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비유강해

비유(23) 왜 못 알아들을까?(I) (눅16:19~31)

은바리라이프 2013. 10. 21. 13:11

비유(23)

왜 못 알아들을까?(I)

 

(16:19~31)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나사로라 이름 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 하나이다

25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지니라

30가로되 그렇지 아니 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31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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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의 ‘성경이 있는 정물’이라는 작품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목사이신 아버지 밑에서 철저한 기독교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고 그 역시 벨기에의 한 탄광촌에 들어가 7년간 목회를 했던 선교사 출신의 화가입니다. 그런데 고흐의 그림들을 보면 하나같이 전부 자기 자신의 인생의 고뇌라는 염증에서 짜 낸 고름으로 덧칠해 놓은 듯한 아픔이 느껴집니다. 고갱과의 이별로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른 뒤 그려낸 ‘붕대를 감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이라든지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해골’등의 작품들을 보면 그가 어떤 고뇌 속에서 평생을 살았으며 그러한 고뇌 속에서의 자아 인식이 어떠했는지가 절절이 배어나옵니다.

저는 그러한 고뇌하는 고흐가 너무 좋아서 대학 시절 고흐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화가인 고흐와 작곡가인 드뷔시에게 지대한 영양을 미쳐서 야포니즘(Japonism)이라는 문화현상을 발흥하게 했던, 그래서 생전에 고흐가 열심히 수집을 해 놓은 일본 에도시대의 채색 목판화의 대가 안도 히로시게의 우키요에(浮世繪)들이 아름답게 전시가 되어 있고 고흐의 해바라기 정물들과 그 유명한 신발 그림들이 멋지게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눈길을 오랫동안 놓아주지 않았던 그림이 두 개가 있었는데 바로 지금 보여드린 ‘성경이 있는 정물’이라는 작품과 ‘소설들이 있는 정물’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성경이 있는 정물’이라는 그림을 보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와서 한참을 그 앞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고흐는 두 작품 모두에서 너무 많이 봐서 구겨지고, 손때가 묻고, 나달나달하게 모서리가 닳아버린 소설을 등장시키는데 그 소설이 에밀 졸라의 ‘나의 기쁨(La joie de vivre)’이라는 책입니다. 저는 고흐의 그림을 보기 전에 이미 에밀 졸라의 책들을 아주 열심히 읽었던 터였습니다. 에밀 졸라는 철저한 무신론적 정체성을 가진 개혁적 현대소설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당연히 중세의 자투리를 부여잡고 생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를 챙기고 있었던 대다수의 유럽 종교인들에게는 쓰레기라는 평가를 받았겠지요. 그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풍자하고 조롱하듯 소설을 써내려갔던 사람입니다. 저에게는 그의 소설이 ‘삶으로 너희의 신앙을 말하라’는 일갈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목사였던 고흐의 그림 속에 바로 그 에밀 졸라의 소설이 너무 많이 읽어서 나달나달하게 닳아버린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밀 졸라는 그의 소설의 내용과 그의 삶을 일치시키려 무진 애를 썼던 사람입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드뤠피스 사건에서의 그의 행보만을 보더라도 그는 자신의 언행일치의 삶에 다소 결벽증적 집착을 보일 정도로 율법적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년들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열광합니다. 80년대에 386세대 청년들이 사상의 은사라 부르는 리영희 선생에게 열광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고흐는 중세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그러나 촛불처럼 자신을 불 태워서 종교인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타다가 꺼진 촛불로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버지로 대표되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기독교를 커다란 성경책으로 그려 놓았고 그 성경책은 이사야서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펼쳐 보임으로, 종교가 어떻게 참 신앙인을 핍박을 하게 되는지를 암시하며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 책 아래에 그려진 고흐의 영적 멘토 에밀졸라의 소설이 명료하게 축약하고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나의 기쁨이라는 책이 인간 삶의 아름다운 가치를 아주 심도 있게 다룬 책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왜 그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렸냐면, ‘이렇게 에밀 졸라식의 언행일치 적 신앙을 추구했던 고흐가 왜 일평생 자신의 귀를 자르는 등의 광기를 감추지 못하고 결국 서른일곱의 나이에 자기 머리에 권총을 쏘아 자살을 했을까?’라는 답답하고 모순이 되는 듯한 인과(因果)의 모양 때문이었습니다. 고흐의 인생에 대해 이미 자세하게 알고 있던 저는, 그가 갑자기 너무 불쌍해졌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정의와 공평과 순수와 언행일치를 그렇게 진지하게 추구했던 고흐가 그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심지어 창녀와의 동거도 마다하지 않는 삶을 살다가 결국 자신의 머리에 총알을 박는 것으로 그의 인생을 끝내버린 것일까?’ 저는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바로 그 당시 저의 신앙의 노선을 그렇게 정리하고 확정해 가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이란, 유치하게 예수의 힘을 이용하여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리영희 선생처럼, 드뤠피스 사건의 에밀 졸라처럼, 용감한 루터처럼, 간디처럼, 슈바이처처럼 가난하고 압제받는 민중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그들의 평등과 권익과 인권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이 바로 올바른 신앙인의 삶이라고, 이제 비로소 신앙인의 바른 길을 찾았노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저에게, 고흐라는 사람의 인생과 그의 그림 한 장이 커다란 파장을 일으켜 버렸던 것입니다.

‘그토록 성경을 사랑했고, 그토록 예수를 좇아 살기를 갈망했으며, 그렇게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가슴으로 품으려 했던 고흐가 왜 결국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나의 삶과 종말도 결국 에밀 졸라의 추종자인 고흐처럼 처참하게 끝날 것인가?

 

저는 성경과 인간 측에서의 열심 있는 노력이 동시에 나타나 있는 그의 ‘성경이 있는 정물’이라는 그림 앞에서 그렇게 큰 화두 하나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오랜 세월을 고민했습니다. 어떤 게 과연 올바른 신앙인의 삶인가? 기복으로 물들고 힘의 원리에 젖어버린 중세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기독교가 틀렸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는데, 고흐처럼, 무신론자인 에밀 졸라나 간디 등의 삶을 표본으로 삼아 인간과 사회의 변혁과 발전을 위해 한 몸을 던지는 헌신의 신앙은 과연 올바른 기독교가 맞는가에 대해서 너무나 긴 시간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둘 다 틀렸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되었을 때 저는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묶여있던 그 속박의 자리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복음의 세계 속을 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를 에밀 졸라나 고흐의 망령 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성경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였습니다.

 

오늘 비유 속에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라는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우리는 너무 서둘러 부자는 다 지옥가고 가난한 거지는 모두 천국 간다는 유치한 결론을 내 버려서는 안 됩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부자는 지옥가고 가난한 자는 천국에 간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가 맞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규정하고, 분류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정의는 성경이 말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정의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제가 서둘러 그러한 문자적 결론을 내리지 말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함께 공부했던 바에 의하면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단순히 이 세상의 재화를 많이 쌓아두고 소유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을 여전히 품은 채 그 ‘나’라는 우상의 유익과 발전과 성공을 위해 사는 모든 존재가 다 ‘부자’라 했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는 그의 소유의 다소에 관계없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자’라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사는 자를 가난한 자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바로 그러한 부자와 가난한 거지의 결국과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는 비유인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당시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의 구전 이야기를 약간 변형시킨 것입니다. 당시 애굽의 한 지방이었던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만들어져 전해진 이야기가 팔레스타인 유대 땅에 랍비들의 예화로 자주 쓰이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어떤 가난한 율법사와 부자 세리가 살고 있었는데 율법사는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잘 섬겨서 천국에 갔다. 그러나 부자 세리는 돈밖에 모르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아서 결국 지옥에 가게 되었다. 가난한 율법사는 이 세상에서는 못 먹고 못 입고 불쌍하게 살았지만 천국에 가서 천국의 맑은 시냇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었으나, 부자인 세리는 이 세상에서는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지옥에 가서는 그 천국의 샘에서 물 한 방울 얻어 마실 수 없었다.

어떠세요? 오늘 우리가 읽은 비유와 비슷한가요? 아닙니다. 주님은 그 비유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리신 것입니다. 선하고 착한 사람은 그들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천국에 가고, 못되고 악한 사람은 그들의 행위에 의해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를 뒤집어엎어서, 인간은 아무리 착한 일을 내어 놓아도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으면 지옥엘 가고, 아무리 한 일이 없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으면 천국에 간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비유 속에서 자기들을 지옥에 갈 부자 율법사로 바꾸어 놓으셨다는 것을 그들은 금방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는 훌륭하고 가난한 율법사라고 우기고 있었던 그들에게 있어서는 정말 자존심 상하고 불쾌한 비유가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구제에 힘을 썼으며, 힘에 지나는 연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자신들의 행위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 아님을, 자신들의 삶으로 애써 보여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그 알렉산드리아의 가난한 율법사의 이야기를 예화로 자주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청천 벽력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바로 위에 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어떤 배경 하에서 주어진 것인지를 밝히는 구절이 나옵니다.

(16:13~14)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을 하시자 바리새인들이 비웃었다고 하지요? 왜 비웃었다고 합니까?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를 증명하기 위해 행했던 구제와 선행과 율법지킴이 사실은 돈을 좋아하는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던 부자 관원의 이야기에서 부자 관원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킨 행위가 사실은 돈을 좋아하는 행위였음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나 부자 관원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고 구제에 힘쓰고 착하게 산 것은 전부 자기 자신의 만족과 인기와 명성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부자들의 행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바로 전에 바리새인들에게 주었던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말씀하셨던,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자기가 부인되어, 다른 말로 ‘나는 예수라는 친구의 죽음에 의해 예수의 친구가 된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자로 낮아져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친구 삼는 성도의 삶과 교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불의한 재물로서의 나의 삶, 부인이 되어버린 나의 삶으로 하나님의 친구임이 증명이 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유대 주의자들이요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절대 자기 자신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행위의 가능성을 굳게 신뢰하고 있었거든요.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소유와 힘을 진심으로 남에게 양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부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에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기록을 해 놓으신 것입니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실제로 아주 검소하고 청빈하게 사는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모든 바리새인들을 뭉뚱그려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기록을 해 놓은 것은 성경이 말하는 ‘부자, 돈을 좋아하는 자’가 단순히 돈이라는 재화를 사랑하고 그것을 많이 쌓은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좋아하는, 다른 말로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위상을 뽐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사는 이들에게 지옥에 간 부자의 이야기가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 그렇게 살다간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일갈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에 간 부자의 처신이 참 멋지지 않습니까?

먼저 그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이로써 그 부자가 유대인이며 유대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던 사람들입니다.

(8:39)

39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자기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주님이 바로 그 바리새인들에게 이 비유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행사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아브라함의 행사가 뭡니까? 아브라함을 흔히 뭐라고 부릅니까? 믿음의 조상이지요? 따라서 아브라함의 행사란 ‘예수를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율법지킴과 제사 등의 기특한 행위를 챙기느라 예수 믿는 믿음, 즉 은혜의 필연성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들의 행위와 업적과 공로를 내세워 자신들의 유익과 만족과 명성과 가치를 챙기려 하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뭐라고 부르시는지 보세요.

(8:43~44)

43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 함이로다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주님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는 유대주의 자들에게 ‘마귀의 자식’이라는 저주를 퍼 부으십니다. 그리고는 ‘그래서 너희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고린도전서에서의 바울의 표현으로 바꾸면 ‘그래서 부자들에게는 복음이 방언이다’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마귀의 자식은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 십자가 복음의 필연성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말하며, 그들의 행사는 율법적이며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열심을 동반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그러한 열심을 전혀 카운트하지 않으시고 지옥 불에 던져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진짜 아브라함의 자식은 어떤 자식일까요?

(9:7-8)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자녀가 진짜 아브라함의 씨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의 모형인 이삭이 어떻게 약속의 자녀가 되었지요? 도저히 불가능한 마른 막대기 같은 노부부에게서 오직 은혜로 출생을 한 자가 약속의 자손 이삭입니다. 그렇게 약속의 자손은 하나님의 은혜가 창조한 은혜의 존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짜 아브라함의 자식은 율법과 제사와 선행 등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챙기는 자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진짜 아브라함의 자식은 ‘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이삭과 같은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없음에서 있음이 된 자이니까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부자입니다. 자신을 우상 삼아 사는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런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자아의식을 폭파시켜 버리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가 지옥에 가있는 것입니다. 그 착한, 자칭 아브라함의 자녀가 지옥에 가 있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지옥의 부자는 살아생전 거지 나사로가 자기의 대문에 누워서 냄새를 풍기고 심지어 자기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는 것을 강제로 금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자신 있으세요? 위생이나 미관을 고려하여 절대 허락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착한 부자는 그걸 허락했단 말입니다.

성경은 그 거지 나사로가 어떤 지경에 있던 사람인지를 잘 그려주는데 그가 헌데를 앓았다고 합니다. 헌데라고 번역이 된 ‘헬코오’라는 단어는 ‘궤양을 앓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거지는 온 몸이 곪아 터져서 고름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심했던지 자기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해서 개들이 그 고름을 핥아 먹는데 그 개들을 쫓아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그 거지 나사로를 멀리 쫓아내지 않았단 말입니다. 이정도면 가난한 거지에 대한 부자의 배려가 대단한 것 아닌가요?

게다가 그는 지옥에서도 땅에 남아 있는 자기 가족을 전도하고 싶다는 아주 기특한 고백을 합니다. 본문 27절을 보세요.

(16:27-28)

27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 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지옥의 불 속에서,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 부자가 자기 형제들을 걱정합니다. 어디를 봐서 부자가 지옥엘 갈 사람으로 보입니까? 심지어 그는 회개의 중요성도 압니다. 본문 30절을 보세요.

(16:30)

30가로되 그렇지 아니 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회개와 전도, 구제, 그는 모든 면에서 아주 기특한 면모를 보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지옥에 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사건화 된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천국과 지옥을 가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도덕과 윤리 등을 근거로 하여 선함과 악함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왜 부자가 지옥에 가게 되었는가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당신이 무엇을 가지고 오셨다고 했습니까? 검을 가지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검으로 무엇을 끊어내시겠다고 하셨지요?

(10:34~39)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 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치 주님께서 가족 관계를 해체해 버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말씀을 하시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타락한 인간은 가족 관계를 ‘나’라는 나라의 울타리 속으로 끌어들여 그 가족들조차 내 존재의 확장 선상에 올려놓습니다. 주님은 그걸 깨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인간들의 가족관계를 해체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들을 진짜 사랑하는 것은 그들과 천국의 가족 관계를 맺는 것이라는, 성도의 새로운 가족관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돈을 좋아하는 부자는 여전히 자기 존재의 확장에 머물러 있는 자기 가족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지옥에까지 가서도 내 식구, 내 가족, 내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 세상 부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지옥에 가서도 ‘나’의 유익만을 챙기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오만한 부자 행각은 회개의 은혜 성을 완전히 무시해 버립니다. 죽은 자가 살아 내려가서 회개를 전파하면 인간의 지성과 이지로 회개가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부자는 기적이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다는 무식한 사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부자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회개는 전적인 은혜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 측에서 생산되거나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이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에서 주인이 찾아 나서서 찾아낸 것들이 회개를 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했지요?

뿐만 아니라 부자는 지옥에서도 거지 나사로를 거지 취급합니다. 그건 부자가 지옥에 가서도 부자 행세를 하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자기 목이 마르니까 거지 나사로를 시켜서 물 한 방울 배달시켜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하지요? 여전히 자기는 거지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율법주의에 빠진 부자들의 착각인 것입니다. 유대주의와 인본주의는 반드시 자기의 잘남과 우월함을 챙겨 갖기 때문에 지옥에서도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차별의식을 들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지옥에 갈 부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는 도대체 뭘 했다고 천국에 간 것입니까? 무조건 가난하게 살면 다 천국가나요?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했으니 가난하면 무조건 천국에 가는 겁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은 시편 51편의 상한 심령, 즉 가난한 마음, 예수 아니면 난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죽은 흙이라는 자기부인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는 왜 천국에 간 것입니까?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천국에 간 것입니다. 이게 예정이며, 선택이며, 편애인 것입니다. 거지로 살아서 천국 간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천국에 간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살라는 대로, 다 털리고 비워진 거지로 살았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여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바로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털리고 비워진 거지로 살게 된다는 것을 교훈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건 그저 저의 추론이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의 천국행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나사로라는 이름의 의미부터 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사람의 이름을 말씀하신 곳이 딱 여기 한 군데밖에 없습니다. 비유에 굳이 왜 사람 이름을 대셨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이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나사로라는 인물이 진짜로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의 환생은, 타락한 인간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 앞에서도 절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오늘의 비유에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을 명쾌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비유에서도 나사로의 이름이 거명이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 나사로가 천국에 갔다는 것을 이름 하나로 설명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 나사로는 이 땅에서 거지로, 헌데를 앓는 자로, 개보다 못한 자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부자는 호화로운 옷을 입고 날마다 연락하며 이 세상을 즐기는 삶을 삽니다. 시편 73편의 아삽의 시가 정확하게 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부분을 놓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이 도우시는 삶은 만사형통, 일사천리, 문제해결, 질병치유, 승승장구의 삶으로 점철이 될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인생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내려가는 인생인 것입니다. 헌데를 앓으며 자신의 헌데를 핥는 개 하나 쫓아낼 힘도 없이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숙식을 해야 했던 거지 나사로가 무엇을 의지하여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성도라는 거지들의 삶인 것입니다. 세상 것은 다 털리는 삶, 그게 거지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인생은 바로 그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누리고 즐길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잔치를 벌이며 살지요. 재산 늘이는 재미, 자식 출세하는 것 보는 재미, 남들에게 칭찬받는 재미 등등 너무 즐길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성도들은 점점 그러한 재미들에 심드렁하게 되고 예수 믿는 재미로만 살게 되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 세상의 힘을 쌓고 모아서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려 하지요? 자기 이외의 다른 대상을 정복하여 ‘내가 신이다’라는 것을 순간순간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신 것은 그러한 다스림과 정복이 아닙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의 선악기준에 의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정복의 정의를 왜곡시켜 버린 것입니다. 하늘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셨는지만 보셔도 아시잖아요?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 하나님 나라의 정복은 하나님만이 가치이며 하나님만이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의 가치를 전부 하나님 아래로 밀어내려 버리는 것, 그게 진짜 세상을 정복하는 삶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인간들이 왜 그렇게 높은 산에 오르려고 하지요? 사람들은 그렇게 높은 산에 오르고 나서 ‘난 그 산을 정복했다’는 표현을 쓰지요? 에베레스트, 히말라야, 킬리만자로 등등 적어도 팔 천 고지 이상의 산들은 모두 다 정복의 대상이 됩니다. 왜 사람들은 기를 쓰고 무언가를 정복하려 하는 것입니까? 심지어 남극과 북극도 인간들의 정복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시도들이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연에게 조롱당하는 현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히말라야나 에베레스트가 웃을 것 같지 않으세요? 조그마한 인간들이 산소통을 메고 열심히 올라와서는 깃발 하나 꽂고 내려가면서 ‘난 이 산을 정복했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게 어떤 의미의 정복입니까? 산은 계속 거기에 있는데 발자국 하나 남기고 간 인간들이 대대손손 ‘우리 인간은 저 산을 정복했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입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자기 발자국 하나 찍고 내려가면 그걸 정복이라 하나요? 극한의 추위를 견디며 남극과 북극의 극점에 깃발 꽂으면 그게 정복이 됩니까? 그건 모두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하는 인간들의 유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정복입니까?

 

실제로 인간들은 자연에게 정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이 온도를 높이고 낮출 때마다 인간들은 옷을 갈아입습니다. 춘추복, 하복, 동복, 수영복, 내복 이런 것들이 왜 필요합니까? 자연에게 정복당한 인간들의 연약함입니다.

인간이 정말 히말라야를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세요? 히말라야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이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정말 산이 놀라는 것입니다. ‘왜 나를 무시 하냐? 왜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느냐?’ 그때 그걸 정복이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러한 세상의 가치를 쓰레기처럼 여겨 버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정복인 것입니다. 히말라야가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올라가 그 산을 정복하겠다는 인간 욕망의 가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잠잠하게 살아가는 것, 역시 자연을 정복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다 똑같은 사람처럼 똑같은 성형외과 의사와 똑같은 성형 기술에 의해 인조인간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바로 자연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주름이나 잡티를 없애겠다고 뻔질나게 레이저를 맞아서 그 내성으로 레이저 총도 무섭지 않은 인간이 되는 것이 자연에게 정복당하는 삶이란 말입니다.

돈을 정복하는 것은 돈을 많이 끌어 모아 자신의 세를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돈에게 정복당한 삶입니다. 돈이 그럴걸요? ‘넌 나를 너무나 가치 있게 생각하는구나. 그러니까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 그래 열심히 나를 정복해봐’하고 조롱을 할 겁니다. 돈을 정복하는 것은 그 돈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돈을 가진 사람이 그 돈을 가난한 자에게 연약한 곳에 그냥 줘 버리면 돈이 그리로 넘어가면서 뭐라 하겠습니까? ‘저 사람은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무시하지?’할 것 아닙니까? 그게 정복입니다. 그건 제 이야기가 아니라 자크 엘룰의 ‘하나님이냐 돈이냐’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월드컵에 열광하는 것, 월드컵에게 정복당한 것입니다. 그걸 무시하고 진짜 가치에 집중하는 사람이 월드컵을 정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얻어내고 성취하는 것이 정복하는 것이고 성공하는 것이라는 엉터리 정복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힘과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자신의 가치와 위상을 챙기려 하는 모든 자들이 바로 부자인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사랑하고 예수를 사랑했다고 하는 반 고흐가 왜 그렇게 고통과 고뇌의 삶을 살다가 머리에 총을 쏘았는지 이제는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흐는 성경 속에서 진짜 예수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가 동생 떼오에게 보냈던 수많은 편지들이나 그의 낙서들을 보면 그는 종교 다원 주의자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범신론적 종교관도 엿보이기도 합니다. 동 서양의 종교를 하나로 보기도 하고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정의와 거룩과 순결을 추구하는데 자신의 삶이 따라주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가 형식적이고 권위 적이며 때론 위선적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신앙이 잘못된 것임을 간파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해법이 틀렸습니다. 기독교인은 혁명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개혁가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자기의 열심과 노력이 혁명과 개혁에 도움이 될 거라는 사상 자체가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사상이고 부자의 사상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열심과 노력을 발휘하여 무언가 세상에 유익이 되겠다는 생각에 고흐는 평생 미친 사람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부자의 삶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실체가 말씀 앞에서, 복음 앞에서 폭로가 되어 질 때 미칠 것 같은 고통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귀가 아니라 목이라도 자르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때마다 ‘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난 이런 존재일 수밖에 없구나’라는 자기부인의 자리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 유다처럼 자기 자신을 스스로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심판해 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귀를 자른다거나 자기 머리에 총알을 박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심판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한 자신을 심판할 권리조차 빼앗긴 사람입니다. 주님은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피로 샀으니 넌 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 소유의 하나님 백성을 자기 마음대로 심판해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성도는, 그게 자연이든 인간이든, 누구를 정복하는 자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될 때 그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들이 성도를 위해 존재하게 될 뿐입니다. 그걸 정복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는 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신 것은 ‘선악과 먹지 말아라’라는 계명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과 동일한 맥락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상태가 정복의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정복하려 한다는 것은 그 정복의 대상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인간은 절대 가치가 없는 것을 정복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요. 성도는 무언가를 정복하려는 삶에서 하나님에게 정복당하는 삶으로 삶의 방향이 전환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진짜 가치는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인생의 경험을 통하여 배우셔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한 정복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정복당하는 삶이야말로 진짜 다스리고 정복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저는 지난주에 아르헨티나에 사시는 한 인터넷 성도님의 소천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6월에 아르헨티나 인터넷 성도님들과 나흘간 집회를 가졌을 때에 그곳에 참석하셨던 분입니다.

4월 달부터 저희 교회 설교를 듣기 시작하셨다고 하셨는데 두 부부가 듣자마자 너무나 기뻐서 매일 매일 저희 교회 설교 CD와 찬양 CD를 들으시며 행복해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치질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 직장암으로 판명이 나면서 힘든 투병을 하시게 되셨고 그 와중에 6월 집회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 후 정확하게 한 달 뒤에 하나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직장암이라는 것이 암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해 하시고 기뻐하시면서 수시로 ‘집으로 가자’ 찬양을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품으로 떠나기 전에 나에게 진짜 복음을 알려주신 목사님을 꼭 한 번만 더 만난 뒤 떠나고 싶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 박종한 집사님께서 마지막 하나님 품으로 가시던 날도 ‘집으로 가자’를 들으시며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 아내와 함께 두 손을 맞잡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기쁘게 떠나셨다고 합니다. 이걸 정복이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그 앞에서 벌벌 떠는 모습, 안 보이십니까? 성도는 사망을 정복하는 자들이지 다른 것들을 정복하여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듯 복음은 죽음의 순간에 안전하게 붙들 수 있는 구명보트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음의 순간에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쓸모 있던 것들은 우리 인생의 배가 침몰하는 순간 하나도 쓸모가 없게 됩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그 순간에 우리의 구명보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은 그 생명의 복음을 못 알아듣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번째 등장인물이 부자의 가족들이지요? 부자의 형제들, 역시 부자의 삶의 원리를 좇는 부자들입니다. 그들은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해도 절대 복음을 붙들 수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세상을 정복하겠다고 하는 부자들은 은혜의 말씀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건 바꾸어 말해 하나님의 복음을 알아듣고 회개를 한 사람은 절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의지하여 사는 부자의 삶을 계속하여 살 수 없다는 말과 동일한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부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가? 다음 주에 이어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