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선교사/성경 순례여행

사마리아

은바리라이프 2015. 3. 6. 08:33


사마리아 전경

 


사마리아

 


폐허가 된 사마리아 성

 

사마리아성에 대한 언급은 구약에서 100번이상 언급될만큼 자주 등장하지만, 솔로몬 사후50년이 될때까지는 건설되지 않았다. 이 도시가 건설된 것은 B.C 875년 오므리왕에 의해서이다. 왕상16:24절“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여기에 그 이름의 기원이 있다.  그러나 오므리는 이 도성을 완성하지 못했고, 그의 아들 아합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는 옛 수도 디르사보다 훨씬 진일보한 것이었다. 아합은 두로 왕의 딸과 결혼을 할 만큼 이방 문물을 받아들였는데, 이 성읍은 페니키아의 숙련된 장인들에 의해 건축되어 상아궁(왕상22:39, 암3:15)이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실제 이곳은 복층구조물이 있었음이 왕하1:2~17절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서 치명상을 입었는데, 이를 통해 이 건물이 높았음을 능히 짐작할수 있다. 그후 여로보암 2세(B.C 793~782)때에 사마리아성은 최대의 번영을 누렸으나,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의 사마리아성의 종말 예언처럼, 여로보암2세 사후 얼마되지 않아 B.C 722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5세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앗수르이 왕조실록이라 할수 있는 annlim에 의하면 살만에셀의 뒤를이은 사르곤 2세가 B.C721년에 사마리아 거민 27,290명을 사로잡아 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를 사마리아의 실제적인 멸망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이 사건은 성경 왕하17:23~24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동일한 앗수르 왕(아마도 사르곤 2세)이, 다른 정복지로부터 사람들을 옮겨다가 사마리아 여러 성읍들을 재건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에살핫돈(스4:2), 앗술바니팔(스4:10, 우리말 성경에는 오스납발)에 의해서도 이러한 점령지에 대한 강제 이주정책은 계속되었다.앗수르왕들에 의해 재건된 사마리아가 오므리가 건설한 것과 동일한 성인지 아니면 인근 지역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북이스라엘의 중심지역이었던것 만큼은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재건된 사마리아는 앗수르 속주의 수도역할을 했다. 느4:17에는 산발랏이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가 팔레스타인 지역 원정후, B.C331년에 사마리아성은 헬라의 직접 식민지가 됨으로 인해 새로운 전기를 맞게되었다. 퇴역 군인들을 이곳에다 대거 정착시키므로써 헬라화를 더욱 가속시켰다. 알렉산더 사후 B.C 198년까지는 애굽의 톨레미 왕조에 속했다가, 그후부터는 시리아의 셀류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3권 275~279에 의하면 하스모니안 왕가의 요한 힐카누스가 B.C 107년에 이곳을 점령하고는 흔적을 알수 없을 만큼 완전히 파괴했다고 되어있다. 실제로 이때 이후로는 파괴된채 방치되어 있었다. B.C 55~57년에 로마의 수리아 총독 가비니우스가 사마리아의 복원을 명령해서(유대고대사 14권 86~88), 재건축이 시작되었지만, 이를 완성한 사람은 헤롯대왕이다.

 

B.C 30년부터 시작해서 무려 10년에 걸쳐 이 사업을 진행시켰다. 이때 그의 후견자인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헬라식 이름인 ‘세바스테’라는 이름으로 도시의 이름을 바꾸었다.(전쟁사 1권 403) 오므리왕의 궁전이 있던 그 자리에 헤롯은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신전까지 세우게 되었다. 또한 헤롯대왕도 이곳에다 알렉산더대왕 처럼 퇴역군인들을 거주시켰다(유대고대사 15권 292~298). 연금을 지급받았던 사람은 무려 6,000명이나 되고 이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이들은 갈라디아인, 드라기아인,게르만인등의 외국인 용병들이었다. 그래서 이도시는 더욱더 국제도시화 되었다. 헤롯대왕 사후에는 아켈라오의 영지였으나, 학정으로 실각한후 로마 총독의 직접 통치지역이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히 총독이 직접 통치하고 있었다. 행8:5,14절에는 마술사 시몬의 본거지로 언급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로마통치시기인 A.D 180~230년경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사마리아 성 야곱의 우물

 

이 우물은 헬레나 황후가 세운 교회 지하실에 있다.  처음 교회도 파괴되고 두번째의 십자군 교회도 파괴되었다. 갈릴리로 행하시던 예수님께서는 피곤한 몸으로 사마리아에 도착하셨다 .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우물 곁에 앉아 계실 때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요4:3-26)고 하셨다.

 


예수님과 야곱의 우물가의 여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여인숙

 


선한 사마리아인의 여인숙

 


사마리아 사람들

 

북이스라엘 멸망 이후부터는 여러가지 역사적 배경으로인해, 북이스라엘의 거주민들은 온통 혼혈족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인해 이들은 남쪽 유다지방의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소외당하고, 멸시를 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강제 이주가 북부 지방 사람들에 대한 감정의 기원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 사마리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지리적인 의미에서 ‘사마리아’는 ‘사마리아지역’을 의미한다. 

 

사마리아성의 역사를 보면 오므리왕조 이후부터는 사마리아성이 북이스라엘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앗수르이후에는 이곳이 속주의 수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지리적인 의미에서 사마리아지역이란 사마리아성의 행정적 통치의 영향을 받는 북부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둘째, 구체적 장소의 의미에서 ‘사마리아’는 ‘사마리아 성’을 의미한다.

 

사마리아성에는 한번도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경제의 중심지이면서, 풍요의 상징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이방문화와 이교의 상징이었다. 세째, 성경에서는 ‘사마리아인’이라고 했을때에는 사마리아지역에 살고있는 거민이라는 의미보다는 그리심산을 자신들의 성지로 여기며,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특수 종교집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의미에서의 사마리아인은 Samaritans로 표현하고, 사마리아성 혹은 사마리아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말할때에는 Samarians라고 표현한다. 실제 Samarians들은 강제이주된 사람들, 퇴역군인 등이기에 아예 이방인이거나 혼혈족들이다. 그러나 반대로 Samaritans들은 족외혼을 엄격히 금하고 있기에 오히려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