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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14 마라의 쓴 물

은바리라이프 2015. 2. 5. 18:17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14

 

마라의 쓴 물

 

 

구원과 행복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종 모세를 믿게 됐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0가지 기적을 보고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엄청난 이적도 체험하면서 구원을 받았다. 홍해를 건너온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감격해 한마음으로 춤추고 노래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아마도 그들은 이런 생각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능력이 크신 하나님이 우리 편이니 걱정이 없겠구나.’

나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선민이로구나.’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

그러나 이스라엘의 눈 앞에는 푸른 초장, 시원한 나무 그늘이 아니라 뜨거운 광야길이 펼쳐졌다. 이스라엘은 그 뜨겁고도 메마른 수르 광야를 사흘이나 걸어야 했다. 성도들은 모두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기적들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내가 구원받은 자가 맞다는 확신도 가져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험들이 인생의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 천국은 이 세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18:36).

 

하나님의 시험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자들을 낮추시고 시험하길 원하신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의 눈앞에 곧장 천국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되, 성도들이 원치 않는 불편한 상황 속으로 끌고 가시는 것이다. 성도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결코 태평성대, 승승장구의 삶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시험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께 띠 띄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끌려가는 삶이며(21:18),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 삶이다(44:22). 그래서 사도들이 입을 모아 성도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벧전4:12).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벗어나자 곧 광야길로 들어서는 것이 바로 그런 연유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삶, 안락한 삶, 행복을 목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깨닫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충만해지는 것으로 기뻐하는 자다. 그 과정에서 겪는 일들은 모두 성도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 것이다. 교회는 이미 창세 전에 구원을 받았지만(1:4), 인생이라는 광야를 살면서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은혜를 온 몸으로 체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마라의 쓴 물

이스라엘은 수르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어도 물을 얻지 못하다가 마라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쓴 것, 쓴 맛이란 의미의 마라라고 칭했다. 그리고 홍해 앞에서처럼 또 원망하고 불평했다. 모세를 원망하는 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었다(16:8).

우리가 인생 속에서 시험을 만날 때마다 내뱉는 원망과 불평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원망과 불평을 멈춰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진짜 죄는 피조물이 하나님 노릇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선과 악, 두 마음으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일이며, 근심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일이다. 그 두 마음에서 빠져나오게 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한 이스라엘은 실상 고난을 만날 때마다 실족하는 우리 모습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한 방법을 주셨으니 한 나무를 쓴 물에 던지게 하신 것이다. 나무는 바로 십자가를 가리킨다. 마라의 쓴물은 십자가로 인해 단 물이 됐다.

 

마라를 구원하는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는 나무에 달려 모든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한몸에 받고 죽으셨다. 그 저주의 십자가, 수치의 십자가가 죄인을 구원하는 단물이 됐다. 그래서 예수께서 달리신 나무 주변에는 마리아라는 이름만 있었다. 마리아는 마라의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마리아)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19:25)’.

마리아 이외에 이모가 있는데, 마태복음에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라고 나와 있다. 곧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인 걸 성경 기자가 잘 알고 있지만, 굳이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마리아들만 나열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상고해 보라.

십자가 주변의 마라마리아들은 모두 불같은 광야 속에서 목말라 죽게 된 자들, 바로 우리를 가리킨다. 마라의 쓴 물, 쓰디쓴 인생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한 나무가 던져져야 비로소 그 쓴 물이 단 물이 될 것이며, 오직 십자가로만 불가능하고, 패역 하고, 소망이 없던 자들이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걸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장면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향하고 있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참인 것이다(5:39).

 

엘림, 마라의 완성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 마라에 이어 엘림에 당도했다. 엘림은 마라의 완성이다. 마라의 쓴물이 나무로 인해 단물이 됐고, 우물들은 깨끗해졌고, 종려나무 그늘은 휴식처를 제공했다. 엘림에 이르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고 하며,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갈 때 쓰인 말이다. ‘이르렀다, 도착했다는 뜻보다 들어갔다, 들어왔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스라엘이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과 안식의 장소에 들어간것이다.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 12는 아들의 수다. 이스라엘이 십자가로 인해 고침(라파)을 받고 생명의 씨를 가진 아들이 됐다는 것이다. 70쉬브임으로 ‘7, 쉐바‘10, 아사르(완성)’의 의미가 합쳐진 말이다. ‘쉐바언약, 안식을 뜻하므로 70언약의 완성이다. 야곱이 애굽에 들어갈 때 12 아들과 70인이 들어갔고, 예수님은 12 제자와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했다. 같은 맥락이다.

성도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엘림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그 구원을 가르쳐주는 것이 마라와 엘림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성도를 광야라는 인생길을 살게 하시면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성도들에게 구원을 가르쳐 주시고 계시다. 성경은 예수, 즉 하나님이 자기 백성 구원하시는 이야기, 곧 복음이다. 성경은 이 세상의 행복을 찾는 매뉴얼이 아니다. 성경에서 다른 것을 찾으려 하지 말라. 날마다 그 구원의 복음을 깨달아 가면서 하나님께 무릎 꿇고 그 은혜를 찬양하라(바라크).’ 그것이 성도의 복(베라카)이다.

조정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