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56)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엡4:1-6)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17

(56)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엡4:1-6)

1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는 지금 에베소서에 기록 된 그리스도인의 실천 강령(agenda)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른 교리에 근거해서 교회의 하나 됨과 교회의 순결함을 힘써 지켜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을 앞으로 세 장에 걸쳐서 더욱 더 자세하게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살게 될 때 자칫 잘 못하면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과 위선에 빠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외식과 위선은 오히려 세상을 더욱 더 어둡고 춥게 만듭니다. 오늘 날 많은 교회에서 도덕 적, 윤리 적 설교가 행해지고 있고 교인들은 바르게 살겠다고 결심들을 하는데 여전히 세상은 이렇게 어둡고 오히려 더 살벌해 지고 추악해 지는 것을 보십시오. 도덕 적 윤리 적 설교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외식 적이며 가식적인 행위와 참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하겠지요? 오늘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고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성경 적인 바른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해 공부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삶이 성경 적이지 못한 삶인지도 아울러 살펴 볼 것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번듯하게 살아낸다 할지라도 그게 하나님 앞에서 전혀 카운트가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울 겁니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 영국의 국교회 성도들이 유럽 전역을 떠돌다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서 신 대륙인 미국 땅에 처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필그림스 파더스“라고 부르지요. 그들이 이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착한 것이 늦가을이었습니다. 겨울을 날 양식과 집이 없었던 그들은 그 한 겨울 동안 반 이상이 굶주림에 그리고 얼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당시 이 미국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그렇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굶어 죽어가고 있는 청교도들에게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감자와 옥수수를 양식으로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땔감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살아남았던 그 청교도들은 “우리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큰 빚을 졌다“ 고 술회를 했습니다. 그 청교도들은 자기들의 집을 짓기 전에 먼저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첫 해에 감자와 옥수수를 추수했을 때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게 오늘날의 추수 감사절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왜 그렇게 훌륭한 청교도 신앙인들의 목사님들이었던 리챠드 벡스터나 존 오웬, 그리고 리차드 십스 목사님 같은 분들이 왜 ‘회심’이나 ‘죄 죽이기’‘돌아오는 배역 자’같은 책을 쓰셔야 했는가?“였습니다. 그런 훌륭한 신앙인들의 목사님들이 왜 “당신들 회개하라, 죄를 죽여라”라고 목소리를 높이셨는가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그분들은 당신들의 책에서 그 당시에도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드물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왜 청교도들을 그렇게 도와 준 천만 명이 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청교도들의 후예인 백인들에게 떼죽음을 당했는가?”입니다.

1616-1619년까지 미 동북부 지역 뉴잉글랜드에서 큰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그 지역의 인디언들이 거의 멸종이 되다시피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에 미 대륙에 상륙한 청교도들이 그 사건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아세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미개한 인디언들을 청소해 주셨다”고 이해를 했습니다.

당시의 청교도 목사였던 윌리암 브랜든 목사의 설교집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설교집 안에 들어 있는 그 목사님의 기도의 내용을 잠깐 인용을 해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살 곳을 그 분의 섭리 가운데 놀라운 방법으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사자인 전염병을 보내주심으로 인디언 번식의 씨가 될 젊은이들과 어린아이들을 중점적으로 효과적으로 죽여 주셨습니다.” 청교도들이 세운 교회 목사님의 기도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그것도 칼비니즘, 개혁 신앙을 좇아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넌 사람들이 이렇게 이기적이며 파괴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이기적인 발상을 하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20세기 중반까지 기독교 선교는 식민주의를 통한 선교가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강대국인 기독교 국가가 약소국가를 침략해서 그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뒤이어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그러한 식민주의 선교를 통해서 많은 나라들에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졌습니다.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이러한 나라들이 전부 식민주의에 의해 기독교화 되었던 나라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나라들이 예수를 잘 믿고 있습니까? 거의 100% 이슬람에게 다 넘어갔습니다. 그것은 이 식민주의에 의한 선교가 절대로 잘 못 된 방법이라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민주의를 통해 선교를 하다보면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입니다. “그 원주민들과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교회의 교황이 도와주었습니다. 당시 세계 교회의 수장이었던 교황이 Doctrine of Discovery 라는 교황청의 교리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새롭게 발견한 땅은 그 발견한 나라에 소유권이 주어진다. 그 소유권에는 그 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생명과 모든 재산까지도 포함 된다” 이것이 Doctrine of Discovery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전하며 용서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가르치는 교회가 이러한 식민주의를 처음 주창하고 지원했다는 것이 믿겨지십니까?

이 괴상한 원리가 언제 처음 발효되었느냐하면 1452년 교황 니콜라스 5세 때입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니콜라스 5세가 포르투갈 왕에게 웨스트 아프리카로 가서 사라센 세력, 즉 이슬람 교도들을 모두 몰아내라고 명령하면서 그들의 모든 소유와 토지를 다 몰수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 사람들을 전부 붙잡아다가 노예로 삼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이것이 Doctrine of Discovery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1492년에 콜롬부스가 미 대륙을 발견하고 돌아갔을 때에도 당시 교황 알렉산더6세가 “인터세트라”라는 칙서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콜롬부스가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의 그 일부분의 모든 원주민과 그 원주민의 재산을 포르투갈에게 준다는 칙서였습니다.

왜 제가 이러한 과거 역사를 들추어내는가 하면 “아메리카 대륙이나 캐나다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 있는 원주민들이 그렇게 정복자들에게 수 천만 명이나 학살을 당하게끔 권한을 준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가 그 학살의 정당성을 인정해 준 것입니다.

처음 미국이라는 나라가 건국이 되었을 때는 미국에 동부의 작은 13개 주밖에 없었습니다.

그 13개 주를 기초로 해서 미국이 영국으로 독립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서쪽으로 서쪽을 땅을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는 멕시코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레곤은 영국이 차지하고 있었고 중부의 넓은 땅은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땅들을 미국이 돈을 주고 샀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청교도의 후예였던 당시 미국의 “디모크라틱 리뷰“라는 유력한 신문의 편집장인 ”죤 설리반“”매니페스틱 데스티니“ ”명백한 운명론“이라는 논설을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인들이 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넓은 미국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백인들에게 부여하신 권리다“라고 지리적인 예정론을 그의 논설에 실었습니다.(geographic predestination) 그러니까 이 미국 땅은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백인들에게 주시려고 예비하신 땅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방해가 되는 인디안 들은 모두 죽여 없애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주민들과의 전쟁을 ”거룩한 전쟁“”Holy War"라고 명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그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1장28절이었습니다.

(창1:28)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온통 자기들만을 위한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서 그 원주민과의 전쟁을 구약의 가나안 정복 전쟁과 동일시했습니다. 자기들은 선민이고 인디언들은 가나안 족속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멸절 시켜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의 후예라고 하는 백인들은 천만 명이 넘는 인디언들을 학살하고도 지금까지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매니페스틱 데스티니”는 흑인들을 노예로 삼고 그들을 거의 짐승 취급을 했던 노예 제도로 이어졌고 “racism""인종차별”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조지휫필드 목사님도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 흑인 노예가 있었다니까 얼마나 그 “메니페스틱 데스티니“가 편만하게 퍼져있었는지 아시겠지요? 당시 백인들이 흑인들을 그렇게 홀대할 때 미국 남부의 침례교회들(southern baptist)교회가 강단에서 그 인종차별을 소리 높여 지원한 것을 아십니까?

왜 청교도들에 의해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이 나라에서 그러한 터무니없는 일들이 일어날까요? 왜 자기들이 쓰는 돈에 까지 “In God we trust"라고 기록하고 있고 저마다 차 뒤꽁무니에다가는 ”God bless America“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처럼 엉뚱한 개인주의와 인종 차별주의에 빠져 있을까요? 그리고 왜 교회들은 그 때마다 입을 닫고 그러한 폭력들을 묵인하거나 암암리에 동조를 했을까요?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이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당시 가장 복음 적이라고 자처했던 독일의 교회가 그 “헤렌라신” “아리안 민족 우월주의”를 지지한 것을 아십니까?

왜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는 교회들이 그러한 터무니없는 엉뚱한 행동들을 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신앙생활을 엉터리로 한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목숨을 걸고 복음을 사수하겠다고 나섰던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역사에 그려진 교회의 열심이 맺은 열매들이 이 모양입니까? 왜 존 오웬이나 리차드벡스터 같은 청교도 목사님들이 그렇게 무섭게 청교도들을 몰아세워 야단을 쳐야 할 만큼 교회가 엉뚱한 결과물들을 만들어 냈을까요?

아니, 이제 멀리서 예를 찾지 말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자고요. 왜 우리는 그토록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종교행위도 열심히 하는데 어떤 결정적인 중요한 선택을 할 때는 늘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됩니까? 왜 우리의 삶은 이렇게 안 바뀌죠? 남이 볼 때는 착한 일도 하고 교회 생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왜 밤에 불을 끄고 누우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런 일을 저지른 것만 생각이 납니까? 때로는 두렵기도 하죠? “내가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 맞기는 맞나?” 이런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세계관이 변하지 않은 채 엉터리 열심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관에 대한 문제는 지난번에도 한번 잠깐 다루었지만 오늘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세계관이 뭡니까?

동물들은 자기의 본능을 따라 삽니다.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싸고 싶으면 쌉니다.

그러나 인간은 늘 선택을 하며 살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어떠한 관점을 바탕으로 선택을 하면서 삽니다. 그러니까 “내 삶 속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하는,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인간과 인생과 사물과 사건과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모든 존재하는 인간은 자기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간에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질문을 갖게 됩니다.

1)우주와 세상의 기원과 구조가 무엇인가?

2)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나는 누구인가?

3)인간과 이 세상이 당면하고 있는 큰 문제가 무엇인가?

4)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모든 인간은 인생을 살면서 마음속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는 관점들을 정립하게 됩니다. 그 것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모두 우리의 세계관에 의해 표출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관은 마치 우리가 쓰는 안경과 같은 것입니다. 녹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녹색으로 보이고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빨갛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세계관이 어떤 세계관이냐에 따라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관은 우리가 나면서부터 하게 되는 수많은 경험들을 통해서 정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뜨거운 난로는 맨 손으로 만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내가 확고하게 붙들게 되기까지는 그 난로를 만져서 혼이 난 많은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수많은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인간은 전부 자기 무의식에 저장을 합니다.

앞으로 자기에게 닥칠 상황들에 바르게 대처하기 위해서 인간은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들을 모조리 저장해 둡니다. 그것을 “이성의 합리화 작용”이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것들이 모두 모여 나의 세계관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세계관은 나에게 꼭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자신의 세계관에 의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과 어떤 집단의 세계관이 오랜 시간 어떤 공동체의 사회나 문화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우리가 “시대정신”이라고 부릅니다. 7,80년대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민중운동”이라든지 지금 대한민국을 끌고 가는 “투쟁”의 정신 같은 것, 뭐든지 “투쟁”으로 풀려고 하지요? 7,80년대를 살아오면서 작은 힘들이 모여 투쟁을 하게 되면 큰 세력이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경험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시대정신이 “투쟁” “쟁의”같은 것들입니다. 그 것들은 아주 작은 시대정신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정말 커다란 시대정신이 있습니다. 전 세계, 심지어 공산 국가들까지도 열광하는 시대정신은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라는 시대정신입니다. 그러한 시대정신을 성경은 “세상 풍속”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너희는 세상 풍속을 좇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세상 권세 잡은 마귀의 세력이 인간들을 미혹해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는 성경적 세계관과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시대정신이라는 것을 잘 기억해 두세요.

그렇게 경험에 의해 단단하게 굳어진 세계관에 의해 가치관이 정해집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 의해 행동양식이 정해집니다. 그러니까 제일 가운데 세계관이 있고 그 다음에 가치관이라는 가치 체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깥에 행동양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계관이 변하지 않으면 가치관이 변하지 않고 가치관이 변하지 않으면 행동양식이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관의 변화가 없이 행동양식만을 바꾸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혼합주의(syncretism)이라고 합니다. 겉만 바뀌는 것이죠. 사람들에게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만 깨끗하게 보이려고 한다던지 종교적인 형태만을 추구하는 것을 혼합주의(syncretism)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직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설교들을 듣고 그렇게 깨끗하게 사는 흉내를 내면서 스스로 자기에게 만족하고 하나님 앞에 떳떳 하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결정적인 선택을 할 때는 성경 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는 이 혼합주의를 우려하는 것입니다.

이 혼합주의라는 말은 선교 학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같은 곳에서는 원래 그들이 갖고 있던 정령사상이나 무속신앙이 혼합되어져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이가 몹시 아프거나 사업이 어려워지면 부적을 사서 붙이기도 하고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하고 하는 그런 것을 혼합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결혼을 앞 둔 많은 청년들과 그 부모들이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궁합을 보고 날을 받는 것을 아십니까? 심지어 교회 자리를 잡아달라고 점쟁이를 찾아 간 목사님도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신앙고백을 똑같이 하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종교행위도 열심히 하는데 어떤 한계 상황에 부딪치면 항상 자기의 유익을 위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선택을 해 버리는 것을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일론 신자라고 합니다. 나일론 양말이 나오기 전에는 전부 면 양말밖에 없었습니다. 그 면양말은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일론이 나오니까 남녀노소가 발 크기에 상관없이 하나가지고 돌려 신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대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것이 나일론입니다. 어떨 때는 성경 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가 어떨 때는 엉뚱한 비 성경 적 세계관으로 엉뚱한 선택을 하는 그런 사람들을 나일론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일론 신자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한 종류는 아예 가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다른 한 종류는 신자는 신자인데 아직 유아기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유아기 신앙인들은 아직 아기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비 성경적 세계관인 세상의 시대정신을 따라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 가장 편만하게 퍼져있는 혼합주의가 뭡니까?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입니다. 예수를 의지한다고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여전히 세상 적인 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다가도 자기의 직장문제라든지 경제적 이익이 걸린 문제라든지 자녀들의 학업에 관한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이 걸리면 금방 힘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무서운 혼합주의입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가 없는 엉터리 혼합주의가 그렇게 기독교 역사에 많은 오점을 남기게 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혼합주의가 있어왔지만 이 힘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가장 대표적인 비 성경적 세계관입니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그 물질주의는 더욱 더 인간들을 사로잡았고 급기야 오늘날에는 그 물질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시대정신이 된 것입니다.

르네상스가 뭡니까? 르네상스는 사실 중세로부터의 탈출이라고 명명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세는 AD500년 경부터 1500년경까지 약 1,000년 동안을 중세시대라고 합니다. 그 때는 교황이 세계의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법이 곧 세상의 법이라 할 만큼 교회의 영향력이 컸던 때였습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마귀의 일로 풀어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인간들은 참으로 가치 없는 존재로 전락을 했던 때입니다. 그 때는 모든 질병을 하나님의 징벌이나 마귀의 시험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면 낫게 된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었습니다. 그렇게 1,000년을 살다보니까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라는 사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그렇게 하잘 것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점차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나왔습니다. 뉴턴이나 갈릴레오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들이 억제되어있던 인간 이성에 불을 붙였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천둥이나 번개는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구름이 부딪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의학이 발달하면서 병은 세균 때문에 오는 것이지 마귀나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것들을 발견한 인간 스스로에 대해 대단한 기대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과거에 맹목적으로 믿었던 하나님을 폄하하게 되었고 인간의 이성이야말로 모든 만물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부터 성경에 나오는 우리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기적 같은 사건들도 하나하나 잘라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들은 점차 어떤 확신에 사로잡혔습니다. “인간들은 점차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점차 좋은 쪽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역사 진보주의라고 합니다. 성경은 인류의 역사의 종착역을 멸망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성경이 기술하고 있는 인류 역사는 목적지가 있는데 그 목적지는 멸망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땅과 새로운 하늘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 성경적 역사관입니다. 그런데 인간과 이성을 존중하는 사상이 시대정신이 되고 역사와 사회는 점차 진보할 것이라는 역사 진보주의가 시대정신이 되자 인간들은 점점 초월적인 영역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영역과 초월적인 존재인 신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의 기원과 근원을 물질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것을 유물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초월적인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올려놓으며, 모든 것의 근본을 물질에서 찾으려고 하는 시대정신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을 “자연주의”라고 합니다. 이 자연주의를 잘 기억해 두세요. 기독교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대표적인 시대정신입니다.

그러던 차에 1859년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써서 “진화론”이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그 학설은 당시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의 역사와 인간은 끊임없이 진보할 것이라는 철학과 사회학 적 진보사상이 시대정신을 이루고 있을 때에 “생물학 적인 진화론”이 등장하니까 인간들은 기고만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인간은 더 더욱 멋지게 진화해서 엄청난 유토피아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역사 낙관주의”라는 시대정신이 발화했습니다. 그러한 역사낙관주의에서 비롯된 가장 비극적인 사상이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이 땅에서 유토피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역사는 반드시 진보할 것인데 그 진보의 정점에 있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150년간 이 세상의 모든 지성인들은 공산주의에 열광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말기부터 시작해서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공산주의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송구영신 예배 때 다뤄 보겠습니다.

그렇게 역사적 진보사상과 진화론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낙관주의라는 시대정신에 빠진 사람들은 무엇을 추구하겠습니까? 진화론의 기본 뼈대가 뭡니까? 적자생존, 약육강식,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는 힘의 원리입니다. 많이 가진 자, 힘 있는 자, 지식으로든 물질로든 많이 소유한 자가 월등하게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이 힘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훨씬 앞선 문명과 문화를 갖고 있는 인종은 그렇지 못한 미개한 자들을 밟아서 없애버려도 된다는 시대정신이 세상 사람들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백인들은 진화론을 바탕으로 진화의 꼭대기에 서 있는 자기네 인종이 저 미개한, 검고 누런 인종들을 지배하거나 계몽시키거나 짓밟거나 아니면 죽여 없애도 된다는 행동양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나찌 독일의 히틀러도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에 물들어 있던 자였습니다. 그는 아리안 족이 진화의 꼭대기에 있는 종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을 아리안 족으로 채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나찌 독일의 골수 장교들은 일부다처제가 허용이 되었습니다. 많이 낳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방해가 되는 유대인들은 모조리 씨를 말려 죽여 버리겠다는 것도 당시의 시대정신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어때요? 마귀가 우리를 자기 마음대로 이리 저리 끌고 다니는 것을 역사를 통해 보실 수 있지요?

오랜 세월 인간들을 사로잡고 있는 그러한 힘의 원리라는 시대정신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부터 교회는 커져야 하고,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목사는 이왕이면 훌륭한 학벌을 소유해야 하고, 장로는 돈이 많아야 하고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그런 엉터리 같은 사상이 교회의 세계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경 적 세계관이 세상의 시대정신을 부수고 세상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데 인류의 역사 내내 거꾸로 시대정신이 기독교 세계관을 지배했던 것을 아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러한 시대정신에 미혹되지 말고 거기에 물들어 버린 너희의 세계관을 바꾸라“

(롬12:2)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 보시면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라는 말이 있지요? 세상에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어떤 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틀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붕어빵이 붕어빵 틀에 들어가면 모조리 똑같은 붕어빵이 되어서 나오듯이 우리도 그러한 시대정신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도 똑같은 엉터리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새롭게 변화된 세계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이렇게 정확합니다.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뭐라고 했습니까? 힘의 원리, 물질주의, 성공주의 이것과는 정 반대의 삶을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에베소서 4장 이하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행동양식을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 일까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아낸다고 해도 간디보다 더 잘 살아낼 수 있을까요?

슈바이처보다 더 헌신적으로 살 수 있을까요?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도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양식은 얼마든지 거룩하게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그들과 무엇이 달라야 하는 것입니까? 세계관의 변화에 의한 행동의 변화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 착하게 성실하게 순수하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정확한 이유와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세계관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심히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 다듬는다면 우리는 뭐가 되는지 아세요?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세계관이 무엇이며 어떤 세계관이 올바른 성경적 세계관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에베소서 4장 이하를 열심히 공부하고 달달 외운다고 할지라도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세계관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알아야겠지요?

여러분, 제가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저 우주에는 7X10의 23승개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그 별들이 전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필요를 위해 한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다는 것을 믿으세요?

힘의 원리를 추구하는 자연주의자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던 물질들이 빅뱅에 의해 존재케 된 것이지 어떤 초월적인 영역이 있고 그 곳에 계신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창조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삶이 끝나면 인간은 소멸되어 버리게 되고 역사도 목적 없는 직선적인 해프닝의 나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우주는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이렇게 눈에 보이는 세상 뿐 만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영역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요1:1-3)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1:15-16)

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시8:3)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히11:3)

3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창조된 것이니라)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천지 만물)이 전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것을 믿고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가 있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자연주의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이 우주와 세상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물질적 영역밖에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에 목숨을 걸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가 끝이기 때문에 여기서 기필코 성공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남들 눈에 보여 지는 의식주의 해결이 인생 최고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도 그가 가진 소유와 물질, 그리고 지식으로 평가를 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고 존경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게 성경적 세계관과 가장 상극이 되는 자연 주의 라는 시대정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자연주의라는 시대정신이 성경적 세계관을 먹어버린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초월적 영역에 대한 기대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이 자연주의자들과 똑같이 삽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세계관, 성경적 세계관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재능을 갖고 있고 얼마나 많은 힘을 소유하고 있고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가 얼마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착한가?”로도 그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인간을 평가할 때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죄와 허물 속에서 살아난 자인가? 아닌가?“로만 평가합니다.

여러분, 기독교 윤리는 세상 윤리와 다릅니다.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이라고 하면 죽여야 합니다. 그게 선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하라 하면 거짓말해야 합니다. 그게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금수와 모든 아말렉 사람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말렉 왕 아각과 살진 양과 소를 살려서 데려 왔습니다. 의도는 좋았지요.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살려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사울은 그 일로 하나님으로부터 폐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살인을 명하시면 살인을 해야 합니다. 그게 기독교 윤리관입니다.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떤 지역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그 때 다윗이 그 곳에 가면 제가 오해를 받아서 죽게 될 것이라고 하니까, 그럼 제사 지내러 왔다고 거짓말하라고 하십니다. 뭐가 선입니까? 뭐가 윤리입니까?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선이며 기독교 윤리입니다. 우리가 이 에베소서 4장 이하를 공부하면서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수많은 윤리적 도덕적 요구들을 대할 때 그 것들을 단순히 “내가 이렇게 살아야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인정받게 될 거야”라고 행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니까 열심히 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세계관을 여러분이 갖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그 분을 신뢰하며 그 분을 기쁘게 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리며 그 분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 물질 세계를 떠나 영원한 초월적 세계로 가게 된다는 것을 믿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삶을 준비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여러분의 세계관은 어떤 세계관입니까?

나이롱 신자로 살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을 지금 준비하십시오. 그게 신자의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의 세계관이 바뀌지 않았다면 지금 다 때려치우시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 내면의 변화, 세계관의 변화를 간절하게 구하세요.

그리고 여러분 인생의 수많은 경험들이 여러분의 그 딱딱한 세계관을 형성했던 것처럼 이제 성경 안에서 다른 경험들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성경 적 경험들이 여러분의 세계관을 바꾸도록 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세계관이 변하기 위해서는 참 된 복음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엡5:26)

26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행20:32)

32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돌덩이 같은 우리의 더러운 세계관이 성령께서 들어오심으로 균열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실천을 통해 차곡차곡 성경 적 경험을 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더러운 세계관의 균열이 점점 커지고 마침내는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화라고도 하고 거룩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그 것을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시대정신에 물들어 있는 나의 세계관을 완전히 박살 내버리고 새로운 성경적 세계관을 갖고자 하는 강한 열망과 기대로 우리는 성경이 요구하는 행동양식을 피 흘리기까지 해 내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자랑을 위해서 성경의 말씀들을 실천하려고 하느냐? 아니면 내 내면의 변화, 세계관의 변화를 위해서 성경 적 경험을 위해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하느냐? 이 둘은 천지차이입니다. 나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인가? 이 둘의 차이는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기독교는 결국 육신 적인 나를 죽이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의뢰하는 새로운 나로의 탄생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자랑과 체면을 위해서도 얼마든지 도덕적 윤리적인 노력과 종교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의 원리에 의한 세계관에서 나온 악한 행위입니다. 내가 변하기 위해서 애쓰는 열심과 나의 자랑을 위해 애쓰는 것은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열심을 부리고 계십니까?

여러분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아시죠?

(행4:32-5:11)

32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36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37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1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10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께서 교회에 오셨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오시니까 사람들이 변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늘리기 위해 일로 매진하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유무상통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때 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속 중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자기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모두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마 당시에 꼭 필요한 돈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들이 그 요셉에게 “바나바“라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 ”바나바”는 번역을 하면 “권위자“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 ”권”자는 “권할 권“자입니다. 그리고 ”위”자는 “위로할 위”자입니다.

헬라어로는 “휘오스 파라클레세오스” “위로의 아들”입니다. 그의 헌금이 대단한 위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옵니다. 역시 그들도 그들의 소유를 팔아서 얼마를 감추고 사도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화를 벌컥 냅니다. “네가 네 소유를 팔아서 여기 안 가져왔으면 그 모든 것이 네 것인데 왜 여기 가져와서 “이게 다”라고 거짓말을 하느냐“ 이게 무슨 뜻 인고하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요셉이 헌금을 하고 나서 바나바라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칭송을 얻은 것을 시기해서 ”자기들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칭송을 얻기 위해서 한 헌금“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나무란 것입니다. ”왜 너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으려고 하느냐?” 이것이 사도 베드로의 지적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어떻게 된다고요?

사망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5장 3절에 베드로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지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스스로를 기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헌금 떼먹으면 하나님께 혼난다는 그런 구절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바리새인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저를 저 세리와 같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냅니다.“ 하고 자랑을 합니다. 세리는 어떻게 합니까? 감히 얼굴을 못 들고 ”아버지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의 기도가 옳다고 하십니까? ”바리새인은 꽝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행위도 자기의 자랑을 위해 하는 것이면 다 “사망의 짓거리”라는 것입니다.

(눅12:13-21)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왜 사람들이 재물을 쌓습니까? 자기를 위하여 쌓습니다. 그것으로 자기의 힘을 삼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재물과 지식과 권세로 자기의 힘을 삼아 다른 이들에게 자랑을 하려는 자들은 전부 세상 권세 잡은 마귀가 주도하는 시대정신을 좇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된다고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처럼 “사망”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엡5:3-5)

3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여기 보시면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탐심을 가진 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라고 아주 못을 박아 놓으셨습니다. 탐심은 전부 무엇에 대한 탐심입니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탐심입니다. 권력, 쾌락, 입신양명

이런 것들은 전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왜 그런 것들을 탐내죠? 전부 자기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거죠.

제가 지난번에 사랑에 관해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 자기를 사랑하세요. 그래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랑을 이런 이기주의, 개인주의로 이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제가 사랑하라는 자기는 구원이 확인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신분으로서의 ”자기”입니다. 아무리 지금 못나 보이고 찌그러져 보여도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해 놓으신 귀한 자녀이니까 자기를 너무 학대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 자기를 어떻게 사랑합니까? 죄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순결하게, 순수하게 지켜내는 것, 이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여전히 이 껍데기, 옛 몸뚱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숭배란 자기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나라에 관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입니다.

(민11:4-6)

4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로 굉장히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절하게 고생을 했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이 남자아이를 낳으면 전부 죽여 버리라는 명령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들이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서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건져내신 것이 아니라 10가지 기적을 보여주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야 하는 사막이 낮에는 거의 섭씨 50도를 오르내리고 저녁에는 거의 영하로 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히터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복과 신발을 40년 동안 헤지지 않게 인도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만나가 내려옵니다. 메추라기가 내려옵니다. 목이 마르면 반석에서 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불평했다고요?

그들에게 탐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만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들의 입과 배를 즐겁게 해 줄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마늘이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탐욕을 품으면 자기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잊어버립니다. 그 영원을 향하는 눈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가 짓지 않은 집으로 가고 있고 그들이 경작하지 않은 땅에서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의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자리,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들 마음 속에 탐심, 물질주의, 성공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자 자기들의 목표지점이 어딘 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먹고 싶은 참외와 수박과 부추와 마늘과 생선을 먹으면 나는 지옥에 가도 상관없다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관의 변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내 하나님을 놓치게 됩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 율법을 받으러 올라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모세가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아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가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라고 합니다.

(출32:1-4)

1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 함이니라

2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오매

4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강림하십니다.

(출19:3-11)

3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7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8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고하였으므로

1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11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너희는 내가 너희를 어떻게 애굽에서 건져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너희가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모두 ”예“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에게 확인 도장을 찍어주시기 위해서 직접 시내 산에 강림하실 거라 하십니다. 그리고 20장에서 십계명이 주어지고 18절 19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봅니다.

(출20:18-19)

18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19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그리고 21장부터 31장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하는 법과 하나님을 섬기는 법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제사법과 제사장들을 세우는 제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러는 동안 산 밑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레 같은 음성과 빽빽한 구름과 불타는 산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시켰습니다. 그리고 24장에 가면 아론과 70명의 장로들이 직접 하나님을 봅니다.

(출24:9-11)

9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겪은 이스라엘과 아론과 70장로들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하나님을 직접 보여줘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세계관이 바뀌지 않는 한 인간은 어떤 기적을 보아도 아니, 하나님을 직접 보고도 여전히 이 땅에서의 힘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도륙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78:12-20)

12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저희 열조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13저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저희로 지나게 하셨으며

14낮에는 구름으로, 온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셨으며

15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16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17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18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19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20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시106:19-22)

19저희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여

20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21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 구원자 하나님을 저희가 잊었나니

22그는 함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일을 행하신 자로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들의 탐욕을 좇아 다른 것을 바라보는 자들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출32:21-25)

21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

22아론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23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24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25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25절에서 “백성이 방자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풀어놓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어떤 규율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근신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를 발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신 것과 그 앞에 내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놓치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이 땅의 힘과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삶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혹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다고 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여러 번 체험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정작 그에게서 나오는 행동양식은 전부 자기 자랑과 자기 배 만을 위해서 사는 그런 사람들, 여러분 그런 나이롱 신자 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사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취급하시는지 보세요.

(출32:26-28)

26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27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28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혈육까지도 다 죽여 버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신앙 문제에 있어서는 가족과도 타협이 안 되는 것입니다. 가족이 잘 못 가면 말려 주세요. 아니면 여러분 눈앞에서 그들이 도륙 되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세계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물질주의와 성공주의, 쾌락주의, 자연주의 이러한 세상 풍속을 좇지 마시고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보이지 않는 초월적 영역을 소망하며 이 땅을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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