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 강해 중에서

은바리라이프 2014. 5. 24. 12:33

성경에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거는 뭐라 그래요? 사랑이라 그럽니다. 믿음이라는 거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믿음의 대상은, 내용은 보이는 게 되면 안 되는 거네요? 그런데 성경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은 믿음이다, 그래요. 하나님은 미쁘시다가 ‘호 떼오스’, ‘호 피스또스’ 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믿음이네요. 그러니까 믿음의 내용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은 안 보이니까. 믿음의 내용이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여러분이 무엇을 믿는다, 내 안에 믿음이 있다, 라고 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그 어떤 것 들 속에서 그 하나님을 알았다는 뜻이에요. 내 안에 믿음이 있다, 라는 말은.

 

그러면 소망은 뭐겠어요? 소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마음으로 바라고 바라는 어떤 것, 알지 못하는 어떤 추상적인, 형이상학 적인 어떤 것이 아니에요. 소망은. 성경에 나오는 소망은 이 역사 속에 던져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이라는 것을 그 마음으로 갖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동원한 눈에 보이는 것을 성경이 소망이라 그래요.

 

다시 한 번,

소망이라는 건 아직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내가 바라는 어떤 것! 그런 추상적인 감정이나 기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갖게 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동원한 어떤 것을 소망이라 그래요. 제가 나중에 창세기에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해드릴 건데 그러니까 여러분 창세기 책하고 요한계시록 책은 반드시 한 다섯 번씩 읽으세요. 그리고 그런 거 읽지도 않고 쓸데없는 질문 좀 하지 말아요.

그거 옛날에 500번도 더 한 거를 만날 질문이 올라오는 게 전부 그거야. 공부를 하고 질문을 하시라니까.

 

소망이 그거예요. 창세기에 보면 소망이란 단어가 첫 번째 거기서 나오는데 거기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온다니까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소망이 그 소망이 맞니?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울은 창세기를 명확히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 소망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모형이잖아.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소망이 진짜 소망이지 그 보이는 것을 너희들이 그대로 받아들여버리면 그건 소망 아니라니까, 하고 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롬 8 : 24 절 보세요.

 

롬 8 : 24-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세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대요. 소망은 저 미래에 있는 어떤 거라면서요? 아니잖아요. 여기 보니까. 소망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대요. 뭐? 성경, 예수, 성전. 이런 게 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동원한 눈에 보이는 나타난 것이잖아요. 십자가, 마찬가지죠?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 얻었어요. 맞아요. 그게 뭔지를 알았으니까. 보이는 소망, 나타난 그것 자체가 소망이 아니잖아. 예수가 소망이 아니고 십자가가 소망 아니잖아. 그 안에 담겨 있던 그 진리가 소망이잖아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자, 보세요. 그걸 소망이라 그래요. 그러면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호 피스토스’를 내 안에 이제 믿음으로 갖기 위해 하나님이 동원한 어떤 것으로 우리는 공부를 하고 배워야 돼요. 예수 성경 십자가 성전, 세상, 인간 이런 것들. 자 믿음을 갖기 위해 우리는 보이는 소망이라는 것으로 공부를 하는데, 배우는데 그것에서 아, 이거! 라고 알게 됐어요. 그래! 그거구나, 이 눈에 보이는 그 소망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소망이구나. 라고 알게 되면 그걸 믿음이라 그러고 그걸 하나님에게 이게 그거죠? 라고 고백하고 다른 이들에게 흘리면 그걸 사랑이라고 해요.

이 정의들을 똑바로 알고 계시라고요. 아무데나 가서 믿음 소망 사랑 이런 얘기 하지 마시고. 그걸 사랑이라고 해요. 성경이.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은 이 천지가 있을 동안에 영원히 있어야 돼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완료되면 믿음 소망은 없어지죠? 사랑만 남는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건 그 믿음과 소망으로 이 사랑이 되라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다 같은 거잖아요.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고전 13 : 13-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거? 바로 이러한 관점으로 죄의 모양으로 오셨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실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그 모양대로만 인식하고 그분이 이 세상 속에서 일으키신 기적이나 표적, 십자가, 부활 이런 걸 나타난 현상 인식 수준의 내 밖의 것으로 인식해버리면,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그건 내거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와 무관하게 내 밖에서 행하신 어떤 것이라고 여겨요. 그리고 그걸 믿는다, 그래요. 자기가. 그걸 자기가 믿는다고 그래요. 그러면 그건 내 밖에 있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ㅣ. 진리는 그 여러분 밖에서 대상이 되면 여러분을 못 살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 십자가 그리고 그분이 하신 일, 그분이 일으키신 표적, 기적 이 모든 것들을 그냥 현상 인식 수준으로 보게 되면 그것으로 죄를 짓는다고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거예요. 죽은 자를 살리고, 풍랑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고 문둥병자를 낫게 하고, 하면서 너희들 나가서 절대 이야기하지 마. 절대 이야기하지 마. 왜?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도 그런 거 아닌가요? 죽은 자가 살기 위해, 구원 받기 위해, 병 낫기 위해, 부자 되기 위해 교회 오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들 그 따위를, 그 따위 인식을 복음이라고 누구에게 가서 함부로 얘기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절대 얘기하지 마. 그건 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내용이 있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그냥 눈으로 봐버리면 그리고 그걸 와, 하고 놀래버리면. 하나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대. 그 피가 우리를 대속했대. 이렇게 그냥 놀라버리는 수준에서 끝내버리면, 그리고 그걸 믿는다고 그래요. 또.

 

하나님은 그래요. 얘기하지 마, 얘기하지 마. 죽은 자가 살아나고, 풍랑이 잠잠 해지고, 문둥병자가 일어나는 건 다 진리를, 복음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야.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야. 너희들의 그 원래 자리, 처음 자리, 그리고 너희들의 실체 그거 보여주는 거야. 그리고 그걸 비로소 존재로 완성할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능력밖에 없어! 를 보여주는 건데, 그래서 너희들 안에 네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마음으로 갖게 하기 위한, 그리고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그 능력의 실체인 사랑이라는 게 뭔지를 가르쳐주기 위한 그런 거였는데 너희들이 그것까지 모르고 그냥 나타난 것으로 나를 소개하면 그게 죄야.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케 하고도 얘기하지 마, 그랬어요.

 

예수님이 그랬죠? 요나의 표적, 내가 보일 건 요나의 표적밖에 없어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왜 배에서 잤겠어요? 요나가 잤으니까. 똑같이 주무시는 거예요. 졸려서 잔 게 아니라.

이게 요나의 표적이야, 라고 가르쳐주기 위해 요나처럼 배에서 주무신 거라니까요. 깨웠습니다. ‘너희들이 믿음이 없어’ 라고 했어요. 믿음이 없으면 세상은, 풍랑은 늘 바다는 너희들을 덮치게 되어있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래놓고 이 풍랑을 잠잠케 할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어. 라고 하시고 ‘말’을 하시는 거예요. 풍랑아 잠잠해라. 바다야 잠잠해라! 그 진리의 말씀이 된 이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그들을 더 이상 범접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태풍은 항상 어디서 일어나요? 바다에서 일어나요.

 

왜 성경이 이 세상을 저주의 바다라고 할까요? 그리고 왜 구원이라는 것을 낚시라고 그래요? 왜?

사람을 낚는다고 그러죠? 바다에서 뽑아낸다는 뜻이에요. 바다에 사는 존재를 뽑아낸다, 라는 건 죽여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거. 아니, 고기들이 '아 이 바다가 너무 지루해' 라고 해변에 나와서 일광욕 하면 굴비 되는 거예요. 바로. 죽음이라니까요. 그거. 그런데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그 저주의 바다를 딛고 서는 건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으로 오신 그분이 그걸 딛고 서시는 거예요. 그리고 심지어 바다를 밟고 오셨다, 걸어 오셨다, 라고 할 때 쓰인 그 단어는 바다를 짓밟다 는 단어에요. 진리는 그 저주의 바다를 짓밟아버리는 힘이 있다니까요.

 

그렇게 여러분이 그냥 성경, 예수, 십자가 이런 걸 그냥 표피적으로만 봐버리게 되면 그것이 여러분을 죽이는 사단, 뱀이 되는 거예요. 뱀의 말, 그러나 그 죄의 모양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리로 읽어내어서 내 마음으로 받게 되면 그에게 있어서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 그건 살리는 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죄의 모양으로 왔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 모양을 그냥 봐버리면 예수가 죄란 뜻이에요. 성경을 있는 모양 그대로 봐버리면 성경이 죄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을 죽이는 책이 된다고 한다니까요. 그리고 그걸 그 말씀을, 그 살려주는 영을 내 안에 갖게 되면 내가 또 그걸 흘릴 수 있잖아요. 그럼 내가 살려주는 영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돼요.

 

오늘 본문의 얘기가 그거예요.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산다는 얘기가 그 이야기라니까요. 그러나 쉬운 얘기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설명해볼게요.

이 세상 모든 만물과 그 만물이 존재하는 원리가 과학이라는 것에 의해서 밝혀지고 정리가 되어져 가고 있죠? 지금. 우린 그걸 그냥 Fact로 인식하고 동의해버려요. 아, 그거? 자연은 이런 거야? 원리라는 건 이런 거야? 이렇게. 그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과 신성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죠? 그러한 이 세상을 축약해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게 뭐예요? 그 호 코스모스를 뭐라고 그런다고 했어요, 성경이? 헬라 사람들이? 성전이라고 읽는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이 세상을 그대로 이렇게 축약해 놓은 게 성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가 성전으로 오셨다 그러네요? 그리고는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이 성경이 예수인 나에 대해서 기록했다 그래요? 그러면 세상, 성전, 성경, 예수는 다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네요? 그리고 똑같은 껍데기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죠?  

 

여러분이 이 세상을 그대로 인식을 하고 이 세상의 희로애락, 그러한 현상과 환경과 사건에 그냥 묶여버리면 여러분은 그냥 세상의 종으로 사는 거예요. 세상풍속을 좇는 자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냥 그 자체가 멸망이란 말에요.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성경을 그렇게 세상을 표피로 보듯 그냥 성경을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상식으로, 표피로 보아서 그걸 그냥 행해버리면 그것이 여러분이 세상에 묶이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예수와 십자가를 진리로 보아내지 못하고 그냥 그걸 무조건 믿음의 대상으로 갖고 가버리면 여러분이 거기에 묶이는 거란 말에요. 그것은 여러분에게 걸림돌이 된단 말입니다. 그게 죄의 모양이라니까요. 그럼 죄의 모양은 뭐예요? 그 모양 안에 그걸 모르면 그 모양에 갇혀서 거기에 연합되어 그 죄가 된다는 그런 뜻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된다. 그랬죠? 그 말은 예수의 십자가가 자기 십자가, 십자가는 하나 밖에 없어요. 우리가 그 십자가에 매달려야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예수의 십자가가 자기의 죽음으로, 아, 예수님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절대로 산 존재일 수가 없는 거구나, 하고 거기서 그 십자가로, 그 다나토스의 그 십자가의 죽음, 예수의 죽음이잖아요. 그 죽음으로 내가 그 다나토스로 갖게 됐을 때, 그걸 생명이라 그래요. 그게 내 십자가라니까요. 그게 자기 십자가란 말입니다. 반드시 나에게 있어서 그 자각과 그 인식과 그 경험이 있어야 돼요. 상관없이 무슨 십자가 보혈, 이야기는 다 하는데 "막 네 맘대로 막 살아, 괜찮아! 그게 다 한 거야' 이거는 아니라니까요.

 

예수님께서 나를 쫓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야 된다고 말씀하신 건 그렇게 내 십자가가 자기 십자가가 되지 않으면 너희들이 말하는 십자가는 그냥 예수인 ‘내 십자가야’. 그런데 그게 네 십자가가 아니잖아. 넌 죽는 거야. 이런 뜻이에요.

 

그 십자가를 예수의 십자가로만 갖고 있으면 넌 죽는 거야. 이런 뜻이요. 넌 나 쫓는 거 아니야. 그게 자기 부인이라니까요. 아, 나는 그렇게 내 존재를 주장할 수 없는 자구나, 가,  자기 부인이에요. 그걸 아는 게. 허벅지를 찔러가며 부인해야 돼, 부인해야 돼. 이게 아니라. 부인 돼요? 그게 자기주장이지 자기 부인입니까? 그래서 보이는 세상의 대표, 옛 성전의 대표로 죄의 모양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언약의 기둥 위에서 육을 삭제 당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성전이라면서요? 예수님이 성경이라며 요? 예수님이 율법이라면서요? 그럼 이건 껍질이잖아요? 모형이잖아요. 그럼 내용이 진짜야 라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는 이 모형은 사라져야 되네요? 당연히 그러니까 예수가 죽어야죠. 아, 내가 살아있었으면, 그때 당시에 내가 살아있었으면 예수를 안 죽이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고놈을 마귀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반드시 죽어야 된다니까요. 아니, 안 죽으면 내가 끌고 가서 죽여야 되는 게 예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 사건은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과 성경과 예수는 절대 껍데기로, 표피적으로 문자적으로만 안 된다는 강력한 웅변이 십자가였던 거예요. 언약의 기둥위에서 이 육은 삭제되었다. 봐! 라고 죽여 버린 거예요. 거기서. 거기서 율법이 죽고, 성전이 죽고 예수가 죽었어요. 성경이 죽었다니까요. 우리 눈에 보이는, 인간이 눈으로 보는 그 포피적인 성경, 그게 율법이잖아요. 그게 죽었단 말에요. 거기서. 그래서 이 세상과 인간과 성경의 대표로 오신 주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도륙당한 거예요. 성전도 그 이야기이고 성경도 그 이야기이고 예수도 그 이야기 하는 거고 이 세상도 그 이야기에요. 이거 현상계에 나타난 거? 이거 헛 거야. 다 진공이야 사실은. 꾹 눌러보면 은 하나님의 법칙, 말만, 전기력의 법칙만 없어지면 원자는 다 그냥 진공이야. 허공이야, 이거 없는 거야. 이거 알고 가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여기에 묶이지 마,  그런데 그 ‘여기에’는 나도 들어가 있다고요. 이 뭄뚱아리도. 그러니까 이게 진짜 아니라고요. 이게 진리 아니라니까요. 이거. 그 내 안에 있는 그 말, 그 말씀, 그 복음, 그 하나님, 그 사랑 그게 내 생명이란 말이에요. 진짜 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