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 강해 중에서

은바리라이프 2014. 5. 24. 12:32

로마서 강해 중에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과 당신 백성들을 우리로 묶어버리죠. 구약성경에 보면 자주 나와요. 신약성경에서는 사도들이 또 우리라는 말을 잘 쓰죠. 그죠? 고전 중에 마틴 부버의 나와 너라는 책이 있는데 뭐 읽으라고 말씀드리는 거 아니에요. 쓰레기 같은 책이에요. 예전에는 제가 그 나와 너를 그것에 근거하여 정의를 해봤었는데 그거는 다분히 인위적인 정의에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라는 거는요, 문자에서 보면 히브리사람들의 개념에서 보면 우리라는 개념은 나와 너, 우리가 아니에요. ‘나 들’이에요. 다 나, 나, 나, 나가 모이면 그걸 우리라고 그래요. 나의 복수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이렇게 함몰되어 들어와서 아, 하나님 나 아니네요. 하나님이 나를 살려야 나는 비로소, 그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산 존재되는 거네요, 라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그렇게 함몰되어 들어와 그것과 연합되면 그 고백이 나의 죽음이잖아요. 그죠?

보세요. 선악과를 따 먹고 인간은 항상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처럼 살아요. 그래서 피곤한 거예요. 내가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이거는 선한 거야, 악한 거야 늘 결정하고 선택해야 되기 때문에. 그게 지옥이라니까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상대편에서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탄핵을 해요. 아, 하나님 공평하기 못해요. 그렇게 일 하면 안 돼요. 내가 어떻게까지 정성을 들였는데 나한테 이렇게 대해? 이렇게 된다니까요. 인간이. 신앙을 가진다고 하면서도.

 

그러면 하나님 측면에서 나는 너예요. 그죠? 나와 너로 갈리는 거라니까요. 그게 아브라함의 이야기, 창세기 15장에서의 ‘케리투투’예요. 제물을 사이에 두고 인간과 하나님이 이혼증서를 가운데 두고 이렇게 ‘케리투투’, ‘카라트’로 갈라지는 거라고요. 분리에요. 그거는요. 그런데 그 상태에서 인간이, 아니네요, 하나님. 저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대척점에서 나의 수고와 노력이 그 제물이니까, 이 제물로 말미암아 이렇게 갈라지면 안 되는 거네요, 라고 내가 죽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내가 한쪽에서 바라보게 돼요. 사랑은 뭐, 마주보는 게 아니라 한쪽을 바라보는 거라며 요? 하여튼 그런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과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때에,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도 그러는 거예요. 병풍이 항상 열 폭이라고 그랬죠? 그 병풍 뒤는 항상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가려놓는, 그 병풍의 역할이 그거고, 그 뒤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항상 죽으면 그 뒤로 들어가는 거예요. 죽지 않고 들어가면 거기서 뭐, 싸우러 들어가거나 쥐어 터지러 들어가거나 그거지, 죽어야 그 비밀 속으로 들어가는 거라니까요. 그리고 열 폭은 뭐냐 하면 휘장이 열 폭이었어요. 그래서 병풍을 열 폭으로 만든 거거든요. 여러분이 죽지 않으면 그 하나님의 묵시,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편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그렇게 넘어가면 하나님과 내가 ‘나’가 돼요. 그 때 그걸 성경이 우리라고 한다니까요.

 

사도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해서 우리라는 개념을 써요. 그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애급으로 보내면서 ‘하나님, 내가, 누가 보냈느냐고 너, 물어보면, 너 누가 보냈어? 라고 물어보면 누가 보냈다고 얘기해야 돼요?’ 그랬을 때, 하나님이 준 단어가 뭐냐 하면 ‘나’예요. 영어로는 뭐 I am Who I am 이라고 써 놨지만 그 단어가 그냥 ‘나’라니까요. 그 당시의 문헌들을 다 뒤져 봐도 그 ‘나’라는 단어가 없어요. 그건 사람들이 쓰는 단어가 아니었어요. 그 제왕들의 비석 같은 걸 봐도 그냥 ‘이 사람’ 이라고 써요. ‘나’를. 그런데 그 때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라는 단어를 준 거예요. ‘나’.

그럼 모세가 가서 뭐라 그래요? ‘너 누가 보냈어?’ 그랬을 때, ‘나’, 그러면 사람들이 네가 너를 보냈냐? 그럴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거기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하면 내가 너에게 내 말을 주면 너는 그 즉시 네 육을 삭제 당하게 되고 네가 내 말이 되는 거야. 그게 ‘나’야. 네가 내 역할을 하는 거야. 이게 ‘나’라고요. ‘나’. 하나님 이름이 ‘나’라는 말이 아니라.

그 ‘나’.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이 말씀하시 그 ‘나’는 전부 그 ‘나’예요. 예수 ‘나’가 아니라.

 

따라서 우리는 예수와 십자가를 섬기는 수준에서 진일보해서 그 예수의 생애와 그 십자가의 죽음을 내 것으로 하여 살아야 되는 거예요. 아니, 절대 하나님의 백성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자기 십자가를 진 우리가 되는 거예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너로 존재하면서 그분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자리, 그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돼요. 그게 죽음이란 말입니다. 성도는 부요함 속에서도 이것이 진짜 부요가 아니구나, 하고 그 부요에 대해서도 죽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이런 가난함 속에서도 아버지의 사랑만 있으면 그게 진짜 풍요네! 라고 그 가난도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 가난에 대해서 내가 죽는 거고. 그것이.

그게 현상계를 벗어나는 거라니까요. 그걸 안식이라 그래요. 그걸 평안이라고 한다고요. 여러분의 환경이 변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예배당에 와서 그 환경얘기만 하고 있다니까, 하나님한테. 그걸 바꿔달라고. 거래도 하고.

 

그렇게 보이는 세상에 휘둘리면 그것이 육의 생각으로 사는 거고. 그것을 오늘 본문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라고 해요. 그 원수라는 단어, ‘에크드’라는 단어는 ‘에크드로스’의 여성 형이거든 요. 그러니까 같은 단어에요. 성만 다른데. 그 ‘에크드로스’라는 단어는 히브리 사람들이 사탄이란 단어하고 혼용하던 단어에요. 사탄이란 말이에요. 그게. 그거 사단이야. 그게 대적 자야. 육신의 생각? 육신?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현상계에 머무는 거? 그게 사단이야. 그래요. 그게 사단이야. 하나님의 대적 자야! 라고 하는 거예요. 대적 자면 뭐예요? ‘너’네요? 그게. 하나님의 반대편에 제물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거니까 그게 ‘너’잖아요. 그걸 사단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저기에다가 두고 열심히 나의 유익을 위해 섬기는 그들이 뭐예요? 그걸 사단이라 그래요. 그러면 우리의 육신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쵸? 반드시 버리고 가야 하는 거예요. 어떻게 버릴 수 있어요? 그게 본문 9절과 10절에 나오는 거예요. 답이 거기에 있어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 즉 하나님의 영이 있으면 너희의 몸은 죽은 거다, 그러잖아요. 너희의 몸은 죽은 거야. 그때부터 하나님은 그거 안 봐, 그러는 거죠? 그런데 그거를 빛나고 성숙하게 만드는 게 기독교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네 안에 진리, 내 말이 있으면 너희들의 몸은 이제 죽은 거야. 그런데 우리는 그 몸으로 뭔가를 자꾸 만들어 내자, 업적을 쌓자, 성취하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니까요. 하나님이 보는 건 영이래요. 하나님 거니까. 그것만. 난 내 것만 봐, 내 것만 찾아. 그것만 가치 있는 거니까. 그래서 내 것이 네 안에 있으면 그 몸은 이제 안 봐. 이게 몸이 죽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몸을 롤 모델 삼아, 그리고 어떤 이의 롤 모델이 되기 위해 열심을 부리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합니까?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건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건 그냥 당연히 하는 거라고 생각하시고 그것 말고 진짜 해야 할 걸 왜 그걸 강조 하느라 놓치느냐는 말이에요, 저는.

 

그러니까 세상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세상과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기록인 그 성경도 그렇고 그 성경의, 그 말씀의 화육으로 오신 예수님도 그렇고 모두 죽어야 하는 게 맞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죽은 거예요. 대표로. 그래야 세상 안에 담긴, 그 인간 안에 담긴, 물론 성도이지만 또 성경 안에 담긴 예수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그 아가페의 사랑 그 진리만이 남는 우리가 될 수 있단 말에요. 그걸 연합이라 그래요.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죽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사는 거. 거기에 참된 안식이 있고 참된 행복이 있고 참된 기쁨이 있는 거예요. 마치 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아비의 그 훈훈한 사랑에 의해서 그 멋진 인생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그 어떤 이들처럼. 나는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 나 하루에 달걀 하나만 먹어도 돼. 대신에 나 보육원에만 보내지 마. 그 애 에게 양식은 그 어미의 사랑이라니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거 배우는 거예요. 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온 천하라고 번역이 된 그 단어가 호 코스모스거든요. 온 세상, 뭐예요? 성전, 율법, 호 코스모스, 그래, 율법적으로 너희들이 완벽하게 됐다고 치자. 사람들이 평가할 때. 그리고 지 목숨을 잃으면 그게 뭔 유익이니? 그랬다고요. 하나님이.

 

온 천하가 그게 성전이란 단어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너희들이 완전히 마스터했다고 치자. 그리고 목숨을 잃으면 뭔 유익이냐?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나 고난 등을 그 나타난 현상으로만 보고 그것으로 절망해버리거나, 좌절해버리거나, 고통을 당해버리면 여러분은 힘들게 그 상황을 겪으면서 돼지는 거예요. 아니야, 안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거에 지지는 말라는 말이에요. 이 육신을 갖고 있고 통점이 살아있는 이 몸뚱아리를 내가 입고 있는데 어떻게 멀쩡하겠느냐고요? 그렇지 않아요, 아파요. 그렇지만 여러분의 마음속의 그 진리로 그것에 져버리면 안 된다니까요. 살아있어야 된다니까.

우리는 그러한 상황이나 현상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으로 끌어안으시고 우리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시면서 그래, 이제 조금 남았어. 금방이야. 이 아빠가 너에게 네가 꼭 배워야 할 걸 가르치기 위해서 이 과정을 그냥 통과시키는 거야. 조금만 참으라고 토닥토닥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 하시면 쫓아오시는 그 하나님을 잊으시면 안 된단 말에요.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토닥토닥 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토닥토닥. 응? 아가, 조금만 참아. 그거에 그 조그만 애기들도 힘을 얻어서 그럼요, 그 맛없는 거 먹으면서도 다 맛있대. 거짓말인 거 뻔히 알아요. 저는 진짜. 그런데 그 조그만 애들이 그 엄마, 그 아빠 그게 더 소중하니까 다 맛있대. 간장에다가 밥만 비벼주는데 다 맛있대.

 

하물며 영적인 세계를 살아간다고 하는 우리 성도가 이 현상계의 그 현상들에게 지면 안 되잖아요. 여러분 정말 그렇게 힘드시면 자존심 상해하지 마시고 저한테 얘기하시라니까요. 드디어 내가 한국에 왔잖아요. 난 이제 기타들고 미사리도 갈 수 있고, 아, 미국에선 안 됐어. 그게. 어디든 가능하다니까. ㅎㅎ 내가 그냥 진짜 어디 가서 라이브 가수로 뛰더라도 내가 그 상황에서 내가 모면하게 해드릴 테니까. 아 그게 우리끼리 서로 가족이라는 의미 아니겠어요? 그것으로 혼자 우울증 걸려가지고,,, 그럼 교회가 뭐냐고요? 도대체가.

 

그렇게 그 아버지의 뜻. 그 아버지의 사랑을 여러분의 현실 속에서 읽어내지 못하면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가장 불행한 자예요. 우리가 가장 불행한 자. 그것을 여러분의 부활이라는 생명의 에너지로 쓰지 못하면 우리가 가장 불행한 자예요.

교회는 눈에 보이는 성숙이나 눈에 보이는 업적이나 눈에 보이는 번영이나 눈에 보이는 행복과 기쁨과 감동들을 만들어내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걸 추구하는 곳도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것들의 위험성을 올바로 깨닫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나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진짜 아버지의 일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간 나, 그 하나님의 은혜나 능력이 아니면 존재도 될 수 없는 나, 그렇게 내가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버리면 ‘너’의 자리에서 그 사단 노릇했던 ‘나’가 거기서 죽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우리 안으로 내가 그 즉시 쫙 빨려 들어가는 거요.

<하나님과 우리>. 우리 편, 그런다니까요. 하나님이. 우리 편, 천지 창조주가 우리 편,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왜 ‘너’의 자리에서 자꾸 그분을 사단으로 몰아세우느냐고요. 그러면 그분이 우리를 사단! 그런다니까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그 그리스도의 영이 네 안에 제대로 들어가면 그 ‘너’가 죽은 거야. 그 몸이, 그 ‘쏘마’가 죽은 거야. 그러는 거예요. 중요한 건 그리스도의 영이야. 하나님의 영이야.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 21절 보세요.

 

마 16: 21-

21.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죽어야 산다, 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이거 꾸짖었단 뜻이에요. 예수님이 폭풍을 꾸짖을 때 썼던 그 단어. 예수님을 그렇게 꾸짖었다는 거예요. 네가 지금 정신이 있어? 없어? 그렇게. 꾸짖어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런 방법은 아니잖아요. 그거요 왜 자꾸 미련한 소리를 하세요. 그 방법 아니잖아요. 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 때 예수님이,)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이 돌이키시매, 가 이렇게 고개를 돌려 돌아서 봤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말을 뒤집어 엎어라는 뜻이에요. 네 말은 틀렸어! 이런 의미에요. 돌이키시매)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사단아, 이 마귀 새끼야! 이런 말이 아니라 베드로야, 그게 대적하는 거야. 그게 사단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직도, 내가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그 수준 밖에 안 되니 이놈아? 이런 게 아니라. 베드로야, 그걸 사단이라 그래. 이렇게요. 그걸 사단이라 그래)

-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여기도 나오죠? 육신의 생각, 사람의 생각. 하나님의 생각. 나오죠? 그죠?)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너희들, 나를 그냥 왕 삼아 어떻게 내가 너희들에게 구원이나 주고 생명이나 주고 그런 존재로 그냥 저 밖에 두고 나를 섬기면 사단 되는 거다. 내 죽음이 네 죽음이 되지 않으면 그건 내 십자가야, 네 십자가 아니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서 ‘나를 위하여‘ 가 나 때문에 예요. ’나 때문에‘ 가 뭐라 그랬어요? 아까?

그 ‘나’, 내가, 내 몸이 죽고 그러한 내 육신의 생각들, 지금 베드로처럼 이렇게 나의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의 이 육의 어떤 안위와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그 하나님, 이거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 그렇게 추구하는 그 아담, 그 몸이 죽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으로 함몰된 그 “나 때문에” 네 ‘네페쉬’가 죽으면, 네 ‘푸쉬케’가 죽으면 그게 복이라는 거예요. 그게 생명이라는 거예요. 그게 사는 거야. 그러나 지금 이 베드로처럼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 네 목숨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네 구원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넌 반드시 잃을 거야. 그런 말이에요. 그 ‘나’. 그걸 여러분이 이해를 하셔야 된단 말입니다.

복음은 아주 심플해요. 여러분. 육으로 죽어야 영으로 사는 거예요. 육으로 심어야 영으로 거둡니다. 율법으로 죽고 진리로 사는 거예요. 행위로 죽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거예요.

선악과 패러다임의 인간으로 죽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으로 사는 겁니다. 복음이에요. 그것이. 그래야 비로소 복음이 Good News, ‘유앙겔리온‘, 복된 소식이 돼요.

 

요한복음 6 : 63-

63.살리는 것은 (뭐예요? 영이니, 육 아니에요. 너희들의 행위 아닙니다. 너희들 몸 아닙니다. 살리는 건 영이다. 육은 무익하대요. 그러니까 죽여야죠. 그런데 어떻게 죽는다고 그랬어요? 오늘 본문에서? 영이 네 안에 들어오면 죽는 거래요. 그거는.)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내 로고스가, 그 말씀이 영이고 생명이야 그러잖아요. 그럼 그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산거고 여러분의 몸, 이 육은 이미 하나님 앞에 삭제 된 거예요. 그럼 너무 그걸로 하나님 앞에 뭐, 이래야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시겠지? 거기에 너무 그렇게 묶이지 마세요. 열심히들 하자고요, 그래서 아, 따듯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이런 평가도 우리도 한번 받아보자고요. 만날 뭐 말씀만 공부해갖고 대가리만 큰 교회. 난 이런 소리만 들어갖고. 아, 그렇게 좀 살지 말아요. 제발. 언제 내가 그러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욕은 다 내가 먹어 그냥. 그렇게 사시되 그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열매로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 그거는 명심하시고 가라고요.

 

요한복음 5 : 24-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내 말씀, 내 로고스를 너희들이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 그걸 들으면 나 보내신 이를 믿는 거예요. 여기서 나 보내신 이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얻었대요. 그리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이 뭐냐 하면 From 사망, To 생명이 아니라 Through 사망, In 생명이에요. 죽어서 산거야. 이런 말이에요. 그게 죽는 거고 그게 사는 거란다. 이런 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자는, 제대로 들은 자는)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 죽은 자들은 ‘네크로스’죠. 그 죽은 자들은 말씀으로만 살아난대요. 말씀으로만. 아들의 말씀. 아들의 음성. 히브리서를 보면 천사와 아들을 이렇게 대조하죠? 그건 뭐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 천사가 아니라 ‘앙겔로스’ 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전하는 자들 뜻인데, 그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갖고 전하는데 아들이 아닌 자들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그 아들, 그 천사를 그렇게 갈라서 설명해주는 거거든요. 마찬가지에요. 여기서도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 그 아들이 된 자의 입에서 나오는 그 진리가 살리는 거지 무조건 성경말씀을 뇌까린다고 살아나는 거 아닙니다.

계시록 20장 4절 보세요. 듣는 자는 살아난다. 그랬어요.

 

계20 : 4-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성도들입니다)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자, 진리에요. 이거는. 한 마디로 바꾸면. 진리로, 복음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목 베임을 받았다는 건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내 삶의 주체로 사는 , 선악과 페러다임 하의 아담들의 목이 말씀에 의해 잘리더라는 거예요. 그럼 어떤 머리가 가서 붙어야 되겠네요? 예수 그 머리가 가서 붙은 자들. 그러니까 자기의 주체성, 자기의 존재, 스스로 존재됨을 하나님에게 이렇게 차압당한 자들이라는 거예요. 죽은 자들이라는 거예요. 그게.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그들이 산 자에요)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리스도로 더불어 에요. 그죠? 그 진리와 더불어, 그 진리가 그 안에 있으면 그들이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 그러죠? 이거 여러분 얘기입니다. 천이라는 것은 충만의 수니까. 하나님의 진리가 율법의 진리로 성취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나는 그 기간을 천이라 그래요. 나중에 무슨 뭐 어떤 기간 그 시점부터 천년이라는 그 기간이 있다는 그런 뜻 아니에요. )

 

자, 그 기간 동안에 여러분이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네 요? 그런데 그들은 어떤 자들이래요?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이래요. 자기의 주체성을 하나님에게 빼앗긴 자들, 몰수당한 자들이에요. 하나님이 그 머리가 된 자들이, 그들이 왕이래요. 그런데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네크로스’에요. 역시. 그렇게 살아나지 못한 자들은? 천년 동안? 무슨 수를 써도 못 살아난다. 에요. 못 살아나더라.

그러니까 이는 첫 째 부활이라.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그러니까 여러분이 첫 째 부활 한 거죠? 살아났어요. 첫 째 부활한 거예요.

6.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또 나와요)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그 진리가 있으면 그들이 왕이래요. 그 목이 잘려, ‘내가 머리 둘 곳이 없다’, 라고 답답하여 그렇게 외치셨던 그 예수님이 머리로 드디어 붙을 어떤 이들이 생겨난 거예요. 그래서 그 하늘의 왕이신 그분이 머리니 이들도 왕이네요? 그런데 현실은 이래요. 그러니까 이 현실이 현실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이 현실이 현실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그 진리의 현실이 현실이잖아요.

여러분의 현실은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모형이라니까요. 그러면 여기에 묶이면 안 된다는 거잖아요. 거기에 묶이는 걸 죄라고 하고.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황이나 환경이나 그 처한 현실, 그 전체는 그냥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허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건 여러분을 건드릴 수도 없는 거예요. 진리인 여러분은 건드릴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성숙이나 변화나 번영이나 발전, 이런 걸로 사람을 부유하다, 가난하다 성숙했다, 그리스도인답다. 악마 같다. 못 됐다. 잘 났네? 이런 평가하면 안 된단 말에요.

적어도 성도는. 아울러 그런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아서도 안 되는 거예요.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러한 변화나 성숙을 도모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어 마땅한 자라는 올바른 자인식을 갖게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라는 건 다른 이들보다 훨씬 착하고 성숙하고 훌륭한 존재가 된 이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 그래요. 성경은 그들을 의인이라고 그래요.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머리를 삭제 당해야 돼요. 참수 당해야 돼요. 그래서 말씀을 좌우에 날 선 검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들의 삶의 주체가 되어버린 하나님처럼의 자리에 올라가버린 우리의 머리를 자르러 오신 거예요. 그 진리의 말씀이. 다나토스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진짜 머리가 붙어요. 그러면 그들을 ‘머리’라 그래요. 진짜 ‘머리’. 그렇지 않은 자들은? 머리가 되지 않으면 뭐가 돼요? 두 개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는. 꼬리 밖에 없어요. 성경이 이 세상을 저주의 바다라고 그러죠? 아랫물이라 그래요. 그 아랫물에서는 이 인간들이 진리, 그 머리로 살지 않고 자기들의 몸, 꼬리를 동력으로 하여 사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꼬리를 반드시 잘라버려야 되는데, 그래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 꼬리를 자르기 위해서는 그 바다에서 낚아 올려야 된다니까요. 그럼 잠시 퍼덕이다가 죽어요. 그럼 하나님이 그걸 살았다! 그래요. 그러니 쉬워요? 이 삶이? 그러니까 말씀은 한 마디로 토닥토닥 이라니까요.

야, 아니잖아. 그게 현실 아니잖아. 내가 지금 의도하는 목적이 있잖아. 그건 모형이잖아. 그걸로 네가 가야할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잖아? 거기서 머물지 마. 본문말씀도 다 토닥토닥. 죽은 거야. 너희 몸은 죽은 거야. 그런데 왜 거기에 묶여? 네 몸에 장애가 있어? 그건 너에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너를 보는 다른 이들에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내가 준 거야. 네 실수로 너에게 그거 간 거 아니야.

질병? 가난? 마찬가지야. 재물? 그것도 마찬가지야. 토닥토닥.

이사야서 9장 15절 보세요.

 

9-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요.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 도다.

꼬리가 되세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자존심을 지킵시다. 이거 다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거짓말, 거기에 속지 말라고 합니다.

신명기 28장 12절 보세요.

 

12.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그 보고에서 뭐가 내려와요?) 네 땅에 때를 따라 (비가 내린다고 그러죠? 비는 뭐라 그랬어요? 은혜의 말씀. 진리. 보배는 그거예요. 그냥 보배를 이렇게 나눠 주고 있는데 이게 보배인지도 모르고, 이 돼지들에게 이거 던지면 안 되는 건데.)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이거 산상수훈에서 배웠죠? 꾸려고 하는 자들에게 거절하지 말라, 가 여기서 나온 거예요. 왜? 내가 있잖아요. 거저 받은 보배가. 꾸러 온 사람들에게 무조건 다 꿔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13.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라 그러죠?)

-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명확히 나오잖아요. 너, 아랫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 아니야. 위엣 사람으로 만들려면 네 꼬리 잘라야 돼)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이 지켜 행하며 이것이 간직하다, 라는 뜻이에요. 내 명령을 네가 마음으로 간직하면)

14.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좌로나 우는 뭐예요? 선, 악입니다.)

-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그러면 그건 다른 신이 되는 거예요. 선, 악의 하나님.)

이와 같으리라

15.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내 말을 네가 모르면 그게 다 저주 되는 거예요.)

16.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성읍과 들은 뭐다? 성경에서? 성전. 네가 있는 이 교회에서 저주 받는다는 거예요. 뭐로? 그 말씀으로.)

17.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양식은 그거 진짜 양식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는다. 그러는 거예요. 그 복, 그 저주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이 말하는 복, 저주는. 냉장고에다가 그거 알고 써 붙이시라고. 복과 저주 이런 거.

그렇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여러분의 목을 참수 당해야 돼요. 그런데 그게 맞는 거예요. 말씀은 바로 여러분의 그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하여 위로하는 거예요. 토닥토닥, 이렇게. 사는 거 별거 없어. 그거야, 그거 하고 가는 거야. 예수를 네 머리로 앉히는 거야. 그리스도를 네 머리로 앉히는 거야. 그거 배우고 가라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주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꼭 어물전에 가면 죽은 고기가 가치 없고 홀대 받죠. 살아서 펄펄 뛰는 게 비싸요. 우리 애들이 지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생선을 그렇게 좋아해요. 그래 갖고 어디 가면 어물전 같은 데를 이제 가요. 가락시장 같은 데나 아니면, 부산에도 한번 가봤는데 자갈치.

아, 실망했어요. 난 굉장히 기대하고 갔는데 너무 지저분하더라고요. 제주도의 거기도 가보고, 또 하여튼 많이 가봤어요. 그런데 거기 보면 죽은 고기는 반값이에요.

돌아가신 광어, 반값. 이렇게 써놨더라고. 거기에다가. 그 돌아가신 광어? ㅎㅎ 한참 생각했는데 죽은 거는 반값이에요. 항상.

그게 세상의 가치관이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안 그래요. 그렇게 죽어야 이게 진짜 보배야. 그래요. 이게 진짜 생명이야. 그런다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 그러한 세상의 평가나 판단이나 이런 거에 절대 주눅 들지 마세요. 세상은 이 세상에서 죽으면 쓰레기 취급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안 그래요. 그래 그렇게 죽는 게 맞아. 그런데 그거 아닌 진짜 기쁨, 그거 아닌 진짜 선, 그거 아닌 진짜 안식, 그거 아닌 진짜 행복. 내가 너희들 위해 준비해 놨다. 너희들은 이미 거기 사람이야. 그거 가르쳐 주는 게 우리 신앙생활이에요. 딴 거 없어요. 성경 통해서 우린 그거 하나 배웠으면 오늘부터 찢어발겨도 돼요. 그거는. 뭐 필요 있어요? 성경이. 산천초목이 다 성경인데.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그렇게 많이 써서 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다 뭐냐 하면 그거 하나하나 증명해주는 거예요.

그러니 나는 매주 똑같은 걸 같이 이렇게 증명해줘야 되니 뭔 팔자냐고요. 이게?

그거 밖에 없어요. 그거 아셨으면 된 거예요. 여러분. 너무 그냥 지적 호기심, 지적 허영심의 충족, 이런 거로 성경을 보려고 하지들 마세요. 글 쓰는 것들 보면 딱 알아. 어떻게 사람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지.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거 하나 가졌으면 그냥 자유하게 그 진리로 잘 사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사는 건 사실 알고 보면 그렇게 쉬운 건데

그런데 우리 몸이 그 길을 자꾸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자꾸 장애물을 놓습니다.

하나님, 이 속에서도 우리가 배울 게 있으리라 믿습니다.

잘 배우고 하나님의 진리 놓치지 않고 꼭 붙들어

우리 하나님, 토닥토닥 우리 등 두드리면서 오시는 그 길에

그 아버지의 손 꼭 잡고 그 아버지의 사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씩씩하게 내 딛을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