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원어해설

보다 - 블레포 데오레오 호라오

은바리라이프 2018. 10. 10. 14:46

5절에 보면 요한이 예수님의 수의를 보았다는 어구가 있지요? 거기에서 보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블레포입니다. 그 단어는 단순히 어떤 형상이 망막에 들어옴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바로 밑의 6절에 보면 베드로가 무덤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 세마포를 보았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는 데오레오입니다. 그 말은 뚫어지게 쳐다보다, 갸우뚱 거리며 쳐다보다라는 말입니다. 그냥 멍하니 쳐다본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의 수의가 저렇게 가지런히 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까? 누군가 수의를 풀고 시체를 가져 간 것이라면 그 긴박한 상황에 수의와 수건을 저렇게 가지런히 원래 있던 자리에 개켜서 올려놓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며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게 데오레오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또 다른 보다가 나옵니다. 요한이 다시 무덤에 들어가서 수의를 보고는 믿었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가 오라오입니다. 그 말은 이해심을 가지고 보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그 단어 ‘호라오가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사역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지어진 하나님 의존 형 소경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돈이나 명예, 인기, 자랑 같은 이 세상의 힘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다시 아버지 집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 집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육신의 눈은 진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진짜 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보고 있는 아주 어리석고 무력한 눈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블레포로서의 보는 것의 한계가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이 변화산에 올라가 찬란한 하늘의 몸으로 변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블레포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하늘의 몸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까지 직접 들었음에도 이 세상의 권세 앞에서 모두 줄행랑을 쳤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본 것입니까? 뭘 보긴 봤는데 그게 그들의 신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건 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은 영적인 깨달음을 전제한 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이라는 단어와 혼용하여 바꿔 쓸 수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저마다 육신의 눈으로 뭔가를 보고 싶어 하고 육신의 귀로 뭔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은 보는 것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으로 성숙되어지지도 않습니다. 홍해가 갈라져 그 40마일이나 되는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넜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세요. 밤낮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고 하늘에서 먹 거리가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이 백 만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물이 땅도 아닌 반석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구의 인구만큼 되는 사람들이 일시에 해갈이 될 물이 쏟아져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한 엄청난 광경을 모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 결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배신하고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뭔가를 보여주면 내 신앙이 더 돈독해 질 거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삶 속에서 기적을 한 번 보여주세요, 그러면 믿을게요.’ 그건 모두 헛소리입니다.

 

(4:48)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리고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십니다. 그 아비가 그 말씀을 믿자 어떤 일이 보였습니까? 진짜로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보는 것이 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보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먼저 보고 믿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패역한 세대라는 욕을 먹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더 확실하게 확인 도장을 찍고 가지요.

(11:40)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먼저 자기 오빠를 고쳐 달라고,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보고 믿으려 하는데 믿으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