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57) 땅 아래 곳으로 내려오시다 (엡4:7-12)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20

(57) 땅 아래 곳으로 내려오시다

(엡4:7-12)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6절까지를 공부했습니다.

간단하게 읽고 복습을 해 볼까요?

(엡4:1-6)

1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통일시켜 놓으신 그 하나 됨을 너희들은 힘써 지키라고 사도는 권면을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하나 됨을 지킨다.”는 구절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아요. “이미 성령께서 하나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우리가 하나 됨을 또 지켜야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잘 이해가 안 되시는 분들은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갑돌이와 갑순이가 결혼을 해서 철수, 영희, 순희 이렇게 세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누가 뭐래도 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돌이하고 갑순이가 사이가 안 좋아졌습니다. 싸움이 길어지고, 잦아지면서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전부 뿔뿔이 다른 곳으로 보내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갑돌이의 아버지라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무리 너희들이 그렇게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헤어져 있어도 너희는 한 가족이야, 그러니까 계속 헤어져 있어라” 그러시겠습니까? 아니죠?

“너희들이 한 가족이라는 것을 내 눈에 보여다오. ”“너희가 함께 모여 행복하게 서로를 사랑해 주는 한 가족의 삶을 내게 보여 다오.” 그게 아비의 마음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하나입니다. 그 것은 누구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인 자식들이 자기들이 하나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서로 물어뜯고 싸우고 시기하고 다투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 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너희들은 가시적으로 이 땅에서 보여줘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어라“가 아니고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 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원래 원문에는 접속사 “데”가 있습니다. “데”는 “but""그러나”입니다.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에게 각기 다른 선물을 주셨다“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하나 됨“이라는 것은 조직적이며 획일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 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하나 됨“은 (uniformity)가 아니라 (unity)인 것입니다. ”일률”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7절부터 교회의 연합에서 교회의 다양성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나오는 단어가 “우리 각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여섯 절에 걸쳐서 “하나”에 대해서 강조하다가 이제 “우리 각 사람”이라는 완전히 다른 표현을 등장시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이면서 또 “각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완전한 독립체이면서 그 전체가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교회라는 것이죠.

그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모두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구원이나 제가 받은 구원이나 모두 똑같은 구원입니다. 모든 회심도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입니다.

어떤 대 가족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cheaper by dozen"이라는 영화를 보면 12명의 아들딸이 나옵니다. 그 열두 명은 키도 나이도 생김새도 성별도 재주도 특기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 12명의 아이들의 한 부모의 똑 같은 자식이라는 면에서는 그들이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자식들 사이에는 부동성과 차이성과 다양성과 변화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다양성들을 통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7절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다양한 선물들이 교회 각자에게 주어져 있는데 그 선물들, 은사들은 모두 한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양성 속에서의 통일이 더 빛나는 것입니다.

(고전12:4-5)

4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여러 가지 은사나 직임 모두 한 주, 한 성령으로부터 어떤 목적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은사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사로 표현하고 있지만 다른 많은 곳에서는 “성령의 은사”라고도 표현하지요? 그것은 전부 같은 말입니다.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7절은 교회는 그 통일을 어떻게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느냐 하면 그 다양성인 각자의 은사에 의해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복선으로 깔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그 7절이 11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7절과 11절을 붙여서 한번 읽어보지요.

(엡4:7,11)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정확하게 이어지죠? 그러면 8절과 9절과 10절은 무엇인가? 원어 성경에 보면 그 부분이 괄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NIV 나 KJS version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8절에서 10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모든 은사를 나누어주시는 분이 되는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특별한 지위에 있게 되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8절을 보세요.

(엡4:8)

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르기를”로 시작하고 있지요? 이 말은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기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시편68편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누어주신 은혜, 은사에 관한 것은 하나님의 즉흥적인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계획하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천 년 전에 시편 기자에게도 계시해 놓으신 거라는 것을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까? 그들은 인류의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눕니다. 단순히 역사를 세대로 나눈 것이 잘 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루이스 벌콥 같은 대 신학자도 세대를 구분했고 이레니우스나 클레멘트, 어거스틴 같은 분들도 세대의 존재를 인정하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세대마다 하나님의 경륜이, 구원의 방법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시대에는 율법으로 구원하셨고 교회 시대에는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식의 주장이 문제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는 원래 하나님께서 계획하지 않으셨던 무리인데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기 때문에 덤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무리로 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왕국이 다시 유대인들에게 전파될 때까지의 임시방편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8절 9절 10절만 보더라도 그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것이 입증이 됩니다.

시편 68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안겨주신 큰 승리를 찬양하는 시입니다. 다윗은 그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라고 찬양을 하면서 과거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넌 사건과 바로와 그의 군대가 멸망한 것과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넣으신 사건을 모두 하나님의 승리라고 찬양을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곤경에 처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시편 68편을 그대로 인용해서 그 것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다윗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단들, 아리우스파나 유니테리안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우리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아울러서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을 보면서 구약의 그 모든 사건들이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예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시편 68편 기자인 다윗은 어떤 지역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면서 당시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경 기자들을 감동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구원의 사건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기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지역적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것과 그가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한 표상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바울이 인용한 시편 68편의 내용과 오늘 에베소서 4장8절 이하의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시68:18)

18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하심이로다

(엡4:8)

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for men) 선물을 받으셨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에베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선물을 ”주셨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받으셨고 한 쪽에서는 주셨습니다. 이러한 인용은 바울이 잠깐 헛갈려서 그렇게 기록한 것도 아니고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선물을 주시는 것과 받으시는 것은 따로 떨어져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동작입니다.

(행2:33)

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시편 68편 18절이나 에베소서 4장 8절이나 전부 동일한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두 경우에서 동일하게 전달해 주는 메시지는 “교회에 오는 모든 선물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며 그를 통하여 온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68에서는 “아들”에게 선물들을 주시는 분은 “아버지”시라는 것이 강조가 되어 있는 것이고 에베소서 4장에서는 “교회”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은 “아들”이시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8절을 다시 정리를 해 드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을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그 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선물들을 받으셔서 교회에게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마귀의 세력은 사로잡혀 질질 끌려오게 된 것이고요. 이것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점진적이며 반복적인 계시의 방법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8절을 읽어보지요.

(엡4:8)

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정확히 이해가 가셨습니까? 9절로 넘어갑니다.

(엡4:9)

9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한글 개역 성경에는 빠져있지만 9절은 “토 데” “그런데”로 시작이 됩니다. 바울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이 올라가셨다”라고 시편68편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올라가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려오셨었다는 말이 아니냐?“라고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면서 다윗이 말한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이셨음을 넌지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 아래 곳“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땅 아래 곳은 ”지옥“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쓰인 ”게스“가 ”게“”땅“의 소유격이기 때문에 ”땅의 아래 곳“은 땅 보다 더 아래인 지옥을 말하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봅니다.

이 구절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기초로 해서 오늘 날 많은 교회에서 암송하고 있는 “사도 신경”에 “he descended into hell""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한글 사도신경에는 빠졌지요.

이 부분과 함께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구절이 베드로전서 3장이지요?

(벧전3:18-20)

18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 구절은 전에 한번 설명해 드렸으니까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은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20절을 보시면 옥에 있는 영들이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않던 자들“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다고 가정을 해 보자고요. 그런데 그 지옥에는 노아의 때에 방주에 안 들어간 사람들만 들어가 있나요? 아니면 그 사람들만 따로 모아놓은 지옥이 있습니까? 거기서도 방별로 따로 모여요? 바로 다음 장인 베드로전서 4장을 볼까요?

(벧전4:5-7,17)

5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17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최후의 심판입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오직 두 차례의 큰 심판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노아의 홍수이고 두 번째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있게 될 심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 첫 번째 대 심판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두 번째 대 심판 전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노아의 때에도 성령으로, 노아의 입을 통해 “회개”를 외치셨고

지금도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입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노아의 때에 그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옥에 갇힌 수많은 자들이 그 복음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고 전부 물에 빠져 죽어 버린 것을 교훈 삼아 두 번째 대 심판 전에 살고 있는 너희들도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라고 권고하는 것이 베드로전서 3장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적은데 너희는 지금 그 안에 들어와 있지 않느냐는 지적입니다. 교회야, 지금 너희들이 아무리 고난과 환난을 통과하고 있다 하더라도 너희는 방주에 들어 있는 자들이니 힘을 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은 문자 적으로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걸려서 “아직 덜 이루었다”가 된 것입니까? 그리고 계속해서 일을 이루고 계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내려가실 일도 없으시고 내려가신 일도 없으십니다.

여기 “땅의 아래 곳”에 쓰인 소유격은 “동격 적 소유격, 정의적 소유격”입니다. “땅 곧 아래 곳”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 번역이지요. 존 캘빈이나 찰스 핫지, 헨드릭슨,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분들이 정확하게 보신 겁니다. 그러니까 “땅 아래 곳“은 9절의 ”모든 하늘 위“와 대조해서 사도 바울이 사용한 문학적 기교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늘 위라는 것이 하늘을 강조하는 것인 것처럼 땅 아래 곳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당하신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이었는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우리를 ”대표해서“ 이 땅에서 죽기 위해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는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보면 모두 죽을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군가가 대신 그 죄를 짊어진다면 그의 백성들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백성들의 죄를 다 한꺼번에 짊어지고 “대신 할 수 있는” “순결한”인간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이신 하나님께서 그 죄를 “대신” 짊어지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인간을 대표해서 죽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은 또 인간이셔야 했습니다. 옛날 고려시대에 “보인”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제도는 어떤 장정이 전쟁에 징집이 되었을 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에게 곡식을 많이 지불하고 대신해서 내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 것을 보인 제도라고 합니다. “나를 대신 하는 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 대신 우리 강아지를”보내면 어떻게 됩니까? 안 되죠?마찬가지로 우리를 대표할 분은 똑같은 인간이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의 철학적 사유의 한계 위에 있는 개념이기에 이해하는 것이 힘들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그 것을 받아들입니다.

(요1:14)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께서 “육신“”사륵스“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쓰인 ”되어“”에게네토“가 ”부정과거“시제입니다. 과거에 한번 일어났던 일이 미래에까지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이 헬라어의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영원히 육신을 입으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눈에 비친 그 분의 모습은 아주 비천한 목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타락한 이 세상은 힘을 추구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힘이 없고 연약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우리”라는 자들이, 곧 교회만이 그 연약함을 보면서 그 연약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순 같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 인 들, 그리고 율법사들에게 미움을 받으셨고 무고하게 고발을 당하셨고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면 끝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은 사망과 무덤을 정복하시는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선물을 나눠주시기 위해서 이 땅 아래 곳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기나긴 침묵“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최후의 심판을 하실 때의 일을 가상으로 그려놓은 책입니다.

거기에는 이 땅을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하시는 예수님에게 항의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이 우리를 심판할 권리가 있는가?“ ”당신은 우리가 세상에서 겪은 고통을 알고나 있는가?“

하면서 어떤 여인이 팔을 걷고 예수 님 앞에 섰습니다. 그 여인의 팔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서 가스실에서 죽기 전까지 그녀의 팔에 새겨져 있던 죄수 번호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당신이 우리 유태인들의 이 고통을 알기나 하는가?“

그리고 한 흑인 소녀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 소녀는 자기가 흑인이라는 것 때문에 린치를 당해서 입은 화상 자국을 보여주며 당신이 이런 고통을 아는가? 하고 따졌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한 남자가 앞으로 나왔습니다. 당신이 나의 이 억울함을 알기나 해? “우리가 전부 땅에서 그렇게 고통 받고 있을 때, 당신은 하늘나라에서 푹신한 소파에 앉아 휴식이나 취하고 있었으면서 당신이 우리를 심판한다고?” 저마다 예수님께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고발하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들 중에서 고발 자들을 뽑았습니다.

먼저 나찌의 홀로코스트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유태인

그리고 인종차별로 평생을 고통 받던 흑인

그리고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죽은 사람,

지독한 관절염으로 불구가 된 사람 등 여러 명을 뽑아서 예수님이 심판 주로 인정을 받기 전에 예수님을 땅에 보내서 그 고발 자들이 겪었던 가장 지독한 고통을 골고루 겪게 하자고 결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을 어떻게 고통스럽게 만들까를 의논했습니다.

“그를 유태인으로 태어나게 하자” “그리고 그의 출생의 합법성을 의심받게 하자” “그리고 그에게 아주 무거운 짐을 맡겨서 그의 가족들로부터 그가 미쳤다는 말을 듣게 하자” “친한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게 하자” “잘못된 재판과 잘못된 배심원들에게 평결을 받고 억울하게 죽게 만들자” “혼자라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맛보게 하자”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게 하자” 그리고는 그 수많은 군중 앞에서 그 것을 발표했습니다. 마지막 발표자가 “그를 고통스럽게 죽게 하자”까지 발표를 했을 때 그 모든 군중은 일순간에 침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고안하고 고안해서 만든 그 모든 고통을 이미 예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을 거기 모인 사람들이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땅의 아래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구절의 진의입니다. 왜 그러셨다고요?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자원하셔서 지옥을 경험하고 가신 것입니다.

오늘 신 장로님하고 김복진 목사님께서 찾아오셔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신 장로님께서 어제 자녀 분 들하고 함께 본 영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성경 이야기 이외에 다른 이야기는 좀처럼 하시지 않는 분인데 영화 이야기를 하셔서 좀 의아하기는 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man on fire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덴젤 워싱턴이 열연을 한 영화죠.

저도 일전에 우리 승호가 갖다 줘서 봤는데, 정말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굵직굵직한 선의 영화를 만들어온 토니 스콧 감독의 진가가 잘 드러난 영화입니다.

거기에 덴젤 워싱턴이 전직 CIA암살 요원으로 나옵니다. 덴젤 워싱턴은 지난 날 잔인한 암살 요원으로서의 암울한 삶이 괴로워서 알코올 중독자가 됩니다. 그러던 중 친구의 소개로 멕시코시티의 부유한 사업가의 9살 난 딸의 경호원으로 취직을 합니다. 멕시코만 하더라도 부유한 집 아이를 납치해서 돈을 요구하는 범죄가 아주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유한 집 자녀들은 항상 경호원들이 따라다녀야 할 정도로 무섭다고 합니다. 알콜 중독자 덴젤 워싱턴은 9살짜리 소녀 “피타”와 지내면서 비로소 잃었던 웃음을 찾습니다. 오랜만에 피타와 함께 잘 지내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덴젤 워싱턴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닥쳐옵니다. 자기가 보는 앞에서 피타가 납치를 당한 것입니다. 덴젤 워싱턴도 큰 부상을 입습니다. 부상에서 깨어난 덴젤 워싱턴은 피타가 납치되어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덴젤 워싱턴은 그 납치범 일당들을 모두 죽일 결심을 합니다. 한 명 한 명 찾아내서 잔인하게 죽여 가는 과정에서 그 피타가 살아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범인들은 그 아이 피타와 덴젤 워싱턴의 목숨을 맞바꾸자고 제안을 합니다.

덴젤 워싱턴은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범인들에게 찾아가고 다리 위에서 피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눕니다. 여러분, 피타를 대신해서 죽으러 가는 그 덴젤 워싱턴이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끌어 안으면서 마음속으로 어떤 당부를 했을까요?

“내가 네 대신 죽으러 간다. 그러니 건강하고 씩씩하고 착하게 살아다오” 그랬겠지요?

“내가 네 대신 죽으러 간다, 그러니까 앞으로 네 마음대로 개판으로 살아라.” 그러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를 대표해서 죽으시기 위해 이 땅 아래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러 가시면서 다리 위에서 우리를 끌어안고 한 마디를 하셨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 거 같으세요?

“내가 널 위해 죽는 것은 너의 그 죄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죄와 잘 싸워내야 한다. 그 죄가 너를 유혹할 때마다 너는 나의 이 죽음을 기억해라” 그러시지 않았을까요?

그 덴젤 워싱턴은 그렇게 당부하고 죽어버렸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당부하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고요. 이제 내가 살아낸 이 삶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다리 위에서 예수님과 끌어안고 나대신 죽으러 가시는 그 예수님을 정말 안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다시 막 살 수 있을까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 깨닫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함부로 막 살지 못 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 사이에 분열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와 전쟁과 험담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기 위해 이 땅 아래 곳으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통일 시켜놓고 우리에게 그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고 부탁하고 가셨다는 것 잊지 마세요.

내 안에서 불쑥 불쑥 악한 것들이 올라올 때 그 다리 위에서 여러분을 끌어안고 “잘 살아다오” 부탁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