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카이로스, 수직적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로마서 강해 중에서)

은바리라이프 2014. 6. 9. 22:50


일찍이 헬라 사람들은요 시간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나누어서 구분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에도요 시간이 그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구분이 되어 등장이 됩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 크로노스는 가만히 있어도 그냥 흘러가는 그냥 자연적인 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을 말해요. 즉, 달력의 시간, 객관적인 시간, 그냥 흘러가는 시간. 연대기적 시간 수평적 시간. 그것을 크로노스라 그러죠? 그 시간은 천문학적으로 해가 뜨고 지면서 결정되는 시간이고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결정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낮과 밤을 알려주며 봄여름 가을 겨울을 알려주고 우리의 육체를 늙게 하고 죽게 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늙는 거지 시간이 그렇게 만드는 건 아니거든요.

 

반면에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 들어있는 사람에게 포착되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이에요. 그에 의해서 해석되는 시간. 바꾸어 말해서 그 카이로스는 영원한 시간. 정말 그 실존적 시간, 진짜 시간. 수직적 시간이라 할 수 있어요. 현재만 있는 수직적 시간. 보편적 인간 일반이 육신으로 감지하는 그 시간이라는 거, 크로노스의 그 시간이라는 건 비록 흘러가는 거지만 그 시간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때 그 의미 있는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부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에 의해 하나님과의 그 접촉점이 생성되는 고 시점의 그 실존 있죠? 그들에게서 인식될 수 있는 그 의미 있는 시간. 아, 이게 그건 거야? 라고 깨달을 때 고 시간, 고걸 카이로스라고 해요.

사실은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이렇게 흘러가는 거가 아니에요. 시간이라는 건 사실은 그 묵시에서 우리 쪽으로 더 미래에서, 굳이 말하자면 Eschatology가 종말이죠? 그 완성되어 있는 묵시, 거기에서부터 이게 뭔 줄 알아? 라고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막 쏟아져 내려오는데 그걸 우리가 몸으로 이 크로스의 시간, 이 역사 속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가면서 우리는 그걸 시간이라고 그렇게 감지하는 것일 뿐이에요.

 

그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라는 영화에서 보면 시계가 여기에 있고 돌아가는데 물이 시계 반대쪽에서 흘러 내려오면서 시계를 치고 거꾸로 흘러가는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시간은 그런 거란 말에요. 과거에서 미래로 이렇게 흘러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거는 이 역사의 주도권이 있는 듯한 느낌이 오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역사에 의해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이미 묵시에서 완성 되어 있는 그것이 우리에게 부딪치는 걸 시간이라고 그래요. 그걸 카이로스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반드시 이 시간, 모든 인간 보편이 살고 있는, 감지하는 이 시간 속에서,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그 진정한 의미, 아, 이게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떤 내용인가를 감지하는 그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그냥 크로노스의 이 시간만 살아가게 되면 그들이 바로 세상 풍조에 묶인 자들이 되는 거예요. 아래의 땅에 묶인 자가 되는 거예요. 아래 사람이에요. 그거는 요. 그러나 이 크로노스의 아래의 삶을 살지만 그 속에서 그 위의 어떤 것을 감지해내고 아, 그거요? 하는 그 사람들이 땅의 크로노스를 살면서 그 카이로스를 사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시간이 둘로 이렇게 나누어져서 등장한다는 말이죠.

 

자, 그렇게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면서 그 시간에 종속되고 지배당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서 자신에게 주어진 그 크로노스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만나게 되는 그 사건들을 재해석해서 살게 되면 거기에 그냥 맞아서 절망하고 실망하고 잠시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재해석해서 살게 되면, 그 시간을 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때가 차매, 때가 이르매 할 때 ‘그 때’는 전부 카이로스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그걸 의미할 때 카이로스. 때가 차매, 때가 이르매 이렇게 성경이 쓰잖아요? 그게 전부 카이로스 란 말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단 말에요. 역사 속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지만 그것이 진짜 사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능력이며 영광이다, 라는 내용을 갖고 있으니까 그걸 ‘때’ 라고 한단 말이에요. 시간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카이로스 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게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 크로노스 속에 그 과거나 미래에 눈을 돌리지 않아요. 모든 이들이 크로노스를 살면서 과거나 미래에 묶여 살거든요. 과거를 두려워하고 그 과거의 일 때문에 상처받고 그걸 아직 까지도 내가 상처로 갖고 있고 미래의 어떤 것들이 불안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고 이렇게 산단 말에요. 사람들이요.

 

역사에도 두 가지가 있어요.

조사나 탐구, Survey,나 Research에 의해서 그냥 이렇게 파악되고 나열된 순수역사가 있고요 해석이나 뜻으로 본 풀이의 역사가 있죠. 단순히 시간 속의 사건들을 조사나 탐구에 의해서 나열해 놓으면 그게 순수역사라고 하는 거고, 그 사건들에 의해 이루어진 내용을 중심으로 그 시간들을 다시 풀어놓으면 그것이 풀이의 역사에요. 그 전자의 순수역사를 독일어로 Historya 라 그러고 그 후자의 풀이역사를 게쉬테(Geschichte) 라고 합니다. 그것을 개인적 차원으로 끌어내려 보자고요. 한 인간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살고 경험하고 부딪치고 느낀 이 모든 사건들을 나타난 모양대로 그냥 나열을 하면 그건 전기가 되죠. 그러나 그 시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나를 이끄신 하나님의 손길을 포착한 이들이 아, 그건 그런 의미였지. 내 인생에서 그거는 이런 의미를 가졌던 거였지? 라고 이렇게 그 하나님의 손길을 중심으로 다시 그 시간이 가진 의미를 이렇게 풀어놓으면 그걸 간증이라고 하는 거예요.

 

간증이란 말은 사실 좋은 말은 아니지만 굳이 나누자면 그렇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죽도록 고생을 했던 시간들이 아,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로 이렇게 끌고 오려고 했던 그 시간들이었구나! 라고 생각되면 그 고생되었던 순간들이, 시간들이 나에게 가치 있는 시간들이 되겠죠? 그 때 나는 크로노스를 고통스럽게 살았지만 실지로는 카이로스의 그 가치로 산거란 말입니다. 똑같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데 어떤 이들은 그 시간을 카이로스로 살게 되는 거예요. 크로노스가 카이로스로 이해되어지면 그 어떤 순간도 가치 없는 순간이 없어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시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선을 이루기 위한 가치 있는 것들이었구나, 라고 깨달으면 그때 그를 항상 기뻐한다고 해요. 그거였어? 그렇게 깨닫는다면. 어떻게 사람이 감정적으로 항상 기쁠 수 있어요? 오늘도 이렇게 울적해갖고 이렇게 표정도 없이들 앉아있는데. 그죠? 그런 얘기가 아니란 말에요. 카이로스 속에서 그건 기쁨이었지! 그게 환희였지! 그건 나에게 행복이네? 라고 알게 되면 그게 항상 기뻐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슬픔과 고통과 눈물과 아픔으로 가득 차있는 이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로스로 이해되어질 때 그 사람은 그 속에서 기쁨과 안식과 행복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웃다가 울다가, 울다가 웃다가 이렇게 변태 같은 삶을 사는,,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삶. 어떻게 저 상황에서 저 사람은 찬송을 하지? 이런 거. 감옥에서 저 바울과 실라는 뭐가 좋다고 찬양을 하고 있지? 이런 거. 카이로스를 사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