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비유강해

비유(20) 닭 날개 끊어지고 독수리 등에 업혀 날다 (마13:51~52)

은바리라이프 2013. 10. 21. 13:09

비유(20)

 닭 날개 끊어지고 독수리 등에 업혀 날다

 




(13:51~52)

51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52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얼마 전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 발사체 나로 호가 우주로 발사된 지 137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이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건을 뉴스로 접하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 인격체인 쇳덩어리 하나를 하늘로 쏘아 올리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데 하물며 인격과 이성을 가지고, 날 때부터 하늘을 거부하고 미워하는 본성을 가진(1:28) 아담 속의 인간들을 하나님 나라로 밀어 올리는 일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겠는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여러분은 성도가 이 세상과 역사와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성경은 우리 성도가 이 땅을 살아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뭐라고 진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5:1)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화목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로 입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일신이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존재는 삼위일체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존재는 ‘없음()’입니다


조금 철학적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없어야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죄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개념은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악한 행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없음이라는 존재가 있음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흙으로 지어진 인간 측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도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에게서 은혜로 흘러 내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 내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기특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과 공로와 업적을 들이대며 하늘과의 화목을 꾀했습니다. 그게 선악과를 따 먹은 자들의 자만입니다. 인간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고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처럼’되었다고 확실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무 인격체인 쇳덩이 나로 호가 스스로의 힘으로 우주로 날아가겠다고 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일임을 성경은 반복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2:1,5)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로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체들이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하늘과 접선을 하겠다고 열심들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능력과 자격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인본주의자들은 결국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유익과 영광을 위해 존재하게 됩니다. 그들의 사고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좌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의 열심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그러한 열심과 노력들을 진노의 불로 태우시겠다고 하십니다.



(1:18~25)



인간들은 창세 이후의 역사 내내 스스로의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애를 써 왔습니다. 그게 도대체 뭐 그리 큰 죄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을 하셨을까요?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기특해 하실 일 아닌가요? 아니면 조금 도와 주시던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 앞에서의 피조물은 ‘없음’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없음’의 존재들이 ‘있음’의 흉내를 내는 것, 그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 자신을 알라’는 취지로 인간들의 바벨탑을 부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인간들의 바벨탑 건설의 시도를 번번이 부수시며 인간의 무력함을 폭로해 오셨습니다. 종교, 도덕, 윤리 등의 인간들의 선행체계가 인간들의 성숙에 전혀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폭로하시고, 이념이나 사상, 교육, 문예 부흥 등의 지식 체계도 인간들의 성숙에 전혀 무익한 것임을 아울러 폭로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끊이지 않는 잔혹한 전쟁과 더욱 더 흉폭 해지는 범죄와 폭력, 빈부의 격차,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의 억지 등이 역사 전체를 검게 물들이며 인간들의 바벨탑 쌓기가 얼마나 무용한지를 여실히 증명해 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폭로전은 오늘 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내내,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난 인간들은 죽은 시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지하시는데 인간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경고와 교훈을 애써 묵살한 채 자기들의 가능성과 열심을 여전히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체들의 바벨탑 쌓기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가 된 무리가 있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들이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모든 인간들의 상징적 모형으로 성경의 독자들에게 제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우매한 인본주의자들의 열심 있는 비상을 닭의 비상이라 명명합니다.

닭은 날지 못하는 조류입니다. 원래는 하늘을 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인간들이 닭들을 우리에 가두고 먹이를 주기 시작하면서 닭의 나는 능력, 활공기법이 퇴화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과 함께 하늘을 살도록 지어진 인간들이 마귀의 속임에 속아 날개를 잃어버린 꼴과 같은 거지요. 닭이나 인간이나 그렇게 활공기법을 완전히 상실한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닭들도 공중을 나는 때가 있습니다. 뒤에서 개가 쫓아오거나, 닭장에 불이 났을 때, 혹은 못된 주인 집 아들의 몽둥이를 피해서 가끔 닭들도 공중을 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닭들의 비상은 곧 거짓 비상이었음이 들통이 납니다. 닭은 결코 하늘을 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닭은 기껏해야 하늘 아래의 공중을 잠시 부유할 뿐이지 절대 하늘을 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의 열심 있는 행위들이 바로 이러한 닭들의 비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닭들이 잠깐 공중을 부유한 것을 가지고 ‘난 하늘을 나는 새다’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그러한 닭들은 자기들이 잠깐 잠깐 떠올랐던 공중에서의 경험을 자신의 자랑으로 쌓습니다. 그래서 진짜 하늘을 나는 것에 대한 동경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닭들의 우매한 열심이 진짜 하늘로의 비상을 오히려 막는 것입니다. 닭들은 그렇게 가끔씩 떠올라 활공에 대한 만족도 채우고 다시 땅으로 내려와 그 맛있는 모이들을 쪼아 먹으며 땅의 삶에 집중합니다. 마귀가 땅에 던져준 모이가 너무 매력적이고 맛난 것들이거든요. 그래서 닭들은 진짜 활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그러한 닭들을 하늘로 쏘아 올리려는 분이 그 닭들의 삶에 개입을 하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자기들이 하늘을 날고 있다고 펄떡 펄떡 뛰는 닭들을 구원하여 하늘을 날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닭장에 불을 지르면 됩니까? 몽둥이를 들고 위협하며 뒤를 쫓으면 닭이 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방법은 단 한 가지, 그 교만하고 미련한 닭들을, 주인이 침노하여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닭들을 독수리의 날개에 얹어 하늘로 실어 나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19:4)

4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그렇지요? 그런 면에서 이 땅에서의 닭들의 우매한 날개 짓은 전혀 무용한 것이 아닙니다. 닭들은 자신들의 공허한 날개 짓을 통하여 그러한 자아실현과 자아성취의 시도가 무용한 것임을 깨닫고 ‘독수리의 날개 위’라는 은혜의 필연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여린 닭 날개 짓을 통하여 ‘나는 스스로 날 수없는 자구나’를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이며 옛사람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부인의 과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이 오롯하게 그 마음에 각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경 구약과 신약의 내러티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옛것과 새것의 비유가 그 전체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비유입니다. 본문 51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물으시는 것으로 비유가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인 옛것과 새것의 비유가 마태복음 13장에 나열된 7개 비유 전체의 요약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간단하게 그 일곱 비유를 짚어보면 오늘의 비유가 아주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핵심 메시지가 뭐였지요? ‘좋은 땅이 되자’였나요? 아니지요?

우리는 길가 밭, 돌 짝밭, 가시떨기 밭일 수밖에 없지만 한 알의 밀알로, 좋은 씨로 우리의 마음에 심겨지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된다는 은혜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비유였습니다.

 

두 번째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심판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우리를 반드시 알곡으로 완성해 내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그 비유의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세 번째로 겨자씨의 비유는 현실 속에서의 천국의 은닉 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닉 성을 설명하는 비유였고 네 번째 비유인 누룩과 밀가루의 비유도 역시 은닉되어 있는 천국의 완료성과 종결성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비유였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너무 훌륭한 성숙이나 성취를 열매로 내어 놓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에 의해 완료되고 종결된 하나님 나라가 그들을 침노하여 결국 영원한 천국 살이가 그들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될 것임이 그 비유들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비유인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도 역시 천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닉 성과,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옛 자아와 이 세상을 부인하는 자로 살게 되는 성도의 세상살이에 관한 비유인 것이며, 여섯 번째 비유인 진주장사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다 비우심의 은혜’와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체되심’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물과 물고기의 비유는 역사를 주관하시고 경륜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 쪽에서의 무력함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비유입니다. 이미 세상은 하나님의 그물에 걸려있는 제한된 세상이며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의 분류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주지시켜주는 비유인 것입니다.

 

이상 일곱 개의 비유가 전부 무엇에 관한 비유입니까? 인간 자유의지의 제한성과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천국의 완료성과 인간의 무력함, 인간 세상의 허망함과 하나님 나라의 영원성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깨달으셨나요?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질문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그러하오이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 마태복음 13장 비유의 내러티브 속의 마지막 비유로 결론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본문 52절을 보세요.

(13:52)

52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잘 보시면 이 마지막 비유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권고를 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깨달았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이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가 이 비유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 비유들을 다 깨달았다면 너희들이 젖어있는 구약의 유대주의라는 사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새것과 옛것이 어울려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성경의 독자, 즉 성도들은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한 해석에 대한 중요한 키가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라는 어구입니다.

서기관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구약, 즉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을 유대교의 서기관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와 대조하여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라는 어구를 사용하십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인 서기관의 직분을 비유로 들어, 하나님의 성도들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전해야 하는 지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서기관에 비유를 하셨는지는 이제 아시겠지요?

그런데 천국의 서기관, 즉 성경과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고 전해야 하는 성도들은 새것과 옛것을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다고 하십니다. 새것만으로도 안 되고, 옛것만으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새것과 옛것이 상호 보완하여 완성된 하나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므로 새것과 옛것이 반드시 같이 곳간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아, 너희들은 그 옛것과 새것이 의미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 그 진의를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천국의 서기관이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28장의 지상 대 명령과 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가르치고 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옛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유대주의와 유대주의의 경전인 구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신약?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도 지시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때에 신약이 있을 리 만무지요? 그렇다면 새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지요? ‘천국의 완료 성, 은혜,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 쪽에서의 주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옛것, 구약, 다른 말로 제사나 율법지킴 같은 인간들의 노력으로 선민 됨을 유지하게 되는 구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연성, 새것을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몽학선생에 불과한 것임을 너희는 이제 알겠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3:23~25)

23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 하도다

이렇게 구약은, 왜 인간들의 열심과 노력에서 나오는 날개 짓은 닭의 비상일 수밖에 없는가를 절절하게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한 시험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 세상 역사는 선악과의 시험장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열심히 노력하여 선악과를 따 먹지 않겠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사실은 그러한 인간들의 열심과 노력이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가 선악을 판단하여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는 만용이요 교만임을 폭로당하는 현장이 인류의 역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하늘을 날 수 있는 활공기법을 차압당한 채 이 땅에 태어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꾸 죽은 닭들이 날아보겠다고,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과 각종 선행체계와 지식체계들을 만들고 문명과 문화를 이용하여 괜찮은 인간들이 사는 괜찮은 세상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퍼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이 인류의 역사 내내 선악과나무가 인간들을 시험하다가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러서야 그 probation의 임무를 끝내고 생명나무에게 먹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묘사 속에 선악과나무만 쏙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인류역사 전체의 과정과 결국을 작은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22:1-3)

1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3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 보석, 생명나무, 다 있는데 선악과나무만 없지요? 이렇게 첫 언약, 즉 구약은 그 자체로 완료 성을 가진 언약이 아닙니다. 반드시 구약은 신약을 결론으로 하여야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구약은 저주의 언약이 됩니다.

(고후3:6~9)

6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7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보시다시피 바울은 구약 율법의 모세의 직분을 죽이는 직분이라고 했고, 율법 자체도 죽이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지켜서 하늘에 오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닭입니다, 어서 죽여주세요. 그리고 독수리 날개에 올려주세요,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할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끌어내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수많은 ‘하라’의 명령은 ‘지켜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어서 자폭하여 죽으라’고 주신거란 말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명료하게 요약을 해 줍니다.

(8:7~13)

7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 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9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 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10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 이니라

12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 이니라

첫 언약, 즉 옛것은 흠이 있는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흠이 있다’라는 표현은 구약이 신약으로 결론이 맺어지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의미이지 하나님의 언약을 흠잡기 위한 표현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약, 즉 옛것은 새 언약, 새것의 도래의 필연성을 가르치기 위한 징검다리 같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새 언약은 뭡니까? 율법을 지켜서 새로운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마음이 새것으로 환치되어져서 아무런 공로나 업적이 없이 거저 천국백성이 되게 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게 새 언약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의 인간들의 잘남과 착함과 공헌과 열심 등이 하나님에 의해 무시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의 언어로 표현을 하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길가 밭, 돌 짝밭, 가시떨기임이 폭로가 되는 것이고, 나쁜 고기로 들켜지는 것이며, 가라지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열심의 씨가 그 불가능한 밭에 심기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그물 속으로 들어와 좋은 고기라 선언해 주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 가라지 같은 자들을 알곡으로 추수해 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묵시 앞에서 계속 실패하는 모습으로, 선악과가 생명나무에게 먹히는 모습으로, 다른 말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자랑이 되고 인간의 공로와 업적과 공헌은 묵사발이 되는 형국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게 천국이 침노해 들어온 이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항상 묵시는 역사를 공격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역사의 실체를 올바로 해석해 낼 수 있는 해석학적 공동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국의 백성은 자신들의 무기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면서 참 천국이신 예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자로 살아야 하기에 이 땅에서 지옥과 같은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밭에 감추인 보화인 것이고 거대한 겨자나무 앞의 겨자씨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옛것인 유대주의와 율법에 젖어있는 제자들에게 일곱 개의 비유를 쉬지 않고 말씀하신 후 ‘너희가 이제 이것을 모두 깨달았느냐?’하고 시험을 치르시는 것입니다.

유대주의, 인본주의, 율법으로는 절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의만을 의지해야, 은혜만을 의지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일곱 개의 비유를 통해 은혜의 언약,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설명했는데 너희들은 그 의미를 올바로 다 이해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구약, 즉 옛것이라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바리새인들의 열심과 경건과 애씀이 다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스스로 죽음에 이르려 하는 자해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애씀의 결과로 자신의 무력함을 발견하여 예수라는 독수리의 등으로 갈아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들의 힘으로 날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경건이요, 애씀이요,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담 이후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아담과 똑같은 선악과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그 시험에서 인간은 ‘저는 제 의지로 선악과를 먹지 않을 힘이 없습니다’하고 자신의 실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폭로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무죄한 짐승의 가죽 옷을 무상으로 받아 입는 자로 서면, 되는 것입니다. 그 그림이 생명나무이신 예수에 의해 선악과가 기각이 되는 그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전부 자신들이 선악과를 안 먹을 수 있다고 용기백배해 있습니다. 전부 간디나 슈바이처처럼 살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이미 선악과를 먹은 자로 이 땅에 태어난 자들이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난 내 힘으로 절대 선악과 안 따먹을 거야’하며 죽을힘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선악과라는 probation에서 실패한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한 자들을 로마서 1장에서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1:28)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저마다 자신이 신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게 되면 신이 된 자신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신 됨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들을 그냥 놔두십니다. ‘상실한’이라고 번역이 된 ‘아도키모스’는 ‘신에게 버림을 받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도록 그냥 놔두신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퍼덕이는 닭들입니다. 그런데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만 가만 놔두지 않으시고 굳이 그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만천하에 폭로시켜 버리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는 항복 선언을 받아내시고야 마십니다. 그걸 구원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끊임없이 바리새인과 같은 구약의 삶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매일매일 옛것을 해체당하는 삶을 살다가 결국에는 그 옛것의 총화이자 보루인 목숨을 빼앗기면서 그 옛것의 삶에서 탈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계속해서 빼앗기는 삶으로 점철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왕창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늘의 풍요를 가득 채우게 되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짜 보화를 소개하기 위한 몽학선생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구약은 바로 나에 대하여, 나의 은혜의 필연성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반복하여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5:39)

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구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24:25~27)

25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구약은 모두 예수님의 희생 제사에 의해 무상으로 주어지게 될 하늘의 진짜 보물인 영생에 관한 것만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절들이 이제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8:17~21)

17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 이니라

18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 하니라

19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

20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21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22:4)

4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어떠세요? 이 말씀들이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이 세상의 재물을 얻게 된다는 그런 말인가요? 그럼 같은 잠언 서에 나오는 이런 말씀과는 어떻게 화해를 시켜야 합니까?

(11:4)

4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

전혀 화해가 안 되는 구절들이잖아요? 하나님을 잘 믿으면 재물을 주신다고 해 놓고, 그 재물은 죽을 때 전혀 무익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에게 주어진 물질적 풍요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까?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물은 그 자체로 ‘이것으로는 절대 만족과 풍요를 누릴 수 없는 것이구나, 나에게는 메시아의 은혜만이 진정한 보화여야 하는구나.’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일 뿐입니다.

(고후3:5~6)

5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6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우리 성도는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그 어떤 성취나 업적으로도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님 나라, 천국 백성인 것입니다. 옛것으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새것,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우리는 진정한 하늘의 풍요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그 거부들이 하나같이 전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하고 넋두리를 해 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결국은 발붙일 땅도 갖지 못하고 무덤 한 평에 자신의 몸을 누이게 되었지요?

 

그렇게 옛것,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하나같이 전부 예수로 수렴되어야 할 징검다리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세상 것의 획득이나 소유의 다소, 세상 사람들로부터 얻는 평판이나 인기 등으로 여러분의 성숙을 자랑하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왜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증명해 내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옛것과 새것을 곳간에서 가지고 나오는 천국의 서기관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들은 새것만으로 자신을 자랑할 수도 없고, 옛것만으로 자신의 만족을 채울 수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옛것 됨의 폭로와 그것을 덮으시는 새것의 은혜 성을 증거 하는 이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는 쇠하고 예수만이 흥하는 삶을 사는 것이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들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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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태가 모든 죄인들의 실체입니다. 몸과 가정과 돈과 일과 이웃 등에게 빼앗긴 나의 마음이 ‘나’라는 존재를 강력하게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상태가 옛것의 상태이며, 옛것에 빠져있는 상태인 죄인의 상태입니다. ‘아니, 이건 누구나가 갖고 있는 일상의 모습인데 이게 죄란 말인가?’하고 의아해 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죄의 모습입니다. 그럼 원래EMB000005586b85
 인간은 어떠한 모습으로 창조가 된 것인가?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져서 그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사물과 소유와 관계를 바라보는 하나님 절대 의존의 상태가 바로 ‘의’의 상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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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위의 그림처럼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여전히 마음은 세상 것, 즉 옛것에 빼앗긴 상태에서 십자가에 의해 자신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도덕과 윤리 등으로 자신의 겉모습을 깨끗하게 하기도 하고 열심 있는 봉사활동이나 헌신으로 이웃과 교회를 감동시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마음은 자기 자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상태가 날아다니는 닭의 수준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성도라는 택한 무리의 삶에 본격적으로 간섭을 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는 ‘나’라는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이 세상 옛것들에서 나의 마음을 하나하나 끊어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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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 세상 것들과 그것들과의 관계로 형성이 되어 있는 ‘나’라는 자아에게서 나의 마음이 끊어져 나가 ‘너’로 객체화 되는 과정을 자기부인의 과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옛 자아의 죽음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는 새 자아가 형성이 되는데 그 모습이 이러한 모습입니다.

 

지금 위에서 보시는 것처럼 ‘나’라는 자아를 형성하고 있던 몸, 가정, , , 이웃 등이 ‘나’에게서 끊어져 나간 자리에 하나님이 연합되어 들어오시는 그런 모습이 바로 옛것이 물러가고 새것이 되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몸, 가정, , , 이웃 등의 옛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 완성이 되는 새것의 도래의 필연성과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한낱 도구에 불과한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나라는 존재의 울타리 속에서 끊어져 나가야 할 것 중에는 스스로 열심을 부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보겠다는 마음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착하게 살려는 노력을 중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성령께서 쉬지 않고 소원을 두시며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덕목입니다. 따라서 그건 우리가 하기 싫다고 해도 끊임없는 욕구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몇 개 해 놓고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쌓아버리는 행위는 죄란 말입니다. 그게 여전히 옛 자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깨끗한 모습까지도 자신의 좋은 평판의 도구로 챙기려하는 날아다니는 닭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열심까지도 천국의 침노에 의해 빼앗기는 것이 성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저 온통 옛것으로 둘러 싸여 있고 옛것만을 내어 놓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은혜로 오신, 이 세상 속 유일한 새것, 예수의 십자가만을 붙드는 자로 지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 빼앗기고 다 비워지고 다 죽어져서 독수리 날개 위에 얹혀 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진짜 헌신과 진짜 착함과 진짜 신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2,000년 전에야 보내셨을까요? 성경은 ‘때가 차매, 때가 이르매’라는 표현으로, 분명 그 때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자마자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십자가 지셨다면 좀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왜 수천 년을 기다리시다가 불과 2,000년 전에야 예수님을 보내셨을까요? 아니, 다른 질문을 해 볼게요.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광야 40년을 허락하셨나요? 왜 성도에게 인생이라는 시간을 허락하십니까? 그 기간 동안 뭐하라는 거지요? 너희 인간들이 얼마나 불가능하고 무력한지 똑똑히 경험하여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이 얼마나 처참한 결국을 초래하게 되는지 삶을 통하여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이 처절하게 인정이 될 때 그때 나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때’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때 동안에 성도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위해서가 아닌 원래의 창조목적에 맞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옛것으로서의 ‘나’가 죽고, 은혜로 창조된 새것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고후5:14~15)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따라서 우리 성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동안에, 왜 이 세상의 소유와 가치와 힘은 우리를 진정으로 만족하게 해 줄 수 없는 지를 처절하게 배우고, 우리의 열심과 노력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보잘것없는 것인지도 배우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배우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구원의 사역에 보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의 건강, , 이웃, , 가정, 열심, 순결, 착함 등의 옛것의 닭 날개는 하루 속히 끊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날개가 끊어진 죽은 닭이 되어 예수라는 독수리의 등에 업히십시오. 여러분은 그 등에 업혀서야 창공을 힘차게 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옛것과 새것을 곳간에서 내오는 주인처럼 여러분도 옛것과 새것의 정의를 올바로 내려 오직 예수만이 결론이며 예수만이 해답임을 명쾌하게 전하는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들이 되셔야 합니다. 후한서(後漢書) 양수전(楊修傳)의 고사에 계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승상 조조(曹操)의 군대가 한중(漢中)을 평정하고, 나아가서 촉()나라 유비(劉備)를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진격하기도 수비하기도 곤란하였으므로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조조는 오직 한마디 ‘계륵일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계륵은 닭의 갈비뼈입니다. 먹을 것은 없는데 막상 버리자니 아까운 부분입니다. 부하들은 그 진의를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한 사람 양수(楊修)만은 그 뜻을 깨닫고, ‘계륵은 먹으면 얻는 것이 없고 버리면 아까운 것과 같다’하며 철수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구원에 있어서의 이 세상 힘의 무용함과 무가치함, 그리고 우리 자신의 공로와 업적의 무력함을 익히 배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러한 것들이 매우 가치 있는 것들로 여겨지게끔 우리를 미혹하여 마치 계륵을 들고 있는 자들의 형국으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그때 우리는 조조가 되어야 합니다. 닭 갈비뼈에 불과한 이 세상과 나의 옛 자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죽고 세상이 나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독수리의 등에 넙죽 올라타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이며 그 복음을, 옛것과 새것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자가 천국의 서기관, 즉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