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성경배경사

신약의 유대적 배경-신약배경사(조갑진 교수)

은바리라이프 2014. 4. 15. 11:14

신약의 유대적 배경

 

신약배경사(조갑진 교수)

1m.div4차 조진성

2014. 3. 11 ()

 

아주 오랜 시간동안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직접 못 박은 살인자이고,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한 범죄자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유대교와 유대인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바로 예수님 본인이 유대인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개혁을 원하셨지 다른 종교를 세우신 것이 아니었다.

 

1. 유대교: 헬라적 유대교와 유대적 유대교

팔레스타인 유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공통적으로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바벨론과 애굽으로 잡혀간 포로들의 후손이다. (포로로 끌려가지 않은 이스라엘사람들은 이방인과 통혼하여 사마리아인이 되었다.) 그 중 귀환하여 예루살렘의 재건에 동참하고 팔레스타인 지방에 정착한 이들은 보다 보수적이며 히브리어 성서를 사용하는 유대적 유대교를 형성하였다.

 

(1)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주전 538년 예루살렘 재건이 시작된 후에도 자신들의 새로운 터전에 눌러앉은 이들로써 지중해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은 이방인들과 섞여 지냈지만 이방 지역에서도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대 신앙을 지키며 이방인들에게 유대 문화를 알렸다.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중심지는 필로가 살았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다. 이곳과 더불어 리비아의 키레네에서 유대인들은 독자적인 정치 단체를 형성하였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비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유대교를 전했으며, 이 때에 두 개종자 그룹이 생겨났다. 첫째, 유대교로 들어와서 할례를 받고 전 율법을 지키는 개종자들과 둘째, 유대교의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고백을 받아들이지만 유대교의 율법 규정들을 개별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소위 경건한 자들로 후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

 

(2) 70인역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헬라어를 생활 언어로 사용하며 히브리 성서를 읽지 못함에 따라 점차 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후 주전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70인역이 번역되었으며, 이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표준성서가 되었다.

70인역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예배를 위해 번역되었으나, 뿐만 아니라 헬라 문화를 기반으로 한 유대교 신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학자들이 성서에 대한 연구를 내놓았고, 이로 인한 신학의 발전은 유대교가 민족종교에서 세계종교로 거듭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3) 유대의 유대교와 헬레니즘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여전히 히브리어를 사용한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이들도 회당에서만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일상생활 시엔 아람어 사용했다. 따라서 이들 역시 아람어 성서가 필요했고, 주후 1세기 아람어역 성서인 탈굼이 출간되었다.

또한 팔레스타인 역시 셀류쿠스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헬라어를 폭넓게 사용하게 되었다. 비록 헬라의 신들을 섬기라고 강요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에게 대항해 주전 167-164년에 마카베오 혁명을 일으켰고, 무려 혁명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이미 헬라의 문화가 (통치계급을 중심으로) 깊게 스며든 후였다.

 

2. 유대교의 구전전승

기독교 이전 시대의 유대인들은 모세 때부터 전해 내려온 율법들을 율법사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했으며, 여기에 랍비들의 율법 해석인 할라카가 더해졌다. 율법에 대한 연구를 모아 주후 2세기말 미쉬나가 만들어졌으며, 이것은 다른 주석집인 게마라와 합쳐져서 5,6세기경 탈무드가 되었다. ‘미드라쉬는 탈무드에 포함되지 않은 해석 자료로써 다양한 성서 본문에 대한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주후 12세기까지의 기록이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일상어로 히브리어 대신 아람어가 쓰인 주전 500년 무렵부터 아람어 성서인 탈굼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위의 할라카, 미쉬나, 게마라, 탈무드, 미드라쉬, 탈굼 등은 특정 시기 또는 특정 랍비에 의해서 주창되고 기록되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그 이전부터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3. 유대의 종교 분파

초기 유대교는 교리 등의 요소가 상이한 여러 분파들의 집합체였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후부터 계속된 분파 간 논쟁은 랍비유대교가 형성되는 주후 200년까지 계속되었다.

 

(1) 사두개파

사두개파는 솔로몬 왕에 의해서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사독의 후예로 추정된다. 사두개파는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하여 기득권 세력을 뒷받침함으로써 성전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에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토라를 중시하여 그 말씀을 엄격하게 지켰다. 그들은 구전 전승이나 장로들의 유전을 기록된 말씀과 같은 등급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모세의 오경만 중시하고 예언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굉장히 보수적이어서 성서의 해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했다. 사두개인들은 전통을 존중하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들로서 예배의식이나 교리의 개혁을 싫어하고 메시아적인 운동을 다 거부하였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안식일이 아주 신중하게 준수되어야 한다고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엄격하게 생각하였다. 주어지는 벌은 율법의 규정에 일치해야했다. 그래서 유대 법정에서 내리는 사형선고는 언제나 돌로 쳐 죽이는 것으로 집행되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다시 파괴되고 성전이 무너진 후 사두개파도 같이 무너져 완전히 사라졌다.

 

(2) 바리새파와 서기관

바리새파는 쉽게 정의내릴 수 없다. 이들은 제사장들이 아니었으며, 랍비로 통칭되지도 않았다. 이 명칭은 대체로 사두개파와 대조할 때에 사용되었으며 그 외에는 현자들또는 서기관들로 불리운 듯하다.

바리새인들의 숫자는 약 6000명 이상으로 그들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통하여 율법의 제자가 행해야 하는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그럼으로써 백성들 가운데서 높은 존망을 얻었으며, 사두개파와는 달리 토라와 아울러 선지자들의 책을 권위 있는 성경으로 인정했다. 정치, 문화, 사회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깨우침을 얻기 위해 성서의 구전 해석을 매우 강조하였고, 예수님은 이것을 두고 사람의 계명을 가르친다하여 비난하셨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바리새파와 서기관이라는 용어는 사라지고 랍비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으며, 이후의 성전과 제사가 없는 유대교의 주도권을 잡았다.

 

(3) 헤롯당

헤롯당은 헤롯의 후손들 중 하나가 다시 보좌에 오르기를 바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분파였다. 헤롯당은 자신들이 죽인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견제하기 위해 예수님을 대적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협조했다. 또한 누가는 헤롯과 로마의 협력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예수님을 처형한 죄를 유대의 군중과 바리새파에게 가중시켰다고 비난한다.

 

(4) 열심당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시몬이 포함되었던 열심당은 바리새파의 한 분파로 시작되었으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친로마파를 암살하는 등의 폭력성을 띄었으며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될 당시 모두가 떠난 예루살렘을 마지막까지 수호한 비주류의 과격한 정치적 분파였다.

 

(5) 에세네파

에세네파 사람들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에 이은 제 3의 종파로 사두개파, 바리새파 사람들과는 달리 적극적인 정치적 생활에서 물러나서 독자적인 종교운동을 전개했다. 에세네파의 뿌리 기원전 167년 마카베오 봉기에 가담했던 하시딤으로 바리새파와 같다. 에세네파 사람들의 수는 약 4천명 정도였다. 그들의 일부는 쿰란 공동체와 같이 독신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생활을 했고 또 다른 일부는 가정을 이루어 일반인들이 사는 촌락 속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의 사상과 삶은 공동체가 남긴 문서들 - 특히 1947년에 발견된 쿰란 공동체의 사해사본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너희는 광야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이사야 40:3을 근거로 광야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다. 이들은 율법을 공부하고 거기에 따라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 주의 길을 준비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으로 자신을 이해했다.

쿰란 공동체에 소속된 자는 개인의 소유를 다 정리하여 공동체에 바치고 공동체의 조직을 인정하며 정결법을 준수했다.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너무나 율법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을 불결한 것에서 깨끗하게 하려 했고, 독신으로 생활했다.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공동체의 규정을 외부사람에게 발설하지 않고 비밀을 지켰다. 비밀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유대 전쟁이 끝나고 모두 잡혀서 고문을 받았지만 아무 말도 안 하면서 웃는 얼굴로 죽었다고 한다.

 

4. 묵시사상

유대교의 묵시문학은 한마디로 헬레니즘에 대한 저항의 열매였다. 팔레스타인의 정치적인 상황 변화 속에서 반헬라주의자였던 하시딤의 역사해석이 담긴 묵시는 부활과 심판에 대한 계시적 말씀이었다.

 

(1) 다니엘서: 헬레니즘 시대의 묵시록으로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가장 오래된 책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은 다니엘서이다. 이 책은 히브리 정경에서는 예언서에 포함되지 않고 성문서에 포함되어 있다. 묵시 문학에서는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을 예언의 형식으로 자세히 열거한다. , 묵시서는 역사적 내용 대신에 과거의 역사를 가공의 예언적내용으로 제시하며, 저주와 축복의 선포 대신에 미래 사건들에 대한 환상적인 예고가 주어진다.

 

(2) 모세의 승천: ‘모세의 유언이라고도 알려진 이 책의 연대는 보통 주후 1세기로 측정되지만, 이 책이 주전 2세기 이후의 전승들을 개정한 것이라고 믿을 근거가 있다. 이 묵시서는 모세가 승천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을 기록하고 있다. 다니엘서와 에녹1서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의 현인이 마지막 때에 대해 예언한다.

 

(3) 성전 두루마리: 쿰란에서 발견된 히브리어 문서로서 사해 두루마리 중에서 가장 긴 것이다. 그 두루마리는 주후 1세기에 기록되었지만 그보다 더 오래된 단편들은 그 책이 주전 2세기 후반 이전에 저술되었음을 증명해준다. 이 본문에서 화자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저서에 신적 영감을 부여한다. 성전 두루마리의 주요 관심사는 할라카, 희생 제사와 제물에 관련된 규정들, 정결에 관한 방대한 규정들이다. 이 중 정결에 관한 규칙은 바리새파의 규칙보다 더 엄격하다.

 

(4) 전쟁 두루마리: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전쟁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독특한 묵시적 글이다. 이 책은 거룩한 전쟁의 주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며,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전쟁이라는 행동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에 앞서 일련의 전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빛의 아들들의 군대 편성과 무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5) 종규 교범과 다마스커스 문서: 종말론적 종파인 에세네파의 공동체들은 규칙들과 법규들의 복합물을 만들어냈다. 자발적으로건 명령에 의해서건 에세네인들이 추방되어 독립된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게 됨으로써 이러한 현상은 더 심화되었다. 두 개의 문서가 현존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러한 규칙들과 법규들이 기록되어 있다.

 

5. 예수님과 유대교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을 설명하시고 그것을 일상생활에 적용하시는 등 랍비처럼 행동하셨다고 증거한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편협한 율법주의와 그에 따르지 못하는 그들의 삶에 반대하셨지 유대교 그 자체를 반대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록 새로운 접근법이었을망정 토라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지 않았다.

 

6. 유대교와 초대교회

예수님 당시와 사도행전 초반부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신실한 유대인이었으며, 그들은 성전 예배에도 참여했다. 따라서 이 초기 시대의 기독교는 유대적 기독교라고 정의된다. 하지만 개종한 헬라인들이 기독교로 유입되며 유대교와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기록된 주후 65~85년 즈음엔 이미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서로를 별개의 집단으로 생각하였으며, 2세기 초엽에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결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