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비유강해

비유(22) 천국은 사은품이 아닙니다. (눅12:13~21)

은바리라이프 2013. 10. 21. 13:11

비유(22)

천국은 사은품이 아닙니다.

 

(12:13~21)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 할꼬 하고

18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얼마 전 큰 인기를 끌고 있던 한국의 한류스타가 집에서 목을 매 자살을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의 자살을 둘러싸고 주위에서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지인에게 사기까지 당해서 경제적으로 많은 손실을 입은 것이 그의 죽음의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자살 기사 아래로 수많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명복을 빈다. 이제는 고통 없는 곳에서 영면을 하라’는 유의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전하는 댓글을 달았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내가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그 아파트 하나를 사려면 죽을 때까지 일해서 월급을 하나도 안 써도 못 사요. 그런데 경제적인 이유로 자살을 한다니요. 그럼 나는 벌써 죽었어야 하나?’라든지 ‘아직도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그렇게 인기가 많은데 뭐가 두려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나요? 난 그 인기의 100분의 1만 있어도 너무 행복해 하면서 살 텐데’라는 식의 자조적 댓글도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직 부모 형제가 살아 있고, 한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국내에 몇 대 되지 않는 비싼 자동차를 굴리며, 늘 하인처럼 자기 일을 봐주는 매니저들이 있고 여전히 일본 공항에 내리면 수천 명의 팬들이 공항에 운집을 하고, 수많은 콘서트와 드라마 출연 계획이 일정 수첩 빼곡히 잡혀 있던 그가 왜 ‘나는 아직 부족하다’는 그러한 결핍을 느꼈을까요? 그가 그렇게 부족하다고 느꼈던 그의 현실은, 일반인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하는, 아예 로망이라 이야기도 할 수없는 화려하고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상은 그의 현실과 너무나 큰 괴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을 것이고, 결국 자신의 로망을 채우지 못할 바에야 자존심 상하게 이 세상에서 아등바등 살지 말고 죽어버리자는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인기 연예인들의 끊이지 않는 자살은 대부분 현실과 로망의 괴리에 대한 불안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되고 싶은 나’의 그림이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데 그 ‘되고 싶은 나’의 자리에 올라가면 또 다른 ‘되고 싶은 나’가 버젓이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되고 싶은 나’를 향해 뛰는 달음박질이 힘겨워 질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 글로벌 금융 위기 때에 독일의 한 기업가가 자신의 주식 평가액이 터무니없이 떨어져 3천만 불까지 내려가자 ‘내 재산이 이제 3천만 불밖에 남지 않았다. 난 망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3천만 불’ 우리 같은 사람은 평생 한 번도 만져 볼 수없는 그런 거액을 여전히 재산으로 소유한 사람이 어떻게 ‘난 망했다’라는 상실감에 시달리다가 목숨까지 끊는 일이 생길까요?

역시 그의 현실과 그의 이상은 너무나 큰 괴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현실의 ‘나’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미래의 ‘되고 싶은 나’라는 그림을 다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환경이 객관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 간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현실을 티코로 인식을 하고 ‘되고 싶은 나’라는 로망의 자리에 벤츠를 올려놓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전부 그 티코 같은 현실과 벤츠라는 이상 사이의 갭을 채우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여 살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러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채우려 하는 모든 시도를 가리켜 ‘탐심’이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주어) 염려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런 맥락의 말씀인 것입니다. 내일의 ‘나’를 그리며 염려와 불안 속에 살지 말고 내일은 내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채우려 하는 모든 인간들의 탐심은 반드시 죽음을 열매로 맺게 된다는 예를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보여주심으로 우리를 경각시키시고 당혹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미래의 희망을 위해 오늘을 삽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과거와 현실의 ‘나’에 대한 불만족이 전제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전부 탐심 속에서 태어나 탐심을 부리다 탐심에 의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탐심이라는 것은 단순히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첫째 아담 속의 모든 인간들이 가진 죄 성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피조물이라는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절대 의존적인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첫째 아담 속의 모든 죄인들은 ‘나’라는 우상의 위상과 자랑을 위해 끊임없이 탐심을 부리며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채워지지 않는 탐심의 자리는 하나님이 빠져 나간 자리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이 그 자리에 들어앉게 되어도 계속해서 탐심이 솟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걸 다 소유했던 에덴동산 위의 아담이 선악과에 대한 탐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결국 에덴에서 추방이 되는 수모를 겪었던 것처럼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현실이 아무리 풍성하고 풍요하다 할지라도 그 탐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현실을 수긍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따라 자기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삶에 진노하십니다.

(2:3)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렇게 우리 인간들이 합의해 놓은 가치와 힘의 획득이, 강함이며 승리라는 아담적 사고 안에서 그러한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 자기 마음이 원하는 일을 열심히 하며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있는 모든 것이 다 탐심의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러한 존재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의 원하는 것’이라는 어구의 ‘원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가 ‘에피뒤미아’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가 로마서에서는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지 보세요.

(7:7)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잘 보시면 전에는 바울이 탐심이 죄라는 것을 몰랐다고 하지요? 그런데 율법의 진의를 알고 나니 그 율법의 내용이 전부 인간의 탐심에 관한 경고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 이게 다 탐심이라는 죄였구나’하고 알아먹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탐심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피뒤미아’ 에베소서의 표현으로 바꾸면 ‘마음의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인간이 마음으로 원하는 것이 다 탐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탐심은 하나님을 진노케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에피뒤미아’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도 등장합니다.

(28:15)

15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여기에서 ‘원하고 원하였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피뒤미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원함,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은 모두 선입니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단어가 인간에게 쓰일 때에는 탐심, 즉 죄로 둔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요? 그런데 로마서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인간의 뜻이 모두 탐심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존재로 지어져 가는 삶이 아닌, 인간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챙기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켜 행하는 그 어떤 것도 다 탐심이며 그 탐심이 곧 죄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탐심을 가리켜 우상 숭배라고 잘라 말합니다.

(3:5)

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리의 육신이 원하는 모든 일이 탐심이며 그 탐심은 우리 자신을 우상삼아 사는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이제 탐심의 정의가 명확해 졌지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지어진 존재가 ‘나’라는 우상 사랑에 푹 빠져 그 우상을 위해 하는 모든 생각과 시도와 행위를 다 탐심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합의해 놓은 힘과 가치를 추구하며,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를 채우려 좇아가다가 정작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경홀히 여기게 되는 것도 탐심의 범주로 몰아넣으시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을 벗어나서 인간들이 합의해 놓은 착함과 선함을 하나님과 인간들 앞에 업적과 공로로 내 세워 사람들에게 영광을 취하는 것도 탐심의 범주에 넣어버리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탐심이라는 것은 이 세상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뜻과 계획에 의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자기의 만족과 자랑과 인기를 챙기는 모든 행위와 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착한 행위도 포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드릴게요. 우리가 지난 수요일에 사사기를 시작하면서 사사기 개관에 대해 공부를 할 때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유언에 대해 살펴보았지요?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아버지들인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게 내려지는 예언이 다 다릅니다. 그들은 열두 지파, 즉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상징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유다 같은 사람은 다른 지파의 왕으로 예언이 되는 반면, 레위나 시므온 같은 사람은 유다의 잉여를 무상으로 받아 챙겨야 하는 역할로 부름을 받습니다.

여호수아서나 사사기서로 가면 정말 그 야곱의 유언이 그대로 적중이 되지요? 유다는 죽도록 싸워서 시므온에게 기업을 나누어주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시므온은 면목 없는 모양새로 유다가 주는 잉여를 넙죽 넙죽 받아먹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 있던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일률적으로 이 세상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의 선악기준에 의해 정해 놓은 어떤 도적 적 윤리적, 혹은 양심적 진선미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그렇게 지향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각자의 역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들의 상관관계와 그 둘 사이를 채우는 은혜라는 내용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내는 것일 뿐임을 알 수 있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창조목적, 그리고 인간의 존재목적은 인간들이 합의하여 정해 놓은 어떠한 최고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는 그림을 삶 속에서 표현해 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옆의 강도 역할이 맡겨지면 그 역할에 충실하다가 천국으로 가면 되는 것이고, 바울과 같은 역할이 주어지면 그렇게 살다가 가면 되는 것이며, 시므온과 같은 역할이 맡겨지면 시므온처럼 면목 없이 잉여만 받아 챙기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인생이라면 그 맡겨진 역할을 살아야 하는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착한 행실의 다소가 그리 큰 문제가 될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자기들끼리 합의해 놓은 선이라는 것과 착함이라는 것, 강함이라는 것과 승리와 성공이라는 것 등등에 도달하려 하는 것이 전부 어디에서 기인한 것입니까? ‘왜 내가 하나님의 뜻만 드러내는 수동적 삶을 살아야 하느냐?’고 선악과를 날름 먹어버린 아담적 사고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인간이 얼마나 훌륭한 존재인지를 보이고 싶은 인본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싶은 미래의 자아상’을 미리 정해놓고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기의 계획과 뜻에 따라 행하는 모든 행위가 탐심입니다.

 

야고보는 그러한 인간의 탐심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4:13~17)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는 장사를 하여 이를 보려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너희의 허탄한 자랑을 위해 그러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고 일갈을 하며 그러한 모든 시도가 악한 것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그러면 장사를 하면서 이윤을 보려하는 모든 시도를 중단해야 하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14절을 보시면 야고보는 자신의 권고 속에 ‘생명’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장사를 해서 이윤을 챙기려 하는 것이 다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생명의 의미와 생명의 중요성, 그리고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미래의 ‘되고 싶은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이 다 허탄한 자랑을 위한 것이며 그것이 악한 것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는 천국도 사은품 정도로만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신이 신이 되어 사는 이 세상 나라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여 그 분의 종으로 사는 천국보다 훨씬 좋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유익은 이 세상에서 다 받아 챙기고 천국은 그저 죽어서 가도 좋고 안 가도 좋은 그런 곳이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나’라는 우상이 깨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5절을 보시면 인생이 원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잘 나옵니다. 뭡니까?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하라’ 그 말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하나님이 살라는 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계획과 뜻을 세워 그리로만 달려가는 그런 삶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다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자기자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7절의 말씀이 쉽게 이해가 가지요?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왜 갑자기 뜬금없이 ‘선’이라는 말이 튀어 나옵니까?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이 선에 대한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착하고 경건하게 사는 삶 정도의 한정된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계획과 야망과 비전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현실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하면서 미래의 되고 싶은 ‘나’를 향하여 달리는 자들이 행하는 모든 행사가 다 죄라는 말입니다. 그게 비록 정당하고 옳아 보이고, 착하고 선해보여도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이 아니면 모두 다 악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착하지 않아서 저주를 받았나요? 그들에게 종교적 열심이 없었습니까? 인간적 관점으로 볼 때 바리새인들은 착하고 선했고 종교적 열심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선을 선으로 인정해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히려 세리와 창기들이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라고 고백을 했을 때에 그들을 향해 ‘의롭다’라는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예수라는 구원자 앞에서 ‘저는 주님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저를 구원해 주세요’라는 고백을 하는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에게 맡겨진 역할입니다. 그러한 그림 속에 인간의 망함과 예수의 흥함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맡기신 역할이 어떠한 역할일지라도 순종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죽은 흙에 불과하고 주님은 저를 빚으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이게 궁극적으로 인간에게서 나와야 할 고백인 것입니다. 그때 존재는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내 생명, 내 의지, 내 뜻’을 남겨 가지고 있는 상태를 ‘죽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14:6)

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1-4)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생명이 어디에 있다고요?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만 생명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도 생명을 가진 존재가 없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다고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존재란, 내가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탈취당하고 예수라는 생명을 거저 받아야 비로소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목숨이 아직 붙어 있다고 해서 ‘나는 살아있는 존재이며 이 살아있는 존재가 원하는 모든 것은 가치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자들, 다시 말해 진정한 생명이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인지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미래의 되고 싶은 ‘나’를 향해서만 일로매진하고 있는 자들은 산자들입니까? 죽은 자들입니까? 죽은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어떤 청년이 예수님께서 강화를 하고 계시는 중간에 불쑥 튀어나와 형이 유산을 나누어 주지 않으니 그것을 좀 해결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당시에는 랍비들이 일반 민초들의 재판관 역할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어찌 보면 아주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요청이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의 유산상속 관습은 형이 3분의 2를 갖고 동생이 3분의 1을 갖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형이 동생에게 줄 3분의 1마저도 착복을 한 것 같습니다.

동생으로서는 당연히 그것을 찾아와야지요. 그래야 먹고 살 것 아닙니까? 그래서 훌륭한 랍비가 있다고 하기에 그 분께 찾아와서 그 분의 강화를 듣는 도중에 ‘저분께 부탁을 하면 내 문제가 해결이 되겠구나’하는 마음에 부탁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당연하고 정당하며 자연스러운 상황을 주님께서 탐심이라는 단어로 묵사발을 내 버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던 것처럼 탐심은 죄이며, 악이며, 우상 숭배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청년에게 ‘에피뒤미아’ 탐심이 가득한 자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도 ‘탐심’이라는 단어와 함께 ‘생명’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세요.

(12:15)

15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주님은 지금 그 청년의 정당한 행위가 세상 적 관점에서 옳으냐 그르냐를 지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청년의 행위가 아무리 정당해 보여도 그게 생명과 무관한 일이라면 그게 바로 탐심이요 우상숭배라는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현장에 있던 청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자가 밭에 소출이 기대 이상으로 풍성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지금 우리 집 곳간의 규모로는 이 소출을 다 담아 둘 수 없으니 지금 있는 곳간을 헐어버리고 더 큰 곳간을 지어 내 소유를 모두 담아 놓아야겠다. 내 영혼아 이제 노후 준비가 완벽하게 되었으니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했다고 합니다. 그게 뭐 잘못인가요? 이 자리에 계신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바로 그러한 노후대책, 은퇴 뒤의 삶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그러한 부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20절로 갑니다.

(12:20)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주님은 풍성한 미래를 기뻐하고 있는 부자에게 ‘내가 네 영혼을 오늘 밤 찾는다면 그 저축해 놓은 것이 다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에서도 죽음과 생명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인간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참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인데 그 생명은 돈이나 재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데 인간들은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소유의 많고 적음이나 인기나 명예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을 합니다. 그 말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이 세상의 힘과 가치를 모으고 모으면 그것이 바로 생명이 된다는 억측을 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도 결국 자기의 소유나 명성이나 인기가 상실이 되면 금방 죽을 것 같은 비명을 지릅니다.

솔직하게 한 번 대답해 보세요.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온통 누가 통제하고 장악하고 있나요? 돈이지요? 명예 아닙니까? 인기 아니에요? 그런데 돈이나 명예나 인기는 한시적이며 유한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에게 통제되고 장악된 인생은 그것들과 함께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그걸 죽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참 생명에 의해 통제되고 장악된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지금 이 세상에서는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을지라도 나를 통제하고 장악하고 있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므로 그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영생이라 합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요한복음에서 찾아 읽었던 것처럼 생명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사람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창조주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그 생명에 의해 만물이 창조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생명이신 예수와 관계없는 모든 존재는 그냥 티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티끌들이 참 생명이신 예수를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들이 생명의 에너지라고 미루어 추측하고 있는 이 세상의 힘이나 인기나 명성 등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 본문 21절이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12:21)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자기를 위하여’ 이 어구가 오늘 본문의 핵심 어구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쌓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며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지혜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보면 그 이야기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6:19~21)

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 하느니라

21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기도 똑같이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이 나오지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행위가 어리석은 행위이고 하늘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너희를 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어구를 직역을 하면 ‘땅의 보물을 땅에 쌓지 말라’입니다.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어구도 ‘하늘의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땅의 보물은 땅에 쌓일 수밖에 없고 하늘의 보물은 하늘에 쌓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땅의 보물이 무엇일까요? 땅의 보물은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공부한 것처럼 자신을 위하여 이 세상이 합의 해 놓은 힘과 가치와 명성과 인기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획득한 수확물을 땅의 보물이라 합니다. 반면에 하늘의 보화는 무엇이지요? 밭에 감추인 보화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보화를 하늘에 쌓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늘의 보화이신 예수를 더욱 더 굳게 믿고 의지해 가는 상태를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시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땅의 보물을 땅에다 쌓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이 땅에, 이 땅의 보화에 연합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 땅의 보화와 운명을 함께 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 땅의 보화는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좀이 먹고, 녹이 슬고, 도적에게 다 잃게 된다고 합니다. 바로 그게 이 세상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화려한 것 같지만 결국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 멸망당하는 것이 이 세상과 그 세상에 마음을 둔 사람들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좀이 먹고, 녹이 슬고 ,도적에 의해 빼앗기게 되는 이 땅의 보화 중에는 이 땅의 재화 뿐 아니라 자기만족과 인기와 명성이라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그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하여’의 목록들이니까요. 우리가 자기만족과 인기와 명성을 누리기 위해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자기 의를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구제, 선행, 봉사, 헌신, 헌금 등을 통해 ‘나는 너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상대적 우월감을 챙기려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게 땅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곳간을 늘이고 미래를 준비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인간들의 자기 의 쌓기를 돈이라는 것으로, 보물이라는 것으로 형상화시켜 놓은 것이지 꼭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는 것만을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신이 되겠다고 나선 인간은 자기의 영광과 인기와 만족을 생명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그 영광과 인기를 챙깁니다. 심지어 순교까지 합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만족이나 영광이나 명성이나 인기 챙기기의 일환으로 격발이 된 것일 때, 그게 멸망의 재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자기 부인의 현장에서 ‘난 왜 예수를 믿어야만 살 수가 있는가?’를 배워야 하는 것이지 내 업적이나 내 공로를 쌓아서 인기와 명성과 만족을 챙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의 보화인 예수를 믿는 것이며, 하늘에 보화를 쌓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 의 챙기기가 이 땅에 보화를 쌓는 것임을 잘 설명해 주는 에피소드가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10:17~22)

17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그가 부자일 뿐만 아니라 유대 관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와 명예와 인기를 다 거머쥔 사람입니다. 그가 주님에게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선한 분에게 선한 일을 배워서 그 선으로 영생에 도달해 보겠다는 그 마음의 저변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은 이미 그 선한 일을 다 하고 있음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관원 정도 되었다면 구약에 능통했을 것이고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선민 됨과 율법 지킴에 의해 영생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선한 선생이여,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 것은 ‘난 지금 영생에 필요한 모든 선한 행위를 다 하고 있으니 당신이 확인 도장 좀 찍어 달라’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미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계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나에게 너의 선을 자랑하려고 하는데 선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곡해해서 인간 예수는 선하지도 않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러한 예수님의 존재론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그 말씀은 인간 측에서는 하늘나라의 선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말씀을 하신 후 십계명의 여러 세목들을 일러주시면서 그걸 다 지키라고 하십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청년은 자신 있게 ‘그건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을 합니다.

주님은 그 청년에게 ‘그럼 네가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네가 정말 율법을 올바로 지켰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이 세상 소유 정도는 너의 하나님 사랑 앞에서 이미 배설물처럼 여겨지고 있을 텐데, 그 증거를 보여 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근심하며 떠났다고 하지요? 잘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지금 그 청년이 어려서부터 지키고 행해온 성화의 모든 과정을 부정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며 점점 더 훌륭한 율법과 도덕의 사람으로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다 무시하시고 네 재산을 다 버려보라는 요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성화가 진짜 성화가 아니라는 말인 것입니다. 진짜 성화는 자기부인에 의한 자기 버림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의 성화된 삶을 버리라’고 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하지요? 그게 바로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내 성화’를 기필코 지키겠다는 것이지요.

 

차치하고, 왜 주님께서 인간의 선한 행위와 돈이라는 것을 이렇게 결부시켜서 말씀을 하실까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인간이 이 세상 선함에 대한 열망과 추구와 행함과 돈을 사랑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과 똑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자 청년이 어려서부터 행한 모든 율법지킴과 선한 행위가 다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돈을 쌓아서 자기를 자랑하고 미래를 준비하려 하는 그 어리석은 마음과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근본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돈만이 악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자신이 우상 노릇하려 하는 시도와 행위가 일만 악의 근본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 중요한 단어를 자주 빼 먹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21절의 ‘사랑하사’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이 어떻게 표현이 되었습니까? 그의 행위가 자기를 위한 가짜 선이었음을 폭로시켜 버리는 것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표현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가진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진짜 선이다’라는 어줍지 않은 세상 윤리를 교훈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너희들은 절대 스스로 선을 내어 놓을 수 없는 자들이니까 무엇을 행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그런 질문 하지 말라’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라는 것을 폭로해 버리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23-26)

23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제 성경이 말하는 부자의 개념을 잘 아시겠지요?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그 우상을 빛내는 데에 모든 총력을 기울이는 사람을 부자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다 부자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자기만을 위해 사니까요. 그러한 인간의 자아실현, 자기성취의 죄를 돈, 재물 등의 단어로 축약하고 상징하여 쓰는 것이고 그러한 자들을 부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26절을 보시면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제자들의 웅성거림이 나오지요? 그 말은 ‘모든 인간이 다 부자인데 그럼 아무도 천국에 못 들어가겠네.’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기에 대한 답이 27절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다.’이게 인간의 부정과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는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에 이어서 또 다른 부자를 하나 더 등장시키십니다. 바로 그 밑 구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으쓱하며 말을 잇습니다. ‘주님, 저 청년은 자기 소유를 버릴 수 없다고 주님을 떠났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는 어떤 상이 준비 되어 있나요?’ 병행구절이 있는 마태복음 19장으로 가면 그러한 베드로의 질문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잇습니다.

(19:27)

27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뭐라 했습니까? 그게 탐심이며, 우상 숭배이며, 죄이며, 악이며, 부자라 했지요? 기가 막히지요? 하나님은 교활하고 용의주도하게 감추어 놓은 인간의 모든 의를 낱낱이 들추어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부자 청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던 베드로도 부자로 선언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그 어떤 선한 일을 행해도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자청년의 이야기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다’로 끝나는 것입니다. 너희들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여 누가 먼저 된 사람이고 누가 나중 된 사람인지 함부로 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선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간의 선악 기준이 얼마나 우습고 모호한지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에는 주일 날 버스를 타거나 자장면을 사먹는 것이 악이었습니다. 강대 상 위에 신발을 신고 올라가는 것도 불경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드럼을 치는 것,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니 그보다 백년 위로 올라가 볼까요? 그 때에는 교회에서 오르간이나 하프시코드 말고 피아노를 치는 것이 악마의 행위로 간주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때요? 피아노 없으면 찬송가를 못 부를 지경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선악구조에 의한 선악 가름이 절대적일 수가 있습니까? 그런 절대적이지도 못한 선악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서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티끌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산 자가 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제 것을 주장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제 소유와 행위를 쌓아서 안전과 인기와 명성을 챙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그저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항복의 고백을 하는 자로 지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하나님의 잉여의 선물로 탄생한 새로운 피조물이며 이 세상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이미 완료된 천국을 하나님으로부터 수여받은 하늘의 사람이 이 세상 소유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배설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좀 나누어 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 근심이 될 말씀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 곁을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와 가치를 얻어내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고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현장에서까지 ‘누가 크냐?’의 싸움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 앞에서 이 세상 모든 힘과 가치가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긴 알았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기에 자기는 죄인중의 괴수이며 사망의 몸과 꽁꽁 묶여 있는 존재라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진짜 버림은 베드로와 같은 생색용 버림이 아닙니다. 그런 생색용 버림의 일환으로 목숨까지 내 놓는다고 해도 그건 하나님 앞에서 전혀 카운트되지 않는 버림입니다. 하나님이 버리라고 하시는 것은 ‘돈, 재물’이라는 개념 속에 내용으로 들어 있는 ‘나’라는 우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서, 나라는 존재의 인기와 명성을 위해서 아무리 청렴하고 청빈하고 깨끗하게 산다고 해도 그건 우상 숭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삶 자체가 탐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나라는 우상을 위해 종교행위를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천국은 그냥 덤으로 얹어주는 사은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열심히 나의 영광을 챙기며 만족과 영광을 누리다가 천국이라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도 들어가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 그건 죄입니다. 천국은 사은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나온 사람들이고 천국을 위해 존재하며,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 것들은 반드시 쓰레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그게 쓰레기의 자리로 내려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본 모습을 끊임없이 폭로하시며, 우리가 쌓으려고 하는 우리의 의를 박살을 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낮아진 자기부인의 자리에서 ‘나는 절대 하나님을 위해 나를 버릴 수 없는 철저한 죄인입니다.’라는 진실 된 고백을 하고 하나님 은혜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깨끗한 부자가 되자는 청부론도 저주받은 이론이라 생각하지만 일부러 가난한 삶을 살자고 하는 청빈론도 또 다른 부자가 되자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악한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자리에서 부자는 부자의 자리에서 ‘난 어떻게 이렇게 돈밖에 모르는 자인가’를 처절하게 폭로 당하십시오. 아닌 것처럼 연극하지 마시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붙드세요. 그렇게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은혜가 쌓이고 쌓이는 것이 하늘에 하늘의 보화를 쌓는 것이고 그러한 하늘의 보화가 쌓이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소유와 세상의 힘에 대한 가치 부여를 조금씩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이며 거기에서 진짜 나눔이 나오고, 진짜 섬김이 나오고, 진짜 헌금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러한 탐심의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였습니까? 야곱이었지요? 이미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전해 들었던 사람이 야곱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의 꾀로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가정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것이 인간의 행위를 제어할 수 있나요? 아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그는 아내를 얻는 것에서부터 외삼촌으로부터 임금을 받는 것에까지 지나친 소유지향성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탐심의 인간이 야곱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로 바뀌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얍복강 가에서의 씨름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평생을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야곱이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갈 때도 함께 계셨지만 그가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 들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동행 하시면서 그의 실체를 낱낱이 폭로 시켜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결국 얍복강 가에서 평생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야곱의 샅바를 잡으시고 그의 환도 뼈를 쳐서 위골을 시켜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결국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의해 환도 뼈를 맞아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한 번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은 하나님이신 예수 안에 넣어 버리시고 그 예수의 환도 뼈를 쳐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예수를 다시 살리시면서 당신의 백성들도 다시 살려 내신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로 이루시는 승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인생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과의 씨름의 현장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샅바를 양보하시면서 우리가 얼마나 끈질기게 하나님을 이겨먹으려 하는지를 폭로하십니다. 그래서 얍복강 가에서 야곱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죄악 된 실체를 폭로 당하던 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스라엘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는 영원히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만을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줍지 않은 연극들 하지 마시고 그냥 폭로 당하세요. ‘난 돈이 좋아요, 난 이 인생이라는 씨름에서 절대로 당신에게 질 수 없어요.’ 그리고 그 현장에서 왜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하는지, 그리고 그 옛 사람의 죽음을 왜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셔야 했는지를 배우세요. 그러면 됩니다.

예수만이 생명입니다. 예수만이 보화입니다. 천국과 예수는 사은품이 아니라 진정한 하늘의 보화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