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64) 행하라, 또 행하라 (엡4:31-5:5)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27

(64) 행하라, 또 행하라

(엡4:31-5:5)

31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1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우리는 지난주에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만을 말해야 하며, 죄와 악에 대해서 의로운 분을 내되 그 분을 낸 것이 죄가 되지 못하게 해야 하고 도적질하는 자들은 도적질을 멈추고 자기가 수고하여 일을 하되 일을 하는 목적을 가난하고 곤핍한 자들을 돕는 것에 두라는 사도의 권고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므로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삼가야 한다.”라고 그 동기까지도 확인을 한바 있습니다.

사도는 오늘 본문 31절에서 그 앞에서 언급했던 소극적 의미의 버려야 할 것들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언급을 한 뒤에 32절에서는 성도가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것을 또 반복하여 기술을 합니다. 31절부터 보겠습니다.

(엡4:31)

31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악독“입니다. 여기서 “악독“ ”피크리아“는 ”남과 화합하려들지 않는 음험하고 노를 잘 내는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성품이지요. 예배당 안에서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남과 화합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드러 내야하고, 자기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면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품위가 손상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죄인들의 특성입니다. 그러니까 멀찌감치 에서 남들을 욕하고 다른 이들이 하는 일을 평가하고, 분노하고 하는 일로 신앙생활을 소비해 버립니다. ”그런 악독은 버려라”라고 사도가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노함”“분 냄”을 버리라고 합니다. 둘 다 비슷한 단어 같지만 “노함”“뒤모스”감정적인 격분을 말하는 것이고 “분 냄“이라고 번역이 된 ”오르게“는 보다 내적인 것으로서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노함과 분 냄, 그러한 것들은 다 버려라“

그리고 계속해서 “떠드는 것“”훼방하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 ”떠드는 것“”크라우게“흥분한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건물과 재산을 가지고 싸우는 LA의 어떤 교회를 TV뉴스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가관이더군요. 서로 상대편의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내기 위해서 ”메가폰“까지 들고 싸우는 그런 모습을 보며 인간들이 얼마나 그 탐욕 앞에서 지저분해 지는지 확실히 보았습니다. 그게 ”크라우게“입니다.

반면에 ”훼방하는 것“이라고 번역이 된”블라스페미아“는 다른 사람이 없는 데서 그 사람을 비방하여 그의 명성을 손상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타락한 죄인들은 참 다른 사람이야기 하길 좋아합니다. 오죽하면 예전에 친구들 여럿이서 술자리를 하게 되면 화장실 가는 횟수를 최선을 다해 줄여야 했습니다. 그 자리를 떠나기만 하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 험담을 하니까, 화장실도 제대로 못간 것입니다.

우리 정말 말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공부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성경이 얼마나 우리 “말”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될 수 있으면 말 많이 하지 마세요.

특히 다른 사람 이야기는 그게 칭찬이 아니면 절대 하지 마세요.

도둑맞아서 자살하는 사람 없고, 누군가에게 억울한 폭행을 당했다고 해서 목숨을 끊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 치 혀“로 내 뱉은 험담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말의 위력은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 정말 말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혹시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으면 그 사람 쫓아내고 싶으시죠? 왜냐하면 내가 불편하니까, 그래서 당을 짓고 속닥속닥 그 사람 험담을 늘어 놓으며 그 사람을 “왕따“시켜서 내 쫓아 버리는 일들이 교회 안에도 비일비재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는 내편만 있어 주기를 바라는 아주 악한 행위입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그 복된 소식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기를 힘들게 하는 상대방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 주셔야 지요. 성경 안에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항상 이스라엘을 연단하기 위해 쓰여 졌던 바벨론, 앗수르, 헬라, 로마 같은 나라들은 하나님의 사용 기간이 끝나면 처참하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나를 연단하고 있는 표독스러운 상대방을 대할 때 ”저걸 어떻게 해서든지 쫓아내 버려야지“로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상대방도 하나님의 복음을 깨닫고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게 되기를 기도해 줘야 지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 주신 훈련 교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전부 쫓아내 버리는 버릇이 들면 자신이 자라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기 맘에 조금만 안 들면 뒤에서 험담하고 앞에서 외면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서 내쫓아 버립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항상 어린애들만 북적북적하는 겁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제발 입 조심하세요. 그리고 앞에서 열거한 것들을 다 포함하는 “악의”'카키아'를 버리라는 말로 소극적 권면을 마칩니다. “다 버려라, 그 모든 것들은 악한 것들이다”

사도는 이렇게 소극적인 금기 사항을 나열한 후에 32절에서 보다 적극적인 권장을 합니다.

(엡4:32)

32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뒤에서 남 험담하고 분을 내고 고함을 치고 악독함으로 남을 상처 주고 하는 것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해 주라“ 이게 사도의 적극적인 권면입니다.

여기서 “인자하다“”크레스토스“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눅6:35)

35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이 “인자하다“”크레스토스“는 어떤 단어하고 발음이 거의 흡사하지요? ”크리스토스“

사도는 우리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통해 해야 할 적극적인 행위를 ”크레스토스“라는 단어로 시작함으로 해서 우리는 결국 ”크리스토스“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아야 하는 자들임을 word play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뒤의 5장으로 넘어가면 ”크리스토스“를 본 받으라는 구절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크레스토스“는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인자한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니까 인자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하고 계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렇게 되어져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서로 불쌍히 여기라“는 권면이 나옵니다. 이 ”불쌍히 여기라”는 말을 직역을 하면“더 강한 긍휼의 내장을 가져라”입니다. 고대 시대에는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내장 속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내장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그 긍휼이 우리 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서로 용서하라” “카리조메노이”가 또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그렇게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용서해 주어라“

4장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나왔었습니다. 사도가 용서가 얼마나 중요하면 이렇게 계속 반복을 하겠습니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실감하세요? 영국의 christian정신병원 원장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환자에게 용서를 확신시킬 수만 있다면, 그들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확신시킬 수만 있다면 나의 환자 절반 이상을 나는 내일 당장 퇴원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용서에 아주 인색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죄책감 속에 시달리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여전히 분노에 몸을 상하게 합니다.

그 정신병원 원장의 말은 상대방이 진지하게 용서의 말을 한번이라도 해 주었다면 굳이 정신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되었을 사람이 그 큰 정신 병원 환자 전체의 절반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에 인색한 세상 속에 살다보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용서를 그다지 심각하게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용서 받으셨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죄책감 때문에 밤마다 머리를 쥐어 뜯고 계십니까? 그러한 죄책감이 우리를 정신병원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아직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때문에 누군가가 그 죄책감 때문에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용서하세요. 용서는 그렇게 파워가 있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즐겨보는 TV 프로그램 중에 “꼭 한번 만나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어려서 헤어진 부모나 형제 자식들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입니다. 대부분이 너무나 가난해서 자식들만이라도 잘 먹이고 싶어서 아이들을 해외로 입양시킨 부모들이 자식을 찾거나 자식들이 부모를 찾아 한국으로 오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들은 자기들만 잘 살아 보겠다고 자식들을 버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20년 30년 만에 만난 그 부모들을 자식들이 용서하고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떠듬떠듬 말할 때면 정말 눈물이 납니다. “용서는 참 아름다운 거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런데 간혹 그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방송국의 연락을 받고도 안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자식을 찾으러 나왔던 어머니나 아버지는 통곡을 합니다. 그건 보는 사람도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용서하셔야 합니다.

월요일에는 제가 집에서 꼼짝을 안 합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 시간에는 주로 음악을 듣거나 신앙 서적 말고 소설책을 간간이 봅니다.

이번 주 월요일에도 집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 길 건너 앞집에 사는 백인 여자가 문을 발로 막 찼습니다. 그 백인 여자는 색깔 있는 사람은 전부 자기 집 개 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그런 무례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수백 번 인사를 했는데 한 번도 인사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혹시나 산책을 하다가 길에서 마주치면 너무 불결한 것을 만졌을 때처럼 옷을 털고 손을 털고 그러는 사람입니다. 남의 문을 발로 막 차기에 나가서 정중히 왜 그러냐고 했더니 “왜 내가 지금 고상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너희 집에서 잡음이 나서 나의 작품에 방해가 된다는”는 거였습니다. 나중에 자기 그림 다 그리면 그 때 음악을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옆집도 아니고 길 건너 편 집에서 우리 집에서 틀어 놓은 음악이 들리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 걸 가지고 남의 집에 와서 문을 발로 걷어차는 그런 몰상식한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저희 집사람이 따지려고 하는 것을 지긋이 말리고 “그러겠노라”고 했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여보 이런 것도 참아야 되요?” “그래 참자, 저 사람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거 알잖아, 설교는 맨 날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해 놓고 자기는 그렇게 못하면 그게 무슨 목사냐? 참자” 저희 집사람이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한참 뭔가를 생각하더니 “여보 우리 잔디 깎을까?” 그럽니다. 저희 집 잔디 깎는 기계가 거의 탱크 소리가 나거든요. 그러니까 저희 집사람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잔디를 깎자는 것이었습니다. 더 시끄럽게 만들어서 복수를 하자는 심사였겠죠. 설마 잔디를 깎는 것까지 시비를 걸지는 못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쳐다보면서 “그럴까?” 하다가 푸 하하 웃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그냥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아마 그 여자도 미안한 마음을 가졌으리라 믿습니다. 아니면 말고요. 그런데 잠자리에 들면서 아내가 그럽니다. “한바탕 해 주면 마음이 풀어질 것 같았는데 그렇게 안 하고 용서하기로 했더니 마음이 더 편해요” 우리는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연습을 자꾸 자꾸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이 본문에서 “같이” “카또스”라는 단어를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형제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인자하게 대해주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같이“ 되어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같이 되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미 부어 놓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긍휼을 계발하고 훈련해서 진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4장이 끝납니다. 참 할 거 많지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행함“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벧전3:8-11)

8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사도 바울의 권고나 베드로의 권고나 대동소이하지요?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이렇게 엄청난 노력과 열심이 요구되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계속해서 5장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행함”에 관해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엡5:1-2)

1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2절의 “행하라” “페리파테오”는 4장 17절에서도 동일하게 쓰였던 단어입니다.

(엡4:17)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그러니까 사도는 지금 4장과 5장에 걸쳐서 계속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소극적 권면과 적극적 권면, 행하지 마라, 행하라)에 관해서 계속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장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운”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너희가 모든 악독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과 모든 악의를 버리고 인자한 사람이 되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내가 1절 이후에 기술해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방법이 뭐지요?

그 방법으로 사도는 “너희는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본받는 자“”미메타이“는 ”그대로 본을 뜨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영어의 "mimic"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떠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요구가 조금 지나친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영원하신 하나님을 본떠서 살수가 있습니까?

사도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본떠서 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유 적 속성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께는 우리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비 공유 적 속성과 우리에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하신 공유 적 속성이 있습니다.

먼저 비 공유 적 속성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자존하심: 이 말은 하나님은 존재의 기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 시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자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참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2)자족하심: 우리 인간들은 항상 어떤 환경이나 물질이나 상황 같은 매개를 통해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만 하나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고 아무도 의지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은 스스로 만족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음식이 필요합니다. 옷, 가정, 우정, 산소, 햇빛, 비 같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왜 하나님께서 이 골칫거리 인간을 만드셨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3)영원하심: 하나님께서는 항상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항상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출발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변하지도 않습니다. 그게 영원성입니다.

(4)전능하심: (omnipotence)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십니다.

(5)전지하심: (omniscience)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속까지도 이미 다 아십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비 공유 적 속성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감히 본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본떠서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공유 적 속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캘빈은 그 모든 하나님의 속성들을 한 마디로 “거룩한 속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거기에는 공의, 악에 대한 분노, 지혜, 신실함, 사랑, 긍휼, 연민, 친절, 용서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가 본떠서 살아야 할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 하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미메타이“”본 떠서 살아라.“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본떠서 살라고 말하기 전에 ”왜”우리가 하나님을 본떠서 살아야 하는지를 먼저 언급 합니다“

뭐지요? “너희는 사랑을 입은 자녀이기 때문에”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녀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인 하나님을 본떠서 살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체의 유전자가 부모의 으뜸 되는 특징을 자녀가 소유하도록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면 하나님의 영적 유전자가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을 본떠서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목숨과 바꾸실 만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일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특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께 칼을 겨누고 있을 때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이해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랑에 대해 이미 아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5절에 “너희가 이미 알거니와”라고 사도가 명확하게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은 어떻게 하나님께 반응을 하여야 할까요?

아버지에게는 자식이 자기 자신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우리 아들이 매일같이 술이나 퍼먹고 마약이나 하면서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면 그 아비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우리 아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운동하고 예의를 배우고 그렇게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을 기뻐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항상 우리를 파괴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렇게 우리를 파괴해 갈 때 하나님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사랑을 입은 자녀이므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바울은 권고하는 것입니다.

우리 둘째 녀석이 유난히 저를 잘 따릅니다. 심지어 이제 여덟 살 먹은 녀석이 “난 아버님 죽으면 같이 죽을 거예요”하면서 절더러 오래 오래 살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아버지를 그렇게 좋아하니까 이 아이는 아버지의 냄새를 늘 맡기 위해서 제 스킨로션을 늘 손에 바르고 학교에 갑니다. 제 기침 소리도 일부러 흉내를 내고 제 걸음걸이, 말투도 그대로 흉내를 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우리 아들 녀석도 비디오게임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제가 어느 날 지나가는 말로 “아빠는 애들이 비디오게임 너무 많이 하는 거 참 싫더라.” 했더니 이 아이가 그 이후로 제가 있는 곳에서는 게임을 안 합니다.

토요일 날이나 주일날처럼 아이들이 교회에서 제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때 그 때는 제가 마음 놓고 게임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교회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아이들도 진짜 아빠가 좋으면 아빠의 기분을 좋게 해 주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합니다. 저는 정말 우리가, 저와 여러분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인지 의문스럽습니다.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식은 그 가정의 대표입니다. 어디 가서 자식이 사고를 치면 당장 그 부모가 끌려가서 욕을 먹습니다. 여러분이 어른들한테 인사를 안 하고 무례하게 보이면 당장 여러분 부모님이 부당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도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켰길 래 애가 저렇게 싸가지가 없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함없이 사람들에게 욕이나 먹을 짓을 하고 다닌다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 하늘 가정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성도들의 삶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롬14:7)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이게 우리의 신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학교 다닐 때 제일 곤혹스러울 때가 언제입니까? 뭔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선생님이 “부모님 모셔와“ 그러면 제일 곤혹스럽죠. 왜요? 부모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니까, 부모님께 너무 미안해서 정말 곤혹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러한 자세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5:16)

16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너희의 행실 때문에 하나님 얼굴에 먹칠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늘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을 본떠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엡5:2)

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사도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고 진술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시고 어떤 것을 버리셨습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손해 보신 게 뭡니까?

시간, 물질, 힘 등등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희생들은 전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버리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서 시간을 희생하고 나를 위해서 물질을 희생하고 나를 위해서 힘을 씁니다. 우리는 절대 나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어떤 것을 손해 보셨다는 것이 아니라 원수였던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도널드 그레이 반 하우스 목사님의 책을 읽다보니까 그 분의 상담 사례가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부부가 도널드 그레이 반 하우스 목사님께 찾아와서 이혼을 하겠다고 상담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었소. 좋은 자동차와 넓은 집과 고급 옷과 비싼 보석, 난 당신이 원하는 것은 모두 다 해 주었는데 왜 이혼을 하자는 것이요?” 그랬더니 그 아내 왈 “맞아요,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주었어요. 당신 자신만 빼고...” “나는 이제 허깨비가 주는 다이아몬드와 허깨비가 주는 좋은 옷과 허깨비가 주는 좋은 자동차에 질렸어요.”

여러분, 우리는 얼마든지 물질적인 것으로, 화려한 것으로 상대방을 현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닌 연극은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없고 상대방을 기쁘게,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자기가 갖고 있는 능력을 조금 나누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 분의 전 존재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알라바마에서 며칠 동안 집회를 할 때 마지막 날 빌립보서를 설교하면서 이 대목을 이야기하는데 어떤 자매님이 갑자기 엉엉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너무 크게 장시간 우시는 바람에 좌중이 크게 당황했었습니다. 그 자매님이 우는 바람에 갑자기 저도 눈물이 쏟아져서 혼났습니다. 나중에 집회가 끝나고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분께 여쭤보았습니다. “집사님 아까 왜 그렇게 우셨습니까?”

그 분은 “예수님이 기지촌 술집 접대부 출신인 자기를 위해서 예수 님 자신을 버리셨다는 데 어떻게 눈물이 안 나오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는 지금까지 그런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 그게 믿어지면서 감격이 복받쳐 올라와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빌2:5-8)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이 복음의 메시지를 너무나 감격 없이 소홀하게 취급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왜 눈물이 안 나세요?

계속해서 2절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시고 “제물과 생축이 되셨다”고 진술합니다. 사실 제물 “뚜시안”과 생축 “프로스포라”는 거의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희생제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구약의 시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시40:6)

6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왜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십니까? 진정한 제사와 예물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히브리서 기자도 인용을 해다가 썼습니다.

(히10:5-6)

5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예수)

6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은 제사제도와 성막과 같은 상징과 모형을 통해서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을 미리 예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지낼 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최상품 제물을 가져와야 합니다.

제단 앞에서 제사장이 그 제물과 그 제물을 가져온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합니다. 그 죄인의 죄를 제물에게 전부 전가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제물을 죽입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다가 지성소에 가서 뿌리고 그 제물의 시체는 번제 단에 올려놓고 태워버립니다. 이렇게 어떤 죄인의 죄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그 피와 살 전부를 희생해야 비로소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제물과 생축이 예수 그리스도이셨다는 것입니다.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구약에 나타난 제사와 성막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고후5:21)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벧전2:22-24)

22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갈3:13)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제물과 생축으로 자기를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똑같이 “하라“고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나 자신을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 자신을 버리기는커녕 자기가 가진 물질을 조금 나누어주는 것도 벌벌 떨지 않습니까? 심지어 남편, 아내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하기가 힘들지요? 오히려 남들이 모두 합심해서 나를 좀 떠받들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시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부르고 계신지 잘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이웃에게 실천해 나가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하셔야 하는지 아십니까?

(갈6:7-10)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부터 그 연습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누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섬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세상에 나가서 우리가 제물과 생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제물과 생축이 되어주는 연습을 열심히 하자고요. 자기가 맘에 드는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여러분의 원수에게 먼저 제물과 생축이 되어주는 연습을 하십시오.

계속해서 3절을 보시면 사도는 우리가 “이름이라도 불러서는 안 될” 금기 사항들을 또 나열합니다.

(엡5:3-5)

3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제일 첫 번째 나오는 단어가 “음행“입니다. ”포르네이아“ 많이 들어보신 단어지요? ”포르노“가 여기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등장한 단어가 ”더러운 것“”아카다르시아“입니다. 역시 성적인 범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 성적인 범죄를 가리키는 단어들과 함께 ”탐욕”이라는 단어를 묶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성적인 범죄는 인간의 탐심에서 나온 아주 악한 범죄라는 것입니다.

탐심은 뭐라고 했지요?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하면서부터 성적인 범죄는 있어왔습니다. 매춘과 동성애, 간음 이 모든 것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점점 풍성하게 열매를 맺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지금 최고의 영화로 꼽히는 두 영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천만 관객을 넘어“왕의 남자”이고 미국에서는 아카데미상을 휩쓴 “broke back mountain"니다. 둘 다 게이 영화입니다. 이제 동성애는 쉬쉬해야 하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떳떳해 졌는지 모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연예인이 ”나는 동성애자입니다“하고 커밍아웃을 하면 모든 방송에서 퇴출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영화, 연극, 드라마, 소설 같은 데서 오히려 그들에게 힘과 용기와 격려를 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동성애에 관한 설교를 한번 한 적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을 너무 몰아세우지만 말고 이해를 하려 애를 써보자고 결론을 맺었지요? 그러나 제가 동성애 자체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 드린 것은 아닙니다. 동성애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순리로 쓰게 하신 것을 역리로 쓰며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서로 정욕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은 죄라고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쾌락 앞에서는 성경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인터넷은 어떻습니까? 언제든지 자기가 원할 때마다 포르노를 클릭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저희 때만해도 어떤 불량한 녀석이 몰래 그런 책을 한 권 가져오면 가슴 두근거리면서 돌려보던 그런 낭만은 이제 다 사라졌습니다.

이제 초등학교 1,2,3학년 아이들까지 포르노에 중독이 되어 있다는 아주 충격적인 통계가 있었지요.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런 것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그리고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아야 할 것 세 번째가 “탐욕”입니다.

“탐욕”“플레오넥시아”“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돈을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는 말입니다. 돈은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돈을 목표로 삼게 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성경은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돈에 눈이 멀어 있다면 정말 심각하게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마6:24)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한 쪽 눈은 핸드 아웃을 보시고 한 쪽 눈은 저를 보세요. 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자유 해 지세요.

번째가 “누추함”입니다. “이스크로테” 이 말은 “말로 나타내는 모든 추잡함을 다 포함하는 부도덕하고 버릇없는 행동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가 “어리석은 말“”모롤 로기아“입니다. 이 헬라어는 바보라는 단어 ”모론”과 말씀을 나타내는 “로고스”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모롤로기아“하면 ”바보같이 말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 모롤로기아를 ”사려 없이 까불대는 것,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고 계시고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그 단어를 ”고상하거나 칭찬할 만하거나 고귀한 것을 깎아 내리기 위하여 저속한 언어와 행동으로 그것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박형용 교수님은 이 모롤로기아를 “의미 없고 빈 쓸데없는 말”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 한마디 한마디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허튼 소리들 하지 마세요. 의미 없는 불평, 불만, 다른 사람 험담, 쓸데없는 농담 이런 것 하지 마세요. 좀 더 과묵해 지세요. “모롤로기아”“바보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도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너희는 그런 것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그리고 우리가 그 이름이라도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의 여섯 번째가“희롱의 말”입니다.

“유트라펠리아”“음탕한 농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뒤의 세 가지는 전부 더러운 대화로 더러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조심들 하세요. 더럽고 상스럽고 허무한 말로 여러분의 귀한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골4:6)

6여러분은 언제나 친절하게 유익한 말을 하고, 묻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적절한 대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약3:3-11)

3말을 부리려면, 그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의 온 몸을 끌고 다닙니다.

4보십시오, 배도 그렇습니다. 배가 아무리 커도, 또 거센 바람에 밀려도, 매우 작은 키로 조종하여, 사공이 마음먹은 곳으로 끌고 갑니다.

5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부분이지만,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

6그런데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마지막에는 혀도 지옥 불에 타 버립니다.

7들짐승과 새와 기는 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은 어떤 종류든지, 모두 인류가 길들여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8그러나 사람의 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9우리는 이 혀로 주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11샘이 한 구멍에서 단물과 쓴 물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본문 4절에서도 너희는 그런 더러움 말들 하지 말고 “감사한 말”만 해라, 하고 우리에게 충고하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5절을 보시면 “지금까지 요구한 것들을 지켜내지 못하는 자들은 천국 못 간다.“라고 못을 박고 계십니다.

(엡5:5)

5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 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이 말씀은 구원받은 자들도 이렇게 지켜 내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당연히 우리 아버지가 원하시는 삶을 좇아, 그 분을 본받게 되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에베소서 4장 이하를 강해하면서 참 많이 struggle했습니다. 저도 사실 “여러분 저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한번 해 보세요” 이렇게 말할 처지가 못 되거든요. 저도 매일 매일 쓰러지고 매일 매일 고통스럽게 허벅지를 찍으며 다시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당당하게 여러분 앞에서 “여러분 이렇게 사십시오.“라고 외칠 수 있는가?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을 얻은 교회에게 쓰신 편지라는 것이 일단 마음이 놓였습니다. 저만 그렇게 못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는 교회가 탄생된 이후 모든 성도들이 겪는 과정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까 조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리고 마음속에서 이런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1)“너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온 것을 믿느냐?”

당연히 믿지요.

(2) “그럼 그 예수가 너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죽은 것도 믿느냐?” “네 믿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해서 너의 거할 처소를 마련하러 올라 간 것도 믿느냐?“ ”네, 믿습니다.“

(3)”너는 그 처소가 뭐라고 배웠느냐?“”바로 저 자신입니다“”그래 예수는 지금 열심히 네 안에서 너를 만들어 가고 있는 거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셔서 네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이 사실인 것처럼 네가 지금 내가 요구하는 대로 완성이 되리라는 것도 확실하단다. 그러니까 너무 절망하지 말아라.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내시고 사울을 바울로 만들어 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도 완성시키실 거야“”네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분명 완성해 내실 거야“

그러고 나니까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넘어지는 저의 실패와 실수 속에서 감사가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죽으셨을까? 그게 역사적인 사실인 만큼 지금은 내가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이 많은 하나님의 요구도 반드시 내 안에서 이루어지겠구나.“ 그래서 복음입니다.

저는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예수님의 손을 놓지만 우리 예수님이 제 손을 절대 놓지 않으시기 때문에 저는 지금 이나마 온 것입니다. 제게는 지금 이 정도 온 것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저를 완전하게 완성해 내실 것을 저는 확고하게 믿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다소 혹독하게 몰아치는 것은 여러분을 자꾸 깨우기 위함입니다. 제가 간혹 분개하여 욕을 내 뱉는 것은 우리가 너무 우리 자신의 죄를 가볍게 여기고 넘어가는 것이 화가 나서 그러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건 제일 먼저 저에 대한 욕인 것입니다. “넌 목사가 되어서 어떻게 그렇게 네 죄에 대해 둔감할 수 있냐?”

그리고 여러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그렇게 저를 분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만나게 해 주신 것을 저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제게는 참 소중합니다. 그렇게 제게 소중한 분들이기에 단 한 분이라도 마귀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안타까움에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의 실수와 실패로 괴로워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것 잘 압니다.

우리 그럴 때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서로 거울이 되어 주며 쓰러지는 자를 세워주고 뒤쳐진 사람들을 기다려 주며 열심히 한번 가 보자고요. 여러분은 잘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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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단 마귀는 아주 매력 있고 달콤한 모습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본능이 욕심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탕자를 생각해 보세요. 그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을 때 그의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의 비위를 맞춰주며 나만 따라오면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그리고 삶이 행복해 질 거라고 얼마나 아부를 했겠습니까? 하지만 그 모든 유혹들은 탕자의 주머니를 완전히 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떠나 버렸습니다. 결국 그 탕자는 먹을거리를 위해 돼지와 다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결국 그런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온통 자기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행복이 영원할 거라 믿고 있겠지만 결국 돼지우리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 마귀의 유혹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단 일초도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없는 여전히 약한 존재입니다. 예전에 한국에 “다라 붕어 낚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라에다가 붕어 몇 마리 갖다놓고 100원씩 내고 낚시 하는 겁니다. 물론 잡으면 다시 놓아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붕어들이 금방 잡았다 놓아줘도 또 금방 미끼를 뭅니다. 그래서 윗입술이 아주 너덜너덜해 지죠. 우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 더러운 유혹에 빠져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의 삶을 살지 않도록 성령 하나님께 열심히 부탁하며, 의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그 죽은 옛 사람을 빨리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매일 매일 입으십시오.

�� 좋& �>���y �;y �냐고요? 맛있으니까? 그러나 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경호는 개를 좋아합니다. 맛있으니까. 자기에게 유익이 되니까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개를 키우려면 많은 손이 가기 때문입니다.

지영이는 개를 사랑합니다. 내가 그 개를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도 내야하고 똥오줌도 치워야 하고 오히려 객관적으로 볼 때는 나에게 손해입니다. 그렇지만 호야의 유익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수두룩할 것입니다. 나의 아내, 나의 남편, 내 자식, 내 형제, 내 자매 그렇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바로 그 사랑을 연습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쿠폰이 생겨서 월요일에 아이들과 함께 유니버설 스튜디오라는 곳엘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쇼의 90%이상이 전부 마귀, 귀신, 머미, 드라큘라 같은 흡혈귀 이런 것을 소재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준다는 것이 귀신 복장을 하고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놀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너무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구니까 나중에는 짜증이 나더라고요. 그러지 않아도 무서워 죽겠는데 자꾸 시커먼 놈들이 놀라게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아마 지옥인 것 같았습니다. 피 비린 내가 진동하는 어떤 곳에 수많은 벌거벗겨진 채 앉아 있었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제가 낮에 본 그 모든 귀신들이 전부 살아서 실물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퍼런 도끼를 들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 한 사람 씩 불러서 커다란 원판에 묶어 놓고 그 원판을 돌리면서 도끼로 그 사람들 퍽 퍽 찍었습니다. 팔 다리가 쩍쩍 찢어지고 피가 튀는데 묶여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억울하다는 듯, 이를 가는 겁니다.

조금 있으면 제 차례가 오는 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 공포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왜 내가 여기 와 있는 거지? 하나님 저 좀 구해 주세요. 제발 여기서만 벗어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순간 알람이 울려서 잠이 깼습니다. 그게 꿈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모든 게 새로워 보였습니다. 집사람이 옆에서 자고 있는데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 방에 가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모두 천사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그토록 무시무시한 사망에서 나를 건져 주신 것이구나, 참 실감이 가는 새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경고를 오히려 재미삼아, 놀이 감 삼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섬뜩하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나중에 우리는 그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심판에 던져지게 될 텐데 사람들은 태연하게 그 것들을 놀이 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기서 건져진 것입니다. 거기서 건져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서 건져주신 그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열심히 훈련하는 것, 그거 외에 우리가 무엇에 욕심을 두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보내는 이 일초 일초가 모여 일분이 되고 이 일분이 모여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모여 우리의 일생,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내는 이 일초, 일 분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을 어떤 것과 계속 바꾸시면서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생명을 무엇과 바꾸시면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할 교회와 여러분의 성숙에 더욱더 매진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더욱 더 진지해 지십시오.

(엡4:7,11,12)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