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19)
주체냐 대상이냐
(마13:44-50)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47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러분은 이 그림이 무엇으로 보이십니까? 길쭉하게 나온 부분을 부리로 보면 오리 같기도 하고 그 부분을 귀로 보면 토끼같이 보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이 그림은 토끼다’라는 명제와 ‘이 그림은 오리다’라는 명제 중 어떤 명제가 참입니까?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둘 다 참일 수도 있고 둘 다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직관과 심지어 사유까지도 각자의 세계관이나 그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 등에 의해 각기 다른 모양으로 인식이 되고 표출이 되기도 합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 분석철학, 언어철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비트겐슈타인은 위의 토끼 오리 그림을 예로 들어서 인간의 언어는 그 자체에 참과 거짓의 명제적 본질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그의 후기 철학에서 주장을 했습니다. 언어의 의미는 명제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용의 맥락 속에서 정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물건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그 대상의 의미를 명제 화 했을 때, 그와 다른 삶의 흐름 속에 들어 있는 이가 ‘추하다’라고 그 대상의 의미를 명제 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어는 그 담지자의 진짜 본질을 하나의 명제로 담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위의 토끼 오리 그림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 그림을 비트겐슈타인의 토끼 오리라 부릅니다. 그의 논지는 플라톤 철학이 지배해오던 서구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플라톤 철학에서 ‘의미’는 항상 하나의 개념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그 개념의 의미가 삶의 흐름 속에서 계속 바뀐다는 것을 지적하며 자신의 스승인 러셀과 프레게의 이론을 거침없이 공격하여 그의 스승인 캠브리지의 버트란트 러셀이 더 이상 논리학의 무대에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치명타를 가한 사람입니다.
20세기 분석철학의 최고라 인정을 받는 그가 그렇게 언어의 상대성을 주장하면서 포스트모던, 후기 현대사회라는 자동차의 가속 페달이 밟아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뿐만 아니라 사유나 사상, 종교, 이념 등에서도 상대화 운동이 급속히 진행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더러운 유산으로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이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절대적 종교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는 제가 보여드린 비트겐슈타인의 토끼 오리 그림은 토끼일 수도 있고, 오리일 수도 있다는 것이 정답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 언어를 갖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사물이나 사건, 인물 등에 대한 사유나 직관은 상대적으로 주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담지자의 의미를 함부로 정의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언어로 정의되는 ‘의미’가 일정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의 후기 저작인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라는 책을 보다가 비트겐슈타인이 놓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어인 말씀에 대한 간과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인간 언어의 상대성은 저도 십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인간 중에는 성도라는 구별된 무리가 있고 그들에게는 특별한 언어가 주어졌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 하늘 백성들에게 주어진 상대화 될 수 없는 절대언어, 절대명제가 있는데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절대 언어에 의해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절대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살전2:13)
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속에서 역사 하느니라
(히4:12)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렇게 하늘의 언어인 말씀은 어떤 대상을 설명하는 용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주체로서 대상들의 의미를 규정해 버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한 분이신 절대적인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그 절대적인 분의 말씀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온통 상대성으로 혼란스러운 이 세상 속에서 절대적인 것을 구별해 내는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토끼 오리 그림 같은 세상을 보면서 그 그림의 실체를 분명하게
짚어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을 보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만 이 그림을 ‘오리’라 한시적으로 명명하겠습니다. ‘오리’를 역사와 인생의 실체라고 가정해 보자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이 그림의 본질은 ‘오리’입니다. 그런데 이 상대적 세상에서 ‘오리’라는 세상의 실체를 전혀 다른 ‘토끼’로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세상’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본질을 헛갈리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로 오해하고 삽니다.
(마11:25~27)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선악과 따 먹고 선악을 알아버린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 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보시다시피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 쉬운 말로 이 세상의 실체와 존재목적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 외의 모든 인간이 이 세상을 ‘토끼’로 본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도만 이 세상을 ‘오리’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성도와 세상의 세계관은 완전히 반대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엡1:8-9)
8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그렇지요? 이렇게 성도에게만 지혜와 총명이 임하여 세상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토끼’라고 오해하고 있는, ‘오리’라는 본질을 갖고 있는 이 역사와 인생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역사와 인생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들에게 ‘토끼’로 오해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후자의 질문부터 해결을 하고 전자의 질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한 가지 숙지해 놓으셔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건 ‘주체’라는 단어입니다.
주체란 단어의 일반적 개념은 ‘어떤 단체나 물건의 주가 되는 것’, ‘사물의 작용이나 어떤 행동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주체의 철학적 개념은 ‘실재하는 객관에 대립하는 의식하는 주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률적 개념으로는 ‘다른 쪽에 대하여 의사나 행위를 미치는 쪽’이라 할 수 있고, 북한이란 국가에서의 주체의 개념은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서의 인민대중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1982년에 김일성의 논문에서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었던 사상입니다.
물론 이 주체란 개념들이 각 단체와 상황 화에 따라 달리 정의될 수 있으나 기본적인 중심어구는 타인(어떤 대상)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인’이란 개념입니다. ‘주인’이란, 개인이든 단체든 국가든 세계든 어떤 사상과 생각과 행동이 타인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주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절대 주체자일 수 없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 전의 인간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라 했지요? 그것을 인간의 ‘대상으로서의 삶’이라 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객체로 존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대상을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주체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주체에 의해 대상으로, 객체로 창조가 되어 그 주체이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고 스스로가 주체성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객체로 밀어 내리는 반역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객체로서의 하나님을, 주체인 자신의 유익에 동원하는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의 주체의 자리를 꿰차고 앉은 아담 들은 제일 먼저 자기 둘레에 성을 쌓고 국가를 형성합니다. 말이 국가이지 인간이 세우는 국가는 ‘자아’라는 이기적 세상을 말하는 것이라 했지요? 그래서 인간 국가의 형성과정을 보면 인간의 자아형성 과정과 똑같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국가를 형성한 인간은 육축을 치는 자, 수금과 퉁소를 잡은 자,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등의 영웅들을 만들어 내고(창4) 그들을 중심으로 인간의 주체 자리를 공고히 다집니다. 그게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역사의 주체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며 삽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이 역사와 인생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것, 즉 토끼(세상이 잘 못 오해하고 있는 역사와 인생의 모습)로 오해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타락을 한 후 인간은 절대적인 하나님과 단절이 되어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판단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 진리, 말씀, 묵시가 창세 때부터 이 역사와 함께 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의 첫날부터 이 세상에 함께 있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것을 좀 더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요한복음1장입니다.
(요1:1-5,9~14)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니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자신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자기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대상화, 객체화하여 사는 이들에게 창세 때부터 절대의 진리인 말씀이, 예수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예수를 못 알아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예수를 알아보고 영접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랍니다. 주님은 그들이 혈통이나 육정에 의해, 즉 인간 측에서의 열심과 노력에 의해 생겨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창조된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들만이 예수를 알아보는데, 그들은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 예수님 안에만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 그 삶이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영원한 생명의 소중함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주체의 자리에 올려드리고 자신들은 그 분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대상, 즉 객체의 자리로 밀어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만 ‘오리’라는 이 세상의 실체가 보입니다.
지금부터 잘 들어보세요. 이 역사와 인생이라는 것을 여전히 인간이 주체가 되는 ‘토끼’로 보는 세상 아담들이 성경을 보게 되면 그들이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우게 될까요? 인간이 이 역사와 인생의 주인공이며 주체자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성경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 안에서 인간 영웅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본받아 살겠다는 만용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이 역사와 인생의 주인공은 여전히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 바울 등의 인물 들이나 선민 이스라엘을 떠 올리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드세요. 믿음의 조상, 성군 다윗,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섬긴 사도 등의 칭찬들이 떠 오르지 않으세요?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자세하게 공부를 한 바에 의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에서 격발된 믿음이었던 것이었지요? 그런 면에서 진짜 믿음의 조상도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인간 아브라함이 독자들에게 제시되고 곧 그가 기각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메우십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은 어떤가요? 다윗도 그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의 자격이 있는 자가 아님을 백일 하게 폭로 당하지요? 그는 사울보다도 더 극악한 죄를 폭로 당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진짜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역시 인간 왕이 기각되고 하늘의 왕이 그 자리를 메우는 형국입니다.
바울은 어떤가요? 바울은 율법에 있어서 완벽한 자였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완고한 율법주의자가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율법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예수님의 일을 훼방했습니다.(롬10:1-2) 결국 율법의 완성 자는 누구이셨습니까? 예수님이셨습니다.(롬10:4)
이스라엘은 어떤가요? 이스라엘이 진짜 선민이었나요? 이스라엘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자들로 폭로가 되지요? 진짜 하나님의 택한 자는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0에 보면 이스라엘이 구름과 바다에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구원은 모세 한 사람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이었잖아요? 따라서 진짜 선민은 예수님 한 분 뿐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인간이 세운 인간의 나라 속에서 여러 인물들과 민족을 들어 예수님을 모형으로 보여준 뒤, 그 인간이 먼저 세운 나라를 예수라는 새 나라가 덮쳐서 뭉개는 식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것을 부정하고 새것이 그 자리를 환치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그게 되던가요? 그게 안 되더라는 것을 역사와 인생이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조차 그들이 먼저 구하는 것은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의입니다. 모든 인간이 내 나라를 견고히 세우기 위해 자신의 잘남과 착함과 인기와 평판을 챙기는, 자기 의의 구축을 인생의 모토로 하여 살지 않습니까? 그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가 그 먼저 세워진 인간 나라와 인간의 의를 덮쳐서 폭로시키고 부순 후에, 예수로만 세워진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에 의해서만 완성되어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의를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 역사인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인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러한 것을 이해하게 된 성도들에게 있어서 역사란,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고 피조물이 객체로 내려가는 과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취 과정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와 인생의 본질은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은, 이미 역사의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가 가치와 힘으로 합의해 놓은 것들에게서 조금씩 마음을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주체로서 추구하던 이 세상 가치나 재화의 소유 등에 의해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체가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 진리가 아니며 진짜 보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예수라는 보화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보장받은 자들로서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워하는 천국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역사와 인생의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가게 되는 과정과 완료의 지점을 하나님 나라, 천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 들어와 있는 천국은 인간의 역사가 합의하고 정의해 놓은 재화나 힘을 많이 소유하고 자신이 원하는 소원이 다 성취가 되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세워 놓은 ‘자아’라는 국가가 부정되고 해체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성도는 그 속에서 자신을 침노해 들어오신 하나님 나라, 즉 예수를 감사함으로 영접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 속 천국인 것입니다. 아니, 영원 속에서도 천국은 바로 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피조물을 장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야망과 비전과 소원, 인기, 평판, 힘 등을 부정당하면서 오직 영생만이 우리의 보화임을 인정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천국을 사는 성도의 삶이며 그게 역사 속에서의 천국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주체의 자리에서 여전히 버티고 앉아 있는 이들의 천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모두 성취가 되고, 자신이 원하는 환경이 완전하게 구비가 된 화려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그림을 보고도 ‘토끼’와 ‘오리’의 다른 명제가 도출이 되는 것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이 역사와 인생의 본질은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들의 국가와 그들의 의가 부정당하면서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오롯이 서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인간들이 자신들의 국가와 자신들의 의를 여전히 포기 못하고 이 역사와 인생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선악과를 따 먹고 역사의 주체를 혼돈한 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다 됐지요?
지금까지 들으신 이야기를 머릿속에 잘 두시고 오늘 본문으로 가보시면 아주 쉽게 그 의미를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먼저 본문 44절을 보시겠습니다.
(마13:44)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여기에서 주님은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라고 말씀하십니다. 밭의 주인도 아니고 보화를 발견한 사람도 아니고 밭에 숨겨진 보화가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행동입니다. 그는 밭에서 보화를 발견하자마자 보화를 숨겨두고 집으로 돌아가서 그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그게 칭찬받을만한 일입니까? 그게 정말 천국을 발견한 사람의 올바른 행동이 맞아요? 원래 그 보화의 주인은 밭의 주인이잖아요? 그렇다면 정직하게 그 주인에게 가서 ‘당신 밭에 보화가 있는데 내가 어림짐작해 보건대 그 가치가 이 정도는 되는 것 같소, 해서 내가 그 밭과 보화의 가격을 맞추어 가지고 왔으니 그 밭과 보화를 내게 파시오’ 이래야 적어도 이솝 우화 정도의 도덕과 윤리를 갖출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몰래 그 보화를 숨겨 두고 주인을 속인 후 그 밭을 몽땅 차지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 정도의 윤리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보화를 발견했을 때 살짝 보화만 들고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굳이 보화를 숨겨놓고 주인에게 가서 밭까지 사는 불편하고 복잡한 행보를 보이느냐는 말입니다.
그 보화, 보배라는 단어가 학개서에 등장하는데 그 곳을 먼저 가보고 다시 신약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학2:6~8)
6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 이니라
8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 이니라
하나님의 것인 보배가 세상에 이를 것인데 그 보배가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그 보배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 보배를 못 알아봅니다.
(벧전2:4~9)
4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 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 지니라
6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보내신 진짜 보배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거치는 돌이 되고 거치는 반석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을 보배로, 반석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반석으로 굳게 믿고 있던 자신의 주체가 예수라는 반석으로, 예수라는 보화로 바뀌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선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반석을 부수시려는 예수를 먼저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인생의 주체, 역사의 주체를 예수로 바꾸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거치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눈에는 그 밭의 보화가 보화로 여겨졌겠지만 그 밭의 주인은 그 밭의 보화가 보화로 보이지 않았다는 전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보화를 보화로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그게 보화라고 설명을 하지 않고 그냥 밭만 사 버린 것입니다. 그건 단지 저의 추론이 아닙니다. 밭의 보화의 비유 바로 아래에 진주장사의 비유가 그 말씀을 뒷받침 해주는 비유인 것입니다. 본문 45절 이하를 보세요.
(마13:45-46)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이 비유를 바로 위의 밭의 보화의 비유와 같은 비유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잘 보시면 이 비유에서는 천국이 진주가 아니라 진주를 구하는 장사입니다. 위의 비유에서는 보화가 천국이라면 아래의 비유에서는 보화를 구하는 장사가 천국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천국을 말씀하시면서, 천국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인데 그 진주장사는 극히 값진 진주를 만나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산다고 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으면 이 세상 그 어떤 인간도 진짜 하늘의 보화를 보화로 구별해 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 진주장사는 진주를 발견했고 진주를 발견하자마자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밭의 보화 비유에서 천국은 보화인데 그 보화는 누구라 했지요?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아래의 비유에서는 천국이 진주 장사지요? 그럼 진주 장사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소유, 심지어 목숨까지 다 팔아 당신의 백성을 사시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바로 진주인 것이고 우리를 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파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주가 진주장사를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진주장사가 진주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먼저 예수님에 의해 찾아진 보배들이 진짜 보배이신 예수를 알아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비유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위의 비유로 올라가 보자고요. 그렇게 예수님에 의해 찾아진 자들, 즉 예수라는 보배를 알아 본 자들이 역시 진주장사처럼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밭을 삽니다.
밭은 세상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보배가 담긴 밭, 즉 세상을 샀다는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밭을 산 이유가 뭡니까? 보화 때문이지요? 그의 의도는 밭을 잘 기경해서 큰 수확을 얻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밭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밭에 묻힌 보화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샀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일생을 바쳐 열매로 얻어내고자 하는 ‘모든 소유’를 세상에 묻혀있는 보화, 즉 예수를 위해 다 버릴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그런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화를 발견한 이에게 더 이상 세상은, 소유를 얻어내어 주체의 자리를 공고히 하는, 그런 곳이 아니라 보화인 주체에 의해 객체로 밀려나는 곳이 된다는 말입니다. 밭은 보화 때문에 버려지는 용도로 구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화를 발견한 이의 주체로서의 세상 소유가 다 팔리는 것입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 보화를 발견하게 된 자의 의지라기보다는 보화를 알아볼 수 있게 된 자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주장사이신 예수님의 은혜에 의해 보화로 발견된 자들은 영생의 수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보화를 알아보게 되어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의를 버리고 오직 그 분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그 분의 나라와 그 분의 의만을 꼭 붙들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실체를 ‘오리’로 분명하게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라는 사람들도 처음부터 이 세상을 ‘오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예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을 받고 죽음도 불사하는 사도의 삶을 산 사람입니다. 오순절에 행했던 그의 설교로 한 번에 삼천 명이 회개를 하기도 했고, 애니아라는 중풍 병자를 고쳤으며, 죽은 자였던 다비다를 살려내는 기적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0장으로 가면 사도 베드로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넬료라는 로마의 백부장 집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주시는데 그가 선뜻 가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인 그에게도 여전히 유대인의 선민의식의 뿌리가 모두 빠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방인인 로마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 올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전히 그의 사고 속에 ‘나’라는 주체, ‘이스라엘 선민’이라는 주체가 꽁꽁 박혀 있습니다. 그의 사고 속에서 유대주의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도였습니다. 그의 눈에 이 세상이 ‘오리’로 똑바로 보였을까요? 그는 사도로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토끼’인 듯 ‘오리’ 인 듯 헛갈리는 세계관 속에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자기 주체의식은 깨지지가 힘이 든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직 경험하지도 못했고 예수님의 부활도 보지 못한 다른 제자들은 어떻겠습니까? 오늘 본문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바로 위의 비유인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굳이 제자들이 설명을 해 달라고 한 것이 바로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마13:36)
36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고 설명을 해 주신 것이 단 두 번입니다. 한번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굳이 설명을 해 달라고 요구를 해서 설명을 해 주신 것은 이 알곡과 가라지 비유 하나 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제자들이 다른 비유들은 다 제쳐두고 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주님께 요구한 것일까요? 그만큼 제자들은 유대주의를 벗어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실 때에는 선민인 이스라엘이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되고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들은 전부 멸망할 것으로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입니다. 민족 주체사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천국은 좋은 씨를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하시면서 그 밭에서는 추수 때까지 가라지도 함께 자란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니, 당장이라도 이방인들을 싹 쓸어 버렸으면 좋겠는데 왜 함께 자라게 놔두신다고 하시는가? 그들은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비유의 해석을 주님께 물은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가라지를 알곡들과 함께 그냥 놔두라고 하시지요?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도 함께 뽑을까 하니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오래 참으심, 그리고 은혜가 듬뿍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알곡을 잘 키워서 완성품으로 만드신 후 가라지를 완전히 멸망의 불로 쓸어 넣어 깨끗한 당신의 천국을 완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일차적으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들에게는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너희들의 판단으로 알곡과 가라지를 분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그 비유 속에는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하늘나라 백성들은 지금 자신들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있는 상태로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지금 가라지를 쳐 버리시면 그 존재 전체가 멸망의 불로 들어가 버리게 되기 때문에 알곡, 즉 새 생명이 성숙하고 완성 될 때까지 가라지를 함께 두시면서 점점 그 가라지의 삶을 밀어내고 결국에는 완전히 소멸하시겠다는 은혜의 메시지가 담겨 있기도 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한 베드로의 상태가 알곡입니까? 가라지입니까? 우리는 그 나타난 현상만으로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가라지 퇴치 과정에 있는 모든 알곡들은 오히려 가라지의 모습을 더 많이 들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이 되어서 이 세상의 도덕과 윤리 등을 기준으로 하여 누구는 알곡이고 누구는 가라지라는 그런 평가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심지어 세상의 힘과 가치를 많이 얻어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저주 받은 사람이라는 식의 번영의 신학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기도 하지요? 그게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을 토끼로 보는 사람들의 오류인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지난주에 함께 읽었던 시편 73편의 아삽의 오해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뭐라 하십니까? 추수 전까지는 너희들이 함부로 판단하여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지 말라고 하십니다. 판단은 추수 때에 당신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알곡 같아 보이던 자가 가리지로 분류되어 불 탈 수도 있을 것이고 가라지처럼 보이던 자의 가라지 됨이 한 번에 다 제거되고 그가 알곡의 영광을 차지할 수도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이 역사와 인생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에게 선택권이 있고 그 분에게만 은혜의 축복이 들려 있습니다. 그 분의 은혜에 의해 보화가 되는 것이고 그 분의 은혜에 의해 그 분을 보화로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구원의 과정 전부가 역사와 인생의 주체 자이신 주님의 손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이 그물에 걸린 고기들의 비유로 장식이 되는 것입니다.
(마13:47-50)
47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혹자들은 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비유를 전도의 비유로 곡해를 합니다. 일단 그물로 다 잡아오면 나중에 목사가 말씀을 갈라낸다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이 비유는 심판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예수님의 그물에 걸려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전부 예수님의 심판의 그물에 다 잡혀있는 상태입니다. 그 어떤 고기도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 그물 속에서 나쁜 고기가 좋은 고기로 바뀌어 질 수도 없고, 좋은 고기가 나쁜 고기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건 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되면 그물 주인에 의해 좋은 고기로 선택을 받은 자들은 살고, 나쁜 고기로 분류가 된 자들은 풀무 불로 던져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정입니다. 선택입니다. 편애입니다. 심판의 주체가 그물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에 들어와 있는 천국은 그렇게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함께 품고 있는 예수님의 그물 같은 것입니다. 성도는 그 예수님의 그물 속에서 어떻게 자신이 좋은 고기가 되었는지를 깨닫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가 할 일은 그거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며, 그것만이 진정한 보화라는 것을 배워가는 것이 성도의 인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난 그저 심판의 그물에 갇혀있는 물고기에 불과한 자인 것입니다. 그들이 무슨 자기 의를 챙기며 무슨 이름과 인기와 가치를 챙깁니까?
그 사실을 삶으로 경험하며 배우는 데에는 반드시 자기부인이라는 고달픈 과정이 따르게 됩니다. 그렇게 성도의 삶속에서 가라지가 제거가 되고 알곡으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길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과정이긴 하지만 그 길이 너무 협착하고 힘이 들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옥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을 토끼로 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해 눈이 떠진 사람들은 지옥같이 고통스럽고 초라한 현장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이고, 화려한 성공과 번영의 현장 속에서 진짜 지옥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피조물이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 대상의 자리로 옮겨 앉는 것이 천국입니다. 그 자리에서 진짜 보화인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진짜 가치요 힘이요 영광으로 구별해 낼 수 있는 올바른 눈을 가지셔야 합니다.
제가 어떤 상황을 잠깐 시나리오 화 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신문지를 깔아놓고 그림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저는 그게 그거 같고 저게 저거 같아서 별 관심이 없이 이리 저리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파는 상인이 제게 저 그림이 좋은 그림이니 백 불에 사라고 권했다고 해 보자고요. 거기가 근사한 그림 가게나 갤러리도 아니고 길거리 잡상인들이 모여 있는 한 데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도 신문지 위에 제 멋대로 놓여 있습니다. 마치 밭에 숨겨진 보화의 형국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이 백 불의 가치가 있어 보일까요? 그럼에도 제가 만일 이 그림을 백 불을 주고 사들고 갔다면 전 제 아내한테 쫓겨납니다. 돈으로 바꿔 오라고. 저나 제 아내 같은 그림의 문외한들은 이 그림의 가치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소더비경매장에 걸렸을 때 이 그림을 1억 3천 5백만 불에 사간 사람이 있습니다. 이 그림이 그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Adele Bloch-Bauer 의 초상화거든요. 그야 말로 세상의 보물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이 길거리 신문지 위에 함부로 던져져 있으면 거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 이 세상에 그렇게 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천국은 이 세상과 우리 인간이 부정되고 해체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모습으로 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천국의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 명성황후가 궁녀 복을 입고 궁녀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고 하지요? 그 자리에 명성황후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라한 궁녀 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한동안 그녀를 못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천국이 우리 가운데 그렇게 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복음을 알아듣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실체를 올바로 파악해 낼 수 있고, 그 속에서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 자신들의 알량한 도덕과 윤리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 안의 가라지를 주님에게 폭로당하며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사는 자로 완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지꼴을 하고 온 이몽룡이를 춘향이는 알아보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완료되었고 종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왜 하나님이 천국을 홀로 완성하시고 종결하셔야 하는지, 왜 우리는 그 은혜만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삶 속에서, 말씀 속에서 잘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 가치와 재화로 행복에 이르겠다는 희망은 어서 버리세요. 이 역사와 인생의 주체가 그러한 세상의 힘과 가치를 얻어내어 구원에 이르겠다는 육적 자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구원의 대상일 뿐입니다.
(전2:1-2)
1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2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세상이 행복의 조건으로 내어 놓는 희락 웃음이 다 미친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진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월드컵이 골프가 TV드라마가 여러분을 진짜 웃게 해 주던가요? 그 모든 세상의 재미들이 우리를 울리고 웃기고 하지만 리모컨 스위치가 눌러지면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TV 드라마처럼 헛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곧 그 리모컨의 파워 스위치를 누르실 것입니다. 그때 진짜 보화를 발견한 사람만이 진짜 웃음과 진짜 희락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을 똑바로 뜨십시오.
'김성수 목사 > 비유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유(21) 일곱 귀신 이야기 (마12:38~45) (0) | 2013.10.21 |
---|---|
비유(20) 닭 날개 끊어지고 독수리 등에 업혀 날다 (마13:51~52) (0) | 2013.10.21 |
비유(18) 겨자씨 같은 천국의 은닉성 (마13:31~32) (0) | 2013.10.21 |
비유(17) 교회야, 세상과 함께 춤추지 말고 세상과 함께 울지도 말라 (눅7:31~35) (0) | 2013.10.21 |
비유(16) 천국을 위한 고자 이야기 (마19:1~12) (0) | 2013.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