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힘써 지키라
(엡4:1-6)
1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는 지난주에 에베소서는 3장까지에서 교리를 설명하고 있고 4장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제 생활에 관한 행동강령을 기술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믿어야 할 것들(credenda)에서 행해야 할 것들(agenda)로 초점이 옮겨지고 있는 것이죠.
그 처음 서론 부분으로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라는 것이 어떤 삶인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서론 부분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악시오스”라는 단어에 관해 자세하게 살펴 보았습니다. “합당한“”악시오스“라는 단어는 두 가지 중요한 사상을 담고 있는 단어라고 했지요? 그 첫 번째가 “조화의 사상”이라고 했습니다. 천칭 저울을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해드렸죠. 교리라는 입력정보가 들어가면 반드시 합당한 삶이라는 출력 정보가 나와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선택된 단어라고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어울림의 사상”이라고 그랬어요. 우리의 성별이나 나이나 생김새에 걸 맞는 어울리는 옷차림이 있는 것처럼 우리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도 어울리는 삶이 있으며 우리는 그 삶을 살아내야 함을 그 “악시오스”라는 단어에서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구체적인 실천 덕목으로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관용, 하나 됨을 힘써 지킴”등을 사도는 나열해 놓고 있음도 공부했습니다.
사도가 4장 이후부터 성도들에게 주지시키고 싶은 행동강령은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4장1절부터 16절까지가 교회의 통일성에 관한 내용이고 4장17절부터 5장 21절까지가 교회의 순결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 종합해서 한 단어로 표현을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 됨” “통일”입니다. 1장 공부할 때 배웠죠? 우리 1장10절을 한번 보고 가죠.
(엡1:10)
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속하신 이유와 목적이 나오죠? 뭡니까? “통일” “애나케 팔라이오” “하나 됨”입니다. 한군데 더 보죠. 요한복음 17장입니다.
(요17:11,21-23)
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21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역을 완성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 됨“”연합“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하나 됨을 통해서 어떤 일이 결과로 일어나게 됩니까?
23절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 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져 가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성령께서 교회를 하나 되게 하셨다는데 그게 어떤 하나 됨입니까? 어떤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연합, 하나 됨, unity가 무엇입니까? 조직적인 연합, 조직적인 하나 됨입니까?
실제로 그렇게 된 적이 있었죠? 언제입니까? 중세시대입니다. 그 때는 교황을 머리로 해서 전 세계 교회가 하나였습니다. 그 때 세상이 교회의 하나 됨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까? 당시의 상황을 스펄전 목사님께서 이렇게 설명해 놓으셨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파쇄 적이고 폭군적이고 미신적이고 무지한 것, 이른바 기독교라고 불리는 그 종교와 진짜 하나님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 해서 동서남북 어디에서든지 진정 지성적인 신자를 발견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이것이 조직적 하나 됨을 이루어 냈던 콘스탄틴 대제 이후의 기독교의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조직적인 하나 됨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란 것인데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 됨“이 ”획일화“입니까?
모든 교파를 초월해서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장로 교인들이 침례교인들 수십만 명을 물에 수장시켜 버린 것을 아십니까? “왜 너희는 세례를 안 주고 침례를 주느냐?” 가 이유였습니다. 수많은 장로 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침례 교인들을 배에 태우고 강 가운데로 가서 그들의 목에 커다란 맷돌을 묶어서 물에 던져 죽였습니다.
“왜 너희는 우리와 다르냐? 하나가 되자” 이게 그 참혹한 살인극의 허울 좋은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 됨이 이러한 획일화입니까? 아니죠?
그럼 조직적인 연합도 아니고 전체를 한 색깔로 맞추는 “획일화“도 아니라면 어떤 연합입니까?
영적 연합입니다. 하나님의 신격 안에 들어 있는 삼위 하나님의 연합과 같은 연합을 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듯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렇게 하나로 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이신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그런 연합과 하나 됨을 지켜내야 하는 자들입니다. 조금 어렵죠?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덕 안에 있는 단일성, 즉 세 분이 일체이시라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을 지상에서 반영하는 공동체라는 것이죠.
바로 그 영적 연합을 이룰 수밖에 없는 근거가 오늘 본문 4절에서 6절까지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하나 됨을 지켜 낼 수 있는가?
먼저 3절과 4절을 보시죠.
(엡4:3-4)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성령을 통해 우리를 영적으로 하나로 묶어 놓으셨답니다. 여기서 쓰인 “평안의 매는 줄“ ”쉰데스모스”는 “쇠사슬, 끊을 수 없는 굴레“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끊을 수 없는 쇠사슬로 서로 묶여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summers는 그의 에베소서 주석에서 ”성령하나님은 평안과 사랑의 쌍둥이 쇠사슬을 취하셔서 그것을 모든 구속받은 자들을 한 몸으로 묶어 버리셨다“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한 성령 안에서 그렇게 하나로 묶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쇠사슬이 어떤 쇠사슬이냐 하면 평안의 쇠사슬입니다. 그 말은 교회는 하나 됨을 힘써 지켜 낼 때 평안하게 된다는 것이죠.
사도는 그렇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 것을 “힘써 지키라“고 교회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쓰인 단어“스푸다 존테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헬라어 시제가 현재 분사입니다. 헬라어의 현재분사는 계속되는 진행의 상태를 나타내는 시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스푸다 존테스”는 “끊임없이 부지런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스위스에서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인 칼바르트의 아들 마르쿠스 바르트는 그 단어를 주석하면서 이렇게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전에 나오는 이 헬라어 동사가 표현하는 절박함을 정확히 번역하여 전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큼 이 단어가 요구하는 것은 크고도 큰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서두름과 열정 뿐 아니라 우리의 의지, 감정, 이성, 육체의 힘 및 모든 마음가짐을 포함하는 전인적인 모든 힘이기도 하다. 이 단어는 수동적인 태도나 정숙 주의 기다리며 두고 보는 자세 또는 부지런하긴 하지만 여유를 부리는 태도를 모두 배격한다. 당신이 행동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당장 시작하라.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라. 바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진정으로 말하건대 당신은 이러한 절박함으로 교회의 하나 됨을 지켜내야 한다.”
우리 교회는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이 영적 하나 됨의 사상을 잘 이해하고 , 바르트의 권고처럼 절박함으로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운 것이, 어차피 듣고 잊어버릴 건데, 이곳을 나가면서 전혀 남의 이야기처럼 여겨 버릴 텐데 내가 뭐 하러 이렇게 열을 올리나... 이런 생각이 자꾸 제 힘을 뺍니다. 안 그러실 거죠? 진짜 절박함으로 한번 지켜보실 거죠?
성령으로 하나로 묶인 사람들은 하나 됨을 힘써 지켜 가면서 “우리는 정말 하나구나,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정말 똑같구나.” 하는 확인을 하게 되고 그 확인 속에서 평화와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4절부터 6절까지에서 일곱 개의 “하나”를 동원해서 교회의 통일성의 기초를 설명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 일곱 개의 개념을 동원한 것을 들어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수, 완전수”를 동원해서 교회의 통일성은 하나님의 신성의 완전함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흥미 있는 지적이지요.
잘 보시면 4절에 세 개 5절에 세 개 6절에 한 개 이렇게 나옵니다.
4절의 세 개는 성령 하나님께 대한 것들입니다. 5절의 세 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6절에서 성부 하나님을 등장시키고 전체를 종합하는 듯한 배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그림을 미리 그려본다면 그 세 절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하나님께서 오셔서 비로소 완성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성자께서 이루신 일이 없었다면 성령하나님은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지 않았으면 성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성령, 성자, 성부 하나님의 공조 하에 탄생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교회는 통일성을 지켜야 한다.” 라고 웅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짚어 볼까요?
그 일곱 개의 “하나”들 중에서 사도가 제일 먼저 제시한 것이 (교회는 “한 몸”이다)입니다.
(엡4:4)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을 하고 나서 인간에게 나타난 죄의 대표적인 결과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주관주의”죠. 다른 말로 “이기주의” “개인주의”입니다. 죄인들은 그렇게 전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삽니다. 다른 이들과 협조나 공조를 하더라도 그게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절대 서로를 돕지 않는 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을 건져내셔서 한 몸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 몸이라는 것은 유기체라는 것입니다. 유기체는 어느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온 몸이 함께 아플 수밖에 없는 운명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서로 협조나 공조(公租)를 안 하면 존재할 수 없게끔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2장을 공부할 때 “한 몸”에 대해 자세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론 설교에서도 한번 다뤘던 내용이지요? 대표적인 구절을 한 군데만 찾아보고 넘어가겠습니다.
(고전12:13-26)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20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 보게 하셨으니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우리는 이렇게 각자가 독립적인 생명체라는 개념을 잊어야 하는 것입니다. 손과 발과 머리와 다리가 서로 각각의 생명체인데 필요에 따라 결합한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 대해 독립적 생명체라는 개념을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진짜 한 몸입니다. 누구는 중요하고 누구는 중요하지 않은 그런 구별이 있을 수 없는 한 몸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한 몸을 이루자“가 아니라 이미 우리는 공조하고 협조하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는 운명 공동체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장 소홀하게 다루는 데가 어디입니까? 항문입니다. 얼굴이 항문더러 “야 너는 왜 그렇게 더럽고 늘 추하냐?” 고 이야기 할 수 있나요? 어느 날 항문이 마음을 굳게 먹고 “오늘부터 한 달간 나는 아무 것도 통과시키지 않겠다.“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조롱하던 예쁜 얼굴이 누렇게 뜨고 피부 트러블이 생기고 그렇게 됩니다. 교회는 그렇게 모두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며 서로에게 소중하게 도움이 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나”가 “한 성령”입니다. 우리는 한 성령에 의해 새 사람으로 탄생이 되었고 지금 그 한 성령의 이끄심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수많은 악령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한 분 성령님에 의해 탄생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한 분 성령님이 교회 전체의 영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한 영이 흐르는 한 몸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치 다른 영을 받은 사람들처럼 예수를 믿습니다.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한 목표를 향해 경주를 해야 하며 한 가지 방향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한 인격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고린도 전서 12장 13절을 다시 한 번 볼까요?
(고전12:13)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한 성령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은 열매도 같은 열매가 맺혀져야 한다는 사실로 귀결이 되지요?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맺으시는 것이니까요. 성령의 열매는 뭡니까? 언제나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매들이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혹시 세상에 무수한 다른 악한 영을 받은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와 비교해서 다른 영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갈5:16-21)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내 안에서 지금 어떤 열매가 나오고 있는지 확인하세요. 분명 성령은 한 성령입니다.
이 구절에 관해서는 우리가 여러 번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자세하게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만 살펴보고 가지요. 20절에 보면 악령의 열매로 열거된 것들 중에 “우상숭배와 술수“가 있지요? 헬라어로는 ”에이돌롤 라트리아”“파르마케이아”인데 이 단어들의 뜻은 “악의 권능을 빌리거나 악의 세력과 결탁해서 피조물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예배를 하도록 사람을 속이는 기만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피조물이라는 것이 뭐겠습니까?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러한 것들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은 “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라 어쩌면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성령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고 은사도 받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돕게 되는 것입니까? 성령이 왜 오셨습니까?
그럼 다른 질문을 드릴게요. 성령이 언제 영원히 인간을 떠나셨습니까?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복의 근원이셨던 성령께서 언제 인간을 떠나게 되었습니까?
(창6:1-3)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 백 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인간을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새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하나님의 신을 인간들 속에 영원히 부어 넣으셔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탄생하게 될 것이라는 언약입니다.
(겔36:24-27)
24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그렇죠? 어떤 무리들에게 성령이 영원히 거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새 언약입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성경에서 다른 말로도 표현을 해 놓았는데 예레미야서로 가보지요.
(렘31:33)
3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성령이 오시는 것을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긴다.”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성령이 왜 오신다는 겁니까?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택해 놓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분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해 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그 일이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의 율례를 기쁘게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진짜 성령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정확한 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엉터리 같은 다른 영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기적이다, 능력이다“ 하면서 사람들을 우상숭배와 술수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개혁주의 목사님들까지 성령 운동에 열을 올리고 계신데 여러분도 성령 충만 받고 싶으세요? 도대체 성령 충만이 뭡니까? 내 안에 와 계신 성령이 점점 자라서 내 안에 꽉 채워지는 것입니까? 성령 충만이 뭐예요? 성령 충만이 뭐 길래 성령 충만의 경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2류 신자라고 서슴없이 말들 합니까?
(엡1:23)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합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엡4:8-10)
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죠.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누구세요? 성령 하나님이세요.
(빌1:19)
19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표준 새 번역)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성령이)도와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교회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입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다시 에베소서 1장 23절을 풀어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교회는 성령의 ‘충만’이니라“가 되지요? 교회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 “성령”의 ‘충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맞으시다 면 여러분은 이미 성령 충만하신 분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성령 충만의 결과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무슨 성령 충만을 또 바라세요. 이제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면서요? 그게 도대체 어디서 나온 발상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택한 성도가 맞으시다 면 여러분은 이미 “성령 충~만“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성령 충만함을 입은 자들로서의 신분에 맞는 열매를 당연히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적이라든지 신비한 체험이라든지, 놀라운 은사를 열매로 내 놓는 사람들은 전부 다른 열매를 맺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어쩌면 악령의 속임수일지 모릅니다. 잘 구별하세요.
우리에게는 오직 한 성령만이 계실 뿐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 한 성령에 의해서 탄생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같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세 번째가 한 소망입니다.
그렇게 한 성령에 의해 태어난 교회는 같은 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만사형통, 문제해결, 일확천금, 질병치유“ 이런 소망입니까? 분명 한 소망이라고 했는데 같은 종류의 소망이어야 하잖아요? 다른 여러 종류의 소망들이 있다면 에베소서 4장 3절은 성경에서 지워 버려야죠. 우리가 가져야 할 ”한 소망“이 뭘까요?
(골1:27)
27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의 소망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
(딤전1:1)
1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이 바로 우리의 소망입니다. “한 소망”
(딛1:2)
2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딛3:7)
7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한 소망입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바라보고 경주해 가는 소망입니다.
(롬8:24-25)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보이는 소망을 소망하는 자들은 다 뭐라고 합니까? “가짜다“ 그러죠?
(딤전6:17-19)
17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로 말미암아 얻어 낼 어떤 물질 적인 것들을 소망하는 것은 참 된 소망이 아닌 것입니다. 왜요? 소망은 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한 소망을 바라보며 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한 소망“이 가지는 또 다른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들의 과거의 상태를 뒤돌아보거나 그것에 집착해도 안 되며 자신의 회심의 경험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기 다가오는 소망을 바라보며 가는 자들이지 과거에 집착해서 괴로워하거나 자랑스러워하거나 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의 강해에서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과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 그리고 존 스토트 목사님 세분 다 인용을 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John Macneil이라는 목사님의 설교를 인용하셨는데 그 분이 설교 가운데서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두 사람의 소경들의 대화를 가상적으로 설명을 하셨습니다. 한사람은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이고 다른 사람은 마가복음 8장의 소경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은 예수님께서 눈에 진흙을 이겨 발라서 고쳐 주셨고 마가복음 8장의 소경은 그냥 고쳐주셨습니다. 눈을 뜬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이 마가복음 8장의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발라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 때 기분이 어떻던가요?”
마가복음 8장의 소경이 말합니다. “진흙이라뇨? 저는 진흙 안 발라 주셨는데”
“아니, 진흙도 안 바르고 눈을 떴단 말입니까?” “그럼 당신은 가짜입니다” “주님은 분명 진흙을 발라서 소경을 고쳐주시는 분입니다” 마가복음 8장의 소경이 말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이 가짜입니다. 주님은 아무 것도 바르지 않고 오직 말씀으로 눈을 뜨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싸우다가 초대 교회가 진흙파와 비 진흙파가 갈라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말씀을 예화로 드셨더라고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저처럼 할 것 안 할 것 다해 보고 돌아 온 사람도 있고 아주 어려서부터 얌전하게 이삭 같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아내 운전해 주러 왔다가 너무 더워서 에어콘 바람이나 쐬자고 들어 왔다가 회심한 사람도 있고 구봉서 장로님처럼 어머님 예배당 모시고 와서 뒤에서 골프 퍼팅 연습하다가 주님을 영접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이제 한 소망을 바라보며 한 곳 만을 바라보며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들에게는 우열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빈부귀천도 없습니다. 이제 모두 평등한 하나가 되어서 한 곳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가 끝나고 바울은 5절부터 성자의 사역으로 넘어갑니다.
(엡4:5)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먼저 “주도 하나이요”부터 볼까요? “한 분 주님”이라는 뜻이죠.
요즘은 종교 다원시대가 되어서 주님이 참 많습니다. 공자, 맹자, 석가, 마호멧 인간들이 만들어 낸 주님이 참 많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일렬로 줄 서 계신 여러 주님 중의 한 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신학자들이나 목사들까지도 많이 그 사상에 물이 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는 그저 많은 위대한 박애주의자들 중의 한 분으로 혹은 많은 성인들 중의 한 분으로 전락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간과했던 교회가 있었죠?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고전1:12)
12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와 한 줄에다 세워 놓고 편먹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인으로 섬겨야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고전8:6)
6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행4:11-12)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 주님,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주인님“ 이라고 부르는 그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모두 한 분 주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한 분 주인으로부터 한 명령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인데 그 분이 어떤 주님이시죠?
(빌2:6-8)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원수들을 위해서 죽으신 주인님이십니다. 그 주인께서 우리에게 자기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가셨습니다.
(눅21:12-19)
12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13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15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19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마5:11-12)
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리로 부르십니다.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면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나처럼 억울하게 당하고 억울하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부르심의 소망에 합당한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고 진정한 승리의 길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고 가셨습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사도행전을 공부할 기회가 있으시면 한번 잘 보세요. 요즘 새벽기도 때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는데 잘 보시면 사도들이 핍박을 받는 장면을 누가가 예수님의 핍박 장면에 나오는 동일한 단어들과 동일한 장면들을 동원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해야 함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 주인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가 “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공부를 했으니까 깊이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교회는 “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믿음의 대상과 내용을 바르게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이런 분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다 맡겨도 안심이다”하고 항복을 하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인격에 항복시키시는 전 과정을 우리는 “믿음“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객관적인 믿음에 의해 우리가 주관적인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 “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처럼 그 믿음 위에 “할례나, 안식일 문제”등을 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왕왕 있습니다. 그건 “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알매니언 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가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는 주장은 “한 믿음”이 아니죠.
그리고 여섯 번째가 “한 세례“입니다. 이 세례에 관한 것도 우리가 여러 번 공부를 했습니다.
여러분, 세례가 뭡니까? 옛 사람이 물에 빠져 죽고 새 사람이 탄생되었다는 징표로 우리가 세례를 행합니다. 고린도 전서 1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표현을 하지요? 애굽 쪽에서 보면 그들이 바다로 들어가서 다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나안 쪽에서 보면 새로운 사람들이 바다에서 살아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게 세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다시 새 사람으로 태어난 자들이라는 것을 인증 해 주는 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벧전3:18-21)
18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여기서 세례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노아 시대 때 비가 내려서 모든 죄인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물이었지만 어떤 사람들, 즉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는 그들의 배가 뜨게 되는 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죄인들은 다 빠져 죽고 의인이 살아남는 것을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부 죽었다가 살아난 한 경험을 한 자들이기 때문에 “한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서로 서로에 대해 분열의 칼을 휘두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감격 안에서 하나로 통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1:10-13)
1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어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 바울 파다 아볼로 파다 게바 파다 이런 분파를 만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전12:12-13)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 세례는 이렇게 교회의 통일성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죄에 대해서 죽었고 의인으로 살아난 자들은 어떤 통일된 결과물들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물이 뭡니까?
(롬6:1-7)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표징이 뭡니까?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죄의 노예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세례를 받은 자의 표징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죽은 자들, 세례를 받은 자들은 반드시 죄를 멀리하고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기는 받았는데 여전히 죄와 함께 뒹굴기를 좋아하는 그런 세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세례를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갈6:14)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한 세례”를 받으신 여러분, 열심히 그 “한 세례“를 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가 4절에서 시작한 위대한 말씀을 6절에서 종결짓습니다.
(엡4:6)
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보시다시피 마지막 일곱 번째가 “하나님도 하나이시니“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신 권유의 말씀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지금까지 보신 것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할 이유”를 일곱 가지로 설명을 하고 있고 그것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처음에 세 가지가 성령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두 번째 세 말씀은 성자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는 최고 절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언제나 성령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사역에서 멈추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데까지 갑니다. 로마서에서도 11장까지에서 복음의 교리를 잘 설명한 다음 어떻게 11장까지를 결론 맺습니까?
(롬11:33-36)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에 대한 영광의 찬양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가 자주 실수하는 것이 우리는 너무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의 사역에만 관심을 둡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까지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벧전3:18)
18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께 우리를 인도해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목표로 하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목표 지점을 자주 놓칩니다. 우리는 미래의 어떤 목표지점을 향해서 이 땅에서 분투하고 경주해야하는 경주자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기들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고 언제 구원을 받았으며 어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에서 멈춰있습니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것이 “당신 언제 구원받았어?” “방언 할 줄 알아?” “왜 다른 사람들은 다 쓰러지는데 당신은 안 쓰러져?” “혹시 믿음이 너무 모자라고 어린 것 아냐?” 뭐 이런 것들만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기 위해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령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엡1:3-10)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한 줄에 한 번씩 나오는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사역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체의 주어가 뭡니까?
3절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가 전체의 주어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나님께서 끝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천지만물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모든 것을 운행하시며 모든 것의 결론이 되시는 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 4장과 5장을 공부하면서 본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부 통일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죠? 네 우리는 바로 그 “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분열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6절을 계속보시면 아주 중요한 통일성의 근거가 되는 단어가 나옵니다. 6절을 보세요. 그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다음에 어떤 구절이 붙어있습니까?
(엡4:6)
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만유의 아버지 “파테르 판톤”입니다. 이 구절에서 만유“파스”라는 단어가 중성이 아니고 남성 형용사가 쓰였습니다. 그 것은 이 “파스”가 온 천지 만물과 우주와 그 밖의 모든 것을 다 포함시켜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요8:44)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타락한 죄인들의 아비는 누구입니까? 마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의 아버지입니까? 교회의 아버지입니다. 이 6절은 그 한 분 하나님께서 교회의 아버지시며 교회를 통일하시는 분이시며 교회 위에 계시며 교회 가운데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주지시키는 구절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한 분 하나님의 큰 계획이요 설계이며 하나님의 모든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분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지금 역사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어떻게 분열하고 다투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분열하지 말고 하나 됨을 지켜내야 한다.“ 이렇게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 됨을 지켜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제 아셨습니까?
몸이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시고 소망도 한 소망이고 주도 한 주요,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고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교리는 한 색깔만을 띄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목적지를 향해서 서로 서로 손을 잡고 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끼리 다투지 말자고요. 내 안에서 울컥하고 분이 올라오고 화가 올라올 때 우리가 지켜내야 할, 하나 됨을 꼭 생각하십시오.
h�B0;py x�� id-mode:char;margin-left:0.2pt;text-align:left;">13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게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런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들의 죄를 아예 보지 않으십니다. 아니 그 죄까지도 품어 안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자기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고도 떳떳하게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해서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과 태도와 감정을 직접 하나님께 투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내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못 마땅함과 수치스러움과 지기 혐오를 하나님께 그대로 투사해서 내가 내 자신이 미워지면 하나님께서도 당연히 자기를 그렇게 미워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래넌 매닝스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향해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악을 용인하시지 않으시지만 우리 안에 악이 있다고 해서 그 분의 사랑을 감소시키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 긍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기분 때문이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로마서 전체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근거를 찾아내셔서 그 것을 근거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서 품에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죄는 자꾸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즉각 적으로 자기혐오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을 하나님께 투사해서 하나님도 나를 절대 용서치 않으실 거야“하고 불안해하고 숨게 만듭니다. 죄를 짓는 것은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혹 우리가 죄를 지었더라도 여러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 뜨거운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를 택하셨고 택하신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좀 더 뻔뻔스러워 지세요. 자기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이렇게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십시오. 이 복음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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