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114-2. ‘원수 갚는 것 ’‘원수 ’

은바리라이프 2014. 1. 6. 20:00


로마서 강해(1). “ 로마서 개관”본문기록...

- 창세기 강해(22) ‘살해하는 자들과 맞아 죽는 자들’본문기록...

 

(롬12:19-20)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에크디케오έκδικέωG1556-변호하다,벌하다...) 말고

     

 - 에크디코스ἔκδικοςG1558-공의를 행함에서 유래

                      :에크έκG1537-로부터,~말미암아..+디케δίκηG1349-공의(원죄,결정,그의 실행),옳은,심판,처벌...

 - 데이크뉘오θεικνύωG1166

   보이다,보여주다,지시하다,경험하게하다.가르치다,설명하다,폭로하다,계시,예언하다..에서 유래-                    

 -파생 :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G1342-공정한,흠없는,거룩한,의로운,적당한...에서유래


진노하심에 맡기라(디도미δίδωμιG1325-주다,넘겨주다..)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에크디케시스έκδίκησιςG1557)-G1556에서 유래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안타포디도미άνταποδίδωμιG467-보복,보답하다,갚다,주다...)


안티άντίG473-반대하여,대신에,때문에,대치 때문에 +

         아포디도미άποδίδωμιG591-나누어주다,넘겨주다,보답하다,회복하다....

        -아포άπόG575-떨어져서,분리,출발,중지,완성,역전... +디도미δίδωμιG1325-주다,넘겨주다.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에크드로스έχθρόςG2190-미워하다,증오하는,적,사단..)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는 지난주에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어떻게 때려죽이게 되는 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인 인간이 자신도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는

욕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장 중(掌中)을 떠나게 되면 인간들은

그 즉시 자기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힘이 세거나 자기보다 무언가 강한 것을

소유한 자기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들을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자들이 관계 속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질투와 분노입니다.


그렇게 질투와 분노로 가득 찬 인간들은 끊임없이 유형무형의 살인을 저지르며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내 닫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모든 행위를 살인으로 규정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살인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형이 매겨져 있습니다.

‘사형’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죽음의 지옥으로 떨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가인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은 성도들은 이제 자신을 예배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기 때문에 질투와 분노와 미움에서 벗어나 오히려 살인자들의 삶을 부끄럽게 만드는 예배의 삶을 살게 되기에 이 땅의 가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벨 들을 때려죽이려 혈안이 됩니다.

질투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땅의 아벨들에게 그 가인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아벨이 그러했듯이 아무 것도 아닌 nothingness의 모습으로 맞아 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좇으라는 것은 ‘네가 죽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맞아 죽어야 하는 상황들을 반드시 만들어 허락하십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정말 맞아 죽는지 아니면 똑같은 힘으로 받아치고 있는지, 인내하는지 분노를

폭발시켜 버리는지를 확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반드시 가인들에게 맞아 죽는 고난의 순간들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험들을 통과해서 이긴 자들만이 정금 같이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삶은 참 힘이 듭니다.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예수를 알면 알수록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위대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스스로 목을 매달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는 모든 이들은 위대합니다.

저는 어느 때부터인가 예수를 믿으면서 여전히 예수 믿는 자로 살고 있는 분들이 존경스러워 졌습니다.

목회를 시작하고 오랜 시간 목회를 하고 계신 목사님들을 존경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나 할까요?

예수를 믿는 아벨 들이 세상의 가인들에게 맞아 죽는 삶은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합니다.

그 만큼 힘이 듭니다. 죽는 것은 잠깐만 참으면 어찌 되던 끝나는 거니까 쉽습니다.

그런데 오감을 가지고 내 육신이 찢겨져 나가는 고통은 죽는 것보다 훨씬 힘이든 것입니다.

내가 가인에게 맞아 죽는 삶은 나의 옛 사람을 죽이는 삶인데 그 옛 사람이 나의 밖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살과 뼈와 피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옛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이 어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그 고통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를 믿으면서 여전히 숨을 쉬며 살아내고 있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들이 곁에서 잘 견디고 계시기에 저도 힘내서 살고 있는 것이고요.

우리 모두는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죽이는 가인의 삶을 습관처럼 살아왔기 때문에

맞아 죽는 삶은 그렇게 녹녹치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도 어느새 가인이 되어 상대방을 오히려 때려죽이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아벨의 삶을 살게되면 그렇게 남을 때려죽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고난의 삶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신앙이 성숙되어짐에 따라 점차로 옛 사람이 죽어지고 그 속에 심겨진 예수 그리스도라는 씨가

자라나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온전한 작품으로 출산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출산에는 반드시 열 달 동안의

수고와 산고의 고통이 따르듯이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출산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수고와 고통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원수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 같은 크기의 힘으로 대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가 주릴 때 먹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많이 먹고 배 터져서 죽어라’는 마음으로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랑하는 마음으로 먹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때려죽이고 싶은 원수한테 먹을 것을 갖다 주라니요? 그게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하나님의 그런 요구는 정말 듣기도 싫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라니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기 이전에 의지의 발동이라고 했지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러한 사랑의 모습이 원수들에게 지는 모습으로, 맞아 죽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자기를 밟는 원수에게 먹을 것을 갖다 바치는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눈에는 당연히 패배의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런 쪼다, 어떻게 저런 못 된 자들에게 당하고만 있어, 겁이 나서 그런가봐, 약해빠진 인간’

그러나 그러한 아무 것도 아닌 자로서의 삶,

다른 말로 아벨의 삶은 가인의 머리를 밟는 삶인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원수들이 너희를 핍박할 때 그들을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악인들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벨이 쌓아놓은 숯불을 근거로 가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참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맞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벨 들이 가인들에게 맞아 죽는 모습이 세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예배당 안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것입니다.

(마23:35)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여기 보시면 의인 아벨과 의인사가랴가 나오지요?

아벨과 사가랴는 죽임을 당한 의인의 처음과 끝의 모델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인들이 모두 어디서 죽임을 당했느냐하면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말은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는 아벨 들은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에 의해

그들의 제단을 지키기 위한 열심에 의해 죽게된다는 뜻과 함께

그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가짜 아벨들에 의해서도 자행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벨과 사가랴의 피가 ‘성전과 제단’사이에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이렇게 다툼과 시기와 질투와 피 튀기는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하나님의 참 백성, 아벨 여러분 그 때 여러분은 가해자가 되셔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아벨과 사가랴처럼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맞아 죽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가인들에게 맞아 죽는 이 땅의 아벨 들은

그들의 선한 삶으로 가인들의 심판의 근거를 하나님께 제공합니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예배를 상징하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세월이 흐른 후에, 종말에, in the end of the day'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중간생략)

(계14:1)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서 있었습니다. 그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어린양의 이름이 적힌 표를 받습니다.

다른 말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작은예수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주의 표를 받고 동일하게 사망으로 떨어져야 할 우리 성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표로

주시고 그들을 당신의 아들들로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저주의 표를 면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한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세상 속에서 보호하시는 방법으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것은

가인과 세상을 한 편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서로 죽일 필요가 없는 한 편’

‘그러면 가인들끼리는 그렇다 치고 가인 시대에 태어날 아벨 들이 가인에게 복수를 하면 어떻게 하는가?’

아벨 들은 가인들에게 복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12:19‐21)

19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아벨 들은 가인들에게 맞아 죽는 역할로 이 땅에 태어나기 때문에

가인은 다른 가인들만 걱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가인들을 모두 한 편으로 만들어 주심으로 이 땅에서 가인들이 아벨 들을 때려죽이는

자신들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 생존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가인은 죽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인들의 삶이 얼마나 악독하고 그 결말이 얼마나 처절한 지를 demonstration해야 하는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 죽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떵떵거리며 아벨 들을 때려죽이는 역할을 충실히 해 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들을 살려 놓으시는 것입니다.

본문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칠 배라고 말씀하시지요? 칠은 완전수입니다.

이 땅의 가인들은 반드시 살아서 아벨 들을 때려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배당 안에도 가인들이 죽지도 않고 득실거리는 것입니다.

 

(창4:15)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그렇게 그 가인의 표를 받은자들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삽니다.

요한 계시록에도 가인의 표를 받은 자들만이 이 땅에서 매매를 한다고 나오지요?

그 짐승의 표를 받지않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매매를 못 한다고 합니다.

그 말은 이 땅의 가인들은 이 세상의 삶의 방식인 힘의 원리에 의해 장사를 해서 이윤을 챙기고

잘 먹고 잘 살게 되는데 이 땅의 아벨 들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인 십자가의 삶의 원리로

이 땅을 살기에 늘 가인들에게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고역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사는 삶이 이기는 삶이고 승리의 삶이라고 하십니다.

가인의 표를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를 바탕으로 매매를 하며 승승장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하늘의 원리로 살아야 하기에 늘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남을 밟아 자기의 유익을 채워야 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를 비워남의 유익을 챙겨야 하는

하나님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승승장구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가인이 저주의 표를 받고도 승승장구하며 성까지 쌓고 그의 후손들과 문명을 만들며 살도록 놔두십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가인의 모습을 보세요.

가인은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태어난 장자입니다. 가인은 모친의 자랑이었습니다.

신체적으로도 아벨보다 건장한 자입니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재주와 능력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그는 최초로 도성을 건설한 위대한 성주였고 각종 문화 창설의 선구자였습니다.

아벨과는 도무지 비교도 되지 않는 뛰어난 자입니다.

그러나 그 삶은 결국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되고 그 뒤로 그 가인들은 엄청난 고통의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일반상식의 세상 가치관으로 사람의 가치를 재서는 안 됩니다.

가치 있는 사람들은 단 한 부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피로 거듭난 아벨 들

본문 17절을 보면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 놋 땅에 정착해서 성을쌓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류 최초의 위대한 성주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창4:17)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 때에,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하노크חנוֹךH2585봉헌된,홍수전에 족장 에녹)이라고 하였다.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도피성으로 피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가인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도피성이 아닌 자신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낸

에녹성을 쌓는 자들입니다. 에녹이라는 단어는 ‘바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 땅의 가인들은 자기가 노력해서 쌓은 이 땅의 힘을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객관적으로 보여 지기는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며 화려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도피성으로 피해서 오직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이 땅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에녹성을 쌓는 사람들에게 당하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맞는 삶입니다.

이 땅의 가인들은 절대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잘 삽니다.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 질문과 대답을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형제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자

가인이 하는 대답이 걸작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지극히 이기적인 자가 되어버린 가인의 실체를 폭로하는 대답이기도 하지만

그 대답 속에는 하나님마저도 무시하는 가인의 오만이 담겨있습니다.

그의 대답 속에는 ‘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나한테 물어보느냐?’라는 오만과 ‘

누가 나에게 내 동생을 지키라고 명령했느냐?’라는 기고만장함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가인들에게서도 이와 똑같은 오만과 기고만장함과 이기심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으로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매일 매일 때려 죽이면서도 죄책감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왜 그들을 지켜야 돼?’라고 뻔뻔스러운 반응을 보입니다.

당연하지요. 그들은 우주의 중심은 바로 자기자신이라고 여기고 있으니까요.

아담과 하와는 한 몸이었습니다.

태초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 서로를 지켜주도록 창조가 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당신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고백을 하는 하나 됨 관계,

즉 의로운 관계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아니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나를 비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한 몸인 나를 위한 삶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삶을 한 번 반추해 보십시오.

 

(막15: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이렇게 자신을 구원하는 삶이 아닌 남을 구원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은 자기의 몸인 교회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결국 주님은 자기의 몸을 위해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모신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위해 나를 비운다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그렇게 살기에. 따라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삶

또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은 결국 우리의 성숙을 위한 도움이 되는, 나 자신을 위한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