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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와 메추라기 ‘메추라기’편

은바리라이프 2015. 4. 3. 02:28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16

만나와 메추라기

‘메추라기’편

메추라기를 주시고 치시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침에는 만나가 내렸고,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날라와 진 주변에 덮였다. 메추라기는 여호와로부터 나온 바람이 바다에서부터 몰아온 것인데 메추라기가 얼마나 많이 떨어졌는지 이스라엘의 진영 사방으로 하룻길 되는 거리에 두 규빗, 약 90cm가 메추라기로 쌓였다. 백성들이 이틀 내내 메추라기를 주워 저마다 최소 10호멜을 모았다. 호멜은 부피의 단위로 1호멜은 약 220리터에 해당한다.

그런데 백성들이 막대한 고기를 모아놓고 이제 포식을 하려는 순간에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이 고기를 씹어보기도 전에, 아직 고기가 이빨 사이에 있어 씹기도 전에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크게 진노하시고 심히 큰 재앙으로 치신 것이다. 그 일로 인해 그 곳의 지명이 ‘기브롯 핫다아와’, 즉 ‘탐욕의 무덤’이 됐으니 적지 않은 수의 백성이 죽은 모양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원대로 고기를 허락하시고, 또 그들을 향해 진노하신 것일까? 이럴 바에는 차라리 메추라기를 주지 않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언뜻 보면 매우 황당한 사건이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역시 깊디깊은 구원의 복음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이 그리워 한 것

이 사건을 차근차근 살펴보자.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식이 떨어졌다고 불평하던 때로 거슬러 가본다. 그때 백성들은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겠다.”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그들의 불만을 잘 살펴보면 다소 묘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명히 애굽에서 많은 가축을 가지고 나왔고, 그동안 그것들을 양식으로 삼았을 텐데,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가 그립다고 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가축을 잡아먹었을 텐데 굳이 애굽에서 먹던 고기와 떡을 그리워 할 필요가 있었을까?

‘고기 가마’의 가마는 히브리어로 ‘시르’라고 하며 ‘솥, 시루, 항아리’를 뜻한다. 즉, 가마는 도자기 굽는 종류의 큰 가마가 아니라 집집마다 걸려있던 솥, 시루를 가리킨다. 그들은 가장 최근에 먹은 그 고기가 아니라 애굽에서 집집마다 먹던 그 고기와 떡을 달라고 한 것이다. 이스라엘 온 회중, 모든 백성들이 먹었던 고기는 무엇일까? 그 고기는 다름 아닌 유월절에 먹은 어린 양이다.

하나님은 죄 없는 어린 양을 죽어야 할 이스라엘 대신에 죽이고 이스라엘을 살리셨다. 그리고 그 고기를 먹으라고 하셨다. 너희는 이렇게 구원된다는 걸 가르쳐주신 것이다. ‘무죄한 어린 양이 죽고 정작 죽어야 할 너희가 살았다.’ 이것이 구원의 복음이고, 훗날 이스라엘이 드리게 될 희생제사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날에 가마에서 먹은 고기를 추억하며 더 먹게 해달라는 것은 대신 죽은 그 양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이 된다.

고기, 바사르의 의미

고기는 히브리어로 ‘바사르’라고 하며 ‘살, 육체’의 의미가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바사르)가 됨이라(창 6:3)’ 성경에서 바사르는 주로 영적이 아닌 육적인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고기’가 담고 있는 의미다. 게다가 메추라기는 바람에 의해 바다로부터 몰아져왔다. 바다는 성경에서 저주의 상징이다. 하늘 위의 진리의 물과 대조적으로 이 땅의 물은 오해된 진리이기 때문이다(홍해 편 참조).

‘내 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며 당신의 살이라고 하셨다. 떡이 살이고, 살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신 것이다. 헬라어로 ‘살’은 ‘사륵스’라고 하는데, 히브리어 ‘바사르’와 같은 말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사륵스) 되어 오신 분이므로 떡과 살은 모두 말씀을 뜻한다.

그 말씀을 구원의 복음으로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율법이 되어 버리고,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하나님이 된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 율법을 자기를 높이고 자기 의를 챙기는 도구로 오용하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 당시의 바리새인이 대표적이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광야에서 고기를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에 섞여 사는 무리, 곧 중다한 잡족이었다. 그들이 탐욕을 품고 충동질 하니 이스라엘 전체가 동조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다른 복음이 교회 안에 들어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행위와 율법의 교리로 뒤바꾼 상황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1:6-7)’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하나님은 그 고기를 저녁에 주고, 아침에는 떡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저녁의 히브리어 ‘에레브’는 ‘무언가 덮여있다’는 의미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어둠의 상태를 가리킨다. 말씀을 보이는 그대로 보면, 본다고 하지만 소경인 상태인 것이고, 그 상태가 저녁이다. 아침의 히브리어 ‘보케르’는 ‘파괴하고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다. 즉, 어둠의 상태, 율법의 상태가 무너지고 자기 부인의 죽음을 죽고, 새롭게 부활하는 것이 저녁과 아침에 담긴 복음이다.

창세기 천지창조 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6번 나온다. 단순히 밤낮이 바뀌고 하루가 지났다는 말이 아니라 이처럼 정교하게 구원의 복음을 담고 있는 말씀인 것이다. 성도는 반드시 저녁에서 아침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죄에서 의로, 율법에서 은혜의 자리로 가게 된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반드시 저녁에서 아침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런 이유로 백성들이 저녁의 양식인 고기를 원할 때 “그곳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 하시면서 진노하신 것이다.

영단번의 십자가 공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보이는 대로 보면, 즉 하나님의 말씀을 눈에 보이는 대로 읽으면 ‘하라, 하지 말라’의 율법이 되어버린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해 열심히 양과 소를 바치며 희생제사만 지낸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거기에 담긴 구원의 복음을 알아야 하는데 그건 알 생각을 하지 않고 열심히 제물만 죽이고 바쳤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고기 먹겠다고 투정한 일이다.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시고, 그로 인해 영원히 죄의 문제가 해결됐다. 이를 영단번이라고 한다. 영단번의 십자가 공로를 깨닫지 못하고 제사만 열심히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셨다(호6:6.) 희생제사에 담긴 내용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구원이고 영생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월절 양고기를 달라고 한 것은 또 어린 양을 죽이겠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단번의 십자가 공로를 부정하고 또 십자가에 매달겠다고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이빨 사이의 고기를 씹어보지도 못하고 죽은 것이다. 홍해를 다시 열고 돌아가 어린 양을 또다시 잡는 것은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