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62)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엡4:17-24)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25

(62)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엡4:17-24)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지난주까지 공부한 부분을 잠깐 복습을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17절부터 19절까지에서 이방인들에 대해서 기술을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를 믿기 전의 에베소 교인들의 상태에 대해 언급을 한 것이죠. “너희들은 허망하게 행했던 자들이고 총명이 어두워져 있던 자들이며 무지하고 마음이 굳어져 있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감각 없는 자였고 방탕에 자기를 방임하던 자들이었고 모든 더러운 것들을 욕심으로 행하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 되었는데도 왜 그런 것들을 좇아 다니느냐? 너희는 예수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지 않느냐?” “너희는 진리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배웠고 그에 대해 들었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배웠다. 그러니까 너희는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라” 여기까지가 지난주까지 우리가 공부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하지 않고 ”예수 안에 있다”라고 인간으로서의 이름 “예수”만 쓴 것입니다. 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 했지요?

왜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개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며 역사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에 쓰인 동사가 부정 과거시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과거에 옛 사람을 벗었고 새 사람을 입었다” 는 뜻이라고 했지요?

골로새서에 가면 좀 더 정확하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골3:9-10)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똑같은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너희는 이미 옛 사람을 벗어버렸고 새 사람을 입었다”

그런데 왜 성경 여러 곳에서는 또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요구한다고 했습니까?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옛 사람이 죽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은 사람만이 옛 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게 이러한 요구가 주어진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더러운 우리 옛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제 죽어버린 그 옛 사람의 시체를 벗어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5절을 보시면 “그런즉“이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엡4:25)

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여기서 쓰인 “그런즉” “디오”라는 접속사는 어떤 일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이미 옛 사람을 벗었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너희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고”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여주시고 우리 안에 새 사람을 창조해 주신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후로 계속해서 옛사람을 벗어가야 하고 새 사람을 입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뒤로 숨어서 “어차피 하나님께서 나를 완성하실 텐데 뭐, 난 그냥 하나님께 다 맡길 거야” 이렇게 살아도 된다면 에베소서 4장 이후는 다 찢어 버려야지요. 어차피 하나님께서 다 하실 건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천 강령을 배워야 합니까?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성시켜 가실 것이지만 우리도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화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믿음의 삶입니다. 그러나 성화에 있어서 우리는 일해야 하며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벗고 입는 일을 해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은 이 벗고 입는 일이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임을 인식하십시오. 거기부터가 시작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다른 이가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힘을 풀고 기다리며 그 일이 우리에게 성취되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지 않고 우리에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힘을 가지고도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써 보지도 않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의도적으로 저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 옛 사람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마귀 적이고 세상 적인 삶에나 속하여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들을 벗어버리십시오. 그것들을 제거하여 버리십시오.“

노 목사님의 분노가 보이지 않으세요?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도움을 받기 원하시면 탁월한 신학자인 존 오웬 목사님의 ”The Mortification of the Flesh"를 꼭 읽어 보십시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이미 다 읽으신 책이죠? 우리 청년들에게는 제가 한 권씩 사 주었으니까 분명히 읽었을 테고요. 목사가 박봉을 쪼개 그렇게 여러 번 책을 사 주는데 그런데도 안 읽었다면 여러분은 정말 회개하셔야 합니다.

존 캘빈도 그의 에베소서 설교에서 이렇게 이 부분을 주석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권유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권고하는 것이 아무 유익이 없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우리의 옛 사람을 완전히 벗어버린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위에 덮인 이중의 실로 짠 털옷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아직도 남아있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여러분은 더욱 열심히 노력하셔야 합니다.” 누가 존 캘빈의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 뒤로 숨어서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이제 목숨 다 바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입니다.

“목숨을 거는 겁니다.”

여러분, 사탄은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기 전부터 이미 우리를 충동질하고 미혹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수시로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실 일이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여러분은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먼저 여러분 자신에게 확인시키십시오.

“난 이제 새 사람이다. 나는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다. 나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옛 사람과 관계가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며 새로운 창조물이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다. 나는 새것이 되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시켜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다. 그래서 난 더 이상 예전처럼, 그 악한 세상에서 사는 자들과 똑같이 살수가 없다” 여러분은 하루를 그렇게 시작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바로 “복음”아닙니까?

(빌1:27)

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우리는 매일 매일 그 복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 합당한 삶, 벗고 입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는 전투의 현장입니다. 맹하게 사시면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여러분을 총력을 기울여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얼마나 이 부분을 강조하시는지 이 부분의 강해 설교 제목을

“기도하지 말고 행하라”로 붙이셨습니다. “기도만 하지 말고 행하기도 하십시오.”가 아닙니다. “기도하지 말고 행하라”입니다. 그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해 내야 하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삶이 엉터리 같았으면 그 노 목사님께서 설교 제목을 “기도하지 말고 행하라” “not pray, just do it"이라고 붙이셨겠습니까?

여러분,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건 모두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롬8:15)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요일4:17-18)

17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 안에는 능력이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옛 사람을 벗으십시오. 새 사람을 입으세요. 알콜, 도박, 마약, 분 냄, 시기, 질투, 다툼 다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겁먹지 마세요. “나는 환자야, 난 할 수 없어“ 아닙니다. 이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just do it!"

우리 윤 효진 집사님이 어떤 못된 랜드 로드를 만나서 1년 넘게 고생을 하셨습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하루 종일 앉지도 못하고 정말 눈물 속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목사인 저도 그 주인 이야기를 들으면 분노가 일어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잘 참아 내셨습니다.

그 억지와 치기에 힘으로 대항하지 않고 계속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잘 참아내셨습니다. 결국 1년이 넘어 일이 기적처럼 해결이 되었습니다. 우리 윤 집사님께서 그 못된 주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실 때 허리를 90도로 굽혀서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고 나오셨답니다. 그렇게 못 되게 굴던 그 주인이 안절부절 못했답니다.

그게 승리입니다. 세상을 향해 멋지게 카운터펀치를 한방 날린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다른 분에게 전해 들으면서 참 통쾌했습니다. “이게 진짜 승리구나, 승리는 정말 사람을 이렇게 통쾌하게 만드는구나.“ 그리고는 주일날 윤 집사님을 뵙는데 무슨 갑옷을 입은 전사가 저기서 걸어오는 것 같더라고요.

그 사람이 속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도대체 저 사람은 속에 뭐가 들어 있기에 그 동안 그런 억지를 다 참고 견뎌냈을까? 그리고 멱살을 잡아도 시원찮은 마당에 공손하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가는가?” 윤 집사님이라고 왜 성질 없겠어요?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고 있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견뎌내고 승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제가 저희 집사람을 보면서 참 은혜를 받습니다.

저희 집사람은 신혼 초에는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저한테 혹시 눈이라도 흘기고 가면 달리는 차 앞을 가로막고 그 사람을 제 앞에 붙들어 와서 기어코 사과를 시키고야 마는 괴력의 왈가닥 “루시”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참 잘 참습니다. 엊그제 월요일 날도 제가 집에 있는데 저희 집사람이 동네 가게에서 인종차별 비슷한 모욕을 당했답니다. 그런데도 어제 들은 남편 설교를 떠올리면서 계속 웃어 주었답니다. 나중에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더래요. 같이 맞받아서 욕 한번 해 주면 속이야 시원하겠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서 지는 것입니다. 참는 겁니다.

지금 “잘 벗고 잘 입고 있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실 때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셨답니다.

“너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께서 바로 그 설교를 하시는 날, 그 동네에서 제일 골치 덩어리인 남자가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40대 중반의 남자는 싸움꾼이었고 술고래였고 바람둥이였답니다. 술만 마시면 누구하고든 싸움의 자웅을 겨뤄서 꼭 이겨내고야 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었고 당시 불량배들이 그렇게 했듯이 콧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있었고 늘 그 힘의 상징인 콧수염을 자랑했었습니다. 늘 그 콧수염이 싸움의 발단이었습니다. 또 다른 불량배들이 자기 콧수염이 더 길다고 도전을 해 오면 그거 재 보다가 싸움이 붙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다음 주에 그 분이 교회에 다시 나왔는데 수 십 년을 길러오던 그 콧수염을 완전히 밀고 나왔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노파심에 “교인들 중의 누가 형제님보고 콧수염을 자르라고 충고하던가요?” 그랬더니 그 남자가 그러더랍니다. “목사님이 지난주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싸움의 동기가 되는 콧수염부터 잘라버리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 후로 그 분은 완전히 변한 새 사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에드워드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무지하고 글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가난하고 초라해도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반드시 옛사람은 벗어 버리셔야 합니다. 저는 이 형제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결단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단순한 신앙인들이 우리 교회에 가득 차기를 하나님께 간구할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들은 늘 수의를 입어야 합니다. 그 수의를 입고 있는 동안 그들은 죄수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습니다. 소방관들은 소방관의 옷을 입습니다. 경찰은 경찰의 옷을 입지요. 그 옷을 입고 있는 동안 그들은 모두 그 옷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거지같은 누더기를 벗기고 하늘의 잔치에 입고 갈 파티 복을 입혀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파티 복을 입고 여전히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으면 안 되지요. 그 왕자 옷에 걸 맞는 그 공주 옷에 걸 맞는 품위 있는 삶을 살아 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엡5:8-12)

8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여기서 “참예하지 말라“”슁코이노네오”“철저하게 관계하지 말라” 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경험상 “나를 죄짓게 하는 것들”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일 어떤 장소만 가면 여러분이 주체를 하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시거든 거기에 가시면 안 됩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 보시면 안 됩니다. 듣지 말아야 할 것들 보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악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도망가십시오. 만나지 마세요. 그게 상책입니다. 우리는 아예 처음부터 철저하게 막아야 합니다. 욥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욥31:1,7)

1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욥은 자신의 눈과 언약을 맺었답니다. 자기는 지나가는 처녀도 안 쳐다봤다는 것입니다. 혹시 죄에 대한 욕구가 올라올까봐)

7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항상 마음은 눈을 따라가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엉뚱한 것들 보지 마십시오. 눈과 언약하십시오. 귀와 언약하십시오.

(롬8:13)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골3:5-8)

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우리는 반드시 육신을 죽여야 합니다. 그건 누가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죽이라“”네크로사테“”의도적으로 공격을 하다” 혹은 “굶겨서 죽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죄에게 의도적으로 먹이를 주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에게 먹이를 준다는 것은 쓸데없는 것들을 보고 듣고 ,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주 끊어 버리지 못하고 찔끔 찔끔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아예 의도적으로 그 놈을 굶겨 죽여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근육을 한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그 근육이 위축되고 약해져서 결국은 못 쓰게 되지요?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래 참았다가 찔끔 하고, 도 찔끔하고 그러면 계속 그 놈에게 밥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아예 쓰지도 말고 굶겨 죽여라“ 그게 “죽이라“”네크로사테“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 하는 게 그리 쉽지 않은 것입니다.

(고후9:26-27)

26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여기서 “내 몸을 치다“라는 단어는 ”휘포피아조”입니다. 이 “휘포 피아조”는 권투 선수가 상대를 쳐서 KNOCK DOWN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려잡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의 육신을 때려잡듯이 옛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일기 중에 이런 대목이 있지요

“나는 육신의 도모를 하지 않고 육신을 죽여 복종케 하기 위해 늘 나의 몸을 칩니다. 나의 몸을 녹초가 되게 합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그것을 쓰러뜨립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 안에 있는 나의 적수를 향해 기를 세웁니다. 나는 매일같이 내 몸을 넉 아웃시킵니다.”

이런 분들의 고백을 들으면 우리가 참 부끄러워집니다. 이렇게 자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바로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었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삶이 왜 오늘날에는 이렇게 사라지고 없는지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 계속해서 23절을 보시면

(엡4:23)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우리는 날마다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사도는 강조합니다. 여기서 “새롭게 된다“”아나뉴스따이“는 현재시제라고 했지요? 헬라어의 현재시제는 진행형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심령의 새로움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령이라고 번역이 된 “프뉴마티 투 누스”“마음의 영”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단어들은 기독교 교리를 바로 정립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여러분, 마음은 뭐고 마음의 영은 뭡니까? 이걸 따지고 들자면 이분설이니 삼분설이니 전인설이니 이러한 전문적인 “인간의 구성 론”을 다 들춰내야 하는데 저는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이루어졌다. 아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으로 이루어졌다. 아니다,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은 하나다“ 이건 복음과는 별로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분설을 지지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비중 있게 연구를 해 보지 않아서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별로 거기에 대해서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 뒤에 그 마음 자체를 주장하고 조정하고 작용케 하는 내적인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마음의 영” “프뉴마티 투 누스”입니다.

여기서 “새롭게 된다.“ ”아나뉴스따이“는 ”다시 새롭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애나케 팔라이오“”재통일“에 대해서 공부할 때 배웠듯이 여기도 ”다시“를 의미하는 ”아나“가 앞에 붙어서 ”다시 새롭게 되다“”쇄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에는 우리 마음의 영이, 우리 마음을 조정하는 영이 새것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을 움직이는 영이 타락을 한 것입니다.

(창6:5)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타락이라는 것은 이렇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생각과 계획이 악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태초에 가지게 되었던 마음의 기능은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주도하는 영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에 제가 안토니 후크마의 인간론을 요약해서 설명해 드릴 때,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 중에 우리는 기능적 형상을 잃었고 구조적 형상은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죠.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독수리가 여전히 날개는 가지고 있는데 그 날개로 날지를 못하고 마당을 쓸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마음을 움직이는 영이 새로워지기 전에는 옛 사람을 벗을 수 없고 새 사람도 입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 마음을 움직이는 영을 새 것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새롭게 하여”가 수동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해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시제를 현재형을 써서 매일 매일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의 마음의 영은 이미 새로워져 있습니다. 단지 여러분이 그 것을 인식하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영이 다시 새로워졌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성경을 통해, 우리 신앙생활을 통해 매일 매일 조금 씩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왜 수동태입니까?

여러분이 이걸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100% 하나님이 완성시켜 가시는 것이지만, 100%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50% / 50% 나눠서 하는 것도 아니고 100% 우리가 하는 것이고 100%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진리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100%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우리를 이끌고 가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100%의 우리 노력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너희는 옛 사람을 이미 벗었다. 너희는 새사람을 이미 입었다“라고도 말씀하시지만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옛 사람을 죽여라, 새 사람을 입어라, 심령을 새롭게 해라“ 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마음의 영’이 매일 매일 새롭게 됨으로써만” 우리는 옛사람을 벗을 수 있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인 바른 삶을 사는 것을 가리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심령이 새 것이 되어 그 새 마음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의 흉내를 잘 낸다 하더라도 정말 여러분의 심령의 새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서 차가운 한기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아무리 번드르르한 경건한 삶을 살고 아무리 종교행위를 열심히 한다 할지라도 여러분 주위에는 상처를 입는 사람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러분의 심령을 날마다 새롭게 한다고요? 성경에 설명되어 있는 여러분의 신분을 매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이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게 진짜 새 사람을 입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시고 거기서 여러분의 신분을 확인하시고 또 성경이 요구하는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삶을 자신을 쳐가며 살아내셔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만난 사람들을 한번 떠 올려 보세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나요? 여러분이 오늘 밤 세상을 떠나게 되면 여러분의 장례식에 올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의 장례식에 와서 어떤 생각을 할까요?

“나를 정말 행복하게 해 주었던 사람, 언제나 그의 곁에 가면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던 사람, 먼저 보내기 아까운 사람” 이런 평가를 들어내실 수 있는 오늘을 사셨습니까?

아니면 “내가 어쩔 수 없이 오긴 왔지만 네가 오늘 나한테 한 걸 생각하면 죽은 시체 따귀라도 때려주고 싶다” 이런 하루를 사신 것은 아닙니까?

매일 매일 여러분의 심령을 새롭게 하셔야 합니다. 매일 매일 여러분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셔야 합니다. 매일 매일 여러분은 여러분의 종말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사셔야 합니다.

(행11:25-26)

25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Then Barnabas went to Tarsus to look for Saul,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 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and when he found him, he brought him to Antioch. So for a whole year Barnabas and Saul met with the church and taught great numbers of people. The disciples were called Christians first at Antioch.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라 번역이 된 “크리스 티아노스”는 “크리스토”와 “...을 추종하는 사람”이라는 “이아노스”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님만 추종하며 좇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안디옥 사람들의 일종의 비아냥이었습니다. 아니, 언젠가부터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무엇을 해도 예수로만 결론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예수쟁이”“크리스 티아노스”라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안디옥이 어디입니까? 소아시아입니다. 그 안디옥은 술의 신 바카스와 님프인 다프네를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술의 신 바카스는 말씀 안 드려도 잘 이해하실 테고, 님프인 다프네는 요정입니다. 그리스 신화속의 님프는 피터팬에 나오는 그런 예쁘고 작은 요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성적으로 문란한, 오직 그것만을 재미로 삼고 사는 여자를 님프라고 합니다. 그 다프네는 아폴로 신과 쥬피터 신의 싸움의 희생물이 된 요정입니다.

아폴로는 활을 들고 다니는 신이라고 했지요? 쥬피터도 사랑의 화살을 들고 다니는 신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폴로가 쥬피터를 놀렸습니다. 조그만 녀석이 자기와 같은 활을 들고 다니는 것이 못 마땅했던 것입니다. 마침 다프네가 아폴로의 앞으로 지나가는데 쥬피터는 아폴로의 가슴에 사랑의 화살을 쏩니다. 아폴로는 즉시로 다프네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심술 맞은 쥬피터가 다프네에게는 미움의 화살을 쏜 것입니다. 그래서 아폴로는 죽자 사자 좇아가고 다프네는 열심히 도망을 가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한참을 도망가던 다프네는 아폴로에게 거의 잡힐 지경이 되자 차라리 저 놈에게 잡힐 바에는 나무가 되게 해 달라고 빕니다.

즉시로 그 다프네는 나무가 됩니다. 아폴로는 그 나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고백하고 그 나무가 된 다프네는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아폴로는 그 것을 기념해서 앞으로 모든 운동 경기에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그 나무 가지로 관을 만들어 씌워 줄 것을 약속합니다.

그게 바로 올림픽 우승자들에게 씌워주는 월계관입니다. 그러니까 세계의 지성과 건각들이 모여서 열심히 경기를 해서 겨우 얻어 쓰는 게 고작 만화 같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월계관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게 전부 어떤 것인지 잘 아시겠죠?

그런 술의 신과 성적으로 문란한 다프네 요정을 섬기는 도시가 어땠겠습니까?

그 더럽고 추악한 지옥 같은 도시 안디옥에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바나바와 바울에게서 일 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공부했습니다. 뭘 한 것입니까?

심령을 새롭게 한 것이죠. 그리고 열심히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그랬더니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뭐라고 불렀다고요? “크리스티아노스”“예수쟁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여러분의 일상의 삶 속에서 그 “크리스티아노스”라는 이름을 들어내셔야 하는 분들인 것입니다.

오늘부터 하십시오. 그래서 다음번에는 제가 우리 교회 교인들의 멋진 간증들을 더 많이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고후12:19-21)

19아마도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여러분 앞에서 자기변명을 하고 있는 줄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덕이 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20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 볼 때에, 여러분이 혹시나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또는 내가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가운데 싸움과 시기와 분노와 야심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교만과 무질서가 있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합니다.

21그리고 내가 여러분에게 다시 갈 때에, 내가 여러분 때문에, 내 하나님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까, 전에 죄를 지은 많은 사람이, 그들이 범한 부정함과 음란함과 방탕한 생활을 회개하지 않은 것을 보고서, 내가 슬피 울게 되지 않을까, 하고 염려합니다.

이게 여러분을 향한 저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