적 교제를 통하여서만 신자들이 주님으로 부터 향기를 가득히 소유한 것 같은 즐거운 은사를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술람미 여자(교회)는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벧화 송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엔게디"는 아마도 아인 지디(Ain Jidy)라고 불리우는 유다 지방인 듯 한데, 거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수풀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Winer, Bibi. Dict; Kitto, Cyclop; Bibi. Lit. S.V.;Robinson, Palest. ii pp.209-216)

"고벧화"는 팔레스틴과 애굽에 많이 있는 식물인데 높이가 10척까지 자라는 것으로서 그 꽃이 매우 아름답고 향기롭0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심령에 접촉되실 때에 우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향기로운 기쁨을 얻는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하였다.(고후 2:14-16).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되어 전파될 때에는 언제든지 향기로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 마 26:6-13 참조.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자는 사실상 고귀한 향기 속에 들어가는 것 같은 기쁨을 느낀다.


아 1: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 할지라도 흘겨 보지말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 여기 이른바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해졌다는 것은 술람미 여자로 상징된 교회가 땅 위에서 핍박을 받아 상처 받은 것을 말한다(M.Henry). 교회가 세상에서 핍박을 받을 때에 불신자들은 교회를 업신여기기 쉬운데 그것은 잘못이다. "흘겨 본다"는 것은 업신여긴다는 뜻이다.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신령한 일보다 사업을 위주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혹은 신자)로 하여금 사회 사업에 치중하도록 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물론 교회가 사회 사업도 해야 되지만 신령한 일을 위주해야 된다.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신자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 영혼("나의 포도원")을 돌보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술람미 여자는 그 사실을 깨달았으니 다행한 일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말하기를, "우리의 명심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이 먼저 무엇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서 맺은 모든 열매들은 육체적인 것이고 성령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등한히 한 죄는 용서를 받겠지만 그 결과는 영구히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우리 몸에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그 흔적은 늘 남아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Ler us never forger that what we are is more important than what we do; and that all fruit borne wwhen not abiding in christmust be fruit of the flesh, and not of the Spirit. The sin of neglected communion may be forgive, and yet the effect remains permanently as wounds when healed often leave a scar behind.- Union and Communion, 1914, p.17).



예수님께서 교회의 아름다움을 창찬하심


아 1:7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 여기서는 신랑 되시는 예수님께서 술람이 여인(교회)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신다. "눈이 비둘기 같다"고 함은 그의 온유하고 순결함을 비유한다(마 10:16). 교회는 온유와 순결로서 하나님의 제물자격을 가지게 된다. 구약 시대의 제물은 양이나 비둘기 같은 것이 그 중요한 것이었다. 매나 독수리나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것은 제물의 자격을 가지지 못하였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 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 교회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라고 하면서 물어보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에게 대한 우리 마음의 태도가 어떠해야 될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 중심에서부터 뜨겁게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 어떤 고상한 말로 칭송한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이 냉랭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울리는 괭과리와 같은 것이다.


목자로 진술된 솔로몬왕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1;17, 2:16, 6:2). 요 10:11,14 참조. 여기서는 솔로몬이 목자처럼 낮아진 것을로 진술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을 구속하시려고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미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이 목자상(牧者像)은 그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상(人間像)으로 낮아지신 처지를 비유한다(빌 2:6-8). 

우리는 그와 같은 점에서만 그로 더불어 접촉할 수 있고, 또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겔 34:15-16; 마 26:31-32; 요 10:11,14-16; 히 13:20; 벧전2:25).


그러면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묻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양 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교회(신자)가 무엇보다도 그 영혼이 살기 위하여 목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계신 곳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교회는 오정(더위가 심한 때)에 쉴 수 있는 곳을 묻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에게는 안식이 필요한 법이다. 그 안식처에 대하여는 다윗이 잘 묘사하였다(시 23;2). 사 40:11, 49:10; 겔 34:13-16; 계 7:17 참조.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곧, 술람미 여인이 어디론지 떠나간 솔로몬을 찾으려고 그의 양 떼가 아닌 다른 양떼들 곁에 가서도 알아본다는 뜻이다. 여기 "얼굴울 가리운자"(* )란 말은 "방황하는 자"라고 번역해야 된다(C.D. Ginsburg).


아 1:8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 이것은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응답이다.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란 말씀은 많은 해석가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위해 주신 모든 계시와 기타 진실한 성도들의 생활 체험을 따라가는 의미라고 한다.

히 6:10-12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리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하였고, 히 13:7에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였다.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여기 "염소 새끼"란 말(* )은 그저 새끼들(kids)이란 뜻이다(Delitzsch). 새끼들을 먹이라고 함은, 양 무리를 먹이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신 바 있는데(요21:15), 그의 양을 먹이는 것은 바로 그와 동행하는 비결이다. 그리스도께서 양 된 자기 백성을 목양하시는 것만큼 주님의 양 떼를 진실하개 먹이는 자는 그의 계신 것에 자동적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실상 그리스도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도 주님 자신을 대접함과 마찬가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마 25:40).


아 1:9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 "내 사랑아"라고 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진실한 교회를 평가하신 적합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신랑되시는

예수님께서 사실상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며 겉사람은 후패하여진(고후 4:16) 술람미 여인(교회)을 보시고 이렇게 사랑스럽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의 아름다움과는 상관이 없다.


"바로의 병거의 준마." 

여기서 술람미 여자를 "준마"(* =馬)에 비유한 것은 무슨 뜻인가? 혹은 술람미 여자의 빛나는 단장이 말 머리의 장비와 같다는 뜻이라고 하기도 하고(Staerk), 또 혹은 술람미 여자의 미(美)의 힘있는 인상(overweldigende indruk)이 말의 정복력과 같다는 뜻이 라고도 한다(G. Ch. Aalders, Commentaar ophet Oude Testament, 1952. s. 38).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그 당시 근동 지방에서는 애인(여자)을 말에 비유하기도 하였는데, 겔레만(Gillis

Gerleman)은 말하기를, "나귀나 소는 짐을 운반하는데 사용되었으나 말은 위풍 있는 동물로 간주 되었다. 애굽에는 애인을 말에 비유한 시귀(詩句)도 있다....그것은 예컨대 '당신은 내게로 오는구나! 왕의 말처럼! 이란 내용이다."라고 하였다(Biblischer Kommentar Altes Testament, Ruth. Das Hohelied, 1965, s. 106-107). 


우리는 겔레만의 주장대로 9절의 "준마"란 말이 애인을 비유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한 교회(혹은 신자)를 이렇게 애인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의 준마"라고 한 것은 말들 중에도 가장 훈련을 잘 받는 말을

의미한다. 바로의 준마는 그 병거에 탄 왕의 뜻을 조금도 어김없이 잘 수행하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말로 비유하여 말씀하기도 하였다.


즉 6:1-3을 보면 네 가지 말이 나오는데 그것들을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섭리라고 한다(즉 6:5,8).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 이상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할 것은 없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6:22).


아 1: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 여기 이른바 "땋은 머리털"은 술람미의 얼굴을 아름답게 장식한 머리털을 말한다. 얼굴은 행실을 대표한 것인 만큼 여기서 교회의 외부적 면모와 및 활동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목도 구슬 꿰미로 단장하였으니만큼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여기서 "목"은 머리(교회의 머리)곧 그리스도에게 붙었으니만큼 기독자의 신앙을 비유한다는 해석이 있다. 이 해석이 옳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첫째로 중요한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다(히 11:6).


아 1: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 주님께서는 행실과 믿음이 아름다운 성도에게(10절) 더 많은 은사를 첨부하여 주실 것을 여기서 약속한다. 신자들

이 그 받은 은혜대로 충성하면 더 큰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에 많이 나타나 있다.

마 25:21에 말하기를,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하였다. 딤전 3;13; 계 2:10 참조.


아 1:12-14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네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벧화 송이로구나 


- 여기서는 신부되는 교회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셨을 때에 그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향기로운 은사를 찬양한다. 참으로 향기로운 은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음 것이다.

"왕아 상에 앉았다"는 것은 왕이 연회석에 나아온 것을 말함이다. 신자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는 그로 더불어 가장 친밀한 교제를 가진다는 뜻이다(계 3:20).

이와 같은 영적 교제를 통하여서만 신자들이 주님으로 부터 향기를 가득히 소유한 것 같은 즐거운 은사를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술람미 여자(교회)는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벧화 송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엔게디"는 아마도 아인 지디(Ain Jidy)라고 불리우는 유다 지방인 듯한데, 거기에는 매우아름다운 수풀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Winer, Bibl. Dict.; Kitto, Cyclop; Bibl. Lit. S.V.;Robinson, Palest. ii pp.209-216).


"고벧화"는 팔레스탄과 애굽에 많이 있는 식물인데 높이가 10척까지 자라는 것으로서 그 꽃이 매우 아름답고 향기롭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심령에 접촉되실 때에 우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향기로운 기쁨을 얻는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하였다(고후 2:14-16).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되이 전파될 때에는 언제든지 향기로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 마 26:6-13 참조.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자는 사실상 고귀한 향기 속에 들어가는 것 같은 기쁨을 느낀다.


아 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 여기서는 신랑되시는 예수님께서 술람미 여인(교회)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신다. "눈이 비둘기 같다"고 함은 그

의 온유하고 순결함을 비유한다(마 10:16). 교회는 온유와 순결로서 하나님의 제물 자격을 가지게 된다. 구약 시대의 제물은 양이나 비둘기 같은 것이 그 중요한 것이었다.

매나 독수리나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것은 제물의 자격을 가지지 못하였다.


아 1:16,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 여기서는 신부된 교회의 구조를 비유로서 묘사한다.

"침상"은 신자가 주님으로 더불어 교제하는 장소를 말함인데 곧, 기도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것이 "푸르다"고 함은 성도가 기도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생명력을 공급 받기 때문이다. 시 23:2-3 참조.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이것은 참된 교회의 구성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신자들이 백향목이나 잣나무처럼 신앙 인격에 있어서 견실할 것을 비유한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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