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진리로 여는 로마서' 중에서

은바리라이프 2013. 12. 22. 23:26


(막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뭡니까? 불세례, 불 심판이 뭐예요? 십자가입니다. 거기에서 무엇이 죽었습니까?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시고’ 가 저주를 받아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그토록 줄기차게 반복되어 기록이 되어 있던 불 심판이 무엇이지요? 성결의 영을 대적하는 육신이 죽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불 심판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제일 먼저 받아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새 몸으로 부활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심판이 완료되었음을 만천하에 공포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성도에게 떨어질 불 심판은 기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받는 불세례를 똑같이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까?

 

(눅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은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이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당신의 십자가를, 이 역사 속에서 우리 어깨 위에 얹어 놓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떨어질 심판의 십자가를 모두 도말해 버린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의 인생 속에서, 왜 성결의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세상에 설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 세상에 서지 않았다면 우리의 결국은 어떻게 끝이 나게 될 것이었는지, 그러한 자들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도저히 살아날 수 없고 살아나서도 안 되는 이런 존재를 어떠한 능력으로 살려내신 것인지에 관해 몸으로 배우고 말씀으로 배우는 신앙생활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과정이 바로 나에 대한 신뢰와 집착을 놓아가게 되는 불 시험의 장인 것이며 그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가 죽어가는 것이고 그렇게 ‘나’라는 존재가 죽어갈 때, 십자가에서 이미 죽어버린 나의 옛 사람을 주관적 믿음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나’라는 존재의 ‘이미 죽었음, 없음의 자리로 돌아갔음’을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 안의 새 생명이 그 옛사람의 부패한 시신을 뚫고 나에게 조금씩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묵시 속에서 완료된 창세전 언약이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에 실재 화 되어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고후4: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예수의 죽음, 즉 십자가를 항상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쓰인 동사의 시제가 전부 현재시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에 예수의 죽음이 실 재화되어 나타나는 것도 현재 진행이고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것도 현재진행입니다. 그 말은 곧 우리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상태, 즉 부활한 자로서 영생을 사는 자의 증거는, 그의 몸에 예수의 죽음이 나타나느냐 안 나타나느냐로 판정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은혜로 부활한 자가 되어 이 세상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옛사람의 죽음인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 예수의 죽음, 즉 십자가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건 생명이 없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고난은 일차적으로 옛 사람의 죽음이라는 십자가 사건의 실제화인 것이기도 하지만 두 번째로는 예수와 연합된 자들의 삶 속에서 예수가 누구이시며 예수가 세상에 어떠한 대접을 받으셨는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로 성도의 삶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냥 그릇으로서 십자가를 담아내는 역할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세상이; 예수를 어떻게 미워했는지를 그대로 경험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요15: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 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아무런 연고 없이 미움을 당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고난도 때로는 아무런 연고 없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삶에 고난이 닥칠 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는가?’에 대한 원인 규명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러한 고난이 자신의 옛 자아를 죽여 감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예 사람이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복음의 현실을 깨닫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걸 기억해야 하고, 두 번째로는 이렇게 아무런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이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닥치는 하늘의 불 심판에 의해 이미 죽어버린 우리의 영적 현실을 자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이해하며 이 세상에서 조금씩 눈을 들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5:9-10)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고후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 이니라

 

어떠세요? 고난이,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의 철장이 우리에게 내리는 저주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6장의 그 제단 아래의 영혼들, 즉 묵시의 영역인 하나님 나라에 이미 완성된 자로 존재하고 있는 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신원이 어떤 신원이겠습니까? 나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해 달라는 그런 신원일까요? 그 신원은 하는에 완성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이 세상 첫 창조에 속한 사라져야 할 옛것들을 하루속히 소멸시켜 주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료에 대한 기원입니다.


우리 성도가 바로 이 세상에서 그러한 소원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 옛사람의 손아귀에서 이렇게 당해야만 합니까? 하나님 어서어서 저의 이 옛사람이 무너지게 해 주시고 죄와 무관한, 완료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을 살게 해 주옵소서’ 한마디로 ‘나를 죽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가 어디에서 원시적으로 보였지요? 가인에게 맞아죽은 아벨의 피가 땅 속에서 신원했던 것 기억하세요? 바로 거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왔던 아벨이 정말 하나님께 복수를 부탁했던 것일까요? 아벨의 신원은 자신의 제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마저도 살해하려 했던 ‘죄’에 대한 신원이었던 것입니다. 그게 천상의 성도들의 신원입니다. 그런데 그 죄인 중의 괴수가 바로 내 안에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미 이 땅에서 하늘을 사는 성도들은 ‘나’를 죽여 달라는 신원을 매 순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열망이 있나요?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옛 사람의 죽음에 대한 열심과 노력과 추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왜요?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의 지향점이 정해지고 우리 삶에 한 방향으로의 지향성이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열심히 노력해서 그 옛 사람의 죽음을 성취해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놓은 그 영적현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내 삶 속에서 그 일이 실재화 되기를 자연스럽게 열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의 열심 안에 들어있는 자의 필연적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의 무력함과 추악함을 아는 자들이 어떻게 그전과 똑같을 수가 있나요?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몰랐던 때와 지금과 여러분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변함이 없습니까? 예전 같으면 당장에라도 목을 매달아야 할 그런 일들이 여러분에게 시시한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까? 심지어 질병이나 죽음을 생각할 때도 예전처럼 그 앞에서 호들갑을 떨거나 하지 않지요? 작은 사고에도 벌벌 떨던 사람들이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되셨습니다. 예전에는 절대 참을 수 없었던 타인의 위해나 모함등에 대해 전처럼 흥분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지나칠 수 있는 여유도 조금 생기지 않았나요? 예전에는 이 세상의 힘과 가치를 쟁취하고 소유하고 축적하기 위해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기도 하잖아요? 분명 어떤 변화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떤 성숙이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비워지는 삶에 대한 열망이 우리에게 있었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러한 비움에 대한 추구와 선한 삶에 대한 열심히 분명 우리에게 있었지요? 목사가, 아무리 ‘은혜가 모든 것을 다 덮으니까 그냥 살라’고 초를 쳐도 여러분 안에 여러분이 그냥 막살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꿈틀거려서 여러분을 아래로 아래로 밀어 내리지 않던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열심에서 격발된 진짜 성도의 열심입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극한의 가난에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도에 지난 연보를 했던 것이 정말 연극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투옥과 죽음도 마다치 않으며 산천을 누볐던 하나님의 사도들의 열심히 정말 외식이었을까요? 감옥 속에서도 찬양했던 우리 신앙 선배들의 담대함이 쇼였습니까? 아닙니다! 분명 성도에게는 변화와 성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피눈물 나는 고민과 열심과 노력이 성도의 삶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나’라는 존재의 가치 격상이나 영광 챙기기나 자아 확립이나 자아 확보, 자아 성취의 도구로 쓰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작해 내는 오늘날 성도라 자처하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어서 제가 지난 일년간 인간들의 행위를 그렇게 두들겨 팼던 것입니다.

 

제가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1년 전에 수요예배를 마치고 식당에 앉아 우리 교회 장로님들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앞으로 얼마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설교를 하게 될 톈데 아마 많이들 혼란스러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설교자로서 목적하고 있는 것이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생각될 때 대반전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냥 잘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지난 1년간 다소 과격하다 싶을 만치 인본주의적 성화론에 대해 메스를 대어 도려내는 설교를 했습니다. 많이들 아프셨지요?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그냥 묵묵히 지켜봐 주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우리 교회 장로님들과 같은 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그런 결심을 했던 이유가 이러합니다. 초창기에 서머나 교회를 개척하고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빠져있는 신비주의나 기복주의를 깨기 위해 여느 개혁주의 교회나 마찬가지로 말씀의 중요성과 성도의 삶에 대해 집중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저희 교회는 정말 열심히 말씀을 공부했고 올바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서머나 교회가 풍성한 말씀과 삶을 가지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얕잡아 보기도 하고 경홀히 여기기도 하며 무례하기까지 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중심에는 항상 성경을 가장 열심히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서 있었고 착하게 살자며 떠벌리고 다니던 사람들이 편당을 가르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을 했던 교회입니다. 그건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압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과 열심히 우리 자신을 비워내고 겸손의 자리, 티끌의 자리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교만과 위선의 자리로 밀어 올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신비주의나 기복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와 위상과 만족을 챙기기 위한 가짜 열심과 가짜 업적과 가짜 섬김과 가짜 착함을 쳐내기로 작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성화론에 대해 목숨을 걸고 반대를 하는 이들의 책과 논문들과 그들의 강의들을 정말 치열하게 탐독하고 , 듣고, 읽고, 쓰고 하면서 제 나름대로 가짜 성화를 부수는 외로운 싸움을 해 왔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주장 속에서 과연 개혁주의의 성화론 중 어떤 것이 허구이며 어떤 것이 깨져 나가야 할 것인지를 배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기독교를 좀더 풍성한 시각으로.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허구이며 어떤 것이 깨져 나가야 할 것인지가 명료해졌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바로 그것들을 깨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쌓은 성화를 부수는 작업은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제 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으로 감지가 된다는 것을 저는 익히 잘 압니다. 많은 분들이 아파할 것을 알았고, 심지어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못 견디고 떠나게 되리라는 것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깨져야 할 것들이 깨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가치와 만족과 자기의, 자가 영광을 챙기기 위해 내어놓는 종교적 열심은 개인과 교회를 파괴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홀로 감수하며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실제로 못 견디고 떠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혼란스러워 하시는 것을 저는 1년간 고통스럽게 지켜봤습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나를 이끌고 계신가?’에 관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 것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삶을 단속하고 성도다운 삶을 견지하며 선한 일에 힘을 쓰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눈물을 뿌리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더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냥 마음대로 사세요’라고 매 설교 때마다 걸림돌을 던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요동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고민을 던져 버리지 않았고 바르게 살고자 하는 열심과 하나님의 백성다움에 대한 고뇌를 놓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목사가 ‘이렇게 사십시오’ 혹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라는 적용의 부분에서 그 어떤 걸림돌을 던지더라도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끌려가는 이들의 삶에는 조금도 요동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옛 자아를 죽여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에서 격발되는 진짜 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열심 있는 삶을 허락하시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십시오. 아니,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열심히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설교시간을 통해 ‘어차피 티끌인 인간에게 인권이 어디 있느냐?’ 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실은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보는데 쓰레기로, 악마로 보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원론적 차원에서 욕을 하셨지만, 그들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인간행위의 무용함과 무력함을 설교하면서도 20년째 한국의 고아원 아이들 마흔두 명의 생활비를 지금까지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나오는 목회 활동비는 전액 그리로 보냅니다. 그리고 교인들 밥을 사줘야 할 일이 있으면 제 돈으로 메웁니다. 그리고 제가 쓴 책이 한 권 나올 때마다 한국에서 점심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한 신학생들에게 무료로 책을 나누어 줍니다. 그래서 책이 한 권 나올 때마다 600만원씩의 빚이 늘어납니다. 작년까지는 그들에게 점심값까지 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고 해서, 그런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뭐, 그런 거 ‘자기 의’잖아 하면서 그런 일을 그만 두는 게 옳은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담이 얹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 그 일에 열심을 부리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죽은 것이지만 우리 안에 성령이 살아 계시기에 성령으로 살아난 자들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다운 열심을 격발해 내신단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서머나 교회는 지난 6년간 누구 못지않은 열심도 부려봤고 그 열심들 중에 어떤 것이 위선의 열심이었고 가짜 열심이었는지도 이제 알았습니다. 어떤 것이 죄에서 격발된 열심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격발이 되는 진짜 열심인지 구별할 수 있는 눈도 어느 정도 갖게 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이제 ‘자기 의’로 쌓이지 않을 수 있는 그러한 삶을 열심히 살아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진짜 열심을 부려서 삽시다. 그때 우리는 죄로 인한 고통과 불쾌와 상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풍요를 한껏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죄라는 주인에게서 조금씩 놓여나는 그 삶이 바로 하늘 백성의 왕 노릇이며 자기부인의 삶이며, 천년의 삶이며, 영생인 것이며, 죽임 당함의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