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21) 일곱 귀신 이야기
(마12:38~45)
38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 하나이다
3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41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 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42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모든 인간은 선택으로 점철된 인생을 삽니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이다’라는 명제는 일견 옳아 보입니다. 관계를 맺을 사람을 선택하고, 사건을 선택하고, 진로를 선택하고, 사물을 선택하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며 사는 것이 보편적 인간의 일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심지어 인간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스스로에게 유리하게 결정지어지도록 종교행위를 빙자해서 열심히 빌기도 합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그러한 자신의 선택의 용이를 위해 자신의 종교와 신을 이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수많은 선택의 미로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선택이라는 것은 질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대학을 갈 것인가? 어떤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직장을 선택할 것인가? 등등 선택의 전제는 항상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는 층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를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은 어떤 부서에서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선택에도, 그 선택을 유발하는 인생의 질문에도 층위와 서열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이라는 것을 유발하는 인생의 질문 중 가장 상위의 질문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우선 어떤 선택을 해결해야 수많은 하위 선택의 가능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섹스피어의 소설 햄릿에 나오는 그 유명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입니다.
일단 죽음이냐 삶이냐를 선택을 해야 그 나머지 선택이 가능해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삶’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요 사회학자인 에릭 프롬(Erich Fromm)은 그의 또 다른 명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이 삶과 죽음의 선택 다음에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선택을 ‘소유 형 인간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존재 형 인간으로 살 것인가?’라고 했습니다. 프롬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는 전적으로 소유지향과 이윤추구라는 것을 중심 가치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고 정확한 진단을 내립니다. 모든 인간은 돈이나 명예, 권력 등에 대해 무한한 탐욕을 갖고 삽니다. 한 꺼풀, 두 꺼풀 껍질을 열심히 벗겨가도 결국에는 알맹이를 만날 수없는 양파의 모습처럼 인간의 욕망은 무한대입니다. 모두가 더 많은 물질적 수단과 더 많은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데 만족은 얻지 못한 채 그 추구의 결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인간들의 그 소유에 대한 추구와 집착의 대상이 점점 확대되어 정신과 지식과 사랑과 신앙의 영역으로까지 침범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추구 대상의 본질과 무관하게 그 추구대상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였느냐의 여부로 승패과 성패를 판단하는 삶을 삽니다.
예를 들면 학교 강의시간에 배운 것들을 달달 외워서 암기하는 것을 공부로 생각하는 학생들, 소유 양식에 젖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암기하여 소유화하기 전에 ‘공부는 왜 해야 하는 것이며,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사유가 먼저 있어야 함에도, 소유 형 인간들의 소유 양식에 젖은 사람들은 그저 자기 것으로 만들어 소유하는 것에 급급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독서를 할 때에도 책의 결말과 주요 사상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줄거리에 끌려 다니는 사람, 역시 소유 양식에 젖어 있는 사람입니다. 독서라는 것은 모름지기 그 책을 쓴 저자의 마음을 읽어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이 주는 정보만을 소유하겠다는 태도는 이기적인 소유 지향적 사회의 보기 싫은 단면입니다.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깊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소유 형 인간들이 추구하는 소유 지향적 삶의 반대편에 있는 삶은 무엇일까요? 에릭 프롬은 그것을 존재 지향적 삶이라 합니다. 존재 지향적 삶이란 소유에 의해 끌려 다니는 삶, 즉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 때문에 행복해 하고 불행해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 있고 없음이나 외적 환경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나 자신’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소유 지향 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소유라는 대상이 사라지거나 줄어들게 되면 상실감을 느끼게 되지만 존재 지향 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소유의 변화에 의해 수시로 행복과 불행의 다른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소유를 지배해야지 소유에 의해 인간 존재가 끌려 다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소유 지향이 법으로 존재하는 소유의 도시에서 빠져나와 존재 지향의 법으로 존재하는 존재의 도시로 이주를 해야 한다고 에릭 프롬은 피력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존재의 주체적 독립을 위해 많은 선행과 사회 변혁의 운동에 동참을 해 나가야 한다고 현대 사회에 처방전을 내어 놓습니다.
‘소유냐 존재냐’에서 가장 오롯하게 솟아있는 대 주제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소유는 사용에 따라 감소하나 존재는 실천을 통해 증대 한다’입니다. 인간은 소유의 증대를 목표로 삼아 살아서는 안 되고 인간 존재 자체의 가치와 질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떠세요? 백번 맞는 말 같지 않습니까? 오늘 날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건전하고 건강한 교회들의 설교를 듣는 것 같지 않으세요? ‘소유 지향적 삶, 즉 기복주의, 성공주의, 번영의 신학을 탈피하여, 인격을 도야하고 선행을 실천하여 우리의 존재 자체를 자랑스럽게 가꾸자’ 이것이 에릭 프롬의 주장이자 현대 개혁 교회의 건강한 외침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모든 것을 다 뭉뚱그려 ‘죄’라 합니다.
인간은 소유를 늘이고 성공을 추구하며 행복을 얻도록 창조되지도 않았지만 자기 존재의 성숙과 발전과 향상을 위해 창조된 것도 아닙니다. 쉬운 말로 역사는 인간이 착해지고 순결해지고 헌신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릭 프롬은 그러한 삶을 존재 지향적 삶으로 분류를 했지만 성경은 그것 또한 소유 지향 적 삶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죄 성은 자기 존재의 착함이나 선함 등도 소유의 대상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처럼 무소유의 삶을 자기의 소유로 삼기도 하고, 청빈한 삶을 자신의 소유로 삼기도 합니다. 사회 개혁을 위한 투쟁을 자기 소유로 삼기도 하고, 봉사나 구제도 소유로 꼭 붙듭니다.
성경은 그러한 행위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러한 행위를 하는 그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고전13:3)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 모든 것을 다 털어서 구제를 하는 행위와 남을 위해 내 몸을 불사르도록 내어 주는 헌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그 사랑을 아는 이의 행위가 아니라면 다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행위는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이라는 사랑의 본체를 증거 하는 것이어야지 그 자체의 성숙이나 발전이나 변화를 보여주는 용도의 행위가 아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인간의 자기 평판, 자기 인기, 자기 자랑 챙기기의 일환으로 드러나는 그 어떤 모양의 선한 모습도 다 죄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오히려 소유의 획득을 지향하는 기복주의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은 순진하기라도 하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이미 들키고나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챙기는 것을 삶의 주목적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소유나 힘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착함의 추구나 희생과 섬김의 삶, 무소유와 청빈 등으로 위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더 무서운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공중 권세 잡은 자인 귀신의 종으로 사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엡2:2-3)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렇지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자들이 다 귀신 들린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에 진노하신답니다.
오늘 본문의 일곱 귀신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 속에 귀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귀신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마귀의 실체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우리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자아 숭배’의 삶인 마귀 적 속성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귀신들림이라는 것을 입에 거품을 물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것은 그냥 질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질병도 사망의 증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정신분열증 같은 유의 정신과적 질병만을 귀신들림으로 이해를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인간의 뇌세포는 무려 1,000억 개가 넘습니다. 그 뇌세포들이 시냅스라는 연결 장치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 시스템으로 화학 전달 물질이 흘러서 정보가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뇌 세포 속에서 일을 하는 신경전달 물질 중에 도파민(dopamin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도파민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몰핀 같은 역할을 해서 감정, 동기 부여, 욕망, 쾌락 등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도파민 분비 조절에 이상이 발생하면 사람에게 다양한 질환이 생기게 되는데, 도파민의 분비가 너무 많아지면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을 일으키고 도파민의 분비가 줄어들 경우에는 우울증(clinical depression)을 일으키게 됩니다.
따라서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항 도파민 제 주사를 한 방 주면 차분해 지게 됩니다. 주님이 지금 그런 일을 하러 오신 것입니까? 주님이 겨우 항 도파민 제 주사 같은 그런 유의 일을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 말씀하셨겠습니까?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보다 본질적이며 근본적인 죄의 뿌리이자 본질의 총합을 부수고 밀어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여러 가지 그림을 통하여 거듭남의 상태와 거듭남의 모양은 하고 있으나 여전히 죄인 된 자의 상태를 비교해 보았지요? 여전히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인 상태에서 아무리 겉을 깨끗하게 하고, 선행을 하며, 종교적 열심을 부린다고 해도 그러한 상태에서 격발된 착함과 열심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카운트가 되지 않는 죄에 불과한 것임을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그게 곧 거짓임이 폭로되는 닭들의 비상이라고 했지요? 예수님 당시 그러한 삶을 살던 대표적인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눅18:11~14)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 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열심히 기도하며,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했으며,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도 않았던 바리새인을 주님께서 불의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며 멀찌감치 서서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이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을 했던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습니다. 주님은 그토록 열심히 종교 행위를 했고 그토록 열심히 착한 일을 행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요8:44)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이렇게 착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기의 영광과 가치와 자랑과 만족을 챙기기 위한 모든 시도가 귀신들린 자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 존재의 주도권을 귀신이 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43절 이하를 보세요.
(마12:43-45)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귀신이 사람의 허락도 안 받고 자기 마음대로 나갔다 들어갔다 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그 귀신이 애초에 있던 곳에서 왜 나갔느냐를 밝히는 것은 무의미한 수고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것을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이 귀신의 들고 나는 것에 전혀 관여를 할 수 없다는 사실 뿐입니다. 제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갔다 합니다. 마치 감기를 비롯한 질병이 자기 마음대로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하는 것과 비슷하기도 하고, 도박이나 알코올이나 마약 등의 중독 들이 자기 마음대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현상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어떤 상태에서도 객체로서, 쉬운 말로 종으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위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세요.
(마12:27~29)
27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 하였느니라
29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보시다시피 구원받기 전의 인간은 마귀의 세간일 뿐입니다. 마귀 집의 가재도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의 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은, 그 모양이 아무리 깨끗하고 훌륭해 보여도 마귀의 행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던 ‘죽느냐 사느냐’ 혹은 ‘소유냐 존재냐’등의 질문에 대한 선택도 결국 인간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자기의 주인에 의해 선택을 강요당하며 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세간은 마귀의 선택을 좇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좇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종은 선택의 여지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 스스로의 의지와 결정으로 선택을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예전에 ‘소비자 연구 저널’지에 콜로라도주립대의 매닝(Manning)교수의 '왼쪽 자리 효과(left digit effect)'라는 연구 논문이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소비자들은 가격표 왼쪽자리의 변화에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100불짜리 물건의 가격표를 99불 90전으로 바꾸면 소비자들은 100과 90을 비교하여 그 물건의 값이 굉장히 싸게 내려간 것으로 인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현대인들이 왼쪽부터 글을 읽는 습관이 들면서부터 인간들 속에 자리 잡은 심리상태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학생들에게 2불짜리 볼펜과 4불짜리 볼펜을 제시하고 4불짜리 볼펜의 값만 3불 99전으로 내렸더니 44%의 학생이 2불짜리를 놔두고 3불 99전짜리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백화점의 상품진열, 거울의 배치, 화장실의 배치, 시계의 은닉 등등은 이러한 소비심리학을 근거로 하여 아주 과학적으로 구축된 선택의 강요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렇듯 연약하고 우매한 인간은 늘 선택을 강요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 속의 인간은 늘 죄만 선택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음의 길인 소유 형 삶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죄만을 선택하게 만드는 그 마귀를 결박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마귀의 집에서 구출해 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것을 구속이라 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가 선택하게 될 그 하나님의 뜻은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를 믿는 것으로 수렴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선택은 늘 옛 자아가 망하는 쪽으로 점철이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요한이 그 구속의 현실을 어떻게 표현을 하나 보세요.
(골1:13~14)
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요일3:8)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일, 마귀의 세간을 늑탈해 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전부 귀신들려 귀신의 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그들 중, 창세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 백성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 마귀의 도시에서 구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이며 구속사인 것입니다.
(롬6:16)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렇게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죄에 순종하는 죄의 종으로, 마귀의 세간으로, 귀신 들려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귀신들린 자의 삶으로 하나님의 의가 침노해 들어와 그 귀신을 잡아 결박하고 귀신의 세력, 죄의 세력에서 구출해 내어 의의 종으로, 순종의 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인간 측에서의 공로나 공헌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침공을 당한 신자의 삶 속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일어납니다. 자기 자신의 신 됨,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인기와 평판과 자랑과 만족을 위해 살기 원하는 마귀 적 속성이 하나님의 은혜의 철장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이들의 삶은 이 땅에서 자기의 영광이나 인기나 스스로의 만족까지도 챙겨 가질 수 없는 삶이 되고야 맙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침공을 받지도 못한 자들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아담 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랑과 헌신과 섬김과 봉사 등을 흉내를 내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깨끗이 소제 되어 있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어디 다른 거처가 없을까?’하고 자기 마음대로 외출을 했습니다. 물 없는 곳, 즉 은혜의 생수가 없는 곳을 찾아 다른 거처를 마련하고자 했는데 물이 없는 곳에는 전부 귀신들이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 왔더니 깨끗하게 소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귀신은 그 사람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친구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더 난장판으로 삽니다.
여기에서 일곱 귀신이란 일곱 마리라는 산술적 표현이라기보다는 7이라는 완전수로 최악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성령의 침입으로 그 마음이 은혜로 채워지지 않고 비워져 있는 상태에서 깨끗함을 흉내 내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일곱 귀신 들린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불교나 동양 철학 등의 참선 같은 것을 생각해 보세요. 참선이라는 것은 번뇌의 원천이 되는 마음을 아예 들어 내 버리는 수련을 말합니다. 그것을 마음을 비운다고 하고, 어려운 말로 몰아(沒我), 혹은 무아(無我)라 합니다. 그 상태가 되면 삶이 정갈하고 깨끗해진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무소유의 삶 같은 것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소제된 마음에서 깨끗하고 착한 삶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깨끗하게 소제된 집에 일곱 귀신이 사는 형국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비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비움은 ‘성령으로 채워짐’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채워진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귀신 세상의 삶의 원리와 욕망이 빠져 나가는 것을 비움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는 바로 승려들의 비움과 같은 유의 비움으로 자신들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지금 누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본문 38절을 보시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 이야기가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경 박사들입니다. 그리고 그 착한 행위, 종교 행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말씀을 하셨고, ‘너희는 아직까지 마귀의 세간’이라 말씀 하셨으며, ‘너희가 바로 일곱 귀신들린 자들’이라고 일갈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거짓 비움과 거짓 깨끗함으로 다른 이들과의 비교 상대적 우월감을 누리는 교활한 행위를 성령 훼방이라고까지 하십니다. 그리고 그건 절대 사함을 입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못을 박으십니다.
오늘 본문 바로 위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 훼방의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마12:31~32)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하나님 나라는 용서의 법칙에 의해 성취되고 운영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살 자격이 있는 존재는 ‘왜 나는 용서받아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자인가?’를 처절하게 자각하고 인식하고 있는 자여야 합니다.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용서를 받아야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그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용서의 필요성과 필연성을 절절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은 다른 이방인들과 죄인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차별성을 늘 가슴깊이 간직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착해지려 애를 썼고, 더욱 경건해 지려고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니까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청천 벽력같은 소리를 하시는 겁니다. ‘너희들은 성령을 훼방하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운영은 ‘오직 은혜, 용서의 법칙’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31절을 잘 보시면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을 심판하셔야 하는 심판 주의 입에서 ‘사하심’ 즉 ‘용서’라는 새로운 법칙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일방적이고 확정적인 선언입니다.
사람은 늘 요동치는 욕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걸 죄라합니다. 그 요동치는 욕망은 악한 욕망과 선한 욕망으로 나누어집니다. 좀 더 명확히 표현을 하자면 ‘선해 보이는 욕망’입니다. 사람은 그 욕망에 의해 선택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의 마음은 욕망의 지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의 주인, 세상의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절대 소멸되지 않습니다. 마치 물이 가득 들어 있는 물 풍선을 이리저리 누르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악한 쪽에서 선해 보이는 쪽으로 다시 선해 보이는 쪽에서 악해 보이는 쪽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닐지언정 사라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소유에 관한 욕망이 악한 욕망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 욕망의 에너지를 착한 일 행하기나 도덕과 윤리 지키기나 청빈한 삶 살기, 혹은 무소유의 삶 살기 등으로 옮겨 버립니다. 겉으로는 선해 보이지만 그것도 역시 인간의 자기 가치 챙기기의 욕망인 것입니다. 그것이 귀신들린 자의 삶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기 전에 인간들이 스스로의 선과 옳음을 먼저 챙겨 버리면 반드시 그 인간은 그 자신의 행함을 자기의 점수로 챙겨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공로로 업적으로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 성령 훼방의 이야기가 어디에서 연결이 되는 것인지 아세요? 이 충돌의 발화지점은 마태복음 12장 22절에 나오는 귀신들린 벙어리 치유 사건입니다.
(마12:22~24)
22그 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 하느니라 하거늘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귀가 먼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셨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귀신이 들려 눈이 멀고 귀가 먼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요, 저주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날 때부터 소경된 이를 가리키며 ‘이가 누구의 죄로 이렇게 된 것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그러한 저주받고 부정한 자를, 율법과 행위의 법칙을 넘어서서 용서의 법칙에 의해 자기 마음대로 정한 자로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유대주의자 들에게 있어서 정함과 용서받음이라는 것은 인간 측에서의 열심과 노력이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노력과 열심을 내어 놓지 못한, 부정하고 더러운 자들은 다니엘서 7장의 그 심판 주, 인자가 심판을 해 버릴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노력도 행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용서가 주어질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기대해 왔던 인자이신 메시아는 그렇게 오시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그 축귀 사건을 ‘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한 사건’이라고 매도해 버린 것입니다. 인자이신 메시아가 한 것이 아니라면 귀신의 왕이 행한 것이니까요.
그 때 예수님께서 성령훼방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언급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죄와 훼방이 용서의 법칙에 의해 은혜로, 선물로 덮이는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아무것도 행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가는 그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아담들이 ‘왜 하나님처럼 강하게 된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과 힘과 의지를 묵살 당한 채 수동적 약자의 모습으로 내려가야 하느냐?’고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는 것이 바로 성령훼방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건 주님이 이사야서 53장의 예언대로 연약한 순으로, 감추어진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이 오셔서 ‘바로 그 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가 진짜 메시아인 것이며 실패의 현장으로 보였던 십자가의 현장이 승리의 현장임’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의 시대가 왔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용서의 법칙, 덮으심의 법칙을 모독하는 자들은 성령훼방 죄를 범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므로 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15:45)
45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은 살려주는 영이랍니다. 여러분은 여기에서 ‘살려주는’이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보셔야 합니다. 살려준다는 말은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기분이 나쁜 말입니다. ‘왜 살아 있는 내가 살려 줌을 받아야 하는가?’ 그런데 성경은 주님을 가리켜 살려주는 영이라 합니다. 그 말은 성령이 아니면 절대 자력으로 살아날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는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귀신은 성령에 의해서만 쫓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성령이 채워 버리십니다. 그래서 다시는 쫓겨나간 귀신이 일곱 귀신이 아니라 칠십 귀신을 끌고 와서도 다시 그 자리를 탈환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제 성령이 임한 자의 삶은 절대로 착한 척, 훌륭한 척, 깨끗한 척, 열심인 척하며 다른 이들의 존경과 인기와 평판을 챙길 수 없는 삶으로 끌려가게 된다는 말인 것이고, 이 세상의 힘을 행복의 근거로 삼아 이 세상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살 수 없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는 반드시 그렇게 완성이 되게 되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이 세상 적 관점으로 볼 때 고달프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걸 하나님 나라가 임한 자의 삶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12:28)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 하였느니라
그렇지요? 하나님 나라, 즉 천국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귀신이 쫓겨나가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옛 사람의 마음속에 가득 차있던 자기 욕망의 지형도를 주님께 빼앗기고 자기 희망과 야망과 소원과 뜻을 부정당하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뜻 보면 성도는 메시아를 만난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사로잡혀 지지리도 복도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아로 위장한 가짜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겠습니까?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반기고 좋아하는 모습으로 오겠지요?
(고후11:14~15)
14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인간은 날 때부터 마귀의 종으로 오기 때문에 생래적으로 마귀의 뜻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를 우호적으로 접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번영의 신학이니 뭐니 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의 획득을 돕겠다고 하는 조엘 오스틴 같은 사람들이 인기를 끄는 것입니다. 광명한 천사니까요. 그런데 더욱 더 무서운 것은 마귀가 양의 탈을 쓰고도 온다는 것입니다.
(마7:15-17)
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귀가 순결하고 연약하고 착하고 여린 모습으로도 와서 그러한 것들로도 인간의 만족과 영광을 챙기게 독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놔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 눈으로는 알곡과 가라지의 판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착하고 순결하고 열심 있는 종교 행위를 내어놓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 아니면 지옥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마태복음 7장의 ‘주여 주여’라고 소리 지르며 항변한 마귀의 자식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들이 아무리 좋은 열매 비슷한 가짜 열매를 내어 놓는다 할지라도 나는 안 속는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뿐이다’라는 말씀 속에 함의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분명 주님이 보시기에는 나쁜 나무인데 좋은 열매 비슷한 것을 가지고 와서 자기가 맺은 열매라고 우긴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위에도 똑같이 나무와 실과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아, 이 나쁜 나무들아 제발 착한 척 좀 하지마라’ 이게 나무와 실과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마귀의 나라는 절대 마귀 나라 백성들의 열심에 의해 전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알세불의 나라에서 귀신들이 서로를 쫓아 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2장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나라를 바알세불의 나라로 규정해 버리시는 것이고, ‘그 나라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 한다면 절대로 너희는 바알세불의 나라 안에서 자체적 분열을 통하여 벗어날 수 없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귀신은 성령에 의해서만, 오직 은혜로만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십자가 은혜에 의해 죄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를 질병이 치유되는 것으로, 귀신이 나가는 것 등으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신 것이 예수님의 표적이며 행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인간의 공로와 열심을 배제한 예수님의 은혜의 사역을 가리켜 ‘마귀의 행사’라 비난을 한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표적을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막16:17~18)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보세요.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지요?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의 종으로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 아들의 나라로 옮겨오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새 방언이라는 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의 비밀인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이해되어 지고 전달되어 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뱀을 집는 다는 것은 뱀을 들어 올려 내친다는 뜻인데 뱀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항상 마귀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었지요? 예수를 믿는 자들의 말씀 선포에 의해 뱀의 세력이 물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맹독이라 할지라도 성도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될 것이라는 것도 역시 사망의 대표적인 증상인 질병이 복음에 의해 정복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질병의 치유를 ‘귀신이 나감’이라고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행10:38)
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이렇게 성경은 이 세상의 힘의 원리와 인본주의 속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원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가리켜 구원이라고 하고, 그것을 귀신이 나가는 것이라 합니다. 절대 어줍지 않은 착한 일 몇 개 해 놓고 혹은 남이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아내어 자신의 만족이나 인기나 평판을 챙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낮아지고 비워지고 부인되어 연한 순처럼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감추어지고 쇠하여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흥함을 증거 하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이 뭡니까? 너희의 열심과 노력과 상관없이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너희의 죄를 속량하는 그 방법 이외에는 그 어떤 기적을 보여주더라도 너희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인 것입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어떠한 선택을 하며 살겠습니까?
요한복음 1장을 보면 그들을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요1:13)’이라 부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땅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구약에서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르죠? 그들이 가끔 이 세상에 내려와서 무슨 일을 하다 가던가요? 부동산 투기하는 천사 보셨습니까? 자식새끼 대학 문제 때문에 골머리 썩는 천사 보셨어요? 이 세상 것 손해 볼까봐 다른 이들을 경쟁자요 적으로 간주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천사 보셨습니까? 하물며 그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며 하늘나라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어요? 당연히 위엣 것으로 살아야지요. 우리를 섬길 천사도 그렇게 사는데 우리가 이 세상 것에 연연하여 살면 어떻게 됩니까?
(골3:1-3)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게 귀신의 세계에서 죽고 하나님 아들의 나라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이란 에릭 프롬의 구분처럼 소유 지향 적 삶도 아니고 존재 지향적 삶도 아닌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만을 드러내며 찬양하는 자기부인의 삶, 십자가의 삶, 즉 하나님 증거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니요, 하나님만이 전부이신 삶, 그게 세상 마귀에게서 벗어난 이들의 삶의 지향점이어야 합니다. 여전히 ‘나’라는 우상을 삶의 중심에 올려놓고 선악구조에 의한 이러저러한 행위들 몇 개 내어놓고 ‘나는 성숙했네, 나는 발전했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네’하지 마세요. 그게 일곱 귀신 들린 자들의 삶입니다. 더 낮아지세요. 더 내려가십시오. 더 벗으세요. 더 털리십시오.
'김성수 목사 > 비유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유(23) 왜 못 알아들을까?(I) (눅16:19~31) (0) | 2013.10.21 |
---|---|
비유(22) 천국은 사은품이 아닙니다. (눅12:13~21) (0) | 2013.10.21 |
비유(20) 닭 날개 끊어지고 독수리 등에 업혀 날다 (마13:51~52) (0) | 2013.10.21 |
비유(19) 주체냐 대상이냐 (마13:44-50) (0) | 2013.10.21 |
비유(18) 겨자씨 같은 천국의 은닉성 (마13:31~32) (0) | 2013.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