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60) 나는 예수를 먹고 예수는 나를 먹는다. (엡4:15-20)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22

(60) 나는 예수를 먹고 예수는 나를 먹는다.

(엡4:15-20)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본문을 통해 모든 신자들은 거듭나게 되면 영적 어린아이에서부터 출발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자라나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린아이로 있게 되면, 우리는 사람의 궤술(퀴베이아, 속임수) 그 “퀴베이아”에 쉽게 빠질 수 있고, 또 간사한 유혹(파눌기아, 짐승이 먹이를 잡기 위해 살금살금 좇아오면서 기회를 노리는 것)그 “파눌기아”에 언제든지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랄 수 있습니까? 지난주에 공부한 것이“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역시 우리의 영적 성장의 비결이 나옵니다.

그게 오늘 본문 15절입니다.

(엡4:15)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오직”으로 시작되지요. 방법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의 본문과 연결해보면 그 비결은 “바른 예수를 알고 믿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이 구절을 좀 더 원문에 맞게 번역을 하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15절은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14절과 대조해서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모든 엉터리 교훈의 풍조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만을 붙잡아야 한다.”라고 그 14절의 해결 방법을 다른 표현으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진리”가 뭡니까?

진리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리스도이십니다. 그 진리의 내용이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성경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구약 성경을 풀어 주시면서 “나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너희가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을 수 있는 영적 성인이 되기 위해서 오직 진리를 붙잡으라.”는 말씀은 “오직 성경대로만 믿고 고백하고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날 에큐메니컬운동이다 뭐다 해서 기독교를 빙자한 얼마나 많은 엉터리 교훈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까? 거기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잘 배우고 익히고 그 대로만 믿고 그대로 고백하고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기적을 부인합니다. 창조설을 부인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책이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 놓은 책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솝이야기처럼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 설화나 우화 등을 도입해 놓은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좋은 교훈만 받아 챙기면 된다는 주장입니다.

하긴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저 팔레스타인 땅에 어떤 목수의 아들이 처녀에게서 났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수긍하기는 정말 힘이 듭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해결했다는 이야기는 설화 중에서도 3류 설화쯤 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이면 우리나라 경주에서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서 신라를 건국했던 그 때입니다. 태백산 자락에서 하늘나라 헤모수의 아들 주몽이 알에서 태어나서 고구려를 세웠던 때입니다. 우리가 박혁거세나 주몽의 이야기를 설화나 신화로 믿는 것처럼 동정녀에게서 난 예수님의 이야기도 그렇게 취급될 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박혁거세나 주몽은 안 믿어도 예수님의 이야기는 믿습니다. 그게 신비입니다.

어떻게 그게 믿어지지요? 그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 그대로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기를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찔리죠?

그러한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과 여러 기적들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헛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15:12-15)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성경대로 믿지 않는 것은 다 헛것입니다. 유다서는 그렇게 헛것, 엉터리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가만히 들어온 자”라고 표현합니다.

(유1:3-4)

3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 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강대상이나 성경공부 자리에서 가르쳐 지는 것을 무조건 옳다고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성경을 토대로 말씀을 옳게 분변하셔야 합니다.

(딤후2:15)

15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우리는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모든 진리를 확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사람의 궤술에 속지 않고 간사한 유혹에 빠져 낭패를 당하지 않을 수 있으며 엉터리 교훈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가만히 들어온 자들에게 배운 엉터리 같은 교리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만을 말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다”라고 번역이 된 “알레뜌오”“어떤 것을 꽉 붙들어 전혀 흔들리지 않게 되어 그 붙들고 있는 것을 자신 있게 고백하고 가르치고 행하는 것“까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정말 진리로 믿고 있는 바는 반드시 행함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는 부탁과 아울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6:17-18)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는 우리가 배운 바 그 진리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린아이에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딤후1:13-14)

13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이렇게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고 분변한 바를 열심히 행동으로 옮기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하라고 합니다. 내가 참된 진리를 붙들고 말하고 행하는 데 있어서 “사랑“이 빠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나의 존재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진리를 고백하고 가르치고 행하는 데 있어서 친절함과 따뜻함과 포용력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말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단호하게 회초리도 들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그가 바른 길을 가게 만드시기 위해 반드시 징계를 한다는 대목이 나오죠? 우리도 때로는 상대방이 오해를 한다할지라도 바른 진리를 가르치고 수호하기 위해 회초리를 들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참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자기가 세운 교회 교인들과 원수가 된 적도 있습니다.

(갈4:16-19)

16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18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이렇게 그가 세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로부터 원수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자기를 원수 취급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합니다. 이게 바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는다.“는 말의 진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음으로 자라가게 된다.” 가 15절입니다.

이렇게까지 한 절 한 절, 한 단어 한 단어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는데 나중에 딴소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전부 우리 하나님의 손아래에서 진행되어져 갑니다.

15절 후반부와 16절을 연결해서 한번 볼까요?

(엡4:15-16)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음”으로 자랍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자라야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16절에 보시면 바로 그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도움을 입어 연락하고 상합하여 자란답니다. 생명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에너지와 양분과 힘이 어떻게 공급이 되는가 하면 “마디를 통하여”공급이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마디“”헵헤“는 말은 ”끈, 힘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연락하고 상합하여“라는 말은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져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그림을 그려보세요. 우리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힘과 에너지와 모든 것을 공급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어떤 끈을 통하여 공급을 받습니다. 이제 그 생명의 젖줄이 다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그리스도와 생명을 공급받는 끈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에 의해 서로 연결이 되고 결합이 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과 동시에 서로 간에도 결합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각 지체가 자기의 분량대로 자기의 자리에서 열심히 그 에너지와 생명력을 발휘해야 전체가 조화 있게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서로 헐뜯고 시기하고 그러지 마시고 제발 좀 서로 도와주세요, 그게 얼마나 중요하면 지금 그 이야기가 또 나옵니까?

잘 보시면 그렇게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생명력과 에너지와 힘을 공급하시는데 16절 말미는 우리가 ”스스로“선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이중적인 성장의 논리를 갖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런데 또 우리가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스스로 자라야 합니다. 이 말은 자칫 모순되는 표현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끝을 통해 자라게 하셔서 천국으로 데리고 갈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그의 삶 속에서 그 자라남의 몸부림이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세우느니라.’ 하나님이 다 해 주시는 것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17절부터 24절까지에서 우리 신자들이 일상에서 매일 매일 행해야 하는 구체적인 행함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먼저 옛 사람의 행위들을 나열하고 “그렇게 살지 말라“로 결론을 짓습니다. 17절을 먼저 보시면 우리가 행해서는 안 될 것들, 옛 사람이 하는 일들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엡4:17)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여기서 “행함”이라고 번역이 된 ”페리파테오“”전체 적인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체적인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삶의 방식은, 허망한 것을 좇는 삶이라는 것이고 우리는 목표지점을 분명하게 잡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허망한 것“ “마타이오테스“”텅 빈 것, 초점이 없는 것, 목적이 없는 것, 방향감각이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삶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뭔가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텅 빈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군대에서 천리 행군을 갈 때 고참들은 수통에 물을 가득 담고, 주머니에 소금과 아주 간편한 군장을 쌉니다. 그리고 무좀약과 빨래 비누를 얇게 갈아서 비닐에 싸 가지고 갑니다. 혹시 군화에 뒤꿈치가 벗겨지게 되면 그 비누 간 것을 군화 뒤꿈치에 조금 넣어 두면 한결 편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400km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짐과 탈진에 대비해서 물과 소금만 준비합니다. 어차피 먹을 것은 부대에서 다 공급이 되니까, 절대 짐이 될 만한 것은 안 가져갑니다. 그런데 이제 갓 입대한 이등병들은 무슨 소풍 가는 줄 알고 군장 안에 초코파이, 사탕, 컵 라면 가득 담습니다. 어떤 놈은 칠성 사이다까지 사서 바리바리 싸 가지고 갑니다. 천리를 마냥 걷다보면 그런 거 먹을 새도 없고 10리만 가도 벌써 어깨가 축 처집니다. 결국 50리 지점에서 다 쏟아 버립니다. 정확히 뭘 해야 하고 뭘 가지고 가야 하는지를 모르니까 우왕좌왕 좌충우돌 하다가 다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초점도 없고 목적도 없이 막무가내로 삶을 살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상관없이 인간이 행하는 모든 열심, 그게 “허망한 것으로 행함“”마타이오테스“입니다.

(롬8:20)

20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타락한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했다“그러죠? 여기서의 허무한데가 바로 ”마타이오테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게 된 우리 인간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 선행체계, 지식체계를 아우르는 모든 것들이 다 헛된 시도들이라는 것이죠. “너희들은 그렇게 살지 말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외치는 내용입니다. 솔로몬이 모든 부귀영화를 경험하고 난 뒤에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구구절절이 토해낸 그 전도서의 고백을 사도 바울이 지금 다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옛 사람의 특징을 19절에서 방탕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엡4:19)

19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Having lost all sensitivity, they have given themselves over to sensuality so as to indulge in every kind of impurity, with a continual lust for more.

“방탕“이라는 단어를 원어로 보면 ”아셀게이아“입니다. 이 ”아셀게이아“라는 단어는 ”허비하다, 필요 없이 소모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없이 나오다가 부엌에 수돗물을 켜 놓고 왔다거나 가스 불을 켜 놓고 나왔을 때 그건 이유 없이 소비되는 것이지요. 그럴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옛 사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 이게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의 시간을 정말 의미 있는 곳에 쓰고 계신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예전에 제가 김도향씨가 부른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곡을 참 즐겨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제 야망과 꿈을 좇아 살았던 그 모든 삶을 한마디로 잘 표현해 주는 노래여서 그렇게 즐겨 불렀나 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저의 지난 시절은 정말 허비하는 삶이었습니다. 바보 같은 삶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이루어 냈다고 자부했지만 참 허무하고 허망했습니다. 결과가 허무하고 허망하다면 그 것을 이루는 데 쓰인 시간은 허비된 것입니다. 그래서 “허무한 데 와 방탕“이 함께 등장하는 것입니다.

벤허의 주인공 찰톤 헤스톤을 기억하십니까? 정말 탄탄하고 건강한 청년이었던 헐리웃 최고의 스타 찰톤 헤스톤이 몇 년 전에 마지막 인터뷰를 했습니다. 벌써 알츠하이머 병, 치매에 걸려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찰톤 헤스톤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지요. “40이 넘으면서부터 나는 초조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황금 같은 나의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후로 이렇게 40년이 지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언제 다시 정신을 놓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 정신이 돌아왔을 때 여러분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나온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마음이 허한지 모르겠네요.” 그 모습을 TV로 보는데 그 주다 벤허가 얼마나 초라한 노인으로 변했는지 모릅니다. 예전에 이집트의 바로 투탄가멘 왕의 미라를 직접 본적이 있습니다. 그의 생존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잘 생긴 청년이었습니다. 얼마나 시체를 잘 간수했는지 1,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시체가 거의 썩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화려한 황금 왕관 아래의 투탄카멘 왕은 그냥 마른 쥐포와 별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으니까 아마 지옥에 갔겠지요. 그렇다면 그 화려한 왕관과 그 황금 의자가 지금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는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졌었지만 그는 인생을 “아셀 게이아”“방탕”하게 살다 간 사람입니다.

제가 최근에 독일 영화 “falling"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히틀러의 이야기를 영화화 한 것입니다. 거의 이길 뻔한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이후에 점점 소련군이 그가 머물고 있는 베를린으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을 때 그 히틀러의 심경을 참 잘 그려 놓은 영화입니다. 결국 그가 숨어있는 벙커의 800m 전방까지 소련군이 밀고 들어오자 그의 아내 에바 브라운과 가로 세로 4M의 벙커에서 자살을 합니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이 그 둘의 시체를 급히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웅덩이에서 태워 버립니다. 나치 총통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습니다. ”아셀 게이아“”방탕“한 삶입니다. 그들은 뭔가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전 생명을 허비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

그리고 세 번째로 옛 사람의 특징이 18절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엡4:18)

18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우리의 타락한 옛 사람은 총명이 어두워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미련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은 “미련합니다.”

(롬1:18-23)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 할지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 인간들은 자기들이 참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해온 짓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킹콩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킹콩을 달래기 위해 그 마을 원주민들이 어떤 의식을 행합니까? 처녀를 제물로 바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늘상 있어 온 실제입니다. 우리가 인류 역사를 되 짚어보면 실제로 귀신들을 달래기 위해 산 사람을 바친 종교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몰렉에게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바쳤지요? 자기 아이를 죽여서 바쳤습니다. 자기 배를 위해 산 사람을 죽여서 바칩니다. 얼마나 미련합니까? 그런데 그게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랍니다.

왜 사람들이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면 돼지머리를 갖다놓고 절을 합니까? 그 돼지머리가 정말 인간들의 일을 도와 줄 수 있나요? 첨단의 항공 산업을 하는 사람들도 여객기가 하나 들어오면 바로 그 자리에서 기장들과 임원들을 모아 놓고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그 돼지는 꼭 웃고 있지요? 예전에 저희 시골에서 참 돼지머리 많이 봤습니다. 마을에 무당이 몇 명 있었거든요. 근데 그 돼지들은 전부 웃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정육점 아저씨한테 왜 돼지머리는 전부 웃고 있냐고 물었더니 돼지를 죽일 때 간지럼을 태워서 죽인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전 진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돼지머리 파는 사람이 그 죽은 돼지 입을 웃는 입으로 만들기 위해서 막 잡아당기더라고요. 왜 그런지 아세요? 이왕이면 웃는 돼지가 복을 더 줄 것 같으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얼마나 미련합니까? 왜 가게 안에 꼭 북어 말린 것을 걸어 놓습니까? 왜 집집마다 복조리를 걸어 놓습니까? 그게 똑똑하고 지혜 있다는 인간들이 하고 있는 짓입니다. 참 미련하지요? 혹시‘ 어, 나도 집에 북어 걸어놨는데‘하시는 분들 오늘 집에 가서 다 갖다 버리세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를 미련하다고 손가락 질 합니다.

‘야, 그렇게 힘들여서 돈 벌어다가 교회다 갖다 바치니? 이 미련한 놈아.’ 그런 소리 들어 보셨죠? ‘일주일 내내 그렇게 힘들게 일 하고서 하루 쉬는 일요일에 교회에 하루 종일 가서 앉아 있으면 넌 언제 쉬니? 이 미련한 놈아.’ ‘야, 저쪽에서 너한테 되로 주었으면 너는 말로 갚아 줘야지, 왜 멍하니 히죽히죽 웃고 있어, 이 미련한 놈아’

그 똑똑한 세상은 우리를 보고 혀를 찹니다. 미련하다고. 그러나 두고 보자고요. 누가 정말 미련한 사람들인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2:14)

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세상은 우리를 가리켜 끊임없이 미련하다고 놀릴 겁니다.

(고전1:18-21)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십자가의 도가 뭡니까? 나를 죽여서 원수를 살리는 도입니다. 당연히 세상은 그 십자가를 미련하다 합니다. 보세요. 세상에 지혜가 없습니다.

(고전2:8)

8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진짜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였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그 예수와 예수의 삶은 미련한 것이었으니까 미련한 것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 예수와 예수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을 지혜 있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예수와 예수를 따라 사는 십자가의 도를 섬기고 , 져 주고, 순종하는 그 삶을 미련하다고 놀려댑니다.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외침입니다.

네 번째 옛 사람의 특징이 18절 후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엡4:18)

18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라고 옛 사람의 특징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애를 씁니다.

지금 서구에서는 진화론이 한 풀 꺾여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과학자들 중에 창조론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아주 드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창조론도 하나의 가설이고 진화론도 하나의 가설입니다. 그러면 교과서에 인류의 기원에는 창조설과 진화설 두 가지의 가설이 있다고 가르쳐야 하는데 전부 진화론 일색입니다. 아예 진화론만이 유일한 논리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이 된 자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에 관한 것에는 극도의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교회 안에도 이런 굳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13:3-9,19-23)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 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20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교회 안에도 세상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열심히 듣습니다. 성경공부도 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무슨 말을 하고 있고 어떤 삶을 요구하는지를 모릅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그냥 예배당 출입만 하는 것입니다.

그냥 연애나 하고 밥이나 먹고 장사에 도움이나 얻으려고 예배당 출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길가 밭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동안은 신앙생활을 참 잘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삶에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금방 교회를 떠납니다. 그 사람들을 돌 짝 밭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이익과 재물의 유혹이 오면 언제든지 교회를 안 나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빼먹고 골프를 몇 번 쳤는데 교회 가서 따분하게 목사 설교 듣는 것보다 백 배 좋아요, 그러면 교회 안갑니다. 어느 날 교회 안 가고 장사를 했는데 훨씬 이익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그거 생각나서 교회 못 앉아 있습니다.

전부 진짜 같은데 마음이 굳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혀 그 삶에 열매가 없습니다.

여전히 부부싸움 하고, 여전히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일가친척 다 필요 없고, 말씀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고 이런 사람들은 100% 가짜입니다. 진짜는 어떻습니까? 말씀을 듣고 깨달아 결실을 맺는 사람입니다.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진짜들의 삶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옥토가 되었습니까?

(겔11:19-20)

19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20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36:24-27)

24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하나님께서 그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시편에서 어떻게 노래합니까?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create me a clean heart" "하나님 정결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시오.”그럽니다. 우리의 마음을 조금 고친다고 부드러운 마음, 정결한 마음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해 주셔야 합니다. 그 사람이 말씀을 깨닫게 되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열매가 안 맺힙니까? 정결한 마음, 옥토는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다면서요? 그 사람은 가짜 아니면, 여전히 게으른 영적 어린아이입니다. 여러분, 옥토에서는 씨도 안 뿌렸는데 무조건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나요? 아무리 부드러운 옥토라도 씨가 뿌려져야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죠?

여기서 씨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옥토에 뿌려져야 부드러운 옥토가 그 씨를 받아먹고 그 다음부터는 씨가 옥토를 먹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소홀히 대하는데 어떻게 열매가 맺힙니까? 씨도 없는 곳에서 열매를 찾는다면 그건 미친 사람입니다. 옥토가 되셨습니까? 그럼 이제 씨를 심으셔야 지요.

그렇게 마음이 무딘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해서 살게 됩니다.

디모데 서에서는 그 마음이 굳어진 자들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볼까요?

(딤전4:1-2)

1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말세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화인을 맞았다는 것은 인두로 지진 화상 자국을 말합니다. 그 자리는 감각이 없습니다. 마음이 무딘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은 믿음에서 떠나서,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굳어있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지 보지요.

(딤후3:1-5)

1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렇게 마음이 굳은자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무정한 자들이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자들입니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자기 사랑”에서 나온 종교입니다.

아니, 교리는 그럴듯하게 교양 있게 잘 꾸며 놓았다 할지라도 결국 그 교주나 그 종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따랐던 것은 전부 “자기 사랑”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그 “자기 사랑”앞에 무너집니다. 우리는? “자기 부인”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이 얼마나 열심히 코란을 외우고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는지 아시죠? 이슬람 국가에서는 택시를 타고 가다가도 기도 시간이 되면 택시 운전기사가 기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면 팔목을 잘라버립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라크를 폭격했을 때 회교국가인 이라크에서 엄청난 약탈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라크 군인들이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입원치료중인 이라크 국립 병원까지 약탈을 해갔습니다. 아마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부상을 당한 군인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도둑질해 간 놈들은 그 놈들이 처음일 겁니다. 그게 매일 알라의 코란대로 살겠다고 하는 자들이 저지른 일입니다. 폭격으로 치안이 부재상태가 되니까 전부 도둑놈으로 변해서 알라고 뭐고, 기도시간이고 뭐고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라마교 중들과 신도들은 라마교 경전을 읽어야 하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마니테”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라마교 경전이 적혀있는 원통을 사원 앞에 죽 달아놓고 그걸 한 바퀴 돌리면 한번 읽은 것으로 간주해 줍니다. 경전 읽는 것은 그렇게 해결하고 그들은 전부 어떻게 하면 국가로부터 이 라마교 승려로서의 권익을 다 보장받을 수 있을까 그것만 걱정합니다.

힌두교 사원에 가도 가관입니다. 힌두교 사원 앞에서 늘 제물 장수들이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힌두교 신자들은 고기, 떡, 꽃 같은 제물이나 돈을 가지고 사원 안으로 들어가서 그걸 사제들에게 바치고 사제가 찍어주는 빨간 물감을 이마에 받아 가지고 나옵니다. 그게 그들의 하루치 거룩 인증입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전부 자기들의 복을 위해서만 매진합니다.

불교는 어떻습니까? 불교의 가장 핵심 교리는 “몰아(沒我)“와 ”무아(無我)“의 교리입니다. 그래서 고승들이 죽으면 ”다비식“이라 해서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몰아(沒我)”를 외치며 제자들에게 화장을 명하고 죽은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그 “몰아“의 외침을 무색하게 젓가락을 들고 스승의 시체를 휘저었습니다. 사리를 찾은 것입니다. 그 뒤 ”몰아“의 지경에서 열반했다고 하는 고승들의 시체는 여지없이 부젓가락에 의해 헤침을 당했고 ”몰아“가 아닌 ”유아“를 상징하는 ”사리“들이 예쁜 보석이 박혀있는 사리함에 총총히 쌓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자기 사랑과 자기 자랑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가 그렇게 사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압니다.

나의 쾌락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예배를 빼먹습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소비해도 아깝지 않은데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배우는 데 쓰는 시간은 너무 아깝지요?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끊겨 비참하게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밀려 4,000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엘리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여리고가 무너질 때, 그리고 요단을 건널 때 그들을 앞장섰던 하나님이 법궤였습니다. 그들은 그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법궤를 앞세우고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30,000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패배소식을 들은 엘 리가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엘리의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도 그 전쟁에서 죽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그 소식을 듣고 죽습니다.

왜 그런 결과가 온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부적처럼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그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의 부적이상 취급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들이 대패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블레셋에게 법궤까지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로 말미암아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서 그들의 신상 다곤 신상의 목이 부러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시 아스돗에 큰 재앙이 닥칩니다. 블레셋은 얼른 그 법궤를 가두로 옳깁니다. 거기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재앙이 임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진짜 이 법궤 때문에 그런 것인가? 하여 시험을 해 봅니다. 아직 멍에를 한 번도 매어보지 않은 방금 새끼를 낳은 암소를 두 마리 차출합니다. 그렇게 새끼에게 젖을 물려야 하는 암소는 절대 새끼를 떨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멍에를 매어 보지 않은 암소는 절대 멍에를 매고 먼 길을 가지 않습니다. 그 암소에 멍에를 매게 하고 법궤를 실은 수레를 연결합니다. 그 수레는 잘 끌리지 않는 새 수레입니다. 그런데도 그 소가 이스라엘로 두말없이 가면 그 법궤 때문에 블레셋에 재앙이 온 것이고 안 가면 그냥 우연으로 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를 실은 소는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곧장 가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법궤를 찾고 아주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 법궤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들여다보고 무려 오만 70명이 죽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셨을까요? 호기심이라는 것이 뭡니까? 왜 관음증이라는 것이 커다란 이슈가 됩니까? 몰래카메라,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것, 그 호기심은 바로 우리 욕망과 내적 욕구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욕구 충족의 수단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역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법궤를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깁니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 엘리아살에게 그 법궤를 관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7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다윗이 왕이 되고 모두 잊고 있었던 그 법궤를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다윗이 그 법궤를 가지로 30,000명의 군사와 함께 기럇여아림으로 갑니다.

(삼하6:1-7)

1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2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3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5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6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웃사가 왜 죽었을까요? 소가 뛰어서 그 법궤를 잡은 것뿐인데 왜 하나님은 손수 그를 치셨을까요?

민수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의 법궤는 항상 레위 인들이 어깨에 메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위의 2절에도 다윗이 그 법궤를 메어오려고 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 법궤를 관리하던 웃사와 아효가 그 법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다 싣고 나옵니다. 그 법궤는 레위 인들의 어깨에 메어 운반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궤를 관리하던 그 웃사와 아효가 마치 자기들의 법궤의 주인인 것처럼, 이 법궤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내가 전문가라고 나선 것입니다. 이렇게 옮겨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소가 뛰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웃사가 그 법궤를 잡았습니다. 당시 수레의 높이가 60cm정도 되었고 법궤의 높이가 68cm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평범한 남자의 가슴 정도 높이에 법궤의 윗부분이 놓여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거기서 붙들었다는 말(아하즈)는 소유 개념으로의 단어입니다. 웃사는 “이건 내 것이다“라고 거들먹거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자기가 거들먹거린 것입니다. 성경 가르치는 분들 조심하세요. 하나님은 그 웃사를 죽여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그렇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지 않나요?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마음이 굳어진 자, 마음에 화인 맞은 자“”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시면 그런 자들은 “모든 것을 자기 욕심대로 행하되“라고 기술합니다.

(엡4:19)

19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옛 사람들은 모든 더러운 것을 자기 욕심을 따라 행한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행하는 종교행위들이 여러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욕심에서 나온 것이며 그건 모두 더러운 것입니다. 잘 분별하세요. 20절 보시면

(엡4:20)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럼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를 배웠습니까? 우리는 나의 유익과 나의 배를 위해 존재하는 예수가 아닌 십자가의 도를 좇아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하게 섬기는 예수를 배웠습니다.

제가 여태 일 년 반 동안 여러분에게 가르친 예수는 바로 그 예수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안 바뀝니까? 어떻게 여전히 자기에게 유익이 안 되고 자기가 드러나지 않으면 투정부리고 삐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럽니까? 여러분, 우리는 허망하고 방탕하고 총명이 어두워진 자들처럼 미련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혹시 마음에 화인 맞은 사람처럼 죄를 짓고도 아무 두려움 없이 그렇게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을 이용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열심히 여러분의 옥토에 말씀의 씨를 심으십시오. 그러면 그 씨앗이 우리의 옛 몸뚱이를 조금씩, 조금씩 먹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풍성한 열매를 맺어 낼 것입니다. 이 밤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 h;���y �;y 하고 싸워서 지면, 다시 갈아치우고 다른 사람들 훈련시켜서 또 싸우고 이런 게 태권도장 아니지 않습니까? 태권도장은 도장에 오는 관원들의 정신 수양과 인격 연마를 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거룩의 문제를 제쳐두고 어떤 일들에 열심을 갖게 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일을 동원하시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를 동원해서 우리의 힘을 빌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봉사하시고 열심히 섬기시고 열심히 자라 가십시오. 우리는 교회에서 그걸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빠지는 만큼 손해입니다.

어떤 사람이 테니스를 배운다고 해 보세요.

매일 가서 연습하는 사람과 일주일에 한번 가서 연습하는 사람과 한 달에 한번 가서 연습하는 사람과 세 달에 한번 가서 연습하는 사람과 누구의 실력이 월등히 나아지겠습니까? 매일 가는 사람이지요. 예전에 제가 중학교 때 과외를 했는데 어떻게 하다가 하루를 빼먹었어요. 그런데 그 과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너 만일 어제 배운 것이 대학 입시에 났는데 네가 어제 빠짐으로 해서 그 문제를 틀렸다고 생각해 봐라. 그런데 네가 안타깝게도 1점 차이로 서울대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봐. 너는 어제의 그 불성실 때문에 평생을 망칠 수 있는 거야“ 그 후로 그 과외에 한 번도 안 빠졌습니다.

그래서 대학 때도 신림동에서 반포까지 매주 수요일에 택시를 타고 성경공부에 갔습니다. 혹시 내가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시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서요.

열심히 교회들과 모여서 여러분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가십시오.

아껴주고 품어주고 사랑해 주십시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랑은 감정이기 이전에 의지이며 선택이라고 했지요? 사랑도 훈령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나의 존재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 상대방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을 더 많이 마련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아하지 않아도 사랑이 가능한 것입니다.

쥐가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왜냐고요? 맛있으니까? 그러나 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경호는 개를 좋아합니다. 맛있으니까. 자기에게 유익이 되니까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개를 키우려면 많은 손이 가기 때문입니다.

지영이는 개를 사랑합니다. 내가 그 개를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도 내야하고 똥오줌도 치워야 하고 오히려 객관적으로 볼 때는 나에게 손해입니다. 그렇지만 호야의 유익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수두룩할 것입니다. 나의 아내, 나의 남편, 내 자식, 내 형제, 내 자매 그렇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바로 그 사랑을 연습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쿠폰이 생겨서 월요일에 아이들과 함께 유니버설 스튜디오라는 곳엘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쇼의 90%이상이 전부 마귀, 귀신, 머미, 드라큘라 같은 흡혈귀 이런 것을 소재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준다는 것이 귀신 복장을 하고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놀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너무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구니까 나중에는 짜증이 나더라고요. 그러지 않아도 무서워 죽겠는데 자꾸 시커먼 놈들이 놀라게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아마 지옥인 것 같았습니다. 피 비린 내가 진동하는 어떤 곳에 수많은 벌거벗겨진 채 앉아 있었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제가 낮에 본 그 모든 귀신들이 전부 살아서 실물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퍼런 도끼를 들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 한 사람 씩 불러서 커다란 원판에 묶어 놓고 그 원판을 돌리면서 도끼로 그 사람들 퍽 퍽 찍었습니다. 팔 다리가 쩍쩍 찢어지고 피가 튀는데 묶여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억울하다는 듯, 이를 가는 겁니다.

조금 있으면 제 차례가 오는 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 공포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왜 내가 여기 와 있는 거지? 하나님 저 좀 구해 주세요. 제발 여기서만 벗어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순간 알람이 울려서 잠이 깼습니다. 그게 꿈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모든 게 새로워 보였습니다. 집사람이 옆에서 자고 있는데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 방에 가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모두 천사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그토록 무시무시한 사망에서 나를 건져 주신 것이구나, 참 실감이 가는 새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경고를 오히려 재미삼아, 놀이 감 삼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섬뜩하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나중에 우리는 그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심판에 던져지게 될 텐데 사람들은 태연하게 그 것들을 놀이 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기서 건져진 것입니다. 거기서 건져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서 건져주신 그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열심히 훈련하는 것, 그거 외에 우리가 무엇에 욕심을 두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보내는 이 일초 일초가 모여 일분이 되고 이 일분이 모여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모여 우리의 일생,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내는 이 일초, 일 분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을 어떤 것과 계속 바꾸시면서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생명을 무엇과 바꾸시면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할 교회와 여러분의 성숙에 더욱더 매진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더욱 더 진지해 지십시오.

(엡4:7,11,12)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