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34) 골방, 닫힌 문, 중언부언 (마6:6~8)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21

산상수훈(34)  골방닫힌 문중언부언

 



(6:6~8)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 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중언부언(重言復言)이라는 한자어를 직역을 하면 무거운 짐을 지우는 말을 새로운 부활의 말(회복의 말)로 하는 것입니다물론 사전적 의미는 한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만 그냥 한자의 의미 값만으로 풀어보면 그러하더라는 말입니다그러면 그러한 중언부언은 반드시 해야 하는 거잖아요우리가 어떤 안경을 쓰고 문자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언부언이라는 말로 쓰인 바톨로게오라는 단어는 말을 더듬다지루하게 재잘거리다공연히 반복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가 맞습니다그러나 그 단어의 원의를 추적해 올라가 보면 그 말도 역시 진리로 해석되지 못한 비 진리의 엉뚱한 말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우리가 기도를 할 때에 그러한 엉터리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을 주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그것은 성전 마당 귀퉁이에서눈에 보이는 것 안에 갇힌 그러한 내용을 주절거리는 저급한 자리에서 벗어나은밀한 하나님의 비밀이 숨어 있는 성전의 골방즉 진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것이었습니다굳이 한자 용어로 표현을 해 보면 이 보이는 현상계와 그 현상계의 수준에서 이해되어지고 해석되어진 말씀을 차안이라 하고 보이지 않는 깨달음의 세계진리의 세계와 그 진리로 해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피안이라 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지 않도록 은밀한 진리의 골방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먼저 그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아야 합니다성경에서는 그 문을 열린 문이라고도 하고천국 문이라고도 하며양의 문이라고도 합니다우리가 은밀한 지성소의 골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양의 문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오늘 본문 바로 뒷장으로 가면 그 문이 나옵니다.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우리는 성전 마당에서 율법적 신앙생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반드시 골방으로 들어가서 그 성전마당의 희생제사가 무엇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그래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성전 마당에서 눈에 보이는 차원의 것들로 아무리 열심을 부려 보아야 그렇게 열심을 부린 만큼 멸망에 가까워 질 뿐입니다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그 감추어져 있는 은밀함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그런데 그 골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협착하다고 합니다당연히 사람들은 그 문을 선택하지 않을 게 뻔합니다왜냐하면 바로 옆에 크고 넓은 문이 있거든요크고 넓은 문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문이라는 말입니다반대로 좁고 협착한 문이라는 것은 장애물이 많아 좁아진 문을 뜻합니다그 말은 그 좁고 협착한 문도 원래는 큰 문이라는 그런 말입니다.그런데 그 큰 문에 장애물이 놓여서 좁은 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그게 스테노스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문의 장애물은 누가 놓은 것일까요선악과 패러다임 속에 완전히 장악되어 버린 인간의 마음이 그 장애물을 놓은 것입니다양의 문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은 누구나 다라는 대상을 향한, ‘진리라는 내용을 가진 열린 문입니다그런데 선악 체계 속의 아담들은 그 진리의 문 앞에 율법이라는 장애물을 놓습니다그리고는 스스로 못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그게 아담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좁은 문이라는 것입니다그리로는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3:20)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렇지요율법의 문으로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고 합니다그게 진리라는 문의 본질입니다.

인간들이 율법으로 장애물을 쌓아버리면 아무도 못 들어가는 그런 문이 진리의 문입니다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율법의 두 마음으로 가진 이들에게 있어서 진리의 문은 생각하기도 싫은 문입니다.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고 있는 자신에게는 영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거든요아니 엄밀히 말해 그 은혜의 문이라는 것은 율법의 두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문인 것입니다 

 


(23:13)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게 좁은 문입니다율법의 장애물에 막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천국의 문입니다성경은 이렇게 선악 체계 속의 아담들이 진짜 크고 넓은 진리의 문을 자기들 안의 율법의 두 마음으로 좁고 협착하게 막아 버렸다고 진술을 합니다그게 하나님이 보시는 이 세상 속 진리의 문의 현실입니다좁고 협착한 문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문.

 

그런데 선악과 패러다임 하의 인간들은 그게 구미에 맞아요그 문은 인간의 열심과 노력과 희생과 헌신으로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는 문이거든요그 문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는 포용력 있는 문처럼 보입니다그래서 아담들은 그 율법의 문으로 몰려듭니다어차피 주어진 육신과 세상의 자원으로 열심을 부리기만 하면 되거든요진리 같은 거 몰라도 되고복음 같은 거 사모하지 않아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성도들도 육신의 몸을 입고 차안의 세상호 코스모스의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그들도 그 골방으로 들어가는 진리라는 문 앞에 엄청난 율법의 장애물을 쌓게 되어 있습니다그런데 오직 그들만이 그 율법이라는 죄자신들의 죄 때문에 그 진리의 문은 절대 열린 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라는 존재의 그 선악의 죄 때문에 그 문이 막혀 버렸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내가 죄인 중의 괴수이고내가 하나님 살해한 자이고내가 불가능한 흙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절절하게 고백하게 됩니다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자신들의 율법적 죄로 꽉 막혀 버렸다는 것을 그들은 아는 것입니다그들에게는 넓은 문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인간들이 생각하는 율법의 넓은 문은 절대 생명에 이르는 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너희들이 선악과 따먹고 선악의 죄 속에 뒹굴며 그 안에서 생산해 낸 세상의 열매들로 진리의 문을 막았다는 것을 알았으면 이제 그 불가능해 보이는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그들에게만 그 골방의 좁은 문은 열린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좁은 문은 은혜의 문인 것입니다우리가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에 의해 막혀 버린 그 스테노스의 좁은 문이 바로 우리의 작품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깨닫고 자기 자신에 대해 처절하게 절망할 때 그 좁은 문은 우리에게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내 주는 것입니다. 

 

(10:7~9)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온자가 누구입니까율법입니다성전입니다그런데 그 율법과 성전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그래서 양들이 그것들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정말 듣지 못했나요?구약 때에도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그런데 양들이 뭘 못 들었다는 말입니까?그것들이 말하는 것 속에서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말입니다그래서 말하는 율법말하는 성전으로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그 예수로 진리를 깨달으면 그들은 구원을 얻습니다그런데 어떠한 방식으로 구원을 얻는가 하면 들어가서 나오는’ 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이런 겁니다구약의 옛 성전은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성벽으로 둘러싼다는 것은 율법에서 거룩하고 성결하게 구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그래서 부정한 자들은 그 성 밖으로 쫓겨나야 했던 것입니다물론 그건 하나의 모형이요 상징이었습니다하늘 성전의 성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 되는 것이고 그 밖에 머물면 하나님 나라의 외인이라는 단순한 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그런데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 들어와 있는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머물고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거룩하게 구획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성전과 성벽을 주었더니 그들이 그 성벽과 성전 안에서 성 밖 사람들의 행사를 그대로 행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성전 마당 안에 모여 열심히 희생제사만 드리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밖에 머물고 있다안으로 들어가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그렇다면 정말 진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율법의 성전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지요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내 양을 양의 우리에서 불러내러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그런데 어떠한 방법으로 나올 수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서 나오는 방법입니다예수라는 문을 통하여 진리 안으로 들어가면 그 율법의 옛 성전에서 빠져 나와 진짜 꼴을 먹을 수 있다는 그런 말입니다다른 말로 죽어서 사는 이치인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존재주장도 할 수 없는 그런 허공의 먼지 같은 자라는 자 인식으로 죽고 그 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다시 사는 것그것이 들어가서 죽고 나와서 사는 복음의 역설인 것입니다. 

 

(10:17)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보세요이렇게 거듭난다는 것은 육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목숨을 버려야 다시 얻는 목숨,즉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그게 아버지의 사랑의 결과이며 사랑의 내용이며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라는 문으로 단 한사람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그 예수는 말은 하셨지만 그 역할은 역시 성전이요 율법이었기 때문입니다그러니까 양들이 또 못 들어요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그들에게 새 마음을 주어 그 새 마음으로 듣게 하셔야 합니다그 역할을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의 영성령이십니다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받게 되면 양의 문이 좁은 문(나 때문에 만들어진 좁은 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문으로 들어가는 길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는 절대 그 문으로 들어갈 자격도 능력도 없는 자라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집니다.그런데 주님께서 그 문만이 너희가 살 수 있는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문이니 그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우리는 면목 없지만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만이 우리가 살 길임을 자인하고 목숨 걸고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은혜의 좁은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안에 진리의 골방이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그 골방 속에서 진리의 내용들이 풍성하게 그 은밀함을 드러내어 줍니다성도는 그것을 꼴로 먹는 것입니다하늘의 양식으로 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양의 문그리스도의 은밀한 진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절대 그 진리의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25:10~12)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미련한 처녀 다섯과 슬기로운 처녀 다섯이 대조되고 있는 비유입니다여기에서 미련한 자라고 번역이 된 모로스라는 단어는 마태복음 7장의 모래 위에 집 지은 어리석은 자를 가리킬 때 쓰인 단어입니다그러니까 진리의 반석 위에 하늘의 성전을 짓지 못하고 모래 같은 율법 위에 율법의 옛 성전을 지은 그런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그래서 그 어리석은 여자들이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기름은 곧 진리의 말씀이니까요그런데 그 어리석은 이들은 혼인잔치에 못 들어가지요그 단어가 골방으로 들어가라의 에이스에르코마이입니다들어가야 할 곳에 못 들어가는 자기름을 가지지 못해 모래 위에 엉터리 성전을 지을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런데 기름을 가진말씀을 가진 슬기로운 다섯이 혼인 잔치 집으로 들어갑니다그리고는 문이 닫힙니다절대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한번 진리의 세계로 들어왔으면 다시 외적 세계의 그것으로 눈을 돌리지 말라는 그런 말입니다외적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되면 어떻게 되지요소금 기둥이 됩니다소금은 언약이지요그런데 멸망 받을 자들도 언약의 성취로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 것입니다그 언약이 소금 치듯 불로 쏟아지면 저주요 심판입니다.그 언약의 소금이 물로세례로 부어져야 사는 것입니다진리의 비로 쏟아져야 사는 것입니다그런데 우리는 너무 뜨거운 걸 좋아해요그래서 무조건 뜨거운 것을열심도 있고 노력도 하는 훌륭한 신앙으로 쳐 주는 것입니다아닙니다원래 신앙은 냉정해야 하는 것입니다냉정(冷靜)이라는 말 자체가 차갑고 싸늘하다는 뜻이 아니라 맑고 맑은 진짜 순수한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그런데 우리는 너무 뜨거운 걸 좋아해요인간의 본성이 그래요자기의 뜨거움을 에너지 삼아 이 세상을 움직여 보려 하는 하나님처럼의 아담들만 가득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문이 닫히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집니다그 열 처녀의 비유가 끝나고 호스펠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그리고 다른 비유가 이어지는데 그 비유가 달란트의 비유입니다그런데 그 호스펠이라는 단어가 그러므로위와 똑같이라는 뜻입니다그러니까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는 한 내러티브로 연결을 시켜 이해를 해야 하는 비유인 것입니다혼인잔치집 안으로 들어간 다섯 처녀에게 다섯 달란트두 달란트한 달란트가 주어지지요그리고는 결과물을 만들어 놓으라고 하시고 주인이 떠납니다지난 주일날 공부했던 것처럼 하나님님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우리를 포도원에 심어 놓으시고는 포도송이라는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깨닫고 인정하고 항복하는 자기 부정의 열매를 반드시 맺어야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그렇게 자기 부정의 열매를 맺는 모든 이들을 다 하나로 묶어 포도송이라 부른다 했지요?

 

아무튼 주인은 그렇게 종들에게 결과물을 준비하라고 명령을 하시고 떠나십니다다섯 달란트는 우리가 산상수훈에서 공부한 다섯 계명을 말합니다그건 십계명의 다른 이름입니다구약입니다두 달란트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축약해 설명해 주신 그 두 계명을 말합니다그런데 그 다섯과 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 완성을 했지요각각 다섯과 둘로 남겼습니다그 말을 직역하면 다른 다섯과 다른 둘로 되게(포이에오했다는 말입니다율법을 진리로 완성하신 주님의 사역입니다두 말할 것 없이 그 착하고 충성된 종은이 세상에 종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착하고 충성된 종에 의해 다섯과 둘이 다른 것으로 완성이 되면 우리는 아가페의 하나로 그 진리를 거저 받게 되는 것입니다그것이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입니다다섯과 둘과 하나는 율법으로서의 구약과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축약이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그리고 십자가 이후의 성령 시대를 각기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혼인잔치 집에 들어가 문을 닫은 이들은 그 하나인 하나님의 아가페를 마음으로 간직하고 찬송하고 감사하며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그건 다섯과 둘을 온전히 성취하신 하나님의 열심이 주는 선물이거든요그들이 혼인잔치 집으로 들어간 자들입니다기름을 준비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혼인잔치 집에 들어 왔다고 우기는 사람들 중에 그 하나를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결실을 맺어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그게 문 밖의 미련한 처녀들이라는 것입니다그 하나를 받은 사람이 뭐라고 해요? ‘주인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악한 자라고 합니다주인은 아무것도 안하고 종에게 일을 시켜 이윤을 챙기는 그런 분이라는 것입니다그래서 혹시나 자기가 주인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할까봐 그 하나를 땅 속에 감추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땅을 살아가는 육적 아담들의 최선입니다아담들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서 업적과 성취를 쌓는다고 해도 그건 전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다시 돌려 드리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장중에서 벗어나 먼지들이 성취해 낼 수 있는 업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나요?아닙니다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말미암게 되는 것입니다우리는 우리 인생에 맺히는 모든 열매들을 전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내어 놓으면 됩니다그게 하나를 받은 자들의 당연한 자세인 것입니다거기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그 어떤 것도 나의 자원이나 수고나 노력에 의해 되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되게 하고있게 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 거창해 보이는 육의 열매가 어찌 자랑스럽게 여겨지겠으며보잘것없어 보이는 열매를 맺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어찌 부끄러워하겠습니까그걸 자유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그러한 육적 열심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내가 맺어야 하거든요그래서 그 짐을 지운 주인이 악해 보이는 것입니다그러나 힘이 약해 뒤집어엎을 수는 없고 억지로 순종하는 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종의 말이 일견 옳아 보이지요하나님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헤치지 않고 모으시는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우리 인간들의 힘이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지 하나님은 하나님 홀로 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십니다그 종은 창조의 원리를 표피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은 당신을 한 알의 밀알로 땅에 심으심으로 열매를 맺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모으시는 분이십니다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에 관한 하나님 말씀을 율법으로 곡해하여 하나님은 나에게 정말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는구나하며 억지로 율법의 행위를 하는 자는 안으로 들어온 자가 아니라 여전히 밖에 있는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그래서 그 자를 밖으로 내쳐 버리는 것입니다그는 골방 밖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문 밖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 골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자들과 골방 밖성전 마당에서 기름도 없는 등을 가지고 세상을 밝히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갈라지겠지요그걸 뭐라 해요심판이라 합니다그래서 달란트 비유 바로 다음에 양과 염소의 심판 장면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혼인잔치 안골방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은밀한 것을 본 자들을 상징하는 양들은 뭐라고 해요? ‘하나님제가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라고 하고혼인잔치 밖의 어리석은 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언제 안했습니까?’라고 합니다.

 

보세요율법과 행위진리와 은혜에의 순종이 확연히 갈라지지요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보지 못하고 표피적 의미로만 보게 되면 무성한 행함만을 내어 놓고 염소의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사랑은혜긍휼로 볼 수 있는 자들은 그 속에서 참 자유를 얻고 감사와 찬송과 누림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사랑할 때구제할 때기도할 때,반드시 골방 안으로 들어가 그 은밀한 것으로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골방 안에 들어가 문이 닫히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다른 곳으로 가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9, 26)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고 

 

얼핏 보면 마치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꽁꽁 잠그고 숨어 있는 것을 묘사한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나 성경이 이 그림 속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유대주의가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공포(한 달란트 받은 자의 두려움)인 것입니다여기에 쓰인 어구를 헬라어로 보면호 포보스 호 이우다이오스입니다. ‘유대적인 것에서 발생되는 두려움공포라는 뜻입니다그러니까 지금 이 골방 안의 풍경은 서슬 퍼런 유대인들의 광기가 무서워서 문을 꼭 잠그고 숨어 있는 유약한 제자들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골방에 들어와 문을 닫은 자들에게서도 여전히 떨쳐지지 않는 율법주의의 무거운 짐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의 골방에 나타나십니다그건 문을 닫은 상태에서도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과시하는 내용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골방 안에 들어와 문을 닫은 자들에게 어떤 내용을 선물로 주시는가를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그 골방의 주인은 주님이시거든요.주님께서 여전히 유대주의의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는 골방 안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설명해 주십니까? ‘평강을 말씀하세요. ‘평강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솨롬을 그대로 옮겨 놓은 단어라 했지요?그런데 그 솨롬이라는 단어는 분석하여 가르친 진리의 말씀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그러니까 평강은 단순히 편안하고 안락하고 아무 일 없는 평온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모든 내용을 한 마디로 함축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에서도 그렇고 26절에서도 똑같이 예수를 수식하고 설명하는 어구가 이스테미 호 메소스입니다. ‘가운데에 똑바로 서다입니다성전 마당 모퉁이와 대조되는 개념입니다그 메소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타베크라는 단어에서 온 것인데 그 단어는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 하나가 되는 가운데’, 즉 성전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주님께서 골방 안에 들어와 문을 닫은 상태에서도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스테미 호 메소스’, 가운데에 굳게 서신 예수즉 그리스도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무엇을요평강에 대해서요.

그렇게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그 은밀한 것평강의 내용을 전해 받은 이들이 중언부언하겠습니까더듬거리며 엉뚱한 말을 하겠어요그래서 주님께서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의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되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중언부언, ‘바톨로게오라는 단어를 분석해 보면 듣지 못해 올바른 말을 못하는 자라는 의미의바토스와 말씀이라는 의미의 로고스의 합성어입니다그러니까 바톨로게오는 올바른 말을 들을 귀가 없어서 더듬는 말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그런데 그 바토스라는 단어는 가시덤불찔레나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가시덤불과 찔레나무는 구약에서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지요그러면 바톨로게오가 무슨 말이겠어요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듣고 그 율법으로 말해 버리면 성경이 그것을 말을 더듬다어눌하다어리석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 바톨로게오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가 바트라코스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가 개구리라는 뜻입니다개구리는 애굽의 신 중다산의 신이었습니다이 세상에서 부정한 난태생을 끊임없이 번식시킴으로 해서 자기들의 종족 보존과 세의 과시를 의도하고 있는 아담군상의 모습생육과 번성을 자신들의 힘과 노력과 자원으로 해 보겠다고 하는 선악 체계 속의 죄인들의 모습이 바로 개구리인 것입니다생각해 보세요개구리들이 합창을 하면 그건 그냥 소음이지 말이 될 수 없어요성경을 율법으로 읽으면 그런 개구리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 단어는 신약에 딱 한 번 등장하는데구약에서도 그 바톨로게오에 상응하는 이레그라는 단어가 딱 한 번 나오는 곳이 있습니다. 

 

(32:1~4)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폭우를 가리 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질 것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의로 통치하시는 한 왕즉 그리스도가 오시면 보는 자의 눈이 열리고 듣는 자의 귀가 뚫려서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고 하지요? 4절의 어눌한 자의 혀가 바로이레그입니다듣지 못해 말을 더듬는 것을 히브리어로 이레그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바톨로게오라 하는 것입니다그리스도를 만나면 그 이레그가 해결이 되어 혀가 민첩하게 되고 말이 분명해 진다고 하지요?

 

그 바톨로게오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풀어서 표기를 하면 코포스 모기랄로스입니다우리 말로 번역하면 귀가 먹어 말을 더듬는입니다그러한 자를 주님께서 어떻게 고치시는가 보면 오늘 본문의 중언부언의 의미가 조금 더 선명해지실 것입니다 

 

(7:32~35)

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 하더라 

 

여기에서 귀먹고 어눌한 자라고 번역이 된 어구가 코포스 모기랄로스입니다그러한 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나와서 주님께 안수해 주시기를 구했다고 하지요여기에서 안수라는 말은 능력()~위에 두다(레피티데미)’라는 뜻입니다사람들이 주님에게당신의 능력으로 덮어 귀와 입을 열어달라고 요구를 한 것입니다그랬더니 주님께서 치료를 시작하십니다먼저 손가락을 귀에 넣습니다구약 성경에서 손가락(에쯔바)’은 어떤 것을 가르치기 위해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예를 들면샬롬(솨람)’을 가르치기 야라(가리키다)’위해 예루살렘을 두시지요그게 예루살렘아닙니까그런데 예루살렘을 통해 샬롬을 배우지 못하고 율법의 성전에 머물러 버리면 그것이 귀먹고 말 어눌한 바톨로게오가 되는 것입니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그 능력의 손가락으로 귀를 뚫어야 합니다그래서 주님의 손가락이 귀먹고 말 어눌한 자의 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붙여 버리십니다주님의 침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물을 말 어눌한 자의 혀(글롯사)에 붙여 버리시자(아프토마이(아코에들음)가 열리고 혀의 구속(데스몬)이 풀립니다그러니까 중언부언은 은밀한 골방 안에서의 주님의 가르침으로만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알 것이라고 착각을 하더라는 것입니다거기에서 많은 말이라고 번역이 된 폴룰로기아는 많은대부분더 큰이라는 의미의 폴루스라는 단어와 로고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그리고 그 많은 말을 듣는 들음의 주체가 개역 성경에는 마치 하나님이신 것처럼 기록이 되어 있는데 거기에서의 들음(에이사쿠오)의 주체는 중언부언하는 사람들입니다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말하는 방식인 중언부언의 말 속에 들음의 내용이 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는 그런 말입니다그런데 들음의 진짜 내용은 그러한 중언부언의 많은 말 속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은밀하게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을 이으십니다. ‘너희가 간구하기(아이테오전에 너희의 아버지께서 너희의 결핍(크레이아)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계신다.’ 우리는 우리 육의 한계 안에서 우리의 결핍을 인지하고 판단합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우리의 결핍은 그런 수준의 결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중언부언 속에 들어 있는 인간들의 육적 필요의 아룀이나 아담의 가치 수호와 상승을 내용으로 하는 엉터리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기도(프로슈코마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우리의 결핍과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그 결핍의 성취가 바로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러한 내용들을 주의사항으로 주신 후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시며 기도의 내용을 아주 짧고 일목요연하게 제시해 주시는 것입니다그게 소위 주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다음 주에 이 주기도문의 서론에 대해 좀 더 살펴 본 후에 그 자세한 내용을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