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 강해중에서

은바리라이프 2014. 1. 6. 20:11


(골1:15~17)

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선재)

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예수 안에서 존재가 되느니라)

(롬11:36)

36만물이 그에게서 나왔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모든 만물의 존재의 이유가 뭡니까? 예수 안에서 존재 하는 것만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사는 하늘의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 안에서, 예수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 만물의 본질적 의미이며 만물의 존재 원인과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와 관계없는 모든 것은 존재로서의 성립 자체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만 모든 것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 창조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걸 올바로 깨닫고 자기 존재를 부인당하여 예수 안으로 흡수되는 것을 구원이라 하고, 그 상태를 순종이라 부르는 것이며, 그것은 다른 말로 안식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됩니다.

그건 창세기에서부터 친절하게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창2:1-3)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 하셨음이더라

 

여기에도 천지만물이 등장하지요? 그 천지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십니다. 그 첫 창조는 하나님 나라라는 묵시 속의 새 창조의 모형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천지만물의 창조의 끝에 안식이 등장합니다. 안식이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묵시 속에 완료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 목적이 예수로 수렴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는 그렇게 천지 만물이 다 이루어진 상태를 안식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와 안식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지요? 잘 생각해 보세요. 사도 바울은 천지만물이 예수가 누구이시며, 예수의 하시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가 되었다고 하고 창세기를 쓴 모세는 그 천지만물이 안식으로 결과지어진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둘을 조합하면 어떤 이야기가 됩니까? 안식, 즉 하나님 나라는 예수가 홀로 성취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천지만물이 창조가 된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여섯째 날까지 일을 하시지요? 물론 상징적인 여섯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합니까?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니 나도 일을 한다고 하시며 창세기 2장의 그 아버지의 일을 인용하셔서 새 창조를 말씀하십니다. 그 새 창조의 일을 여섯째 날에 마치시는데 여섯째 날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금요일입니다. 그 여섯 째날, 금요일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어떤 일에 의해 무엇이 성취되나요? 그 여섯째 날, 그러니까 유월절 금요일에 십자가가 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창세기 2장에 쓰인 단어, ‘다 이루었다’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세상에 떨어졌습니다. 거기에서의 다 이루어짐은 예수의 죽음에 의한 다 이루어짐이었습니다. 무엇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인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로 완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그 이야기를 창세기 2장은 천지 만물이 다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리고 안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고, 바울은 그 현실을, 예수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는 만물의 본질적 존재 의의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묵시 속 목적(창세전 언약)이 예수에 의해 완료가 되는 커다란 구속사의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천지와 만물이 모형으로, 재료로 창조가 된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창세전 계획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료가 된 상태를 안식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식이라는 개념은 ‘일하지 않음’이라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안식일에 일을 하는 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까지 엄히 금한 것입니다. 그 말은 안식, 즉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이 일해서 성취되는 곳 아니고 너희들의 노력으로 운영되고 유지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나라라는 것을 계시로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러한 복음이라는 전체의 그림이 역사와 인생 속에 그려지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로기온, 말씀’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붓을 잡으시고 하나님의 일을 그려내시는 그 모습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그 캔버스에 그려진 바로 그 내용이 ‘로기온’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캔버스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그려내신다는 말과 똑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맡은 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유익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혹자들은 말씀을 맡았다는 것을 준행의무의 차원에서 설명을 하곤 하는데 그건 아니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말씀을 지켜낼 재간도 없었고 지켜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유익이라는 말을 한단 말입니다. 어떤 이는 그 유익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유익으로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원어 본문을 보면 그 유익이라는 단어는 유대인에게 걸려 있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본문을 파싱해 보면 그 유익은 말씀을 맡긴이의 유익이 아니라 말씀을 맡은 자의 유익입니다.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이 역사와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을 그려내는 캔버스인 것이라면 그 역사와 인생이 어떤 상태로 예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까? 아니 그보다 먼저,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뭔가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마1:21)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필연성을 이 역사와 인생들이 올바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떤 상태여야 하지요? 구원이 필요한 자여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자의 능력과 성품과 본질이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은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이(paradigm shift)가 반드시 필요해요. 성경을 인간 중심으로 보게 되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로 자꾸 관심이 쏠리게 되요.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들을 통하여 어떻게 당신을 설명하시는가?’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후자의 관점으로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구원자 예수, 은혜의 하나님을 설명하고 그려내는 것이 이 역사와 인생의 목적인 것이기에 구원을 받을 자들은 구원을 받아야 할 자로 예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 역사와 인생, 그리고 우주라는 공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 했습니다. 캔버스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예수를 그려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 백성만을(모든 존재 아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떤 상태라는 것입니까? 구원을 받아야 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 즉 하나님 나라가 누구에 의해 어떤 희생을 전제로 성취가 된 것임을 그려내시기 위해 아담들의 입에 선악과를 물려서 이 죄악의 세상으로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자가 누구이며 왜 구원이 필요한지가 설명이 되니까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았을 때의 자기 자신들의 실체를 올바로 자각하고 ‘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맞고 그래서 마땅히 구원을 받아야 할 자입니다’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하는 자를 성도라 하는 것이고, ‘여기도 괜찮은데 왜 우리가 여기를 떠나는 구원을 받아야 해?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여기에서 유토피아를 세우자.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그 유토피아 건설에 필요한 자원과 힘을 보태달라고 하자’라고 인간과 역사의 가치를 챙기는 자들을 지옥자식이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지옥 자식들까지도 이 역사와 인생 속에 직접 그려내시는 분입니다.

 

(롬9:21~23)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 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렇게 하나님은 지옥에 떨어질 자들도 미리 정하셔서 어떤 게 지옥자식인지를 그들의 인생이라는 캔버스 안에 그려 내십니다. 저는 지금 존 칼빈의 이중 예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술을 그대로 읊어 드리는 겁니다. 그걸 굳이 이중 예정이라 부른다면 거기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 자신이 모든 것의 주라는 것을 만 천하에 공포하시기 위해 이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필요했던 것이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기고만장하지 마세요.

 

(빌2:8~11)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분명히 나오지요? 이 역사와 우주, 그리고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심지어 땅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까지 주라 시인을 받으시는 데에 한시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비움과 예수의 죽음이라는 것은 예수가 홀로 다하셨다는 것을 강력하게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리고 이 만물의 역할이 종결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알아야 할 자들이 모두 알아먹었을 때에 이 역사와 인생과 우주라는 모델 하우스는 철거가 되고 오롯이 예수가 주인이 되고 예수만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안식의 나라인 것이며,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1:10~12)

10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보세요. 모든 것이 다 낡아지고 결국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입니다. 하늘과 땅을 비롯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낡아지고 급기야 갈아입혀져야 하는 소멸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지만 오직 주 만 영존하실 것이고 주 만 여전히 영원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이신 예수가 설명이 되면 그 나머지 설명용 도구들은 다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역사가 두 개의 가치가 처절하게 싸우는 장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치와 피조물들의 의기투합과 연합에 의한 바벨성이라는 가치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예수라는 가치 앞에 모든 것들의 연합이 산산이 부수어지고 낡아져서 예수라는 가치만이 오롯하게 승리의 기호로 서게 된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예수라는 가치와 인간이라는 가치가 전쟁을 벌입니다.

교회 안의 전쟁 중 가장 무서운 전쟁이 바로 그러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인간들의 처음자리를 자각하게 하시고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자기백성만 죄에서 구원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무엇이라 했지요? 인간이 자신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여 인간 자신들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모든 것이 다 죄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열심히 공로를 쌓아서 하늘나라에 가서 상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도 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본주의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과 관계없이 이 역사와 인간들이 내어 놓는 모든 것이(그것이 비록 선해 보이고 신실해 보인다 할지라도) 배설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 예수만이 있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3:2~9)

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 당을 삼가라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도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도덕과 윤리, 율법이라는 객관적 평가에 의해서는 거의 완벽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수를 알고 나니 자신의 그 모든 것이 다 죄, 즉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자 그리스도를 얻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을 대하실 때에 죄라든지 구원이라든지 은혜라든지 이런 것들의 개념을 국어사전의 개념으로, 동화책 수준으로 이해를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들이 합의하고 정의해 놓은 도덕과 윤리, 그리고 사회법이 요구하는 행위 규범을 잘 준수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피조물들이 자기들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종적인 관계 속에서만 그 개념 성립이 가능한 것이지 인간들 사이에서의 횡적 관계에서는 기실 죄라는 개념이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의 죄가 인간의 횡적 관계 속에서 더럽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야기한 것처럼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만 그 개념이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나 선이라는 개념을 참 잘못 알고 있어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의 이해득실의 결과로 그것들을 정의 한단 말입니다.

 

자, 그렇게 죄라는 것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종적 관계에서만 성립이 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들 사이에서 피조물에 의해 죄라는 것이 생산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게 가능합니까? 혹자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죄를 만드신 것인가요? 아니면 또 다른 혹자들의 주장처럼 인간들이 자유의지로 죄라는 것을 선택한 것인가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역사와 인생이라는 것을 굳이 창조하셔서 묵시의 현실을 죄와 은혜와 구원 등의 소재 등을 사용하셔서 설명하고 계신 이유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없음에 불과했던 죽은 흙들이 하나님이 누리시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자리까지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때 그들의 위상이 얼마나 엄청난지, 하나님은 노파심에서 역사와 우주까지 창조를 하셔서 ‘너희들이 어떻게 존재가 되었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는지 분명하게 알고오라’고 우리를 이 역사와 우주 속에 잠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자기들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스스로 챙겨서 주장하는 것이 죄인 것이기 때문에 그 대단한 하늘의 존재들이 자신들의 존재의 뿌리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 마귀가 제 분수와 제 자리를 모르고 하나님과 맞장을 뜨려고 했던 것과 같은 우스운 일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영원을 살 존재들을 이 역사와 시간, 공간과 우주 속으로 내려 보내셔서 그들의 처음자리를 확실하게 경험케 하시고 그들이 어떠한 은혜로 하늘의 존재가 된 것인지를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시고 경험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캔버스는 철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와 인생은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한 이해와 설명용인 것이지 여기에서 행해지는 행위와 업적과 공로에 의해 결과가 도출되고 생산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부터 출발을 시키시는 것이고, 애굽에서부터 출발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애굽은 죄악의 세상의 모형입니다. 애굽은 노아의 세 아들 중 저주를 받은 함의 후예들이 만든 나라이지요? 함은 덮으심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대표 모형입니다. 덮으심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 측의 자격과 조건에 의해 맺어지는 결과가 달라진다는 율법주의요 인본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인간들의 노력과 열심에 의해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차등 있게 주어지는 곳입니다. 그걸 마귀의 나라라고 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애굽의 부추와 마늘과 고기였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이 자기들이 원하는 그런 것들을 더욱 풍성히 공급해 주는 그런 저급한 것인 줄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애굽에서 즐기던 것을 줄 양이었으면 뭐 하러 애굽에서 건져내십니까? 그냥 애굽에 놔두시고 애굽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시면 되지요. 그런데 굳이 거기에서 끌어 내셨을 때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서도 애굽의 생활을 그리워했단 말입니다. 그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고도 구원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을 통과시키시며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의 역사와 인생을 통하여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그들에게 다시 율법이 주어지고, 옛 사람들이 다 죽는 일과, 놋 뱀 사건과, 성막 짓기와, 모세의 죽음 등의 그림이 그들의 역사 속에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주인공이 되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떼를 쓰며 하나님을 원망했지요?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만 충실하게 하면 얼마든지 얻어먹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잖아요? 마귀의 나라인 애굽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자기들이 일한만큼 얻어낼 수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택할 때 그 곳을 애굽과 같다고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 애굽에는 부추와 마늘과 고기 등의 자기들이 먹고 싶은 것이 다 있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살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율법을 주지 않은 상태니까요. 성경이 광야의 이스라엘이 애굽의 부추와 마늘과 고기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애굽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있는 곳이고 그들이 종살이만 충실하게 하면 그들이 원하는 그것을 얻어 낼 수 있는 그런 곳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고 보니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얻을 수가 없고 은혜에 의해 거저 만나라는 것이 주어지는데 그게 별로 탐탁치가 않은 겁니다. 그러나 그 만나야 말로 그들을 살릴 수 있는 하늘의 양식임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종살이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것을 죄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을 마귀의 세간이라고까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들은 그게 죄인 줄을 몰라요. 그래서 거기서 건져내 주었더니 자꾸 그리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게 죄인들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귀의 종들은 절대로 하나님 나라, 즉 약속의 땅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애굽이라는 나라의 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그려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도 애굽에서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애굽왕 바로를 ‘똑같다’라고 선언해 버리신 것입니다.

 

(민14:22~23)

22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애굽의 풍요를 그리워하던 이스라엘을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않은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열 번만 하나님을 시험했나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열 번이라고 굳이 산술적 표현을 사용하시는 겁니까? 애굽에서 열 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던 자가 누구입니까? 애굽왕 바로입니다. 당시 한 나라의 왕은 그 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애굽 왕 바로는 애굽 전체를 모형하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죄악의 나라, 마귀의 나라 애굽과 이스라엘을 똑같은 자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 번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광야에서조차 애굽왕 바로처럼 개차반으로 살던 자들의 자아를 결국 죽여 버리시고 당신이 준비하신 안식의 땅으로 끌고 들어가시는 것이 이 역사와 인생이 그려내고 있는 그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이 끝까지 구원 받아야 할 존재로, 율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마귀의 세간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발생되고 성취되었다는 것을 역사와 인생 속에 그려내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지, 어떻게 하면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확장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침서나 교훈서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과 세상이 애굽의 모습으로, 어둠의 모습으로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열심만이 오롯하게 영광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도 못한 이스라엘에게 유익 운운하는지 아시겠지요?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 속에서 그려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애굽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부터 미리 암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하나님 백성인 아담과 하와의 입에 선악과를 물려서 밖으로 쫓아내시는 것에서부터 구원이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인지를 그들의 인생과 그들이 엮어내는 역사를 통해 그려 내십니다. 선악과를 물고 마귀의 종이 되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보암직도 하고(안목의 정욕) 먹음직도 하고(육신의 정욕)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이생의 자랑)’이 세상 것들을 추구하며 오직 자신들의 ‘하나님처럼’의 삶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아담들의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을 손수 찢어 버리시고 당신 아들의 피로 짠 의의 흰옷을 입혀내시는 그 은혜의 그림이 에덴동산에서부터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 은혜의 필연성을 그려내실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형하고 있던 이스라엘이 어떤 지경에 빠져 있었나요? 빛이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움들이었습니다.

 

(요1:5,10-11)

5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역사와 인생의 본질적 내용이신 예수가 이 땅에 오셨는데 세상이 모두 구원이 필요한 어두움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건 예수라는 제목의 하나님의 그림의 배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림은 늘 거기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이 없음인 것이니까요. 그 없음에서 어떻게 있음이 창조가 되는지를 그려내는 것이 역사이고 그 그림의 제목이 ‘예수’인 것입니다.

또 반복합니다. 하나님은 그 어두움 중에서 당신이 선택하신 어떤 자들에게 복을 부으셔서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 그들의 처음자리를 확인케 하시고 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예수에 의해서만 말미암게 되는 것인가를 그려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맡음’에서의 ‘로기온’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