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복음서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왜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을까?

은바리라이프 2014. 8. 8. 20:41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왜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을까?

 

♣ 겉옷과 계명의 아들

 

열 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고 고침 받은 이야기는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성서시대 사회적 약자로서 소외 받던 여인이라서 더욱 동정이 가는데다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기만 해도 나으리라는 믿음도 대단하고 또 그 믿음대로 불치병을 고침 받은 점도 감동적이다.

 

혹자는 여인의 이 대단한 믿음을 가리켜‘저스트 원터치’(Just one Touch)믿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의 믿음도‘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한 번만 비벼 주면, 아니면 여인처럼‘단 한 번의 터치’만으로 기도 응답을 즉각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전을 넣고 버튼만 누르면 원하는 상품을 얻을 수 있는 자동판매기처럼 말이다.

 

그러나 부정한 혈루증 환자라는 당시의 사회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무리 앞에 나타나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댄 여인의 믿음은 결코‘버튼 하나만 눌러댄’단순하고 가벼운 행동이 아니었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댄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여인은 어떻게 겉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자신의 혈루증이 나으리라는 믿음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 겉옷과 하나님의 계명

 

유대인들에게 겉옷이 특별하고 소중한 이유는 겉옷의 네 귀에 달린‘술’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겉옷을 지을 때 술을 달라고 지시하셨는데, 이는 그 술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살아가는‘계명의 아들’임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민15:38~40)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과 경건성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옷단 술을 이용했다. 술을 길게 늘어뜨림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계명에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순종하고 있음을 보이려 한 것이다.‘경문’은 기도할 때 이마에 차는 성구함을 가리킨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마 23:5)

 

때로는 술을 너무 길게 늘어뜨려 땅에 질질 끌려서 뒤에 오는 사람에게 밟히는 경우도 있었다. 서기관들이‘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바로 이 옷단 술을 길게 늘어뜨리고 다닌다는 말이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눅 20:46)

 

예수님은 기도할 때‘경문’을 차고‘옷단 술’을 착용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기 때문이다. 단지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자신의 종교적 열심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경문을 남보다 크게 하고 술을 길게 늘어뜨리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행동이었다.

 

1세기에 이스라엘 땅에서 사역하셨던 예수님도 기도할 때 경문을 차고 술이 달려 있는 겉옷을 입으셨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보고 바로 유대인으로 알아보았는데 이는 예수님의 복장이 1세기 유대인들의 복장과 같았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요 4:9)

 

하지만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영화나 기독교 성화를 보면 예수님의 겉옷에 달려 있어야 할‘술’과 기도할 때 이마에 차야 할‘경문’이 제대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만일 이 모습을 사마리아 여인이 보았다면 단번에 예수님이 유대인임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2000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 사역한 역사적 예수님은 분명‘유대인 예수’였지만,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성화에서 보는 것처럼 로마, 영국, 미국을 거쳐 서구화된 예수님일는지 모른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 10:30)

 

많이 알려진‘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도 옷과 관련된 배경을 이해하고 읽는다면 새롭게 와 닿을 것이다. 비유에 나오는 강도 만난 자는 강도에 의해 옷이 완전히 벗겨졌고, 너무 맞아 반 죽음 상태에 이르렀다.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통해 사회적 신분과 출신을 알아보았던 당시에 강도 만난 사람은 발가벗겨진 채로 버려졌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초주검 상태였기 때문에 말도 할 수 없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레위기에 나오는 의식적 정결법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신원을 확인할 길 없는 그 사람을 도울 수 없었다. 자칫 부정한 사람과의 접촉으로 자신이 부정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 온전한 자의 옷단 술 만지기

 

열 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왜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을까?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는 순간 특별한 전기가 흘러서 병이 낫게 될 것을 기대했을까?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엉뚱하고 황당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을 아무렇게나 만진 것이 아니다. 바로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달린‘옷단 술’을 만진 것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옷단 술이 가진 특별한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여인의 기이한 행동에 숨겨진 믿음의 비밀을 알 수 있다.

 

예수님 당시 1세기의 랍비 문헌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온전하지 않은 자가 온전한 자의 옷단 술에 손을 대면 온전해진다”

이러한 1세기 유대인들의 믿음은 혈루증 여인뿐 아니라 다른 무리의 행동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고 손을 대는 자마다 모두 나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막 6:56)

 

겉옷에 달린 옷단 술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의미하는 영적인 상징물이다. 마치 오늘날 십자가가 마귀를 쫓는다고 믿는 것처럼 성서시대 유대인들은 겉옷의 옷단 술이 그런 영적인 에너지와 파워가 있다고 믿었다.

 

랍비 문헌에서 말하는 ‘온전한 자’는 하나님과 특별하고도 친밀한 영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다. 즉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사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장애가 없는‘의인’을 가리키다. 예수님은 1세기 이스라엘 땅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랍비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살리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이런 예수님의 옷단 술에 손을 대는 행위야말로 질병에서 나음 받는 가장 확실한 투자와 모험이 아니었겠는가!

하지만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오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애가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자신을 부정한 자로 보는 뭇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율법은 여인이 생리 기간 동안 쏟아내는 피를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고 있다.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의 몸에 그의 유출이 피이면 이레 동안 불결하니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레 15:19)

 

혈루증 여인과 같이 정상적인 생리 기간이 아닌데도 피의 유출이 있으면 유출기간 내내 부정하게 인식되었다. 결국 여인은 혈루증이 완치되기까지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 격리된 상태로 살아야 했다.

 

만일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의 불결기가 아닌데도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그의 불결기를 지나도 계속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모든 날 동안은 그 불견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레 15:25)

 

둘째, 자신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잇다는 죄의식이었다. 피의 유출이 있는 여인은 자신과 닿는 물건과 사람을 모두 부정하게 만들었다.

 

그의 유출이 있는 모든 날 동안에 그가 눕는 침상은 그에게 불결한 때의 침상과 같고 그가 앉는 모든 자리도 부정함이 불결한 때의 부정과 같으니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다 부정한즉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레 15:26~27)

 

혈루증 여인이 무리에 둘러싸인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기 위해서는 먼저 무리를 뚫고 나와야 했고,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부정하게 해야 했다. 간신히 무리를 밀치고 몰래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온전하신 예수님도 여인 때문에 부정해질 수 있었다. 여인은 이런 장애물들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고 나아왔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고 놀랍게도 자신의 혈루의 근원이 마른 것을 체험했다. 순간 환호성을 지를 뻔 하다 자신의 입을 간신히 틀어막고 조용히 몰래 현장을 빠져나가려던 여인은예기치 않은 상황에 봉착했다. 무리에 둘러싸여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침을 당하시던 예수님이 여인의 행동을 눈치 챈 것이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막 5:30)

 

여인이 계획했던‘치고 빠지기’(hit and run)전략은 난관에 부딪쳤다. 여인은 결국 무리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부정한 여인이라는 수치심과 많은 사람을 부정하게 했다는 죄의식을 가지고 군중 앞에 노출되어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여인이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군중의 눈길이 예수님의 입에 쏠렸다. 예수님은 과연 여인을 어떻게 벌할 것인가? 여인은 허락도 없이 함부로 옷단 술을 만짐으로써 예수님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1세기 당시의 랍비 문헌은 남의 옷단 술을 함부로 만질 경우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옷단 술을 만지고도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옷단 술 소유자의 자녀들이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옷단 술을 만져도 아무런 법적인 저촉을 받지 않았다. 마치 경륜과 지혜의 상징인 할아버지의 수염을 지나가는 행인이 함부로 만지면 모욕이 되지만, 손주들이 만지면 용납되는 것과 같았다. 군중의 관심이 예수님께 쏠려 있을 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놀라운 선포를 하셨다. 예수님이 여인을‘딸’이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막 5:34)

 

예수님이 군중 앞에서 여인을 자신의‘딸’로 선포한 순간, 여인은 더 이상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옷단 술의 주인인 예수님이 여인을 자신의 딸로 선포함으로써 처벌의 대상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인의 혈루증을 치료한 데서 만족하지 않고, 여인의 마음 가운데 있는 수치심과 죄의식까지 씻어 주기를 원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