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 강해중에서

은바리라이프 2014. 1. 6. 20:13

성경에서 옷과 벌거벗음, 부끄러움이라는 개념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이 창세기 2장과 3장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겨져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창조가 되었을 때에는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지요? 그들이 인간들의 손이 가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벌거벗었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이 굳이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벗겨져 버렸습니다. 그 상태에서 인간들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벗고 인간들의 벌거벗음이 인간들 자신에게 노출이 되면 인간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데 그 상태를 진짜 벌거벗은 부끄러운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rm 상태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그 부끄러움과 벌거벗음을 가리려 시도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하나님처럼’되어버린 자신들의 힘으로 부끄러움을 가릴 옷을 스스로 해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인간들이 해 입은 옷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입니다. 그게 바로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라는 옷입니다. 그 옷은 아담군상들이 존재하는 역사 내내 인간들의 로망이 됩니다. 명예의 옷, 재물의 옷, 인기의 옷, 선한 평판의 옷, 등등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벌거벗음과 부끄러움을 가리려 애를 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세상의 옷, 인간의 옷을 가리켜 벌거벗음이라고 합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모든 것이 풍요했습니다. 교인들의 선행, 구제, 열심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스스로 자기들은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없이 잘하고 있다고 자기들에게 반해 버린 것입니다. 그게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입은 마귀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게 벌거벗은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에게 찾아가셔서 바로 그 옷을 벗기시고 무죄한 짐승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은혜의 옷으로 갈아입히시는 것이 구속사의 전체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인간들의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과 하나님의 은혜의 옷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을 입고 벌거벗은 자들에게 뭐라고 하시지요?

 

(계3:180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의의 흰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흰옷은 어린양의 피에 씻은 흰옷, 불로 연단한 금으로 사는 흰옷, 갗은 옷인 것입니다. 그 옷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 옷이 십자가에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들에게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지요?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누가 제비 뽑아 가져갔나요?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벗겨 갔습니다. 그러니까 산상 수훈의 겉옷과 속옷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미리 비유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옷이 예수를 죽인 우리에게 입혀진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짠 옷, 의의 흰옷, 그 옷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성경이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하는 성도에게 끝까지 지키라고 한 옷이 바로 이 그리스도라는 옷인 것입니다. 다른 옷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옷 d입은 자들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렇게 그리스도에게 장악된 상태를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라는 행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뜻과 의지로 살진 제물들을 살려서 가지고 온 사울에게 뭐라 하셨지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낫다는 것은 better가 아니고 ‘옳은’이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순종이지 제사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순종이라는 것은 몇 가지 지시사항을 잘 지켜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순종 ‘솨마’는 두 객체가 하나로 연합이 되어 한 몸이 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종은 두 객체가 따로 존재하며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복종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한 쪽 대산이 다른 쪽 대상에게 완전히 장악되고 흡수되어 자신을 부인당하고 끌려가는 그 연합의 상태를 순종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는 성도의 삶 속에서 나오는 순종에는 자랑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옷을 입은 자들이 바로 그러한 순종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모든 성도의 삶은 전부다 순종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원하시는 것입니다. 제사, 행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널 비워낼 때 넌 그냥 살아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라는 은혜의 옷을 입은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 돈, 명예, 인기등이 없으면 벌거벗었다고 자신을 자책하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라는 옷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벌거벗고도 벌거벗은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벌거벗은 임금님과 그 임금님을 바라보면서 ‘그 옷 참 멋있다’고 외치던 나쁜 백성들처럼 진짜 벌거벗은 무리들이 자신들이 입은 옷이 진짜라고 너스레를 떨고 있는 꼴입니다.

 

바로 그러한 아담들의 세상 옷을 찢어 버리시는 것이 자기부인이라는 것이고 그러한 자기부인 위에 입혀지는 은혜의 옷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여전히 인간들의 공로와 열심과 노력이 가미된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옷을 서로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아무리 훌륭해 보이고 멋져 보이는 옷이라 할지라도 잔치집 밖으로 내쳐져서 영원토록 이를 갈게 될 자들의 엉뚱한 옷인 것입니다. 왕이 원하시는 옷은 왕이 준 예복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말씀을 똑같이 주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말씀 속에서 자기들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을 배우는 반면,(그것이 은혜의 옷을 입은 자들) 종교인들은 인간들의 가치와 세상적 가치와 자신의 체면을 먼저 챙겨내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과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의 모습이었고 오늘날 율법주의에 매인 교회 안의 종교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