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원어해설

60.새 옷과 낡은 옷의 이야기

은바리라이프 2015. 11. 24. 21:51

60.새 옷과 낡은 옷의 이야기


 -산상수훈(45) “새것을 담은 새 그릇”본문기록...

(눅5:

3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아들인데 손님으로 번역이 되었음)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아들들로 금식 할 수 있느뇨)- 아들들은 신랑과 함께 있으면 금식하면 안됩니다.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첫번째 남편을 빼앗기는 날이 오는 것이지요)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당연히 첫번째의 남편인 율법을 먹지 않습니다)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파라볼레(παραβοληG3850/비유)””로 그 이야기 옆에다가 한번 던져 놓으시는 것입니다

              - 파라발로(παραβα′λλω/G3846/따라던지다)- 몸을 던져놓는 것이 비유라고 그랬지요

                           파라παρα′G3844곁에 +발로βα′λλωG906;따라 던지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 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이 금식의 이야기의 연장으로 붙어 있는 새 술과 새 부대의 이야기를 각 절로 분리해 보면

36절은 ‘카이노스’(καινόςG2537)와 ‘팔라이오스’(παλαιόςG3820-낡은)의 대조

37절은 ‘네오스’(νέοςG3501)와 ‘팔라이오스’(παλαιόςG3820-낡은)의 대조

38절은 ‘네오스’(νέοςG3501)와 ‘카이노스’(καινόςG2537)의 대조

이러한 사전 분석이 이 비유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키가 됩니다.

 

먼저 36절을 보시면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라고 시작이 되지요?

여기에서 ‘새 옷’이 ‘히마티온(ἱμάτιονG2440-옷) 카이노스’이고

낡은 옷이 ‘히마티온(ἱμάτιονG2440-옷) 팔라이오스’입니다.

그리고 조각이라고 번역이 된 ‘에피블레마(έπίβλημαG1915)’는

            ‘에피발로’에서 유래한 단어로‘속하다’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훨씬 적확합니다.

                그 ‘에피발로(G1911)’라는 단어가 ‘붙이다’라고 번역이 된 그 단어입니다.

                                에피έπίG1909-위에(첨가함의미)+발로βα′λλωG906;따라 던지다

그리고 앞부분에 ‘찢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직역을 하면

새 옷에 속한 것을 옛날 옷에 속하도록 던져 넣는 것은 원리적으로 되지 않는다.’입니다.

새 옷에 속한 것이 뭡니까?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옛날 옷인 율법에 던져 넣어 그 둘을 섞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건 새것의 파괴(스키조σχίζωG4977, 분열하다, 부수다)라는 것입니다.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왜냐하면 그 새것에 속한 것은 옛것과 같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새것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합하다’라고 번역이 된 ‘쉼포네오’라는 단어는

              ‘함께 한 소리를 내는’이라는 ‘쉼포노스G4859σύμφωνος’라는 단어의 동사형입니다.

                                쉰σύνG4862-함께+프호네G5456φωνή-언어,소리,폭로...

그러니까 옛것과 새것은 서로 다른 말이기 때문에 하나의 말로 섞일 수 없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므로 새것에 속한 것을 옛것에 속하도록 던져 넣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비유가 금식의 이야기를 부연설명해 주는 비유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되지요?

그렇다면 이 36절의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이겠습니까?

새것에 속한 양식은 절대로 옛것 안에 양식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그런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둘은 같은 말(쉼포네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새 옷과 옛 옷은 서로 엮여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도 두 가지 천으로 옷을 만드는 것을 금한 것이고 주님의 속옷도 호지 않은 옷이었던 것입니다.

그건 그 분이 이렇게 저렇게 찢고 엮어서 만든 그런 옷을 입으신 분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원래부터 호지 않은 진리의 옷을 입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다만 어두움에 속한 어리석은 자들이 그분이 주는 옷을 진리의 옷으로 받아 입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갈기갈기 찢어서 자기들의 힘과 노력으로 이리저리 꿰매어 율법의 옷으로 입어 버렸습니다.

그걸 히브리어로 ‘타파르’라고 하는데 그 단어가 쓰인 곳이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창3:7)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처음으로 한 일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하고르חגורH2290, 띠)를 해 입은 것입니다.

그 일은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그 자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이야기 바로 아래 절에서는 그 나무가 무화과나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선악과나무를 무화과나무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성경 전체에서 줄곧 율법을 가리키는 모형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 이파리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스스로 꽃을 피울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고 고작해야 아담과 하와의 띠밖에 생산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겠다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은 것이

그렇게 나쁜 일입니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의 그 ‘엮다’라는 단어가 ‘타파르תפרH8609(바느질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 띠(진리의 모형)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바느질을 한 게 누구입니까?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걸 뭐라고 해요? 율법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의 스스로의 힘과 노력과 열심으로 진리를 완성해 보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율법이라 합니다.

그렇게 사람이 자기들의 힘으로 이리저리 재단하여 바느질을 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옷을 해 입어 버리면

그게 바로 율법의 ‘낡은 옷(히마티온 팔라이오스, 구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낡은 옷의 재료인 율법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려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때가 되면 그 무화과에서 열매가 맺힐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때는 주님이 스스로 그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죽으시는 때입니다.

주님은 그 율법의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골고다 언덕에서 저주를 받으십니다.

저주받아 말라비틀어진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열리게 하기 위해,

그분이 친히 말라비틀어진 언약의 기둥에 매달려 버리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율법의 무화과나무가 죽자

 거기에서 생명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의의 겉옷이 넷으로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호지 않은 속옷, 즉 진리라는 내용을 담은 넷이라는 겉옷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절대 맺을 수 없었던 생명의 열매가, 율법이 저주를 받아 말라죽어 버림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열리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옷에 속한 것과 낡은 옷에 속한 것은 분리가 되어 서로 엮일 수가 없는 게 맞는 겁니다.

그게 새 옷과 낡은 옷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새 사람은 낡은 음식을 먹을 수가 없고 여전히 낡음에 속한 자들은 새 것을 먹을 수가 없다는 그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