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아들의 출산을 위한 카이로스 속의 고난과 영광 (로마서 강해 중에서)

은바리라이프 2014. 6. 9. 22:49


이렇게 설명을 한 번 해볼게요. 어머니가 복중에 생명의 씨를 받아서 잉태를 하게 되죠? 그건 다 하나님의 자손 그 ‘제라’가 어떻게 아들로 탄생되는가를 설명해주기 위해 하나님이 모형으로 주신 거예요.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런 과정 거치지 않고 만들어서 뿌릴 수 있다니까요. 그런데 우리에게 굳이 그런 과정을 통과하게, 경험하게 시킨 건 우리에게 그걸 통하여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한 거란 말입니다. 여자는 복중에 생명의 씨를 남자로부터 선물 받는 거예요. 부여받는 거예요. 받아서 잉태를 합니다. 그리고는 열달 동안 그 생명의 씨에 의해 그 어머니의 인생이 장악되고 조종되게 되어 있어요.

 

열 이라는 것은 항상 십계명, 율법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아래의 호 코스모스의 세상은 열이에요. 열(10). 옛 성전, 율법, 아래 세상. 이건 다 같은 거란 말에요. 그 열, 그 열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씨를 받아 하나님의 그 진리의 말씀이 그 씨가, 그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 순간부터 그는 열의 삶을 사는 거예요. 내 복중에 생명의 씨를 가진 자로 사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열, 그 열을 그 씨에 의해 장악 당하고 조종당하며 살게 돼요.


어머니들이 그러죠. 어머니들이 임신하면 그 임신 전의 여자와 그 후의 여자가 다른 여자가 됩니다. 그 안에 씨가 조종하기 때문에 그래요. 장악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안에도 그 성령, 진리의 영이라는 그 씨가 들어가면 그 성령이 여러분을 어떻게? ‘아고’, 인도해간단 말에요. 끌고 간단 말에요. 생명의 씨를 받지 못했을 때, 여자로써 추구하던 모든 욕망과 애씀을 그 씨에게 빼앗겨요. 아니, 나는 안 빼앗기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어떻게 빼앗기게 돼요. 심지어 먹는 거 까지 조종당해요. 내가 좋아하는 거 따로 있어요. 그런데 내 씨가 먹으라고 하는 걸 먹게 돼요. 그게 입덧이에요. 


저희집사람, 결혼했을 때 임신 하자마자 통닭을 사달라고 그러면서, 고기라는 걸 아예 안 먹었던 사람이에요. 김치도 안 먹었어요. 닭고기? 전혀 안 먹었어요. 회, 야채, 비싼 거만 먹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통닭을 사달라고 해서 당연히 다 안 먹겠지 그러고 닭다리 두 짝을 제가 다 먹었어요. 그랬더니 20년 동안 그걸로 제가 바가지 긁히고 있어요. 그 때 돼지 같이 다리 두 개 다 먹었다고. 아니, 먹는 거 까지 바뀌어요. 그 안에 씨가 너는 이걸 먹어야 돼 라고 조종한다니까요.

 

생명의 씨를 잉태하지 못했을 때 여자가 좋아하던 그 먹거리는 그 여자를 살리는 양식이 되지 못한다, 라는 것을 그 복중의 씨가 알려주는 거예요. 상징이에요. 물론. 당신은 내가 먹으라는 걸 먹여야 산다, 라는 암묵적 강요에요. 씨의 강요. 생명의 씨의 강요. 그걸 입덧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당연히 여자는 힘들죠. 여자, 여자 그러니까 뭐 딴 사람들 생각할 거 없어요. 우리 얘기에요. 신랑인 그 하나님, 그 예수 그리스도 말고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비로소 존재가 될 수 있는 우리 얘기하는 거예요. 이 땅에 내려온 하나님의 신부 얘기. 그 여자는 힘들죠. 어렵죠? 고통스럽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니까. 


그런데 그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자기 몸을 가꾸고 자신의 건강을 위하며 자기 몸을 자랑하는 삶이 점차, 점차 지양 돼요. 지향 되는 게 아니라. 그 때만큼은 조금 살이 쪄도 용서가 되고 부스스한 채로 마켙을 가는 것도 스스로에게 용인이 돼요.

아니, 그 전에는 정말 허리가 1 센치 두꺼워지는 것도 스스로 용납이 안 돼. 그러니까 자기를 막 때려요. 꼬집기까지 하고. 그런데 임신을 하고 나면 여자들이 코끼리가 되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녀요. 왜? 내 안에 생명이 있거든요. 씨가 있거든. 이거 하나로요. 그 씨에 의해 조종당하는 거예요. 좋아하던 커피나 몸에 안 좋다는 음식들도 스스로 자제하게 돼요. 


자기 안에 잉태된 그 생명이 그런 것들보다 더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이 이 삶이 나타나게 돼 있어요. 그러나 원래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도록 태어난 선악과 입에 문 아담들이 그렇게 자가 자신의 욕망을 몰수당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게 고통이 아닐 수가 없죠.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임신하면 우울증 걸리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안의 생명이 그걸 하게 하는 거예요. 그 고통스러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내 복중의 생명이 인식되고 감지될 때마다 그 고통은 잠시 기쁨과 환희의 자리를 내주죠. 아, 그렇지. 내 안에서 내 아이가 내 배를 차네? 그 때 오, 내 몸이 코끼리가 되어도, 부스스한 모습으로 남편이 손가락질을 해도 그거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게 너무 좋은 거예요. 내 안에 생명이 있지? 그 생명이 내 안에서 이렇게 역동적으로 뛰어 놀고 있지? 이렇게. 내가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는 내 안에 소중한 생명이 있음을, 그것 때문임을 깨닫는 거예요. 카이로스죠.


그러나 자아라는 육신을 여전히 갖고 있는 그 어미는 이내 또 고통과 어려움 속으로 다시 빠져 들어요. 그러면 또 남편만 달달 볶아요. 그러면서 크로노스이 열이 채워지는 거예요. 그리고는 아이를 낳는 출산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크로노스의 열이 아들로 출산 되는 거예요. 열이, 이 아래의 세상이, 율법이 아들로 출산이 되기 위해서 열둘이 필요했죠? 그래서 열두 사도, 열두 지파가 있는 거죠.

 

그렇게 그들이 열둘, 아들이 되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말씀을 내 마음으로 받고 전하게 되죠? 그 때 그거를 칠이라 그래요. 그래서 그 다음에 일곱 집사가 뽑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곱 집사의 섬김은 그들이 뭐 구제와 긍휼의 어떤 삶을 담당한다고 하는 게 다 말씀을 전해서 구제하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날 존 칼빈이 정해놓은 집사 장로 이 서열은 성경적인 게 아니에요.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뿌리는 이들이 됐을 때 그들을 집사라 그래요. 사실은요. 그 디컨 (Deacon) 이라는 단어 자체가 섬긴다, 라는 뜻인데 성경에서의 섬김은 말씀을 전달해주는 섬김 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들을 건져내는 거 밖에 없다고요. 그러니까 그런 뭐 집사니, 장로니, 이런 명칭에서 그냥 자유로우세요.

 

아무튼 그렇게 열 달의 그 고통스러운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낸 그는 열둘의 아들을 어느 날 이제 출산을 하게 되죠. 그런데 출산을 할 때,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습니다. 그 열의 고통이 한 순간으로 모아지는 거예요. 그건 그들이 그 생명의 씨를 받고 열이라는 아래 세상을 사는 그것이 바로 이러한 죽음의 삶이다, 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렇게 죽었다가 사는 고통만큼 힘든 거다, 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왜? 우리의 육이 죽고 영으로 사는 시간이 바로 그 크로노스의 아래, 그 열의 시간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여자가 자기에게서 나온 그 아들을 보는 순간 열 달 동안의 고통과 불편함과 우울함과 아픔 이런 게 싹 사라지죠. 한 순간에. 여자가 애를 낳을 때 온 몸의 뼈가 다 해체되는 거 같다 그래요. 그만큼 아프다는 거죠. 그냥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예요. 한 마디로. 그래서 다시는 내가 애를 갖나 봐라, 그러는데 아들이 나오는 순간, 아들이라고 하니까 딸들이 서운해 할 텐데, 씨가 내 안에 들어와 생명으로 출산이 되면 성경이 그걸 그냥 아들이라 그래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문득문득 경험했던 그 카이로스의 시간, 아 내 안에 생명이 있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힘든 거지! 이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거지! 그래서 가치가 있는 거지! 라고 했던 고런 문득문득 겪었던 그런 카이로스의 그 시간이 아, 바로 이거구나! 라고 완결이 되는 거예요. 아들을 낳게 되면. 결론이에요. 그게. 그러면 그 여자는 그 해산의 순간을 시점으로 해서 영원한 카이로스의 그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영원이라 그래요. 거기에서의 삶을 영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는 그 크로노스의 시간과 상관없는 자로 살게 되는 거죠. 그게 그 묵시의 완성된 현실인 거예요. 이미 여러분이 살고 계신 그곳.

 

그 크로노스의 열 달이라는 시간이 사실은 이 카이로스의 기쁨을 그 시간 속에서 나타내준 모형의 시간들임을 알게 되는 거죠. 열 달 동안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렵게 그 시간을 보내잖아요. 그러나 그 시간은 바로 이 카이로스의 이 완결, 이 기쁨, 이 환희, 이 행복을 위한 시간이었다, 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크로노스의 시간은 바로 이 카이로스의 이 시간을 역사 속에서 나타내어 보여주는 시간이다, 라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열 달 동안에 그 크로노스의 시간은 출산이라는 그 카이로스의 완성을 위한 거예요. 그런데 완전한 출산이 되기 이전에도 인간 안에 그 생명, 그것이, 그 역동성이 감지가 된단 말입니다. 고 때 마다 그 어미는, 그 여자는 카이로스의 감동을 맛보게 되는 거예요. 그걸 현실천국 이라고 그래요. 성경에 보면 천국이 왔다, 그러잖아요?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나중에 착한 일 많이 해서 가는 거 아닙니다. 성경은 단 한군데도 그렇게 얘기한 적이 없어요. 그 나라가 온다고 그래요. 우리한테. 심지어 왔다 그래요. 어디 있어요? 여러분이 그 카이로스의 그 시간을 살게 될 때가 그게 천국인 거예요. 지속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그러나 그게 완료가 되면 아들을 확 낳아버리면 그 때 여러분은 바로 그 나라를 살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그 현실천국과 연결이 되지 못하면 그 진짜 천국은 절대 못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천국을 살아야 된다, 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냥 행복하기만 하고 편안하기만 하고 기쁘기만 하고 이런 삶을 살라는 게 아니에요. ‘천국을 살라’ 는 건. 아, 이게 그거지! 라고 하는 고 순간, 이게 카이로스란 말에요. 그게 ‘천국을 사는’ 거란 말에요.

 

이렇게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요 과정을 자신의 인생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하여 경험하며 살게 돼요. 그러다가 이 크로노스 속에서 호흡을 이제 완전히 뺏기는데 영원한 카이로스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거예요. 요건 진리와 비 진리의 얘기예요. 율법과 은혜의 얘기라니까요. 사람이 이 땅에서 죽는 게 호흡을 뺏기는 거죠? 그래서 성경에 보면 생명은 코끝에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이 호흡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들어가면 이게 바로 말이라는 뜻이에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진공 속에서 소리가 전달이 됩니까? 공기, 호흡이 없으면 소리라는 것은 없어요. 실지로 실험을 해봐도 그래요. 자명종 소리를 딱 올려놓고 시계를 그릇 안에 딱 넣어버려요.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공기를 쭉 빨아내서 진공을 만들어 놓으면 소리가 없어요. 안 들려요.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진리와 비 진리의 이야기인 거예요.


율법 안에 태어나는, 이 아래, 크로노스의 시간 안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전부 비 진리, 율법으로 살게 돼요. 그 말을 갖고 있어요. 안에. 그러나 나중에 그걸, 그 호흡을 뺏기고 푸뉴마, 진짜 호흡, 진리의 말을 받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따라서 이 크로노스의 세상 속에서 카이로스의 삶을 살게 되어 있는 성도라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희열을, 아픔 속에서 희망을, 눈물 속에서 미소를 경험하는 그런 아주 변태 같은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게 복음을 아는 이들의 삶 속에서만 나오는 크로노스 속의 카이로스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인 18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8 : 18-

생각 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 고난 받는 거 그거 나중에 그 영광을 위해서니까 꾹 참어! 이런 말이 아니에요. 여기서 현재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카이로스예요. 원문을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다시 번역해 드리면

카이로스 속에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이라는 건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이야” 이런 말이에요. 장차, 라는 말, 이런 말 없어요. 현재형이에요. 이거는. 다시 한 번, “ 하나님은 우리 안에 씨를 심으셔서 우리를 아들이라 불러주세요. 그래서 그들은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그래요. 그리고 그 안에 들어온 그 하나님의 영, 그 영, 그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여 언약의 십자가로 끌고 간다, 그래요. 


당연히 그 언약의 십자가로 끌고 가는 길은 쉽지 않겠죠? 그죠? 그러니까 그것이 우리에겐 고난으로 감지가 된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 씨를 받은 이들은, 그 진리를 안 이들은 이미 크로노스 속에서 그 카이로스를 살게 되는 것이므로 그들이 카이로스를 살고 있는 그들이 당하는 이 크로노스 속에서의 그 고난은 사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거예요. 감지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인식될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아시죠? 여러분의 그 인생 속에서 나타나는 고민과 고통과 고난과 절망이나 이런 것들이 그냥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우리에게 허락했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게 카이로스 속에서 사는 이들의 고난이라는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이 그냥 현재의 고난이라고 이렇게 이야기 한 거죠. 그래놓고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 한다니까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 뭐예요? ‘독사’가? 하나님의 뜻. 그 초월 속에 계신 그분의 뜻과 그분의 마음이 보이는 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 현상이나 사건 등으로 이렇게 나타나는 걸 ‘독사’라 그래요. 영광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분의 뜻이 뭡니까? 그분의 뜻이 뭐예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만날 기도하잖아요? 뜻이 뭡니까?

육을 입은 당신의 백성들이 그 육을, 언약의 기둥, 스타오로스, 십자가에서 몰수당하고 삭제당하고 영으로 사는 거. 하나님의 영이 진짜 내 생명이지! 깨닫고 그 영으로 사는 게 하나님의 뜻이잖아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반드시 십자가로 그 언약의 기둥으로 끌고 가겠네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그 언약, 그 뜻이 우리를 그 십자가로 끌고 가는 게 그게 나타나는 게 우리의 삶 속에서 뭐로 나타나겠어요? 고난으로 나타나죠. 그런데 그 뜻이 나타나는 게 영광이라며 요?

그러니까 카이로스 속의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이야! 맞는 소리죠?

그게 진리라니까요. 그게 오늘 본문 18절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분명 우리는 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생명을 잉태한 자의 불편함과 고단함과 고통스러움을 겪을 거예요. 그건 우리 주님이 약속하고 간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거,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거는 분명해! 라고 약속한 게 뭐냐 하면 고난이에요. 하나님이 약속한 거란 말에요. 그러나 그건 우리를 언약의 기둥, 즉 십자가로 ‘아고’ 이끌어서 우리의 육을 죽이고 영의 아들로 완성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잖아요. 그걸 깨닫는 이들에게 있어 그건 영광으로 감지될 수 있다, 라는 거예요.

 

그렇지. 이렇게 나타나야지. 내 삶속에 이런게 없어서는 안 되지. 나타나야지. 이렇게.

이렇게 아들을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 계명 아래의 것, 세상, 이게 열이에요. 이게 율법이니까. 아래 것이. 그죠? 그 열이라는 과정, 크로노스의 그 과정을 통과해서, 해산의 고통으로 통과해서 아들을 낳아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을 아들로 낳게 돼요. 여러분을 아들로 낳게 되면 그가 정말, 그 예수가 진짜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이었네! 라고 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또 낳는 거예요. 조금 있으면 이해가 가실 거예요. 


그건 필연적 과정이고 필수적인 통과의례인 거예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있어야 돼요. 그 해산의 고통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라니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아들로 만들겠다, 라고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을 창조하시면서부터 말씀해 놓으셨다니까요. 그래서 그 과정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이 상속자인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 라고 못을 박아버려요. 본문 16절 보세요.

 


롬 8 : 16 -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 영으로 더불어, 는 우리 영과 함께, 가 아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이 되어, 이런 말이에요. 모든 인간이 영이 있다? 천만의 말씀. 헬라 사람들이 그들의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거지. 영이라는 건 성령이 분명히 말이요, 생명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 생명이 없고, 그 말, 그 진리가 없는 이는 영이 없는 거예요. 그걸 그냥 나쁜 영이라고 푸뉴마 다이모니온, 악령이라 그래요 그걸. 영이 없는 거예요. 그건요. 그걸 귀신이라고도 불러요. 그러나 그건 영이 없는 거예요. 우리 안에 그 진리, 그 생명이 들어오게 되면 그걸 영이 있는 사람, 혹은 영에 속한 사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예, 그 성령, 그 성령이 우리의 영이 되어)

-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걸 증거 (한대요. 증거하면, 그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어떤 현상이 나로부터 이제 나타나게 된다는 건데 그게 영광이잖아요. 증거가 되는데 어떤 식으로 증거가 되느냐 하면)

17- 자녀이면 (아들이면) 또한 후사

(상속자란 뜻이죠?) 곧 하나님의 상속자다 (무얼 받아요? 생명을 받는 거예요. 생명의 씨를 받는 자 그들이 아들이다, 자녀다. 그래요) -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에요, 공동 상속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들이신데 이 땅에 오셔서 그 몸이 언약의 기둥에서 발기발기 찢겨지고 영으로 사셨단 말이에요. 그걸 부활이라 그래요. 그죠? 그런데 그분과 우리가 공동상속자래요. 그럼 똑같은 길을 가겠네요? 공동상속자니)

-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거는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을 필시 받아야 돼, 이런 말이 아니라 너희들이 그 영광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고난으로 나타난다, 라는 거예요. 함께 나타난다. 이런 말. 영광과 고난이 함께 나타나네?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그러나 그걸 크로노스 적으로 그냥 이해하고 끝나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걸 반드시 카이로스로 이해해야 너희는 그 크로노스 속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다, 라는 거예요. 감정적으로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그래, 이게 맞는 거지. 이게 올바른 길이지. 이렇게 깨달으면서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