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67) 열심과 성실로 시간을 건져 올리십시오. (엡5:14-18)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31

(67) 열심과 성실로 시간을 건져 올리십시오.

(엡5:14-18)

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우리는 지난주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서 세상을 책망하라"는 사도의 서슬 퍼런 권고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여기서 세상을 "책망하라""엘렝코"는 단순히 비난하라는 말이 아니라 ”증거를 방편으로 납득시키다“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그 말은 우리가 세상의 어두움을 대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조명과 이해를 제공해서 그들이 “아 우리가 틀렸구나.”라고 스스로 깨닫게 만들어 주라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 14절에서 사도는 다시 한 번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거룩하게 살 것”을 종용합니다.

(엡5:14)

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초대교회가 이제 구원을 얻은 자가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상징인 세례를 받는 세례의식 때 온 회중이 그 사람을 환영하면서 부르던 세례의식 찬송으로도 쓰였던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서 60장 1절을 인용한 거죠.

(사60:1-3)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그러니까 이 14절의 말씀은 (성도들, 빛의 자녀들)은 더 이상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모든 면에서 영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악한 자들의 행위로부터 자신들을 철저하게 분리시켜서 빛들의 자녀답게 살아야 함을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열방과 열 왕이 우리의 비추는 빛을 보고 하나님께 나아오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15절에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또 다른 모양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엡5:15)

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사도는 먼저 성도들에게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처럼 행하라“고 권합니다.

여기서 “행함“”페리파테오“는 우리 성도들의 행실과 품행 전체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빌립보서에도 쓰였습니다.

(빌1:27)

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그러면 지혜는 무엇이고 지혜 있는 자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우리가 잘 정리하고 있어야 하겠지요?

지혜라는 것은 “지식”이라는 말과 다른 것입니다. 또 지혜라는 것은 “능력”이라는 말과도 다른 것입니다.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도 때로는 어리석은 판단을 합니다.

능력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도 때로는 어리석은 행동을 합니다.

지혜는 단순하게 지식이나 능력이나 지성이나 선함이나 비상한 재능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응용하는 능력을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올바른 판단력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법고시 수석 합격한 사람이 그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법정에서는 엉뚱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개인기를 소유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합주를 망치는 경우를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아주 뛰어난 성악가가 성가대의 화음을 다 망쳐버리는 경우를 종종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지혜롭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지식과 재능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는 평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 어리석은 결과가 나오게 됩니까? 우리 인간은 “나를 돋보이려 하고, 나를 자랑하려 할 때”늘 어리석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판사가 왜 간혹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는 줄 아십니까? 그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잊고 마음속으로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기 시작하면 그 재판은 망치는 것입니다. 판사는 검사나 변호사가 아닙니다. 자기의 감정과 자기의 기분을 판결에 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뛰어난 개인기를 소유한 연주인들이 합주를 망쳐버리는 것도 “자기의 목소리나 자기의 악기 소리를 돋보이게 하려고 할 때” 그 연주가 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의 행동은 늘 자기 위주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는 삶인 것입니다.

(골4:5)

5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성도들이 지혜롭게 행하는 것은 항상 외인을 먼저 생각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럼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에베소서 강해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의 특징을 아주 잘 정리를 해 놓았습니다. 그 중 몇 가지만 짚어보고 넘어가지요.

먼저 어리석은 사람들의 제일 되는 특징은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성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대신에 감정의 차원에서 평가하고 대조합니다. 왜 유명한 연예인이나 뉴스 앵커들이 국회의원에 출마를 하면 대부분 당선 됩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것을 이지적이며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이 전에 자기의 감정이 “난 저 사람 좋아, 저 사람 참 멋있어”라고 하는 그 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고난이 닥쳤을 때 왜 이런 고난이 욥에게 닥쳤는지 이지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고 감정을 앞세워 “당신의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외쳤을 때 욥이 그 아내더러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어리석은 여자중의 하나같이 되었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리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불편함만을 들어서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백성이 어리석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당 안에도 이렇게 자기의 기분이나 감정을 앞세우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일단 예배당에 오면 분위기부터 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해 주고 자기를 재미있게 해주면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가대가 자기가 듣기에 흡족하게 찬양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목사가 분위기를 잡고 자기를 울려주느냐, 못 울려 주느냐 이런 것으로 교회를 판단합니다. 교회라는 곳은 한 술 더 떠서 그런 사람들 비위를 맞추느라고 예배 시간에 연극을 넣기도 하고 설교하는데 옆에서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하와이안 댄서가 짧은 야자수 잎으로 된 치마를 입고 죽 서서 찬양대의 찬양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합니다. “설교는 짧게 노래와 연극은 길게“ 이게 요즘 교회 성장 학에서 제일 인기 있는 표어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람의 감정을 부추기는 어리석은 짓들입니다.

두 번째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이 욕망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다가 결국에는 멸망해 버리는 것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그들의 특징은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는 것은 다 가져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탐심을 여전히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눅12:15-21)

15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영원한 생명과 죽음 뒤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탐심을 바탕으로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만을 꿈꾸는 사람을 성경은 “어리석다“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세 번째 특징은 “자기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 철학자가 “인간은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맞습니다. 사람들의 삶의 목적을 잘 들어보면 전부 그 끝은 자기 자랑으로 수렴이 됩니다. 원래 인간들은 자기의 자랑을 위해 사는 존재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고 인간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 자랑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고후11:17)

17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바울이 지금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자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늘 남의 흉을 봐야 합니다.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늘 남을 밟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를 자랑하는 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 있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지혜롭지 못한 자들의 네 번째 특징은 “자신의 열심을 의뢰”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열심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히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을 부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해 주신 것이 너무 황송하고 감사해서 열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들의 그 열심을 의뢰합니다. 그렇게 열심을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자랑을 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참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 놓고 다른 사람을 정 죄 합니다. “당신은 왜 나만큼 기도 안 해?”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교회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 죄 합니다. “왜 나만큼 열심들이 없어?” 이건 어리석은 열심입니다. 감사를 근거로 하지 않은 열심들은 아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롬10:2-3)

2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행22:3-4)

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 하는 자라

4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사도 바울의 열심이 낳은 결과가 뭡니까? 살인과 박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물을 잘 이해하고 거기서 나오는 기쁨과 희열에 근거하지 않은 열심들은 전부 전갈의 독처럼 그 열심을 부리는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여러분 혹시 “카스트라토“라는 것을 아십니까? 남자 성악가들이 여자 목소리처럼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카스트라토”라고 합니다. 원래 그 “카스트라토”라는 말은

중세시대 교황청 남자 어린이 성가대의 목소리를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성가대 아이들을 거세시킨 것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중세 때에는 찬양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양이 변성기 전의 남자아이들이 부르는 찬양이라고 여겼습니다. 빈 소년 합창단, 파리 나무십자가 합창단의 음악을 들어 보셨으면 아실 거예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변성기가 되면서 소리가 아름답게 유지가 안 되니까 교황이 직접 재능 있는 아이들의 부모의 동의를 얻어서 거세를 시켜 버렸습니다. 무려 350년 동안이나 교황청의 성가대 아이들을 거세 해 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서 남자아이들을 거세하면서 까지 아름답게 만들어서 올려드리는 찬양을 좋아하셨을까요? 정말 그렇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니라 폭군이죠.

여러분이 잘 아시는 작곡가 하이든도 어린이 합창단 출신으로 거세를 당할 뻔했던 사람입니다. 하이든이 마침 그 때 전염병에 걸려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합니다.

그걸 누가 했다고요? 교회가 했습니다. 그 교회의 열심이 낳은 결과가 뭡니까?

제가 어떤 책을 읽다보니까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그 저자가 중국 백두산을 가는 길에 요기를 하기 위해 일행과 함께 한국 사람이 하는 식당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식당 주인은 그 식당 밖으로 전축 스피커를 내 놓고 하루 종일 복음성가를 틀어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 식당 벽은 온통 성경 구절 액자로 가득 차 있었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중국은 그렇게 공개적으로 종교 음악을 틀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커다랗게 복음 성가를 틀어놓고 장사를 하시는 그 분이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 존경스러워서 “어떻게 이 공산주의 국가에서 이렇게 복음 성가를 틀어놓고 장사를 하시게 되었느냐고” 물으셨답니다. 그 주인이 말씀하시기를 자기가 그 식당을 개업할 당시에 그 분이 한국에서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께서 오셔서 그 식당 개업식 날 그 자리에서 자기를 선교사로 임명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의 일을 열심히 하게 되면 자기 사업이 날로 번창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까지 해 주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열심으로 복음성가를 틀어 놓고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저자가 속으로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감탄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주문을 하고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그 감탄이 분노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밥과 반찬이 담긴 그릇은 너무 더러워서 구토가 날 지경이었고 밑반찬은 몇 사람을 거쳤는지 벌써 여기 저기 말라붙어 있었고 밥을 7개를 시켰는데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고 밥을 네 개만 주고 세 개는 도로 가지고 가서 다른 손님상에 내 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려서 겨우 밥을 얻어먹고 커피를 시켰는데 너무 싸구려 컵에다가 커피를 담아 줘서 기름 냄새 때문에 그 일행 중 한 사람도 커피를 마시지 못했답니다.

저도 저희 집사람과 그 집엘 가본 적이 있습니다. 역시 불친절하기도 했지만 제가 놀란 것은 그 집 뒤뜰에 곰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철장에 갇힌 그 곰의 가슴에 빨대가 꽃혀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그 곰의 쓸개에 빨대를 꽃아 놓고 거금을 낸 사람들이 직접 그 웅담을 받아먹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도대체 이 열심은 누구를 위한 열심입니까? 그 열심으로 정말 하나님 나라가 확장이 되겠습니까?

이 모든 어리석은 자들의 특징을 종합해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모든 지혜 없는 자들의 행동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않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인 것 같고 겉으로는 감동 적인 예배를 찾아다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 편 기자인 다윗은 이렇게 노래를 한 것입니다.

(시14:1)

1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기의 유익을 위한 모든 열심, 종교 행위 이런 것들은 전부 지혜 없는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결론 적으로 지혜라는 것은 “나를 드러내려는 시도를 버리고 다른 이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나를 죽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지혜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뭡니까? 십자가, 자기 부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고전1:30)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골2:1-3)

1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여러분은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사시는 분들이시기 때문에

지혜 없는 자들의 어리석은 행위를 답습하셔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말이나 행동이나 모든 행실을 신중하고 사려 깊게, 나의 기분이나 감정을 앞 세우지 않고 객관적이며 이타적인 삶을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6절에 그렇게 지혜 있는 자로 사는 사람들의 첫째 요소를 “시간을 아끼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엡5:16)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서 “아끼라“”엑사고라조“는 ”건져 올리다, 악의 굴레에서 속량해 내다, 다 사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월이라고 번역이 된”카이로스“도 원래의 뜻은 ”기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좀 더 원어의 뜻에 맞게 번역을 하면 ”기회를 다 사버려라“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시간은 모두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는 시간들입니다.

어떤 기회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 낼 수 있는 기회요.

이런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여자들이 어떤 물건을 사기 위해 쇼 윈도우를 주의 깊게 그리고 자세하게 훑어보다가 어떤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했을 때 그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기전에 그 물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런 자세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기회를, 우리의 시간을 기회로 다 사버리도록 노력해야 하는가?

그 이유가 바로 뒤에 붙어 있지요? “때가 악하니라.“ 때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벧전4:2-4)

2이제부터는 육신의 남은 때를 인간의 욕정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3여러분은 지난날에, 이방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였으니, 곧 방탕과 정욕과 술 취함과 환락과 연회와 무분별한 우상 숭배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때로 충분합니다.

4그들은, 여러분이 자기들과 같이 그런 지나친 방종에 빠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면서, 여러분을 비방합니다.

(롬13:11-14)

11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습니다.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14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요일3:2-3)

2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 모습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그에게 이런 소망을 두는 사람은,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누구나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조다난 에드워드 목사님은 20살 때 이미 하나님 앞에서의 결심 문인 (Resolutions)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 (Resolution)의 70번째 항목이 이렇습니다. “한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내 힘껏 가장 유익 되게 시간을 이용할 것을 결심합니다.“

여러분 제가 나눠드린 조셉 얼라인의 책 읽어보셨나요? 그 목사님이 시간을 어떻게 쓰시던가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새벽 3시부터 일어나셔서 4시간 동안 기도하시고 묵상하시고 말씀을 공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시간을 쪼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썼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가 제일 한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밤새도록 컴퓨터 게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완전히 허구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그 귀한 시간을 허공에 날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포츠 중계에 목숨 거는 사람들 있지요?

지난번에 일본과의 야구 경기를 보시고 제가 아는 장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우리나라가 일본한테 6대 0으로 지니까 아주 속이 상해서 미치겠더래요.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이기고 좋아하는 것을 보고 더 속이 상하더라는 거예요. 남은 지금 경기에 져서 속이 상해 죽겠는데 상대방이 너무 기뻐하니까 그 사람들이 미워지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때 “아, 내가 전에 우리나라가 두 번 이겼을 때 저렇게 좋아했었지, 그 때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파 했을까 생각하셨답니다. 왜 초대 교회 교부들이 운동 경기를 사탄의 장난이라고 했는지 왜 칼빈이나 루터가 운동 경기를 마귀의 미혹이라고 했는지 이해를 하시겠더래요. 우리는 정작 이 세상에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 두 나라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이 동네 저 동네, 이 나라 저 나라 편을 갈라서 싸우면서 진 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그걸 즐기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게 죄인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남의 슬픔을 다른 이의 패배를 즐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지 ”스포츠“라는 미명 아래 잊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비디오 가게에 출근부 도장 찍는 사람들, 여러분 TV 드라마라는 것은 진실이나 순수 같은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TV는 오직 시청 율을 목표로 삼습니다.

시청 율이 올라가야 그 시간대에 광고주가 많이 붙게 되고 그게 방송국의 수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시청 율을 올리는데 사활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TV앞에 붙들어 두기 위해서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죄 성을 자극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륜이나 동성애나 삼각관계, 폭력 이런 지저분한 것들 천지입니다. 차라리 그런 걸 보시려거든 좋은 명화들을 골라서 감상하세요.

적어도 그런 명화들은 감독들과 제작진들이 수년간에 걸친 기획과정을 거쳐서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라도 있다고요. 그래서 좋은 영화를 한편 보고 나면 좋은 책을 한 권 읽은 것처럼 시원합니다. 엉뚱한 것 하느라고 여러분의 그 귀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마세요.

그리고 지혜 있는 사람의 두 번째 요소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는 것”입니다.

(엡5:17)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롬12:1-2)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살전4:3)

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엡1:4-5)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여러분 부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병을 모두 낫게 해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한 가지 우리 성도들의 “거룩”입니다.

지혜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그 길을 향해서 거룩하고 경건하게 올곧게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라“(쉬니에미)는 ”이해하라”는 뜻과 함께 “경건하게 행동하다”라는 뜻이 함께 들어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늘 “이것이 나의 거룩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아닌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계속해서 18절에서 그렇게 지혜 있는 자로 살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엡5:18)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많은 사람들이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해서 헛갈리고 있습니다. 성령 세례는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될 때 단 한번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그 이후에도 우리가 늘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성령 집회 같은데 가서 입에 거품 물고 부들부들 떨면서 쓰러지는 것이 성령 충만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앞일을 예언해 주는 그런 사람을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는가?

여기 18절의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구절은 명령형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은 서도가 수동적으로 기다려야만 할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책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명령을 받는 사람이 전혀 실천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시지 않으십니다.

둘째로 복수형을 썼기 때문에 성령 충만은 소수 정예 기독교인들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나 저나 전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세 번째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수동형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함과 준비됨을 통해서 성령 충만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이 구절은 시제가 현재 시제입니다. 헬라어의 현재시제는 진행형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성령 충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령 충만“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 때 성령이 임하시기 전과 그 후를 성경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성령 충만”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도행전만큼 성령의 강림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도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을 시작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과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한 것을 비롯해서 여기저기에서 성령의 강림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한 사건을 하나 뽑아서 그 성령 강림의 의미를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시켜서 그들에게 가도록 하십니다. 베드로는 가려하지 않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부정한 짐승과 정한 짐승을 한 보자기에 넣어서 베드로에게 잡아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율법의 예(例) 대로 부정한 것을 못 먹겠다고 버팁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내가 정하게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 하면 안 된다고 혼을 내 주십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가고 고넬료와 그 일가는 가시적으로 임하시는 성령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이 있던 구약과 그러한 구분이 없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애나케 팔라이오” 통일 된 신약이 갈리는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넬료의 이야기 바로 앞에 애니아라는 남자 중풍 병자가 일어나고 다비다라는 여자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넬료의 이야기와 그 두 이야기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만 성경은 원래 장, 절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고 다시 한 번 잘 읽어보십시오. 그 애니아와 다비다의 이야기는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행9:36-40)

36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38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39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40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40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다비다를 일으키는데 “다비다야 일어나라”“다비다쿰”이라고 외칩니다. 다비다에게는 도르가라는 이름이 있었음에도 일부러 “다비다 쿰”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 말을 어디서 들어보셨지요? “달리다쿰” 바로 야이로의 12살 먹은 딸을 살리신 예수님의 외침을 여기다 옮겨 놓은 것입니다.

(눅8:41-56)

41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이는 자기에게 열두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43이에 열 두 해를 혈루 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4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48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49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50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52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56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여기 5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이야 일어나라”라고 외치십니다. 그게 “달리다쿰“입니다.

그러면 이 회당 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가?

유대인들의 문학 기법 중에 샌드위치 구조라는 것이 있다고 했지요? 가운데 있는 것을 용이하게 설명하기 위해 양쪽에 설명용 빵을 대는 것을 샌드위치 구조라고 합니다.

이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시는 사건 중간에 어떤 사건이 들어가 있습니까?

열 두해 혈루 증을 앓는 여인의 사건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2살 먹은 야이로의 딸이 일어난 사건은 바로 이 12해 혈루 증 여인이 치료를 받고 구원을 받은 사건과 동일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이 혈루 증 여인이 예수님의 어디를 만졌습니까? 44절에 보면 “옷 가”를 만졌다고 나오지요?

이 “옷 가“는 ”옷 술“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옷 술은 율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민수기 15장 37절에서 41절까지를 참조 하세요. 이 여인이 율법을 통해 치유를 받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48절에 보시면 그 여인이 치유를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은 그 “옷 술” 때문이 아니라 “그 여인의 믿음” 때문이라고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구원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혈루 증 여인이 구원을 받은 사건이며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사건이며 다비다와 애니아가 일어난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전에 고넬료의 사건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사건들도 역시 구약과 신약이 갈라지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 사건들이 지금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는 사건과 동일한 메시지를 갖고 있는 사건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제사를 지내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죠? 그 제사와 율법이 여인의 후손인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바로 그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으로 제사를 지내고 율법을 이해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분명 구약의 백성들도 그 메시아를 멀리서 기대하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는 것을 이해하고 기다린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성령이 아니 계시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하셨지요?

그러면 구약 시대에도 성령이 임하셨습니까? 우리가 알기로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성령께서 불의 혀처럼 처음 임하신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까?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필요할 때에만 잠간씩 임하셨었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로 말미암아 성령이 이제 우리 안에 영원히 내주 하시게 되셨습니다.

이게 신약과 구약의 갈라짐입니다.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은 이제 구약의 그림자처럼 희미한 구원과 신약의 뚜렷한 구원이 확연히 갈라지는 사건인 것입니다.

고넬료는 성령이 임하기 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행10:1-4)

1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4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기 4절에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아나바이노“는 제사 용어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 그 제물이 타는 연기가 하나님 앞에 올라감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인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 역시 “므네모 쉬논” “기념물이 되었다”“즉 제물이 되었다”라는 제사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 앞에 제사로 올려졌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미 구약 적 구원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에게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까?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마16:15-17)

15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미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야로 부르고 있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 것을 알게 하신 분은 바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다“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럼 구원 받은 거 맞지요? 그런데 왜 또 그 들에게 성령이 불의 혀처럼 임해야만 합니까?

역시 그 사건도 구약과 신약의 놀라운 차이점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눈에 보이게 가시적으로 다시 구원받은 자들에게 임한 것은 단순히 은사나 받고 방언이나 하고 예언이나 하는 차원에서 성령이 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에서 성령께서 그렇게 눈에 보이게 임하신 사건은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제사나 율법이 가리키는 메시야를 단지 멀리서 기다리며 그림자로 보고 구원을 받았다면 신약 시대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심으로 그 성령이 구약 시대처럼 왔다 갔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셔서 이제 친히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대 전환점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 강림의 preview인 다비다의 죽음과 야이로의 딸의 죽음과 수넴 여인의 아들의 죽음이 문제입니다. 왜 구원받은 하나님의 딸, 다비다의 죽음과 부활로 그 성령 강림을 예고할까요? 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중에 아이가 죽습니까? 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하나님의 도움을 빌어 탄생하게 한 그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바로 그들이 이제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뭐든지 잘 되고 세상 적인 힘도 얻게 되고 걸렸던 병도 나아야 된다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이렇게 신구약을 넘나들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평생을 광야처럼 살다 가셨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를 요약해 주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에게 너의 힘으로 너를 증명해 봐라”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신명기에서도 똑같이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의 목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신8:2-3)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과 성도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이 왜 광야로 나갔지요? 사람이 떡으로 만 그러니까 이 세상의 것들, 이세상의 힘 그런 것을 목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그 뜻을 좇아 사는 것이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이 바로 광야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성도들에게 임하심과 동시에 그분은 우리를 예수님의 광야의 삶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으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게 지혜 있는 자들의 삶이고 그게 성령 충만한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이 뭡니까? union christ, 예수님의 삶에 동참해서 그 분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가신 하나님의 성품,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을 우리의 삶 속에서 열심히 연습하는 삶, 그것을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노력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권투선수가 거의 그로키 상태에서도 상대방의 주먹을 반사적으로 피하는 것 보셨지요? 그 때는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인데도 평소에 얼마나 연습을 만이 했으면 그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반사적으로 피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피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동이 감정을 컨트롤한다는 것 아세요? 우리는 처음에는 감정에 의해 행동을 하지만 나중에는 그 행동에 의해 감정이 컨트롤이 됩니다. 처음에는 슬퍼서 울다가 나중에는 자기의 울음에 더 복받쳐서 울게 되는 것처럼...

사람을 때려보면 처음에는 그렇게 심하게 때리려고 하지 않았는데 때리다 보니까 그 행동이 자기의 감정을 자극해서 더 과격하게 때리게 되는 것입니다. TV 탤런트들도 악역을 오래 하다보면 진짜 사람이 악해 진답니다. 그래서 악역 탤런트들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상담을 하셨답니다. 악한 것들은 그렇게 연기로 흉내만 내도 우리에게 악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여러분의 행동을 자제하시고 바르게 선택을 하시고 훈련을 하세요. 저절로 내 감정이 나의 행동을 순결하게 만들어 줄 때까지 기다리시면 안 됩니다.

기독교는 열심히 하나님의 성품에 나를 맞춰 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제가 지난 이년 동안 매 주 싸워 온 것이 바로 이거 아닙니까?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앉아있는 사람들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화도 안내요. 그리고 매주 꼬박 꼬박 와요.

기독교는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다른 이들을 살리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밀알들이 썩지는 않고 전부 새총이 되어서 서로 밀알로 쏘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에 밀알을 맞아서 부상당한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밀알 맞아서 팔 부러진 사람, 밀알 맞아서 다리 부러진 사람, 밀알 맞아서 눈 먼 사람 부상자들 투성이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깨어나십시오. 그리고 지혜 있는 자처럼 행동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셔서 여러분의 거룩에 힘쓰십시오.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그게 여러분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하셔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