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는 이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수리아의 안디옥
장흥길(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신약에는 동일한 지명으로 서로 다른 두 곳이 언급된다. 그 하나는 수리아 지방의 ‘안디옥’이고(행 11:20 등), 다른 하나는
비시디아 지방의 ‘안디옥’(행 13:14 등)이다. 고대의 안디옥은 성경에 언급된 곳 외에도 여러 곳에 있었다. 왜냐하면 ‘안디옥’은
‘안티오쿠스’(Antiochus)를 기념하여 세운 도시로 여러 곳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안티오쿠스는 주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후
‘셀류시드 헬라 제국’을 열었던, 그 부하 장군 ‘셀류커스 Ⅰ세’(Seleucus Ⅰ Nicator)의 부친이었다. 셀류시드 왕가의 여러
왕들은, 알렉산더가 자신을 기념하여 정복지, 여러 곳에 ‘알렉산드리아’를 세웠던 것처럼, 안티오쿠스를 기념하여 제국의 여러 곳에 동일한 이름으로
도시를 건설하였다. 현재 터키 영토로 시리아와 접경 지역인 하타이(Hatay) 지방에 있는 안디옥(현 지명은 안타키아)은 다른 곳에 있는
안디옥과 구별하여, 일반적으로는 ‘오론테스(Orontes) 강변의 안디옥’으로 불린다.
원래 이 도시는 구약에 언급된 아람 왕국
시절부터 있던 고대 도시는 아니었다. 주전 301년 셀류커스 Ⅰ세가 알렉산더 사후 안티고니드 왕조를 세웠던 안티고누스(Antigonus)를
입수스(Ipsus)에서 물리친 후, 지중해안 오론테스 강 어구에 항구 도시 ‘실루기아 피에리아’(Seleucia Pieria)를 세웠다.
이듬해, 그는 여기서 내륙으로 25㎞ 정도 떨어진 오론테스 강변에 안디옥을 건설하였다. 고대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 주전 64년-주후
25년)의 『지리학』(16.2.5)에 의하면, 셀류커스 Ⅰ세는 수리아 지방의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에 네 개의 도시를 세웠다. 그 중 가장 큰
도시인 ‘안디옥’은 부친의 이름을 따라 명명하였고, 항구에 건설한 요새 도시 ‘실루기아’는 자신의 이름을 따라 불렀으며, 나머지 두 도시
‘아파마’(Apameia)와 ‘라오디게아’(Laodiceia)는 각각 그 아내와 모친의 이름을 붙여 명명하였다.
바울 당시 이 도시는 수리아 지방의 수도(首都)였으며,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를 이어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대도시였다. 주전
1세기 그리스 고대사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의 『사기』(17.52)에 의하면, 당시 안디옥의 인구는 자유인만
약 30만 명에 달하였다. 또 신약 당시 로마 작가이자 자연사가인 플리니(Pliny the Elder, 주후 23-79년)의
『자연사』(6.122)에 의하면, 그 인구는 6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다. 이로써 대개 1세기 당시 안디옥의 인구를 50-60만 명 정도로
여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이 이 도시에 많이 거주했던 것은 도시 건립에 따른 셀류커스 Ⅰ세의 이주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곧 셀류커스는 안디옥을 세운 후 여러 곳에서 사람들을 이주시켜 이 도시에 살게 하였는데, 대부분의 거주자들은 마게도냐의 퇴역 군인,
아테네에서 이주해온 식민인, 그리고 유대인이었다(H. F. Vos, Wycliffe Historical Geography of Bible
Lands, 2003, 405). 메츠거(B. M. Metzger)에 의하면, 신약 당시 이 도시에 살던 사람 일곱 명 중 한 명은
유대인이었다. 이처럼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진 기독교인들이
베니게와 구브로 외에 이곳에 사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행 11:19)도 여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던 당시 배경을 이해하면, 피신한
자들이 많은 도시들 가운데 하필이면 이 도시에서 전도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수리아의 안디옥과 관련되어 있는 본문으로는, 이곳 출신의 의사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6:5; 11:19-24,
25-26, 27-30; 13:1-3; 14:26-28; 15:22-29, 30-35; 18:22-23)과 바울이 기록한
갈라디아서(2:11-14), 그리고 디모데후서(3:11)를 들 수 있다. 이 구절들에 나타난 안디옥의 모습과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사도행전에 나타난 안디옥을 살펴보자. 첫째, 이 도시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과부를 위한 일상 구제의 일을 위해
택한 일곱 일꾼 중 한 사람인 니골라의 고향이었다(6:5). 그 헬라식 이름을 감안하면, 니골라는 이방인 기독교인으로, 이전에는 유대교
개종자였다. 그는 1세기 말 자신의 신앙과 행위를 오해하여 간음을 일삼은 ‘니골라당’(계 2:6)에게 거짓으로 추앙을 받기도 하였다. 둘째,
안디옥은 이방인을 향한 선교로의 중대한 전환이 이루어진 역사적 장소였다. 스데반 선교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박해를 피해 구브로와 구레네로 갔던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헬라인에게도 전도하여 믿게 되자,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파송하여 복음 사역을 하게 했다(11:19-24). 이로써
안디옥은 이방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셋째, 안디옥은 바나바가 다소에 있던 바울을 불러 함께 사역함으로써, 제자들이 외부인에 의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였다(11:25-26). 넷째, 안디옥은 기독교 선지자 아가보가 글라우디오 황제(41-54년
통치)가 다스리던 로마 제국 전역에 일어날 흉년을 예고한 곳이기도 하다(11:27-30). 다섯째, 안디옥은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가 있던 이방 선교의 전초기지였다(14:26-29). 두 사도는 안디옥 교회의 대표로서 예루살렘에서 열렸던 사도회의에 참석하여 이방 선교에서
불필요한 율법의 짐을 떨어버리는 중대한 합의를 이끌어 낸 주역들이었다(15:22-35). 또한 이 도시는 이들이 첫 번째 선교여행을 마치고
보고한 장소이며(14:26-28), 바울 사도가 두 번째 선교 여행 후 세 번째 선교 여행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었다(18:22-23). 이처럼,
안디옥은 바울에게 실질적인 이방 선교의 전략 중심지였다.
바울서신에서도 안디옥과 관련된 본문을 찾을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갈라디아서(2:11-14)에서 그러하다.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대표로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 사도회의를 한 뒤, 예루살렘 교회는 그
답방으로 대표단을 안디옥 교회에 파송하였는데, 이때 일어났던 불미스런 일이 갈라디아서에 묘사되어 있다. 먼저 안디옥에 이른 베드로 일행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형제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할 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이르러 이 장면을 목격하자,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식사하던 베드로가 그 자리를 슬그머니 일어났고 그와 함께 식사하던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바나바까지도 그 자리를 떠났다. 이를
목격한 바울은 베드로에게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식탁 교제를 하다가 물러난 행위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차별하는 것이며, 그들에게
유대적 생활 방식을 강요하는 것임을 강하게 책망하였다. 이로써 이방인 선교에 대한 확실한 신학적 입장이 정립되고 그 발판을 마련한 곳이 바로
안디옥이었다. 또 후기바울서신인 디모데후서(3:11)에도 이 도시가 언급되었는데, 이때 바울은 어떤 어려움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여기서
받았던 박해를 언급하였다.
또 안디옥은 마태가 유대인과 이방인 선교를 함께 실천한 공동체를 위해 저술한 복음서의 저작 장소로
추정된다. 그 근거로 마태복음 내의 많은 유대 기독교 전승들과 저작 장소 추정 구절(4:24), 또 1세기 말 기독교 문서로 열두 사도 교훈서인
디다케(Didache)와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서신이 제시된다. 교회사적으로도 이 도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후 4세기 초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3.36.2)에 의하면, 이 교회 최초의 감독이 베드로였고, 트라얀 황제(Trajan, 주후
98-117년 재위) 때 순교한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안디옥 교회의 세 번째 감독이었다(3.32). 2세기 후반에는 여러 영지주의
이단들(Menander, Saturninus, Cerdon, Tatian)이 여기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런 이단의 활동에 대하여 주후
180년경 테오필루스(Theophilus)는 기독교 변증서를 저술하였는데, 이 저술 역시 유대적이면서 이방적 안디옥 교회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 도시의 고대 유적은 그 서편의 오론테스 강과 동편의 실피우스(Silpius) 산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안디옥은 네 차례 확장되었다. 곧, 이 도시는 셀류커스 Ⅰ세에 의해 그 제1지구가 처음 건설된 후, 다시 제2지구로 확장되었고,
셀류커스 Ⅱ세(주전 247-226년)와 안티오쿠스 Ⅲ세(주전 223-187년) 때 제3지구인 오론테스 강의 섬에 궁전과 대경주장 및 전차경기장이
건설되었다. 그 후, 안티오쿠스 Ⅳ세 에피파네스(주전 175-163년)에 의해 네 번째 지구가 확장되었다. 로마 시대
아우구도(Augustus)와 디베료(Tiberius) 황제는 대(大) 헤롯의 도움을 받아 이 성 안에 주전 23년-주후 37년 궁전, 극장,
열주로, 원형극장, 수로 등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지진 등으로 인해 일부 유적만이 남아 있다. 1910년 이곳에서 이중 구조로 된
‘은제(銀製) 성배(聖杯)’가 발견되었는데, 내부의 잔은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 때 사용한 성배로 전해지나 확실치 않으며, 외부의 잔은
2-6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도시의 동북편 스타우리스(Stauris) 산 서쪽 사면에 길이 13m, 폭 9.5m, 높이 7m의 큰 굴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이 예루살렘 사도회의 후 바울과 베드로가 만났던 ‘베드로의 굴’로 전해진다. 십자군이 이 도시를 점령했던 1098년, 이 굴을
좀 더 파고 입구 양쪽에 두 개의 아치를 세워 기념교회로 삼았다. 현재의 교회는 1863년 프란시스코 교단의 카푸친(Capuchin) 수도회가
세운 것이다. 현재 도시 중심에 고대 안디옥과 주변 지역에서 발굴된 주택 바닥 모자이크 등의 유물을 전시하는 하타이(Hatay) 박물관이 있다.
아쉽게도 이 모자이크는 신약 당시보다 몇 세기 뒤의 것이다. 이곳에서 25㎞ 정도 떨어진 지중해변에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첫 번째 선교 여행 때
출입했던 고대 항구 실루기아가 현재 사만다으 근처에 위치해 있다(행 13:4; 14:26). 실루기아는 현 지명으로는 ‘체브릭’으로 불린다.
요약하면, 고대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에 세워진 수리아의 안디옥은 로마 제국의 3대 도시로 외항인 실루기아와 함께 육로와 해로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인데다가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여 초기 기독교인들이 선교의 전초기지로 삼고 제국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도시였다. 특히, 이 도시는 헬라의 문화와 학문 및 종교가 번성했던 도시였지만 또한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유대인 선교나 이방인 선교에
적절한 기독교 선교의 전략적 요지였다. 특히, 이 도시의 헬라적 학풍은 바울이나 후대 교부들의 역사적 성경해석에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안디옥은
바울 당시 로마 제국 내 수리아 지방의 수도이자 군사, 교통, 무역, 학문적 대도시로서 초기 기독교 열방 선교의 발판을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