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성경배경사

마카비 혁명운동

은바리라이프 2014. 4. 21. 15:41

마카비 혁명운동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본결과,, 마카비 혁명의 원인은 안티오커스 4세의 핍박속에서 그에게 분개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로마와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하고 본국으로 퇴각하는 처지가 되었을때,, 굴욕적인 참패의 비통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돼지고기를 제우스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명령을 내려 예루살렘 성전에서 계속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공포하였다. 이것이 마카비혁명운동이 일어나게 된 당시의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다음에 더 자세히 나와있다.


안티오커스 4세는 팔레스타인의 모든 지역에 제우스를 위한 제단을 세우고 제물을 바칠 것을 명령했다. 이때 모디인(Modiin)의 제사장이었던 마타티아스(Mattathias)는 이 명령을 거절했다. 마타타아스는 그의 다섯 아들들과 더불어 안티오커스 4세에게 항거하는 '마카비 혁명운동'이라 알려진 무력투쟁을 시작했다. 그들은 헬레니즘에 반대하며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경건한 유대인들과 힘을 합쳤다. 마타티아스는 혁명을 일으킨 직후 죽게 되었고 그의 아들 유다(Judah)가 그의 뒤를 이어 혁명의 주동자가 되었다. 초기의 혁명운동의 진두 지휘를 맡았던 유다는 그의 놀라운 게릴라 전법 때문에 '마카비'(의미는 '망치')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유다는 기원전 164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하였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이 사건을 '하누카'(수전절; 요 10:22 참조)라는 명절로 기념하고 있다. 초기 단계에서는 단지 종교적인 핍박들을 종식시키려는 반란운동이었지만, 전쟁이 확대되면서 그러한 한계를 넘어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려는 혁명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유다 마카비의 예루살렘 점령은 전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지만 셀룩커스왕조의 군대는 '아크라'라는 예루살렘 내의 한 요새에 여전히 주둔하면서 대치상태를 유지하였다. 기원전 160년 유다 마카비가 엘리아사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자 그의 형제 요나단(Jonathan)이 혁명의 주도권을 쥐었다. 요나단은 혁명운동을 재정비하여 셀룩커스 군대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이스라엘의 북동지역과 트랜스요르단 지역들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153년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였고, 그것은 앞으로 있게될 새로운 왕조(하스모니안왕조) 창설의 기초를 놓는 일이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셀룩커스왕조의 정치적인 음모에 의하여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요나단의 뒤를 이어 혁명의 지도자가 된 시몬(Simon)은 오랜 투쟁 끝에 기원전 141년 셀룩커스왕조로부터 완전히 정치적인 독립을 성취하였다. 그는 게셀과 욥바를 점령하여 유대인들이 바다를 통하여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