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 45 새것을 담은 새 그릇 마태복음 6:16~18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34

산상수훈 45 새것을 담은 새 그릇





마태복음 6:16~18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는 지난주에 신랑과 금식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공부 했습니다

첫 번째 신랑으로부터 받아먹어야 하는 율법이라는 양식이 있었고 유월절 어린양 그 고기로 제가 설명해 드렸는데 그리고 두 번째 신랑으로부터 받아먹어야 하는 은혜라는 양식이 있었죠. 두 번째 신랑으로부터 그 은혜의 진리를 양식으로 받아먹을 수 있는 이들은 첫 번째 신랑으로부터 그 율법이라는 양식을 받아먹고 그것만 그 양식만을 먹어야 하는 영적인 애굽에서 반드시 뛰쳐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그 첫 번째 양식 그 유월절 고기, 그 율법이 그 인간의 가치를 향상시켜 주고 상승시켜 주는 자기애적 자아 향상, 자아 상승, 자아가치 상승 뭐 이렇게 표현해도 되겠죠? 그런 것들이 너무 좋아서 두 번째 양식이 필요 없는 그냥 어떤 무리들은 그곳에 그 양식을 먹으려고 계속 머물면서 그 공허한 양식을 배터지게 먹다가 결국은 그곳에서 멸망에 처해지게 된다 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와 물 포도주를 내는 두 신랑의 이야기인 거고 로마서 7장에 그 첫 번째 남편과 두 번째 남편의 이야기인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신랑과 양식의 이야기에다가 이런 비유를 하나 붙여 넣어 주셨어요. 한 번 보세요.



누가복음 5:34~39

3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그 아들인데 손님이라고 이렇게 번역해 놨어요)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아들들로 금식 할 수 있느뇨~ 아들들은 신랑과 함께 있으면 금식하면 안됩니다.)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이제 첫 번째 남편을 빼앗기는 날이 오는 거죠.)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당연히 첫 번째의 남편의 그 율법을 안 먹습니다.)

36 또 비유하여(비유, 파라볼레 라고 이제 그 이야기 옆에다가 뭘 하나 던져 놓으시는 거예요. 파라발로 몸을 던져놓는 게 비유라고 그랬죠. 파라볼레)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묵은 거에 그 맛이 든 사람은 새것은 안먹는다는 얘기입니까? 발렌타인 21년 산을 먹던 사람은 17년 산을 절대 안먹는다는 얘기인가요? 뭔 얘기에요. 이게. 여러분이 너무 잘 아는 새 술은 새 부대의 비유죠. 이게 왜 금식의 이야기에 붙어 있을까요? 여러분. 새 걸로 먹으라는 건가요? 이 말은 마치 격언처럼 선거 때마다 등장하고 심지어 시위 현장에서도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그런 구절입니다. 이 말은 그렇게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에요


지금부터 왜 금식의 이야기에 이 비유가 붙어 있는지 제가 설명해 드릴테니까 잘 한번 들어보세요.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시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금식의 이야기가 더 아주 선명해질 겁니다. 그러면 아마 다음 주까지 하면 여러분은 그냥 이 시대들이 오해하고 있는, 그 이슬람교인들 이라고 하는 라마단식의 그런 금식으로 지금 기독교도 금식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거든요. 그것이 얼마나 우매한 이슬람교인들도 하는 그런, 그런 우매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아시게 될 거예요


주님은 무슨 금식을 이야기 하셨는지 이 비유를 원문으로 보면 아주 중요한 세 단어가 키워드로 쓰이고 있어요

첫 번째 단어가 ‘카이노스’고 두 번째 단어가 ‘네오스’ 라는 단어고 세 번째 단어가 ‘팔라이오스’ 라는 단어에요. 그 단어의 뜻을 여러분이 잘 이해를 하시면 이 비유는 아주 쉽습니다


‘카이노스’(καινόςG2537)라는 단어는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NEW 라는 단어에요. ‘네오스’(νέοςG3501)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에요. 여기서도 NEW 비슷하죠. 새로운 NEW 라는 단어가 나온 거거든요. 새로운, 이거와 대조적으로 ‘팔라이오스’(παλαιόςG3820)라는 단어가 여기에 이제 나오는데 이 단어는 뭐 ‘오랜 된’, ‘묵은’, ‘옛 것의’ 뭐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무슨, 어떤 차이가 있냐면 이 ‘카이노스’는 새로운 이란 뜻이지만 새것, 새로운 이런 뜻인데 어떤 새것이냐면, 예전에 아주 엉터리로 살 던 사람들이 사람이 이제 개과천선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할 때에 그 새것 있죠? 그러니까 똑같은 사람이에요. 똑같은 사람인데 예전에는 엉터리로 개차반같이 살다가 이 사람이 변화하고 성숙되어 새롭게 변했을 때에 그걸 ‘카이노스’ 라고 그래요

반면에 ‘네오스’ 라는 단어는요. 그냥 본질적인 그 새것 있죠? 그 새것


제가 예전에 ‘칼로스’ 라는 단어하고 ‘아가또스’ 라는 단어를 비교해서 설명해 드렸는데, 둘 다 선이죠? 둘 다 선이라는 단어인데, 이 ‘칼로스’ 라는 단어는 나타난, 겉으로 나타난 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성전이나, 성경이나, 율법이나 뭐 예수나 이런 것이 이렇게 나타난 선이죠? 눈에 보이는 나타난 선. 그러니까 어떤 선이라는 것을 내용으로 담아 눈에 보이게 나타난 것으로 준 것. 그래서 그 눈에 보이는 그것을 ‘칼로스’ 라고 그러고, 이걸 ‘칼로스’ 이것의 내용으로 진짜 그것을 선하게 만드는 그 내용이 바로 ‘아가또스’ 라고 그랬잖아요. 그죠


그런데 둘 다 선인데 이 ‘칼로스’ 라는 걸 이렇게 나타내 보여 준걸 이 ‘아가또스’ 로 알지 못하고 그냥 나타난 그것. 그 성전, 그 예수, 그 성경으로 보게 되면 그것 자체가 뭐에요? ‘카코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개역성경이 ‘악’이라고 번역한다고 그랬습니다


이런 개념들을 여러분이 잘 알아 두시면 제가 하는 설교들이 어렵지 않아요. 요즘 설교가 자꾸 어렵다고 사람들이 그러는데 어떤 분들은 막 너무너무 좋아가지고 그냥 그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듣는 반면에 어떤 양반들은 머리를 긁적긁적 거리면서~ 여러분들이 그런 개념들을 잘 아직 숙지가 안돼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여러분이 이런 개념들을 숙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굉장히 여러분이 좀 안타까워하시고 하셔야 되는데 그냥 저 양반이 다음 주에 또 설명해 주겠지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아닙니다. 여러분 제가 언제까지 여러분 곁에 있을지 여러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 여러분이 이해를 하고 계셔야 되요


이 ‘칼로스’ 는 건 선이에요. . 선인데, 그러니까 이해가 안가면 머리를 하여튼 막 굴리셔야 되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이해가 안 갈 때 그냥 확 포기해 버리면 그때부터 졸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타난 선이에요. 성전도 분명히 성경이 선하다고 그랬고, 예수도 선한 분이고, 율법도 선한 거예요. 선한 건데,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이 진짜 선(‘아가또스’)으로 이해되어지지 못해서 그냥 그 표피적인 것으로 그들에게 이해되어진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건 그냥 악(‘카코스’)이라니까요. 그게. 성경이 그걸 악이라고 그래요. 만찬가지로 이 새것(‘카이노스’) 있죠? 우리 지종현 집사의 1년 전, 낡은 것(‘팔라이오스’) 옛 것, 그런데 지금 새거됐잖아요. 그죠? 그런데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죠. 아주 좋은 예가 하나 들어와 가지고~ 그죠? 보세요.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라니까요. 그런데 그 안에 어떤 게 들어갔어요. 그 내용이라는 새것이 그게 ‘네오스’ 에요. 그거는 그냥 본질인 새것. 이게(‘네오스’) 들어가니까 어떤 이가 ‘팔라이오스’ 상태에서 묵은 것, 옛날 것, 낡은 것 이 상태에서 ‘카이노스’ 새로운 것이 되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팔라이오스’ 라는 이 단어는 ‘팔린’ 이라는 이 단어에서 나온 건대요. 이 ‘팔린’ 이 뭐냐면 반복하다, 진동하다, 씨름하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희생제사는 계속 반복해서 드려야 되죠? 율법도 계속 반복해서 지켜야 되는 거죠? 영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은 율법은 계속 지켜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의 ‘팔린’ 이에요. 그러면 ‘묵은 것’ 이라는 건 단순히 ‘옛날 것’ 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걸 계속 반복하고 진동하고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씨름해야 하는 율법적인 어떤 것을 ‘묵은 것’ ‘옛날 것’ 이라고 하는 거예요. 반면에 새것은 거기에서 벗어나서 어떤 것을(‘네오스’) 받아 거기에서(‘팔린’) 벗어나서 옛 것이(‘팔라이오스’)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이(‘카이노스’) 되어 버리는 거 있죠? 이걸 ‘카이노스’라고 그래요. 이 차이만 잘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이 비유는 아주 쉽게 풀 수 있어요.

고린도후서 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서는 어떤 단어가 쓰였겠어요? 새것이 되었으니까 ‘카이노스’ 죠 거봐요. 이렇게 잘 하면서 말이야~ 당연히 ‘카이노스’ 에요. 똑같은 존재인데 새것이에요 지금 여기 있는 분들 그죠? 새것이에요 새로운 피조물이죠? 여러분 그런데 겉은 우중충 옛날 거란 말이에요. 똑같이 그러니까 이거 이게 바로 ‘카이노스’ 에요. 새것. 새것인데 그 본질이 변해 버린 게 아니라 어떤 변화와 성숙, 어떤 하나님의 선물, 그 은혜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그렇게 하나님께 여겨지고 평가되어지는 새것인거예요. 자 그리고 그 ‘팔라이오스’ 는 구식 이라는 말 정도가 아니라 반복하고, 씨름하고 진동해야 하는 율법적인 언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비유의 의미를 해석해 보자는 말이에요. 이 금식의 이야기의 연장으로 붙어 있는 새 술과 새 부대의 이야기를 각 절로 이렇게 분해를 해보면 36절은 ‘카이노스’ 와 ‘팔라이오스’ 의 대조에요. 그리고 37절은 ‘네오스’ 와 ‘팔라이오스’ 의 대조에요. 그러면 38절은 ‘네오스’ 와 ‘카이노스’ 의 대조에요. 이러한 사전 분석이 이 비유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키가 되요.

36절은 ‘카이노스’(καινόςG2537)와 ‘팔라이오스’(παλαιόςG3820-낡은)의 대조

37절은 ‘네오스’(νέοςG3501)와 ‘팔라이오스’(παλαιόςG3820-낡은)의 대조

38절은 ‘네오스’(νέοςG3501)와 ‘카이노스’(καινόςG2537)의 대조

먼저 36절을 보시면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라고 시작이 됩니다. 여러분 개역성경이 좀 웃기게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았어요? 아니 어느 미친놈이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서 낡은 옷을 깁는 인간이 있어요? 생각을 해보시라구요. 이게 그 말이겠어요? 아니 낡은 옷이 뭐 진짜 옛날에 고조할아버지나 이런 분이 뭐 의미 있는 어떤 걸로 이렇게 전해주는 것이 좀 떨어져서 그걸 기우기 위해 뭐 새것을 갖다 대고 이런 거는 이해가 가지만, 그런 사전 설명 없이 새 옷을 찢어서 낡은 옷을 깁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구요. 그런데 여기 그렇게 번역이 되어 있단 말이에요. 여기에서 ‘새 옷’이 ‘히마티온(μάτιονG2440-) 카이노스’이고 낡은 옷이 ‘히마티온(μάτιονG2440-) 팔라이오스’ 이에요. ‘히마티온’ 은 우리가 겉옷, 속옷 할 때 배웠던 단어입니다. 그리고 조각이라고 번역이 된 ‘에피블레마(έπίβλημαG1915)’ 라는 단어는 ‘에피발로’ 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건데요. 그 단어가 ‘속하다’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젠 여기서는 ‘붙이다’ 이렇게 번역을 해 놨단 말이에요. 그리고 ‘찢어’라는 그런 단어는 어디에도 없어요. 찢어서 뭐 어디다 붙였다는 이런 말은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구절을 직역을 하면 ‘새 옷에(‘히마티온’ ‘카이노스’) 속한 것을 옛날 옷에 속하도록 던져 넣는 건 원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런 말이에요. 다시요. 새 옷이 뭐예요? 새 옷, 겉옷이죠? 그거요? 우리는 속옷, 옛 사람을 새 사람으로 덧입는다고 하잖아요. 그게 새 옷이란 말이에요. 그 새 옷에 속한 것을 옛 옷, 헌옷, 묵은 옷에 속하도록 던져 넣는 건 원리적으로 안된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새 옷에 속한 그게 뭐겠어요? 당연히 진리죠. 진리의 말씀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새 옷을 새 옷 되게 하는 거는 진리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 복음 밖에 없단 말입니다. 자 새 옷에 속한 그것을 묵은 옷, 낡은 옷에다가, 낡은 옷은 당연히 ‘팔라이오스’ 니까. 율법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율법에다가 던져 넣는 것, 이건 불가능이다 이런 말이에요. 새 옷을 뭐 조각을 찢어서 헌옷에다가 갖다가 기우고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새 옷에 속해 있는 그것을 낡은 옷에다가 던져 넣어, 속하도록 던져 넣는 것은 원리적으로 형요부사니까 안된다 이런 말이에요. 당연한거죠.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건 새것의 파괴다, 스키조(σχίζωG4977) 라는 단어가 분열하다, 부수다 이런 말이거든요.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왜냐하면 그 새것에 속한 것은 옛것과(거기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한글 성경에는요? 보세요. 옛것과 합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 ‘합하다’라고 번역이 된 ‘쉼포네오’ 는요 함께 한 소리를 내다 이런 말이에요. 사전 있는 분 찾아보세요. 함께 한 소리를 내다 이런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왜 새것에 속한 것을 낡은 옷에 속하도록 던져 놓을 수 없냐면 새것에 속한 그 말과 옛 낡은 옷에 속한 그 말이 함께 한 소리를 내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둘은 섞일 수가 없다는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금식의 이야기가 참말, 진리와, 거짓말, 가짜 양식의 이야기잖아요. 그러니까 그거에 연결되어 지금 이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란 말이에요. 말의 이야기가~ 그 ‘쉼포네오’ 가 ‘쉼포노스G4859σύμφωνος’라는 단어의 동사형이거든요. 그게 함께 한 소리를 내다 이런 말이란 말입니다. 지금 이 비유가 금식의 이야기를 부연설명해 주는 거라는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자 새것에 속한 양식은 절대로 옛것 안에 양식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이런 말인 거예요. 왜냐하면 그 둘은 같은 말(쉼포네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말이거든요. 그렇게 새 옷과 옛 옷은 서로 엮여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율법에 보면 두 옷감을 하나로 붙여서 옷을 만들지 말라고 그러죠. 섞지 말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호지 않은 속옷을 입고 있었죠. 바느질 한 흔적이 없는 옷인 거예요. 그거는요. 그건 그 분이 이렇게 저렇게 찢고 엮어서 만든 그런 옷을 입은 분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였어요. 그분은 원래부터 호지 않은 옷, 이렇게 인간들이 이렇게 찢고 저렇게 찢어서 서로 엮어서 만든 그런 옷이 아닌 원래 그거, 진리, 그걸 입고 오셨고 그걸 넘겨 주실려고 했는데 인간들이 그걸 그대로 받지 못하고 갈갈이 찢어 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걸, 그렇게 찢은 그걸 넷으로 넘겨주는 분이다 가 십자가에서 그 분의 옷이 넷으로 찢어지는 거예요. 그러나 호지 않은 그 속옷은 찢지 말라 그러잖아요. 찢지 말자 그런단 말이에요. 왜 바로 이 넷으로 찢어서 너희들에게 준거, 사실은 우리가 찢어 버린 거예요. 그게 율법이잖아요. 진리는 하나인데, 인간들의 그 노미조 하는 두 마음, 에피뚜미아 라는 두 마음이 그 말씀을 갈갈이 찢어 버리는 거죠. 그런데 주님은 그걸 넷으로 줘요. ? 그걸로 하나를 알으라고. 주일 설교에서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넷으로 찢어서 주는 겉옷이 나오고, 호지 않는 하나의 옷이 나오는 거예요. 자 그렇게 갈기갈기 찢어서 자기들의 힘과 노력으로 이리저리 꿰매어 입는 옷, 이걸 율법의 옷이라고 그래요. 그걸 낡은 옷 ‘히마티온 팔라이오스’ 라고 부르는 거예요. 옷이 헤졌어, 낡았어, 옛날거야, 구식이야 그래서 새것 또 사야 돼 이런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여자들 거울 앞에 서면 맨날 옷이 없대~ 옷 천진데~그렇게 꿰매어 자기들이 만들어 입는 옷, 낡은 옷, 옛날 옷 이게 창세기에 나옵니다.

3:7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처음으로 한 일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하고르, 띠에요. 치마 아닙니다. 띠를 해 입은 거예요. 고작 부끄러움을 가리겠다고 띠를 해서 묶은 거예요. 상체와 하체를 겨우 분리해 놓은 거죠. 여러분. 그 일은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일부러 성경이 나무를 계속 단수로 표기를 해요. 그러면 거기에는 나무가 하나라는 뜻인데, 선악과를 먹자마자 무화과나무 잎사귀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성경이 의도적으로 선악과나무를 무화과나무로 연결을 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신약에서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해 버리는 거거든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마나 그 이파리로 자기들이 치마를 해 입었어요. 띠를 해 입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나무 뒤에 숨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있는 곳이 어딘줄 알아!?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 율법 뒤에 숨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가 숨바꼭질하는 하나님이 어딨어? 못 찾겠네~ 그런 의미로 물어 본 거 아니잖아요. 아담아 네가 있는 데가 어디냐? 어디인줄 알아? 왜 그 나무 뒤에 숨어 있어? 그런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무화과나무는 성경 전체에서 줄곧 율법을 모형 하는 나무로 등장하죠.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거란 말이에요. 그 이파리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스스로 꽃을 피울 수도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고, 그래서 무화과에요. 꽃도 아닌 것이 과일도 아닌 것이~ 고작해야 아담과 하와의 띠밖에 생산해 낼 수 없는 나무에요. 그래서 저주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거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겠다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은 거, 그게 뭐 그렇게 나쁜 일인가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해 입었다고 그러죠? 그 ‘엮다’라는 단어가 ‘타파르תפרH8609’ 라는 단어인데요. 그게 ‘바느질하다’ 라는 뜻이에요. 성경이 일부러 그런 단어를 갖다 써요. 그 띠를 진리의 모형, 띠에요. 그 띠를 만들기 위해 사람이 자기 힘을 동원하여 스스로 바느질을 해서 입더라는 거예요. 이게 최초의 낡은 옷이에요. 그리고 이것을 율법으로 계속 반복하여 설명해 주는 것일 뿐입니다. ‘타파르’~ 자 그걸 율법이라고 하고 인간들의 스스로의 힘과 노력과 열심으로 진리를 완성해 보려고 하는 그 모든 시도를 성경은 그걸로 계속 설명을 해줘요. 그게 율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들의 힘으로 이리저리 재단하여 바느질을 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옷을 해 입어 버리면 그게 바로 ‘히마티온 팔라이오스’ 구약이 되는 거예요. ‘낡은 옷’~ 그래서 주님이 그 낡은 옷의 재료인 그 율법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려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무화과나무 이야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 라는 말이에요. 그 때, 때는 이젠 여러분이 잘 아시죠? 그 때, 때가 언제에요. 때가 와야 되요. 그 때, 예수계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제 영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 때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때가 되면 열매가 열려요. 때가 되지 않으면 열매는 못 열린다니까요. 거기에서.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죠.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그래요. 못 딴다는 거죠? 그런데 주님은 따셨어요.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율법입니다. 그런데 율법, 가시나무와 엉겅퀴에서 하나님께서 포도를 따시고 포도는 연합된 성도, 이 성도를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 개가 붙어서 하나가 된 그걸 하나님이 그냥 교보재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리고 구약에도 그렇고, 신약에도 그렇고 내가 반드시 무화과를 따겠다. 라는 그런 말이 여러 번 나와요. 그런데 그 무화과는 꽃도 아니고 열매도 아닌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 무화과나무라는 거기에서 딸려고 하는 하나님의 열매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도행전에서요 집사, 7집사, 12장로 다음에 7집사가 나오죠? 7집사를 완료하고 죽는 게 누구에요? 7집사는 말씀으로 섬기는 자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가 스데반이죠? 스데반이 포도라는 뜻이에요. 포도를 땄잖아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딴다니까요. 하나님이. 열매를 따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때, 그 때는 언제에요? 주님이 스스로 그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그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되셔서 죽는 거예요.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주님은 그 율법의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골고다 언덕에서 저주를 받으세요. 저주를 받아서 말라비틀어진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열리게 하기 위해서, 그분이 친히 말라비틀어진 언약의 기둥에 매달려 버리는 거죠. 율법의 나무에요. 선악과에요. 그것이요. 그런데 그렇게 율법의 무화과나무가 죽자 거기에서 생명의 열매가 맺혔잖아요. 우리가 다음 주에 살펴 볼 건데, 그 열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렇죠? 그 말은 영이죠? 이제는 여러분 이거 다 외우셔야죠? 그런 구절들은. 그렇죠? 그러면 여러분이 그 진리를 받았어요. 그리고 여러분이 그 말을 할 때 여러분이 바로 그 열매를 맺는 분이죠? 그걸 누군가 들어서 따 먹으면 그가 산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그들의 식량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이 이제 이해가 가겠죠? 내가 내 살과 피가 너희들의 양식이야~ 라고 하신 주님의 말이~ 그죠? 그게 여러분이라니까요. 내가 이 땅의 양식이에요. 여러분. 내 안에 진리가 있다면~ 만약에 아니면 텅 빈 것을 먹은 그자가 텅 빈 것을 전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알곡과 쭉정이를 키질할 때 다 날라 가는 거예요. 자 이렇게 주님께서 저주의 무화과나무에 매달려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열매가 맺혔고 그 열매가 여기까지 이렇게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의의 겉옷이 넷으로 주어진 거죠. 그 넷은 호지 않은, 꿰매지 않은 하나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도 그걸 꿰매지 않은, 호지 않은 바로 그 하나로 갖고 있어야 되는 거고, 그것으로 전해줘야 되는 거예요. 따라서 새 옷에 속한 것과 낡은 옷에 속한 것은 분리가 되어서 서로 엮일 수 없는 게 맞는 거죠? 그래서 새 옷에 속한 것을 낡은 옷에 속하도록 던지는 건, 원리적으로 안되는 거다 이렇게 이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새 옷을 찢어서 붙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새 사람은 낡은 음식을 먹을 수가 없고, 여전히 낡음에 속한 자들은 새것을 먹을 수가 없다 는 그런 말이죠. 그렇다면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의 이야기로 한번 넘어가 보자구요. 이건 또 어떻게 그 양식, 금식의 이야기와 연결이 되는지~

누가복음 5:37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자 여기에서는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가 대조가 되고 있죠. 새 포도주는요, ‘오이노스(οίνοςG3631) 네오스(νέοςG3501)’ 입니다. 이게. 네오스라는 건 본질적인 그 새것 이라고 그랬어요. 새 포도주. 낡은 부대는 ‘아스코스(άσκόςG779) 팔라이오스(παλαιόςG3820-낡은)’ 에요. 그러니까 새 포도주는 본질인 새것을 가리키는 거고 낡은 부대는 여전히 이제 율법의 그릇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스코스’라는 단어는 단순히 그냥 ‘가죽부대’라는 말로 해석을 하면 곤란해요. 그 단어는 그 ‘스큐오스(σκευοςG4632)’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인데요. 그 단어는 그릇, 기명, 기구 이런 말이에요. 그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한 군데만 찾아 드릴게요.

로마서 9:21~24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이게 ‘스큐오스’ 거든요.)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24 이 그릇은(이 그릇은 누구래요? 우리라고 그러죠.)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그러면 여기서 부대라는 건 우리를 이야기 하는 거네요? 가죽 부대하니까 뭐 옛날에는 양이 흔했으니까 양을 통째로 잡아서 알맹이를 쏙 뺀 다음에 그 네 다리를 묶어 가지고요 거기다가 술이나 물을 넣어서 마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마 그렇게 여기도 번역을 한 거 같은데,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요. 우리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성경이. 우리의 이야기를. 이 단어는 성전의 기명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흔히 쓰는 단어인데요. 성전의 기명이라는 건 진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잖아요? 하나하나가 다. 그렇죠? 따라서 우리가 우리 안에 진리를 담게 되면 우리는 새 그릇이 되는 거예요. 새 부대에요. 그것이. 새 부대. 우리 안에 담긴 것이 진리가 아니면 우리는 그냥, 그냥 그릇이에요. 질그릇. 그러니까 보배를 담은 질그릇과 그냥 질그릇은 다른 겁니다. 여러분. 보배를 담은 질그릇은 깨지면 보배가 들어나지만, 그냥 질그릇은 깨지면 그냥 깨지는 거예요. 멸망이에요. 그것이

고린도후서 4:6~7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이게 ‘스큐오스’에요)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보면 보배가 뭐라고 그러죠? 6절이 보배라는 이야기잖아요.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하나님’ 이게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있으라’ 그 말을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어두움이 뭐라고 그랬죠? 여러분. 자 ‘호셰크’ 라는 이 단어가 어두움인데 이 어두움은 반드시 ‘오르’ 라는 ‘빛’ 으로, 적어도 성도에게 있어서는 빛으로 이해되어지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 이 어두움을 나쁘다 고 그러지 않아요. 적어도 창세기 1장에서는 이 어두움과 빛이라는 것을, 뭐가 나쁘고 뭐가 좋은 것이다 이렇게 구분하지를 않아요. 그냥 이건 어두움은 하나님이 이렇게() 나타내려고 주신 거야~고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밤 마찬가지에요. 밤이 ‘라힐’ 이죠? 뭐에요? 이게. 가르침을 주는 가르침. 밤이라는 단어 자체가 뭘 가르치기 위해 준거라는 뜻이에요. 낮은 뭐에요? 그러면. 진리를 주는 게 낮이에요. 여러분. 그러면 밤이나 낮이나 뭐가 달라요? 이 밤으로 이 낮을, 이 날을 알면 되는 거예요. 그럼 저녁은 뭐고 아침은 뭐에요? 이게 저녁이고 이게 아침인데, 이 저녁이라는 말은 ‘뭐가 이렇게 덮여 있다’ 이런 뜻이에요. 원래가. 덮여있는데, 그러니까 파자 하면 아랫것으로 시작하는 성전이란 뜻인데 덮여 있는 거예요. 그 안에 뭘 분명히 내용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아침은 뭐냐면 그 성전을 파괴하고 다시 세우기 시작하면 그걸 아침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이거 보세요. 어두움 이 어두움을 그게 뭔지 그러니까 성전을 그대로 성전으로 보면 네 눈이 어둡다 그런단 말이에요. 그걸 어두움이라고 그래요. 그걸 ‘호셰크’ 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걸 죄라고 한다니까요. 이 어두움을. 그런데 그 성전이 뭔지를 알았어요. 그런데 여전히 그 성전이에요. 그런데 어떤 이의 눈에는 그게 그냥 껍데기로 안 보이고, 그렇지, 그게 그 내용이지 라고 보인단 말입니다. 그 때 똑같은 성전을 보는데 어떤 이는 그걸 어두움으로 보고 어떤 이는 그걸 빛으로 본다 말이에요. 빛이라는 건 그런 거라니까요. 다른 종류의 어떤 것이 아니에요. 이해가 가세요. 여러분. 그러니까 이 어두움은 이 빛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고 이 빛이라는 건 그 어두움을 나타낸 거네요. 그러면 이건 이건거구, 이건 뭐냐구요? 마찬가지에요. 밤이라는 건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거예요. 그렇죠? 그 어두움을 밤이라 하자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왜냐하면 선지서나 구약이나 아니면 신약에도, 뭐 유다가 밤으로 갔다~ 니고데모가 밤에 왔다~ 이런 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창세기의 이야기들 그 창세기에서 전제들을 계속 이렇게 어떤 개념들을 정리해 놓으시는 거예요. 자 밤이라는 게 뭔가를 가르치기 위한 그 가르침이 밤이에요. 그런데 그 밤을 통해서 니고데모처럼 아 저분이 ‘빛’이구나~ 라고 알면 그게 뭐에요? 그게 낮이에요. ‘욤’ 진리를 받는 거예요. 그것이. 그리고 그게 뭐냐면 어이구 그게 덮여 있던 게 부수어지고 파괴되어지고 다시 세워지니까 나에게 보이네~ 그게 그 뜻이네~ 라고 하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그러니까 이건 그냥 다 하나라니까요. 뭐 이거는 나쁘고 저거는 좋고 이렇게 구분하라고 준 게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에게. 그런데 뭐라고 그러시냐면 바로 그 어두운 것에서 그걸 빛으로 아는 어떤 이들이 있어라~ 라는 그 분이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껍질에 그게 ‘프로소폰(πρόσωπονG4383-얼굴)’ 이죠? 그게 얼굴이라고 번역됐단 말이에요. 뭐 맞아요. 얼굴이라는 단어가 얼꼴이니까. 영의 모양이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춘 그걸 ‘보배’ 다 그러는 거예요. 지금. 그러니까 그 보배를 마음에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이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죠? 이 이야기가. 그런데 그게 없으면 그냥 질그릇이에요. 깨지는 거예요. 여기서 쓰인 단어도 ‘스큐오스’ 에요. 그릇이에요. 그릇. 기명, 기구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내용을 담는 그릇. 그러니까 그러니까 새 포도주, 오이노스 네오스, 새 포도주, 그 본질, 그 진리, 그 새 포도주는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를 이야기하는 거겠죠? 그죠? 그리고 낡은 부대는 진리와 상관없는 율법의 그릇, 진노의 그릇, 로마서의 표현대로 바꾸면 진노의 그릇, 멸망 받을 그릇, 그걸 상징하는 거예요. 낡은 부대. 그 안에는 율법이, 헛된 양식이 가득 담겨져 있어 그 새 포도주, 진리가 담길 공간이 없다 는 뜻이에요. 못 담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담길 수가 없어요. ‘팔라이오스’ 의 그 그릇에 담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어구를 직역을 하면 이래요. ‘새 포도주는 옛것이 담겨져 있는 그릇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런 말이에요. 반드시 옛것이 먼저 비워지게 되어 있어요. 만일 새 포도주인 진리가 낡은 그릇에 담겨 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그래요? 새 포도주가 낡은 그릇을 가죽 부대를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버린다고 그래요. 찢는다고 그러는데, 이거는 조각조각 부수어지다 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율법을 모래라고 하고, 부스러기라고 하고, 조각조각 깨진 것, 이렇게 이젠 이야기하잖아요. 율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조각조각 부수어 버린다. 새 포도주가 낡은 그릇을. 그리고 37절 후반부를 보며는요 그 결과 낡은 부대가 아폴뤼미(άπόλλυμιG622) 완전히 멸망한다 그래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 새 포도주, 그 물 포도주를 내시는 새 신랑, 그 신랑, 그 신랑 예수라는 돌에 오히려 걸려 넘어지는 자, 오히려 그 예수라는 올무에 걸려 멸망에 이르는 자들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여전히 율법의 그 헛된 양식으로 가득 차있는 이들에게 진리가 가면 그 예수에 의해 그들이 멸망한다 그러잖아요. 그죠?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들은 완전히 산산이 율법으로 조각조각 내어 ‘아폴뤼미’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는 거예요. 누가? 진리가요. 절대 안 받아들이니까. 그래서 주님이 그래요. 너희들은 그 말에 의해 심판 받을 거야~ 라고 그런다구요. 말에 의해서. 자 바꾸어 말하면 낡은 그릇이 그 가죽 부대, 낡은 그릇이 진리를 받아낼 수 없기 때문에 그 진리를 모래와 부스러기로 산산이 부수어 버려요. 그러니까 율법주의자들에게 진리를 주잖아요. 복음을 주면 그걸 율법으로 산산조각 낸다니까요. 그러면 그 진리는 그들을 산산조각 내버려요. 바다의 모래로~ 그렇게 되면 새 포도주 그 ‘네오스’ 그 새것이 어떻게 된다고 그래요. 땅으로 흘러 버린다고 그랬어요. 자 그 생명, 그 진리, 피는 곳 뭐다? 생명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 피를 땅으로 계속 쏟아내는 이를, 무슨 병이 걸렸다고 그래요? 유출병에, 혈루병에 걸렸다고 그러죠? 그들은 부정한 자다 라고 하는 게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 그렇게 주님께서 당신의 피를 흘려서 이건 참 생명이잖아요. 그 피는 곧 물이고 물은 곧 성령이고 그 성령은 곧 진리니까. 그것을 흘려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주죠? 왜 줘요? 그걸 너희들이 받아 마시고 네 마음으로 가지라 라고 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걸 KEEP 하지 못하고 흘려버리면 그러면 멸망이에요. 그가 부정한 자란 뜻이에요. 그래서 혈루병이 부정한 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율법에도 여자가 월경 때는 부정하다고 한 게 바로 그런 의미란 말입니다. 그 피를 땅에 흘리면 안되는데 율법주의자들에게 그 진리가 가게 되면 그들은 이 진리를 부수어 버리고 진리도 그들을 부수어 버려 그리고 완전히 멸망케 해요. 그리고 그들에게서 그 새 포도주가 담길 공간이 없기 때문에 계속 흘러~ 땅으로~ 그러면 저주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엑케오 G1632 έκχέω’ 쏟아진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쏟아진다, 새 포도주가 쏟아진다. 따라서 새 그릇은 반드시 그 새 포도주를 마음으로 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낡은 그릇은 절대로 진리의 양식을 먹을 수 없다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금식의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예요. 똑같은 이야기잖아요. 그들은 매일 엉뚱한 율법의 양식이나 먹는 거죠.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그릇에 담겨져야 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팔라이오스’ 라는 그릇에 담겨져 있으면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자 새 그릇에 담긴 새 포도주를 창세기 언어로 바꾸면 ‘자칼’ 과 ‘네케바’ 인 거예요. 자 ‘네케바’ 라는 그릇 그 단어 자체가 (제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홈’ 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 단어가 ‘구멍을 뚫다’ 이런 뜻도 있어요. 그러니까 ‘홈’, 구멍이 뚫려진 어떤 곳에 거기에 들어가야 할, 그러니까 보석이 (뭐라고 그러죠? 이거 거미손이라고 하나 뭐라고 그래요?) 보석을 이렇게 잡는 그 금, 이런 거 있죠? 이런 ‘홈’ 이런 거를 ‘네케바’ 라고 그러고, 그 안에 담기는 것을 ‘자칼’ 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담겨져 있지 않으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생각해 보세요. (알 빠진 반지 끼고 다니는 여자 같이 추한 여자 어딨어?) 그런데 그 ‘자칼’ 이 없는 그 그릇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런데 이 보석, 이 보배, 이 ‘자칼’ 은요~ ‘네케바’ 가 없으면 이것도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그냥 구슬이에요. 이건. (다마치기 할 때 쓰는 다마라니까) 그러잖아요? 이‘자칼’ 은 영이잖아요. 영이라는 개념은 그걸 담는 그릇인 이런 육신이 없으면 이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영을 뭐 어떻게 설명할 거냐구요. 영은 비로소 담길 그릇과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그 때부터 의미가 발생하고 가치가 생기는 거예요. 안 그러면 그게 담길 그릇이 없을 때 영은 그냥 헛개비라니까요. 신기루라니까요. 그건. 그러니까 이 둘은 반드시 연합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38절이 ‘쉰테레오G4933συντηρέω’로 끝나죠. 이게 ‘함께 완성하다, 함께 일하다, 둘 다 보존되다’ 이런 말이거든요. 개역성경에는 뭐라고 번역이 되어 있죠? 38절의 마지막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것이니라’ 이렇게 되 있는데~ 그냥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반드시 ‘쉰테레오’ 함께 완성되어야돼~ 둘이 함께 공존해야 돼~ 이런 말이에요. 새 포도주는 새 그릇에 담겨 있어야 둘 다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다~ (σύνG4862-함께) 이라는 단어 자체가 함께니까요. 그렇게 새 포도주 성령을 양식으로 먹은 자들은 이제 성경과 예수뿐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이제 그 나타난 표피로 육체대로 보지 않고 영으로 보겠죠? 영으로 본다니까 뭐 대단한 거 같은데 진리로 본단 말이에요. 그 육체로만 판단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선악으로

고린도후서 5:15~17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산 자들은 새것이네요.) 다시는 저희 자신을(이건 옛 것이네요.)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영입니다. 다시 사신 자는 그 예수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다시 산 건~ 새 남편이에요. 새 남편)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보세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안다니까요. 사람들은요. 그 법에 그 진리를 못 받으면~ 그런데 그 진리를 안 이들이 어떻게 보냐면~)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옛날 것이에요. 그런데 옛날 것이 여기서 ‘이전’ 이란 뭐냐면 ‘아르케’ 라는 단어가 쓰였어요. ‘베레시트’ 의 그것, 그 옷은 지나갔다는 거예요.)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 옷이 뭐죠? 무화과나무 그 옷~ 이전 것은 지나갔어요. 그걸 낡은 옷, 묵은 옷이라고 했잖아요. ‘팔라이오스’ ‘히마티온(μάτιονG2440-) 팔라이오스’ 라고 그런데 여기서는 ‘아르케(이전)’ 라고 쓴다 말이에요. ‘태초의 그 옷’ 그것은 지나갔으니 이제 새것이 왔다~ 새것이 되었다. 라고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그 새것 ‘카이노스’ 우리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그 그리스도도 우리에게는 육체대로 아는 그리스도면 안되잖아요. 십자가에 매달아놓고 열심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그 예수, 그건 나와 아무 상관없는 예수죠. 그 복음은 그냥 내가 소문으로 들은 복음이지 내거가 아니라니까요. 나와 아무 관계없는 그 십자가가 나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냐구요. 이제는 육체대로 알지 않아요. 영으로 알아요. 그런데 영은 어디에 있어요. 여기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이천년 전의 그 골고다의 십자가는 이제 사르르 녹아 이리로 들어와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더 이상 그것은 나에게 찬양의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감격의 대상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거보고 눈물 콧물 짜고 하는 그런 일을 그칠 수 있다니까요. 그런 사람을 이제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라고 부르고 그들은 더 이상 묵은 것에 매이지 않는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은 이제 새 포도주만을 원하죠. 그게 그들의 참된 양식, 참된 이라는 건 진리 ‘아가또스’ ‘알레떼이아’ 에요. 진리의 양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새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고 여전히 묵은 포도주인 율법만을 먹고 마시고 있는 이들은 절대로 새것을 원하지 않아요. 이 진리를 아무리 이야기 해 줘도 그 율법, 내가 내 열심으로, 내 가치 챙기고, 내 만족 챙겨 갖는 그 신앙생활이 너무 좋아~ 사실은 그게 보람 있고, 할 맛도 납니다. 여러분. 힘들지만 애써 헌금하고 힘들지만 정말 매일 새벽에 나와서 새벽기도 하고 하는 거~ 보람 있다니까요. 그리고 인간들은 그렇게 할 때요 그 때 만큼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굉장히 뿌듯해 져요. 그래서 그것을 열심히 시키는 교회는 다 부흥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새벽기도 끝까지 안할려고~ 집에서 해요. 집에서~ 새벽잠 없으면~

그래서 마지막 39절이 이렇게 끝나요.

누가복음 5:39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보세요.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자들은 절대로 새것을 원하지 않는다. 라는 거예요. ? 묵은 것이 인간들의 구미에 맞아요. 그래서 이 인간들은 전부 묵혔다 먹어~ 된장도 묵혔다 먹어~ 술도 묵혔다 먹어~ 치즈도 묵혔다 먹어~ 그리고 오래 묵힐수록 비싸~ 죠니워커 블루가 제일 오래된 거거든요. 죠니워커 레드 보다 배나 더 비싸요. 배가 뭐에요. 아 옛날 이 전적이 다 나오네~ 뭐든지 묵혔다 먹어~ 그리고 오래 묵힐수록 가치가~ 골동품 보세요. 오래 묵혀 두면은 묵혀둘수록 비싸~ 성경은 그런데 새것, ‘네오스’ ‘카이노스’가 되라고 그래요. ‘네오스’ 를 받아서~ 그런데 인간들은 전부 묵혀~ 뭐든지~ 그게 그냥 우연히 아닌 거예요. 여러분. 인간들의 그 본성. 심지어 싱싱한 회도 왜 초밥에 식초를 뿌려 먹는지 아세요? 그걸 오래 묵히면 시거든요. 그런데 성질이 급해갖고요. 새것을 갖다 놓고 묵은 것으로 만들어 먹는 거예요. 그래서 식초를 뿌리는 거예요. 다 묵혀 먹어~ 자 그렇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카이노스’ 에 새것들은 이제 본질이 바뀐 게 아니라 신분과 그들에 대한 평가가 바뀐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낡은 그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이 눈에 보이는 어떤 차이를 가지는 게 아니라 낡은 것이 그 진리 안에서 새것으로 여겨지는 것 일 뿐인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대단하게 크게 변화가 없을 수도 있는 거란 말입니다. 단지 그것에 누림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다른 게 아니라 묵은 포도주가 담고 있는 그 새것이라는 내용을 알게 되면 그게 새 포도주가 되는 거예요. 말씀은 어때요? 성경이 율법으로 보이면 그게 묵은 것이에요. 그러나 진리로 보여 지면 그 자체로 새것이에요. 성경이 그 사람들은 딴 거 갖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똑같은 성경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묵은 것으로 가고 어떤 이들에게는 새것으로 보여 져요. 그래서 새 언약, 새 언약 신약이죠. 새 언약에 쓰인 단어가 ‘네오스’ 가 아니라 ‘카이노스’ 에요. 그 말은 무슨 말이에요? 이건 그냥 구약, 그 내용을 그대로 갖다 옮겨 놓은 거야~ 이런 말이에요. 구약도 이 이야기였어~ 이런 말이에요. 그 새 언약이 ‘카이노스’ 에요. ‘카이노스’

고린도 후서 3:6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여기에서 의문이나 영이나 똑같은 말씀을 가리키는 거죠? 의문은 율법이고 영은 ‘푸뉴마’ 말씀이에요. 진리의 말씀. 의문의 말씀이 따로 있고 영의 말씀이 따로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말씀을 의문의 말씀, 즉 율법으로 보고 열심히 행하고, 육체의 일을 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 말씀을 영으로 보고 열심히 살리는 일을 하더라는 거예요. 살리는 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워서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하는 거예요. 영으로 보고. 그래서 주님께서도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따라주시면서 ‘이것이 바로 새것의 모형이야~’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새것의 모형이야~

마태복음 26:27~29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거 포도주에요. 유다가 나간 다음에 포도주를 지금 따라 주시는 겁니다.)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자 피에서 포도주로 왔습니다.)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포도주죠?)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제 그 아버지의 그 나라가 완성이 되면 너희와 함께 뭘로 마셔요? 새것으로 마신다 말이에요. 내 안에 그 그리스도가 영으로 들어오시면 나와 그 그리스도는 함께 새것으로 마시는 거죠? 그러데 이 새것이 뭐냐면 ‘카이노스’ 에요. 그러니까 지금 ‘카이노스’는 그 전에 어떤 것을 내용으로 보았을 때 ‘카이노스’ 니까~ 그 포도주가 사실은 새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라는 뜻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이제 그 새것을 내가 마셨다면~ 여러분 다 마셨죠? 성령을 마셨단 말이에요. 주님이 이게 생수라고 그랬고 그게 바로 성령이다. 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새것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주님과 함께 마시는 새것~ 그러면 여러분이 성찬식 때 마시는 그 포도주가 이제는 뭐~ 마셔도 되고 안 마셔도 되는 거죠. 굳이 다른 대다수가 그거 합시다~ 그러면 우리도 할 겁니다. 당장에 다음 주부터 하자구요. 진짜 포도주로 찰랑찰랑 넘치게 내가 주게~ 한 잔씩 꾹꾹 눌러서 드릴게~ 마셔도 되고 마시면서 그렇지 이게 새 것이지~ 이게 성령이지~ 라고 해도 되고, 그거 뭐 그까짓 거 다 알았는데 안 해도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 안하면 큰일 나는 게 ‘로만 캐톨릭’ 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열심히 다니면 괜찮다고 이야기 하는 건 도대체 무슨 베짱이냐구요. 여러분 잘 이해하셔야 되요. 그거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인데 그렇게 그냥 선배들이 그리고 혹 내 옆에 있는 이들이 친한 이들이 다 그렇게 간다고 이게 맞는 거겠지~ 이라고 하면 다 죽어요. 자 자 그 포도주는 ‘피’ 고, 피는 곧 물이고, 그 물은 그 진리고 그 진리는 성령이며 그 성령이 바로 새것이에요. 다 같은 겁니다. 그래서 요한이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죠.

요한일서 5:7~8

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보세요. 성령, , , 진리 다 그걸 증거 하는 거래네요. 같은 거죠? 이게 뭐에요? 이게 새 것이잖아요. 이게 뭔지를 알면 그게 바로 새것이잖아요.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로마서 7:7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 라고 이야기 해 놓고 ‘탐내지 말라’ 라는 말로 그 죄를 다시 받아요. 이게 ‘에피뚜미아’ 거든요. 그러니까 율법이 그 내용이라는 걸 내가 몰랐으면 나는 계속 탐심을 그 내 욕구, 육체의 욕구를 따라 그 율법을 그냥 행해 버렸을텐데~ 그걸 죄라고 그래요. 나는 계속 죄를 지을 뻔 했구나~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율법의 내용이 뭐라는 거예요?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거죠? 탐심이 무엇인지 가르쳐서 그거 하지마~ 그거 안돼~를 가르쳐 주는 거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바울이 자기는 열심히 행했죠? 열심히 행했는데 율법이 그거 열심히 행하지 말라 는 거였다 라는 얘기 아니에요. 지금. 그럼 그 열심히 행한 게 뭐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 육체로 육신으로 열심히 행해 버리면 그게 ‘에피뚜미아’ 요 그게 ‘죄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뭔지를 알았으면 더 이상 그 율법은 나에게 있어서 죄도 아니고 내 육체의 욕망을 이루는 그런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 때 그 율법은 나에게 빛이 되는 거라니까요. 그렇게 먹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십계명의 맨 마지막이 그 전체를 정리하는 탐내지 마로 끝내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그걸 딱 빼고~ 그건 전체 주제니까~ 살인, 간음, 거짓 증거, 사랑 이렇게 네 개만 주는 거란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16~18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성령과 육체의 욕심이 대조 됩니다. 성령은 ‘푸뉴마’ 에요. ‘호푸뉴마’ 말씀입니다. 말씀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말씀을 쫓아 이루어라~말씀을 이루어라 이런 말이에요.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욕심이 ‘에피뚜미아’입니다. 그러면 말씀과 진리와 육체의 욕심은 서로 대촉점에 있는 거예요. 육체의 욕심은 율법인 거예요. ‘노미조’ 하는 우리의 생래적 그 본성)

17 육체의 소욕은(이것도 ‘에피뚜미아’ 에요. 탐심이라고 번역된 그 단어)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의 소욕, 육체의 소욕 이러는데 소욕이라는 게 뭐냐면, ‘에피뚜미아’ 인데 예수님이 내가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했다 할 때에도 ‘에피뚜미아’ 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어떤 존재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데 성령의 소욕은 이 육체의 소욕 우리의 그 율법의 두 마음, 뭐든지 선악으로 나누어서, 그렇게 이것 저것으로 나누어서 자기들이 가치 있다 생각하는 거를 추구하는 그것과 반대되는 게 성령의 ‘에피뚜미아’ 란 말이에요. 주님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 ‘푸뉴마티코스’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 버리면 우리 안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에피뚜미아’는 육체에 있을 때에 그 모든지 ‘노미조’ 해버리는 그 ‘에피뚜미아’와 다른 거라는 거예요. 주님이 자연스럽게 내어 놓은 그 ‘에피뚜미아’ 그것을 우리가 갖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나누어서 안 봤다니까요.)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그 말씀이 너희를 인도해 간다면 너희는 절대 그 율법 아래 있지 않지~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왜 모든 말씀을 다 자꾸 그 율법으로만 보고 그걸 그냥 네 육체로 자꾸 행할려고 그래~ 그런 말이에요. 그걸 그렇게 행해 놓고 그냥 다 이겠거니~ 하고 그렇게 있는 거 큰일 나는 겁니다. 여러분. 자 이렇게 ‘에피뚜미아’ 를 금하는 율법을 그냥 ‘에피뚜미아’ 로 행하게 되면 그게 멸망의 양식이라는 거고 그 ‘에피뚜미아’ 를 금하는 율법을 통해 그 ‘에피뚜미아’ 를 하지 않게 되었다면 나는 이제 그걸 금식하는 자가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그것이 바로 나의 생명의 양식이라는 거예요. 왜냐면 그 ‘에피뚜미아’ 가 죽어버린 저주의 무화과나무에서 열린 그 진리의 말을 나는 이제 따 먹는 거니까. 그래서 새로운 포도주, 그 새 양식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말씀 그 율법, 그 예수, 그 성전을 올바른 내용으로 아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새 계명을 설명하면서, 이건 뭐 다른 게 아니라 어두움인 옛 계명을 그냥 내가 드러낸 거야~ 이렇게 이야기 해는 거예요. 새 계명이라고 따른 거 뭐 대단한 거 갖다 주는 게 아니라 옛날 거 그거 그냥 써 준 거야~ 그런데 그걸 내용으로 알면 돼~ 이러는 거예요.

요한일서 2:7~8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그죠? 옛 계명이야~ 다 똑같은 거라는 거예요. 창세기 1장부터 말라기 끝까지 그 이야기도 마태복음 1장에서 요한계시록 끝까지의 그 내용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새 계명을 ‘카이노스’라고 한다니까요.)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이제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어두움이 지나가고 그 어두움이 나에게 빛으로 보이네~ 그러면 그게 나에게 새 언약인 거예요. 새 계명인 거예요. 아 이제 십계명이 무슨 말인지 금방 알겠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알고 나니까 위에 다섯 계명까지도 다 나에게 해결이 되었네. 그러면 나에게 있어서 그건 어두움이 아니라 이제 빛이잖아요. 그래서 요한이 그러는 거죠. 내가 뭐 대단하게 새 거 어디서 갖고 와서 너희에게 주는 게 아니라 옛날 것 그거야~ 그런데 그 어두움을 빛으로 볼 수 있는 너희에게 이것이 주어지니 이것이 새 계명이 되는 거 아니냐~ ‘카이노스’ 그러면 그게 우리에게 양식이 되는 거예요. 정리를 하면 이러합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리는 말씀이라는 양식을 참 양식으로 먹고 살아 나야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는 존재에요. 그런데 그 하늘의 말씀은 이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그 제한된 이성 속으로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아래의 것이라는 그릇에 담겨 내려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껍데기로 보이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만 진의로 보이게 되어 있어요. 전자는 그렇게 하늘의 말씀을 쭉정이로 보고 쭉정이로 먹는 자들이고 후자는 그 말씀을 참된 알곡으로 먹고 살아나는 자들인 거예요. 이게 성경 전체의 이야기에요. 그 양식의 이야기에요. 어떤 걸로 먹을 거냐~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부터 이 양식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다음 주에 설명해 드릴건데~ 오늘 다 할라고 그랬는데 힘이 들어서 안 되겠어요.

창세기 1:29~31

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채소 아닙니다. 이건 풀이에요. )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이 양식의 이야기가 나오죠? 너희에게는 ‘자칼’과 ‘네케바’가 된 이들이게는 내가 온 지면에 그 씨 맺는 모든 채소, , 씨를 씨 뿌리는 자 ‘아라 제라’ 모든 채소를, 모든 풀과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 그런데 여기 나무가 단수에요. 모든 이라는 단어 ‘콜’이 붙어 있는데 나무는 단수에요. 모든 하면 복수로 써야 되는 거 아니에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창세기에 두 나무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것도 하나라는 얘기에요. 그래서 모든 그러면서 그냥 나무. 자 그 나무를 너에게 식물로 줄 거야~ 양식으로 줄 거야~ 그거를 생명나무 열매로 먹으면 된다는 얘기요.)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우글우글거리며 땅에 모든 기는 것, 공중의 모든 새, 성전, 땅의 모든 짐승, 진리가 되지 못한 그러한 ‘네페쉬’들 이들에게는 뭘 줘요? 모든 푸른 풀, 푸른이란 단어가 ‘텅빈’ 이란 뜻이에요. 텅 비어 있는 쭉정이 줄 거야~ 양식으로 그런 말이에요. 그러면 이거 먹으면 큰일 나는 겁니다.)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라는 건, ‘이것이 정당하다’ 이런 말이에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성경에 나오는 모든 양식의 이야기 금식의 이야기는 다 여기서 출발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여 풀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양식의 이야기를 알면 다른 그 어떤 개념들, 괜히 막 복잡하게 성경이 이렇게 해 놨는데 그것들 몇 개 알았다고 그래가지고 뭐 그냥 논문 쓰고 사람들한테 뭐 내가 뭐 그냥 성경에 통달한 사람인양 이렇게 하는 사람들 많은데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거 몰라도 돼요. 여러분. 이것만 제 양식으로 먹어버리면 됩니다. 몇 개 아는 거 그냥 추측하고 상상하여 이거 아니에요? 그거 딴 사람들한테 그거 자랑하고 싶어가지고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이 양식을 이 말씀을 이렇게 그냥 제대로 먹어 버리면 여러분은 그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그것을 당연히 이렇게 금하게 되어 있어요. 당연히 금하게 되어 있어요. 물론 그것을 먹지 않는 게 육신을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 힘듭니다. 그걸 안 먹는 게 우리 육이 지금 굶어 죽어가는 거거든요. 왜냐면 육신은 그걸 먹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는 육신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걸 먹지 말라는 거예요. 그거 금식하라는 거예요. 그걸 금식하는 게 새 것으로 먹는 거니까. 그래서 제가 이거를 요즘 너무 이게 헤이 해 진 거 같아서 우리 저 총괄팀장 이하 우리 팀장들이 저를 말씀만 이렇게 전할 수 있게 너무 그냥 잘 해줘가지고, 옛날에는 이런 설교를 할 때에는 막 고민하고 ?? 제가 경험해 보고 막 이러고 하고 그랬거든요. 열심히득심이라~ 그리고 제가 주일 저녁부터 사흘을 한 끼도 안 먹고 굶었어요. 이 금식을 설명할려고 옛날에는 몸에서 우러나왔는데 밥을 안 먹는 게, 내가 이 육신이 원하는 걸 안 먹는 게 어떤 건지를~ 너무 그냥 와이프가 밥을 잘 채려 주니까. 맨날 배터지게 먹다 보니까 이 감각을 잊어버렸어~ 그래서 오늘 오전까지 꼬박 사흘을 굶었어요. 그리고서 이렇게 뭘 안 먹는다는 게 이게 미치겠는 거구나~ 그런데 하나님이 먹지 말란단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금식을 한번 씩 해 보실려고 한다면 anytime OK 해보세요. 여러분. 그걸 안 먹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그 율법 그것이 우리에게 제공되는 곡기란 말예요. 그거를 먹지 않고 하늘의 그 양식으로 우리가 진짜 이 역사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 이건 불가능인데 우리가 살아 있다니까요. 사흘을 굶고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이 기적이 어딨어~ 살아 있잖아요. 그래서 은혜라는 게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게 맞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한 번 열심히 끌려 가 보세요. 여러분 삶 속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진리가 뭔지 글로 말로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마음으로 이렇게 알아요~ 그리고 제가 아 해도 아 그거 어 해도 아 그거 이렇게 알아 먹는다니까요. 그게 뭔지 그 하나만 가지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음 주에 창세기 이 부분은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에게 먹으라 하신 것과 먹지 말라 하신 것이 분명히 이렇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도 알고 보면 그냥 하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육은 우리 육이 편하고 또 우리의 육이 추구하고 우리의 육이 필요로 하는 것만을 선택하여 하나님이 원치 않는 그 것을 열심히 먹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이끄사 이렇게 새로운 것으로 먹여 주시고 몸은 힘들고 육신은 고통스럽지만 이 세상이 유일한 양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금하게 해 주시니 감사드릴 뿐입니다. 하나님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끌려 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