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69) 세월을 아껴서 해야 할 일(II) (엡5:15-18)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33

(69) 세월을 아껴서 해야 할 일(II)




(엡5:15-18)

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우리는 지난주에 우리가 세월을 아껴서 해야 할 일들에 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여전히 “나“에서 머물고 있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코페르니쿠스적 대변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서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이 돌고 있다는 천동설이 태양을 중심으로 땅이 돈다는 지동설로 대 변혁이 일어난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나와 나의 필요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패러다임이 shift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오늘과 다음 시간 두 시간에 걸쳐서 왜 우리의 신앙의 패러다임이 ”나“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옮겨져야 하는지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 신앙의 목적이 ”나“와 ”나의 필요“에 머물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분을 충만하게 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신앙이 ”나“와 ”나의 필요“에 머물게 되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수시로 흔들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결론을 가지고 천천히 우리의 숙제를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고 오늘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계십니까? 그런 거 별로 생각해 보신 적 없으세요?

이건 아주 유아적 질문인 것 같지만 우리가 꼭 정리해 두어야 할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를 아주 소홀히 여기며 심지어 무관심합니다.

다른 질문을 하나 더 드리죠. 그럼, 우리는 구원을 언제 받습니까? “창세전에”



(엡1:3-5)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면 그들은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으로 납니까? 아니죠. 그들이 비록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각자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누군가에 의해 복음을 전해 들어야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행18:9-10)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사도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중에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테네를 거쳐 죽을 고생을 다하고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또 유대인들이 그를 훼방하고 조롱했습니다. 바울이 심히 낙심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성에 내 백성들이 많이 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해라”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린도 성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직 복음을 전해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창세전에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기 전까지는 여전히 구원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전하는 자에 의해 복음을 듣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 귀를 여시고 복음을 이해시켜 주십니다.



(행16:14)

14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신학적인 용어로 “예정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그 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우리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그 예정 안에 들어있는 자들은 반드시 구원해 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구원의 여정에 우리의 손발을 움직여 동참하도록 요구하십니다.

비근한 예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행16:30-31)

30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이렇게 성경에는 이율배반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3:16)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10:13)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만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시고 그들에게만 귀를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과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우리를 함께 동참시켜 주십니다.


(롬10:14-15)

14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보세요.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라, 그래야 구원 얻는다.“ 해 놓고 ”저희가 믿지 않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믿음을 주시기 위해 전파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죽이시는 십자가의 사건 이외의 구원의 전 과정“에 우리를 동참시키십니다.



(창28:10-15)

10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11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12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13주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14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보세요,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가 누워있는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고 사방으로 퍼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분의 계획대로 바로 만들어 내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나는 지금 이러 저러한 계획을 갖고 있는데 나는 내가 그 계획 이루는 데 너를 동참시킬 것이다, 그러나 네 힘으로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너를 도와 나의 계획을 이루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죽도록 고생을 합니다. 그 야곱이 겪은 20년간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시키는 데 꼭 필요한 시간들이었던 것입니다.



(수1:1-9)

1주의 종 모세가 죽은 뒤에, 주께서, 모세를 보좌하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2"나의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스라엘 자손 곧 모든 백성과 함께 일어나, 요단 강을 건너서,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거라.

3내가 모세에게 말한 대로, 너희 발바닥이 닿는 곳은 어디든지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4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 큰 강인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헷 사람의 땅을 지나 서쪽의 지중해까지, 모두 너희의 영토가 될 것이다.

5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6굳세고 용감하여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

7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8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

9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내가 모세에게 약속한 것처럼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들어가서 싸워서 빼앗아 가지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싸울 때 내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시지 ”내가 다 싸워서 뺏어 줄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는 전 과정에 우리가 힘써 해야 할 부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성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싸워야 할 전쟁이 있는 것이고 겪어야 할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한동안은 구원 얻기 전의 옛 사람과 더 친한 삶을 살게 됩니다.

어떤 때는 오늘밤에 죽으면 내일 아침에 천국에서 눈을 뜰 수 있다는 또렷한 확신에 차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순간은 아주 간혹 이지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진짜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 하는 두려움 혹은 무관심의 상태로 보내게 됩니다.


오죽하면 그 위대한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도 죽기 삼 개월 전에도 “내가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라는 고민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 이후 최고의 설교자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챨스 스펄젼 목사님도 한창 세계적인 설교자로 각광을 받고 있을 때 자주 “내가 혹시 이렇게 하나님께 사용만 당하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게 아닌가?”하는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 구원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의심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조금 씩 조금씩 씻겨가게 되고 우리는 점점 더 뚜렷한 확신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의 삶은 (1)아직 복음의 소식을 듣지 못한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복된 소식을 삶으로 입으로 전하도록 주어진 시간이며 (2)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을 점점 명확하게 깨닫고, 그 구원을 값없이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감사로 말미암아 그들의 성품과 인격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로 점차 바뀌어 가는 다시 말해 거룩과 성령 충만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걸어가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인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삶의 의미이며 목적이라면 우리가 우리에게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그 귀한 “시간”을 아껴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1) 입으로 삶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하겠죠? 그리고 (2)내가 구원받은 자라는 사실을 점점 확실하게 깨닫고 지금은 이렇게 자주 흔들리지만, 흔들리지 않는 믿음 위에 굳게 서는 자로 지어져 가는데 우리의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진짜 감사가 나오게 되겠죠?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그게 감사로 이어지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진짜 감사가 나오게 될 때 우리의 삶의 행동이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간을 아껴서 해야 할 일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점점 명확하고 또렷하게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우리는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저 영원한 세상을 확신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인가?



(히6:11-12)

11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여기서 11절의 “소망의 풍성함”이라고 번역이 된 부분 “플레로 포리안 테스 엘피도스”“소망의 확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너희는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구원의 확신에 이르도록 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지런히 구원의 확신을 향해 손발을 움직여서 그 곳에 도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10:22)

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여기서 “온전한 믿음“ 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도 역시 같은 단어입니다. ”플레로 포리아 피스튜스“ ”확실한 신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확실한 신뢰“”확신“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질 수 있다는 것이죠.

(딤후1:12)

12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확신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깨어나자마자 자기를 돌로 쳐서 죽이려 했던 루스드라 성으 다시 복음을 전하러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벧후1:10)

10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굳게하라”“베바이안”“흔들리지 않는, 확실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생활의 지향점은 거룩, 성령 충만, 하나님의 영광, 다른 말로 “확신“이어야 합니다. 그 확신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우리는 거룩의 삶 성령 충만의 삶,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의 확신이 전혀 없거나 자주 흔들리면서도 전혀 아무런 노력이나 시도도 해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챨스 스펄전의 책에서 그 분이 구원의 확신에 대해 하신 말씀을 제가 인용을 해 놓았습니다. handout을 잘 보세요. 제가 읽겠습니다.

“자기가 진정으로 거듭났는지를 의심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그 의문이 저절로 풀릴 때까지 태평스럽게 기다리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눈을 붙이고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지옥을 정말 안다는 사람이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밥이 목으로 넘어갑니까? 지금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 되지 않아서 이미 정죄 되었는지도 모르고, 숨이 넘어가거나 심장이 멎기만 하면 곧 지옥으로 가게 되는 그런 상황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태평할 수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멈추는 순간 그와 더불어 여러분의 인생은 마감됩니다. 여러분의 생애는 끝납니다. 오늘밤이 바로 그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이런 모호한 상태에서 벗어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열심을 내어 부지런히 그 확신을 챙기셔야 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확신 속에서 아주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수많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일화가 책이나 구전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익히 잘 아시는 요한 웨슬리가 탔던 배의 모라비안 교도들이 실제로 풍랑 앞에서 즐겁게 찬양을 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1848년에 증기 여객선 오스트리아 호에 화재가 나서 그 배가 대서양에 침몰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때 물에 빠져 죽은 사람만 400명이었습니다. 거기서 살아남은 어떤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배가 점점 시커먼 바다 속으로 침몰해 들어가고 이제 그들이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분은 거기에 함께 있었던 친구들 다섯 명과 함께 손을 꼭 잡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쳐다 보면서 “우리 잠시 후에 천국에서 만나자”하고 기쁘게 바다로 뛰어들었답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그 수많은 신앙이 선배들이 전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신앙을 지켜내지 않았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없이 어떻게 그런 순교자 적 삶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신앙인들은 자기가 신앙하고 있는 바에 대한 확실한 신뢰를 향해 시간을 아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러한 확신에 대해 무감각하며 무관심하며 게으르게 자신의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삶에 변화도 없고 힘도 없고 세상과 싸우기는커녕 늘 우울하고 두려움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과 다음 시간은 여러분들이 어떻게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지를 확신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확신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확신 속에 거할 수 있는가를 논하기 전에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확신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구원도 못 받은 사람이 가짜 확신에 차 있는 것, 이게 정말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대적이 있습니다. 그 대적들은 사람들에게 엉터리 확신을 우리에게 심어주어서 평생 그 것이 진짜인 줄 알고 살게 만들다가 결국 지옥으로 가게 만들어 버리는 고도의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짜 확신을 굳게 잡고 심지어 순교까지 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슬람 교인들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알라는 우리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들도 순교를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폭탄을 짊어지고 자살 테러를 감행합니까?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는 비행기를 몰고 미국의 항공모함에 자폭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요? 그들은 그들이 신이라고 믿었던 일본 황제 히로히토에 대한 신앙의 확신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불교의 이차돈은 어떻게 참수 대 앞에서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습니까?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마7:22-23)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 보세요. 이 사람들도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을 하고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눅18:11-12)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그런데 주님이 그들을 어떻게 부르십니까?


(마23:15,33)

1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렇게 가짜로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지옥 자식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럼 오늘 날 무지한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가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지 몇 가지만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1)첫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공적인 결단이나 외적 반응을 한 후에 그 것을 확신의 근거로 삼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어, 전도 집회나 부흥회 같은 곳에 가서 설교자나 전도자로부터 구원의 초청을 받는 경우가 있지요? “지금 이 시간 예수님을 믿기 원하시는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런 초청을 받아보신 적 있으시지요? 자기가 그런 초청에 응해서 앞으로 나간 사실을 근거로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죤 위트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영적 출생이나 회심은 수학 공식의 수준에서 다루어져 왔습니다.

그 공식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습니다. ‘초청을 받았을 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만약 당신이 나아가서 진실 된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문을 따라 하면, 혹은 믿기로 서약하는 카드에 서명을 하면 그 다음 들려오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지도 않을 것이고, 당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여길만한 어떤 증거도 당신에게서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을 했으면 그것으로 다 된 것입니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은 그게 전부입니다. 게다가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사람들은 이러한 공식을 통해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이 세상에서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실수입니다.

아예 확신이 없는 경우보다는 영적인 생명의 어떤 징후가 없어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러한 ‘쉬운 확신 주의’가 더욱 염려가 됩니다.“

이 중에도 혹시 자기 삶 속에서 아무런 영적 생명의 징후도 없이 그러한 자신의 공적인 결단이나 외적인 반응을 근거로 구원을 확신하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회개하시고 다시 시작하세요.


(2)두 번째로 어떤 분들은 세례를 받은 것을 가지고 자기는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영세를 받는 것으로 원죄가 사해진다고 믿기 때문에 영세를 받기만 하면 지옥에는 가지 않는다는 굳은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 기독교에도 들어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세례 안 받아도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예수 님 옆에 달린 강도가 세례를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례는 신앙고백이며 구원의 내용을 상징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형식일 뿐입니다. 여러분 절대 세례 받았다고 해서 천국 못 갑니다.

(3)세 번째로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교회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온 것을 근거로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고 예배하고 한 것을 가지고 자신은 하나님께 용납을 받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며 하나님께 속한 일을 했는데도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웃 집 아이가 우리 아이들과 자주 오랜 시간동안 놀았다고 해서 그 이웃집 아이가 우리 아이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망상일 뿐입니다.


(마15:8-9)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도 헛되이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막6:20)

20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버린 악한 헤롯도 세례 요한의 설교를 달게 들었습니다.


(막1:35-37)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36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진짜였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가짜의 상태로 예배당 출입할 수 있고 열심도 낼 수 있고 설교에 감동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는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4)네 번째로 어떤 사람들은 자기 가족의 기독교 유산을 근거로 구원의 확신을 삼습니다.

“우리 아내가 저렇게 열심히 믿는데, 우리 부모가 저렇게 열심히 믿는데, 우리는 삼대 째 예수를 믿는데, 설마 내 믿음이 가짜일까 보냐?“ 이런 사람들 있지요? 여러분, 구원은 상속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5)다섯 번째로 어떤 사람들은 많은 선행을 한 것을 가지고 구원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평생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왔는데, 내가 예수를 믿고 얼마나 착한 일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마다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 간디도 구원 받았게요?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81%가 성경의 가르침은 100% 완전한 것이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94%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 48%가 만약 사람들이 선하게 살거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선행을 많이 하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믿는 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믿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전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의 50%가 선행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성경 무오 설을 떠벌린다 해도 인간이 선행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다 가짜입니다. 그러니까 무서운 것입니다.


(6)여섯 번째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경험을 근거로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벽에 걸린 십자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환상을 본다거나, 성찬식을 하는데 예수님의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거나, 트레스 디아스에 가서 기도를 하러 들어가는데 그 강대 상 앞에 예수 님 시체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거나 그런 신비한 체험을 근거로 “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해” 하고 우기는 사람들이 특히 이 LA에 많습니다. 제가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지금 목사가 된 어떤 분이 간증을 하시는데, 성찬 식 때 떡을 받으러 나가는데 그 성찬 상위에 예수님의 시체가 피를 뚝뚝 흘리며 누워 있더래요. 그래서 자기는 그 모습을 보고 “내가 구원을 받았구나.”라고 확신했다고 하더군요. 그건 무슨 괴기 영화지 구원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얼른 병원에 가 보세요. 제가 좋은 정신과 의사 소개해 드릴 테니까 한번 가보세요.

여러분, 어떤 종교에도 초월과 신비는 존재합니다.

무당들도 작두 위에서 춤을 추고, 중들도 안수해서 암을 고칩니다. 불교 선방에 가면 서커스에서나 보는 공중 부양 같은 것은 늘 볼 수 있습니다. 절대 그런 체험이 여러분의 구원을 확인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탄은 그러한 것들을 살살 줘서 복음을 무당 짓거리처럼 아주 저급한 것으로 변질 시켜버리는 수단으로 많이 씁니다.


(7)일곱 번째로 우리가 가장 헛갈리기 쉬운 것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개인적인 삶이나 생활 방식이 변화 된 것을 가지고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흥회에 다녀와서 담배를 끊었다든지, 일 년에 서너 번 가던 교회를 매주 가게 되었다든지 이런 생활 방식이 변화된 것을 가지고 자신의 구원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여러분,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만큼 삶이 변한 분 계셔요?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기도 할 때 함께 기도했고 전도할 때 함께 전도했고 기적을 일으킬 때 함께 기적을 일으키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던 자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현장에도 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마귀”라고 부르셨고 “멸망의 자식”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 교에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그들의 삶이 변하는지 잘 아시죠?

그러면 그 분들도 구원의 확신을 가져도 되는 것입니까?

신문이나 잡지 같은 걸 보면 다이어트 식품이나 변비 약 광고 같은 데에, 그 약으로 효과를 본 사람들의 간증이 여러 편 실리지요? 예전에 제가 어떤 변비 약 광고에서 봤는데 그 사람은 그 변비약을 알게 된 후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늘 맥이 없고 밥 맛도 없고 생활도 우울하고 해서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을 부리고 폐쇄적인 삶을 살았는데 그 변비약을 누가 소개해 줘서 그 것을 먹고 변비를 해결 한 후 생활이 활기가 있어지고 모든 게 기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친절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간증을 한 걸 보았습니다. 이렇게 심지어 변비약도 한 사람의 생활 방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의 변화, 그 것도 구원 확신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다음 주에 이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