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54)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엡4:1-6)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15

(54)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엡4:1-6)

1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제 본격적으로 4장부터 전개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천 부분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1장부터 3장까지에서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교리 적으로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1장부터의 내용을 잠깐 요약해 드리면, 교회는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을 하시고 예정을 하셔서 성자 예수 그리스의 사역을 통하여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자녀를 삼으시고, 그들이 죄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보증으로 성령하나님을 보내셔서 그들을 인 치셨다는 것을 설명하지요. 그러고 나서 1장은 특별히 에베소 교회를 위해 드리는 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려내시고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교회는, 원래는 허물과 죄로 죽었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구원을 허락하셔서 살려내신 새로운 무리라는 것을 설명하며 시작을 합니다. 그 유명한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이 거기 있지요.

(엡2:8-9)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리고 계속해서 그 하나님의 은혜, 그 하나님의 선물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 없이 모든 열방에 적용이 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교회는 서로 서로 연결이 되어 서로 도우며 거울이 되어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들로 지어져 가는 것이란 것으로 2장을 맺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 바울 자신의 이방인에 대한 사명을 기술한 후에 우리가 오랜 시간 공부했던 바울의 두 번째 기도로 3장을 마칩니다. 그리고 4장으로 이어지면서 “그러므로”로 그리스도인들의 실천 강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1장에서 3장까지에서 예정과 선택, 양자됨과 구속, 성령의 사역과 거듭남, 만국 백성을 연합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연합하는 삶에 대해 말하고, 이러한 것이 입력되었을 때 너희에게서는 어떠한 출력 정보가 나와야 하는가를 4장부터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대부분 이러한 순서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그 다음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는 그리스도인의 행동강령을 설파합니다.

(골3:1)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롬12:1)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살전4:1)

1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갈5:1)

1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가 바른 교리를 입력받았을 때 반드시 우리 안에서는 사도 바울이 요구하는 출력정보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1절부터 한 절 한 절 보겠습니다.

(엡4:1)

1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합당하게“”악시오스“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사상이 깃들어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는 조화의 사상입니다.

여러분, 천칭 저울 아시죠? 보통 저울은 무게를 재지만 천칭저울은 무게를 재는 저울이 아니라 질량을 재는 저울입니다. 양쪽에 접시가 달려있고 거기에 동일한 무게를 올려놓아 그 물질의 질량을 재는 저울입니다. 이 저울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무게와 질량의 물질이 동시에 올라가야 그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조화의 사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악시오스”라는 단어를 동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교리와 실천에 똑같은 비중을 두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히6:9-12)

9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10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덕목들을 부지런하게 실천하라고 권고하는 동시에 믿음의 도리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특히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 위하여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낼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그리스도인들은 교리와 실천 사이의 조화를 유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오늘 에베소서 본문의 말대로 하면 “합당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교리와 실천은 둘 다 중요한 것이니까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합당하게”“악시오스”라는 단어 안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사상이 “어울림”의 사상입니다. 그래서 흠정 역 성경에는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어울리게 행동하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구절이 빌립보서에도 있지요?

(빌1:27)

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어울리게) 생활하라

복음을 잘 깨달은 자들은 그 복음에 어울리는 생활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당시 사람들의 옷차림에 많이 쓰던 단어였습니다. 예를 들어 회색 양복에 녹색 양말에 흰색 운동화를 신은 사람은 “우 악시오스”죠. “우”가 절대 부정을 나타내는 단어니까 “절대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라는 뜻입니다. 단아한 미색 투피스 정장에 쇠사슬 목걸이와 뱀 모양 팔찌 같은 것은 “우 악시오스”입니다.

그리고 80먹은 할아버님이 힙합 청바지를 입으시고 바지를 엉덩이 중간쯤에 걸치고 계신 것, 전혀 어울리지 않죠?

그렇게 교리를 제대로 배우고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그에 걸 맞는 어울리는 삶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사도는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악시오스”“합당한 생활”의 근거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제시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 즉, 하나님의 교회는 모두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라는 단어 ”에클레시아“가 원래 ”에크“”밖으로“ ”레시아“”부르심” 그러니까 ”밖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 아닙니까? 어디서 어디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죄에서 거룩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어디로 불려 나왔는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부르심을 받고 밖으로 나온 사람이 계속해서 부르심을 받고 나오기 전의 생활을 답습한다면 그 사람이 어찌 부르심을 받아 밖으로 나온 사람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너희가 부르심에 어울리게, 합당하게 생활을 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J I Packer가 John Owen목사님이 쓰신 “The Mortification of Sin""죄 죽이기”라는 책의 서문에서 자신도 예전에 그리스도인들의 실천부분에서 상당히 갈팡질팡 했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하고 하나님의 주권 뒤로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다 하실 텐데 뭐“ 하고 자신은 그 하나님의 주권 뒤로 숨는 것이죠. J I Packer도 똑같은 고민을 했었다고 합니다. J I Packer뿐만 아니라 시카고 무디 기념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셨던 해리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도 똑같은 고민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고갈이 될 때까지 갔었다고 합니다.

그 같은 고민 끝에 그 대가들이 내린 결론이 “우리는 우리의 손과 발과 의지를 움직여서 피 흘리기까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모았습니다. 네, 우리는 반드시 부르심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3장1항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일단 유효한 부르심을 입어 거듭났고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자기들 속에 새로운 영의 창조함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실질적이고 개인적으로 더 거룩하게 하심을 입되, 그리스도의 말씀과 자기들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더 거룩하게 하심을 입는다. 죄가 몸 전체를 지배하는 권세는 파괴가 되고, 그 죄의 지배함에서 나왔던 여러 정욕들이 갈수록 어 약화되고 죽여지고, 구원하시는 모든 은혜에 있어서는 더욱 더 생기를 가지고 힘을 얻되, 참된 거룩의 실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그 참된 거룩이 없이는 주를 뵙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난번에 읽으신 회심의 저자 리차드 백스터는 그의 책에서 회심을 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게으르고 나태해서 엉터리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의 죽음을 얼마나 잊어버리고 사는지, 또한 여러분이 영원한 것들을 얼마나 가볍게 취급하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입술로는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얼마나 용감하게 죄를 짓고 있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두려움 없이 사는지, 얼마나 여러분의 영혼 문제에 대해서 소홀하게 대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부정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얼마나 세상 적인 관심사와 쾌락에 빠져있으며 유치한 장난감 같은 세상 것들을 간절히 추구하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여러분의 짧고 귀중한 시간을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낭비하고 있는 동안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이제 그 무서운 날이 임박했습니다. 그날에 여러분의 슬픔은 시작될 것이며 반드시 통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고통과 파멸 속에서 부르짖어 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곧 지난날 어리석게 행동한 기억들 때문에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금 무시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삶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신속히 여러분의 죄를 버리려고 합니까? 얼마나 빨리 여러분의 생각과 생활을 그리고 진로와 모임을 변화시키고 감정의 물줄기를 바꾸며 여러분의 관심을 다른 것으로 돌리려고 합니까? 얼마나 굳게 결심하고서 지금 여러분을 속이고 또 여러분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여러 유혹들을 떨쳐 버리려고 하십니까? 또한 여러분은 얼마나 열심히 가장 복된 삶을 위해 분발해야 하겠습니까?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얼마나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겠습니까? 얼마나 진지하게 하나님의 율법들을 묵상해야 하겠습니까?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죄를 짓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점점 성화 되어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까?“

제가 오랜 신앙생활의 고민 끝에 완전하게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신자라면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정말 죄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파멸시킵니다.

제가 예전에 한국 극동방송국에서 방송을 잠깐 진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거기서 만난 미국 선교사님들이 계셨습니다. 나이 많으신 할머니들이신데 그 분들이 호스피스 봉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선교사님들이 특히나 저를 예뻐하셔서 그 분들이 일하시는 곳에 저를 자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 중에 얼굴에 피부암이 걸리신 한 중년 남자 분을 세 달 정도 계속 뵌 적이 있습니다. 그 피부암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처음에는 입술 있는 곳이 조금 헌 것처럼 구멍이 뚫리더니 이내 코가 없어지고 얼굴 전체가 날아가 버립니다. 마스크를 벗으면 분명 살아있는 사람인데 얼굴이 없어요. 암세포가 점 점 점 점 얼굴을 먹어버리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죄를 묵상하면서 그 얼굴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죄라는 놈은 우리를 그렇게 처참하게 갉아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한센 병에 걸린 사람들처럼 고통을 못 느끼고 계속 그 죄라는 놈에게 자기 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의 모든 서신 서에서 “너희들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롬8:12-13)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3절을 보시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하고 단언합니다. 여기서 너희가 누구입니까? 구원받은 교회입니다. 바울은 같은 로마서 8장1절에서 그 유명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이미 선언해 놓은 뒤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 신자들이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지요? 그러면 이 13절의 제대로 된 해석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받아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육신의 행실을 죽인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이 땅에 남아서 살게 되는 모든 시간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죄를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13절 후반부에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구절이 있죠?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영원한 나라에서는 지금 우리의 육신이 그 정욕으로 말미암아 저지르는 행실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몸의 행실이 죽는다는 것=살리라 인 것입니다. 물론 그 것은 먼 훗날 될 일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이 그 영원한 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맛을 보실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이 육신의 정욕으로 말미암는 더러운 행실이 다 사라진 새 삶을 사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생을 이 땅에서 우리가 맛 볼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우리의 죄와 싸워서 하나하나 이겨 낼 때 그 나라의 맛을 조금씩 맛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계속해서 “죄와 싸우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고전9:26-27)

26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사도는 늘 자신의 몸을 쳤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직 완성된 완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완성품, 걸작, masterpiece가 되기 위해서 자기 몸을 스스로 쳐 나갔다는 것이죠.

(빌3:12-14)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렇게 우리는 온전함을 향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전에 TV를 보니까 24번이나 성형 수술을 한 남자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얼짱 탤런트가 되기 위해서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랍니다. 그 사람 얼굴의 변천사를 보니까 정말 처음하고는 완전히 다른 멋진 미남이 되어있었습니다. 연기자가 되겠다는 작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도 그런 각고의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수술을 한번 할 때마다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우리가 그 정도의 열심이라도 갖고 있습니까? 우리는 열심히 우리의 죄를 죽여가야 합니다. 그게 부르심에 합당한 행위입니다.

(골3:1-5)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사도 바울로 부터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권면을 받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1절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 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구원받고 매일 ”할렐루야, 할렐루야“하다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부터 아주 바빠지는 것입니다.

죄와 싸워야 하고 이 땅의 지체를 죽여가야 하기 때문에 게으를 시간이 없습니다.

(요15:2)

2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완전히 잘라내 버리시지만 과실을 맺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신 답니까? "깨끗케 하시느니라“”카따이로“ ”가지치기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쳐내게 만드신 다는 것이지요.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더럽고 필요 없는 가지를 쳐내듯 죄 죽이기를 힘써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생각 해 봐야죠. 혹시 나는 과실을 맺지 못하는 곧 잘려나갈 나무가 아닌지.

여러분, 죄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욕을 무참하게 박살을 내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갈5:17)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고 싶으시면 여러분이 소홀히 여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셨던 작은 죄들을 하나하나 죽이세요. 이 잡듯 잡아내셔야 합니다. 참 빗으로 싹싹 빗어서 엄지손톱으로 콕 콕 눌러서 죽이듯이 죄를 그렇게 죽이셔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 죄라는 놈이 얼마나 달콤하고 집요한지 성경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가 얼마나 쉽게 죄에 빠질 수 있는지를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히12:1)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죄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표현을 합니다. 죄는 그렇게 우리를 쉽게 얽어매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죄부터도 허용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 죽이기”라는 책을 쓴 존 오웬은 “죄는 뿌리까지 다 말려버려야 한다.”고 까지 이야기합니다.

댐에 작은 금이 간 것을 그대로 놔두면 얼마 있다가 그 댐 전체가 무너져 버리게 되는 것처럼 죄의 파괴력은 그토록 무섭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모든 적들을 다 진멸 하고서 “저 정도는 그냥 놔둬도 우리에게 아무 해를 입히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가사와 가두와 아스돗에 조금 남겨 둔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나중에 낭패를 당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가사의 블레셋 사람들에게 삼손이 죽었습니다. 가두의 블레셋 사람들 중에 골리앗이란 놈이 나왔습니다. 아스돗의 블레셋 사람들에게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그 뿐입니까? 그 때 다 진멸 하지 않은 블레셋 사람들이 지금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지요? 죄는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엄청난 파괴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런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여러분이 원해서, 좋아서, 그 달콤한 죄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었는데 예전과는 달리 그게 여러분을 너무나 괴롭게 만든 경험이 없으세요?

예전에는 남의 돈 떼먹고 하는 것이 “나의 이익”으로 바로 연결이 되어서 떼먹으면 떼먹은 만큼 기뻤는데 언젠가 부터 가슴 한 켠이 답답하고 해가 떠 있는데도 자기 주변만 어두운 것 같은 그런 경험 해보신 적 없으세요? 우리가 구원을 받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후에 죄를 짓게 되면 우리는 너무나 괴롭습니다.

(시31:10)

10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시51:8)

8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나단으로 부터 자기의 죄에 대해 지적을 받고 다윗이 고백한 시입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하나님께서 자기 뼈를 꺾으셨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한동안 죽이지 않은 정욕을 마음에 품고 있었을 때 그는 영적으로 소진되어 완전 파산지경에 처해 버렸음을 다른 시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시38:1-8)

1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2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4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5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6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7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8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이렇게 신자가 정욕을 품고 있으면 실제로 육신이 상하고 피곤하고 불안하게 됩니다.

(시40:12-13)

12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재앙이 나를 에워쌌고, 나의 죄가 나를 덮쳤습니다. 눈 앞이 캄캄합니다. 나의 죄가 내 머리털보다도 더 많기에, 내가 낙심하였습니다.

신자의 죄는 이렇게 자신을 파괴하고 스스로 괴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우울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죄를 죽여라“하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죄가 우리를 죽이니까요.

끊임없이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부지런히 경주해 가는 것은 마치 부지런한 농부가 열심히 밭을 돌보아서 좋을 결실을 맺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는 잡초도 뽑아주고 성냄이라는 돌맹이도 골라내고, 시기, 질투라는 벼멸구도 잡아주고 그렇게 부지런하게 논밭을 돌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를 풍성하게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으르게 그냥 그런 잡초들과 벌레들을 방치한 농부는 결국 잡초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더러 매일 매일 정욕의 잡초를 부단하게 제거하는 데 힘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제가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회심을 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 중에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분들이 계셔서 그냥 저의 설교를 도덕적인 권면으로 받아들여서 “그래, 난 오늘부터 열심히 죄를 죽이면서 살 거야”하고 결심하고 노력하시게 되면 그 분들은 바리새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죄가 뭔지도 모르고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도덕적인 행위를 고치는 것으로“나는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이렇게 가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는 권면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진짜 죄가 무엇인지 알고, 나의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그 죄를 이미 없애주신 주님이 너무 감사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겸손하게 하루하루를 노력하며 경주하게 되는 죄 죽이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뭡니까? 단순하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행동만이 죄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흉한 생각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셨죠? 왜 형제를 가리켜 라가라 하는 자는 살인을 한 것과 같다고 하셨죠? 죄라는 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가시적인 행동이기 이전에 그 마음속에 있는 경향, 의도 이런 것부터가 죄라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는 겨울철이나 봄철에 사과가 열리지 않을 때도 사과나무입니다. 죄의 해결을 받지 못한 죄인이 죄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겉으로 나타나는 죄의 행위를 막을 수는 있어도 그 마음속에 진드기처럼 붙어있는 죄에 대한 경향이나 끌림 같은 것은 해결할 수가 없잖습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연극을 할 수 있습니다.

(행8:9-13)

9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12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마술사 시몬이 빌립이 표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보고 빌립을 전심으로 따라다니며 잠시 마술을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안에 있는 다른 욕심 때문에 마법을 잠시 쉬고 있었을 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와서 안수를 하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시몬이 은을 가져와서 “그거 나도 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뭐라고 하지요?

(행8:23)

23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우리는 이렇게 얼마든지 겉으로 보이는 행위에 있어서 거룩한 연극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시78:32-37)

32이 모든 일을 보고서도, 그들은 여전히 죄를 지으며, 그가 보여 주신 기적을 믿지 않았다.

33그래서 그들의 생애는 헛되이 끝났으며, 그들은 남은 날을 두려움 속에서 보냈다.

34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멸 하실 때에,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으며, 돌아와서 하나님께 빌었다.

35그제서야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심과,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기억하였다.

36그러나 그들은 입으로만 하나님께 아첨하고, 혀로는 하나님을 속일뿐이었기에,

37마음은 분명히 그를 떠났으며, 그가 세우신 언약을 믿지도 않았다.

인간은 이러한 존재입니다. 얼마든지 예수를 믿는다고, 난 회개했다고 할 수 있고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도 너무나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죄에 대한 경향이나 습관이나 정욕은 어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겉으로 드러나는 죄 뿐 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죄에 대한 욕구까지도, 경향까지도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가능할까요? 네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와 고쳐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으니까요.

(사57:18-19)

18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19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워하고 또 그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며 기도하면 우리를 도와 고쳐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 먼저 우리는 우리를 다스리고 있던 죄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 앞에서 무기력한 우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그 죄에 대해서 죽이시고 다시 의에 대해서 살리셨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는 이미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어 버렸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처음에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들은 고래고래 고함을 친답니다. 그러다 점점 힘이 빠져 결국은 소리 없이 죽어 버리게 되듯이 우리의 죄도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포악하게 그의 힘을 발휘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는 이제 우리에 대해 영원히 죽을 것이고, 아니 이미 죽은 것이고 지금 그 죄는 우리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흠집을 내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하며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더럽게 붙어 있는 죽어 가는 죄의 시체들을 털어 내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이 죄와는 절대 친할 수 없는 존재라는 확신 속에서 그 죄를 털어내며, 밟는 것입니다. 그것이 힘에 부칠 때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며 부지런히 죄와 싸워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게 사도 바울이 요구하는 부르심에 합당한 행위입니다.

(고후7:1)

1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약속을 받았으니,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 가운데서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막13:37)

37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요즘 제가 새벽에 일어나면서 한 번씩 읊조리는 구절입니다. “성수야, 깨어있자”

우리 주님께서 오죽하면 이렇게 몇 번씩이나 부탁하고 가셨겠습니까?

(눅21:34-36)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른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시18:20-26)

20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21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2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23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24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25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여러분, 여러분에게 작은 정욕이 일어날 때 항상 생각하세요. 이 작은 정욕에서 출발한 것이 결국 나를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절박함으로 그 정욕을 밟으십시오.

(약1:14-15)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말씀은 정욕의 초동단계에서 진멸 해 버리라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2절로 넘어갑니다. 바울은 2절에서 부르심에 합당한 행위의 구체적인 목록을 기술합니다.

(엡4:2)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그 목록을 보시면 겸손, 온유, 인내, 사랑, 관용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열매들이죠? 네, 성도들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3절까지의 내용은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죄를 죽이는 삶이다. 그렇게 살게 될 때 너희는 비로소 “샬롬” “평강, 평안”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우리더러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 되는 삶을 살아라.“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미 하나 되게 해 놓으신 그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다른 거예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 됨을 이루고 평강을 얻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다 주어져 있는 것을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확인하고 지켜내는 것입니다. 같은 말인 것 같지만 아주 다른 말이죠. 캐톨릭이나 알매니안 주의자들은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탈락이다’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출발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성령에 의해 완성되기로 찍힌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완성이 될 수밖에 없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갈 길, 괜히 멀리 돌아가지 말고 오늘부터 가자“ 그게 우리의 신앙관입니다. 사뭇 다르죠.

그럼 2절에 나와 있는 성도들의 합당한 삶으로 열거된 내용들을 훑어보고 오늘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겸손““타 페이노프로수네” 이 말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이 “타 페이노프로수네”라는 말은 단순히 힘이 있는 사람이 힘이 없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를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 페이노프로수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이 단어는 약자들에게 쓰이는 경멸의 단어였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온유“”프라오테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의 뜻은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 그 힘을 쓰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말인데 역시 비굴한 사람들에게, 혹은 노예들과 같은 억지로 굴종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단어를 쓰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겸손과 온유는 “나의 유익을 위해 상대방에게 분노하지 않고 악의를 품지 않고 모든 심령의 나쁜 것에서 벗어난 상태”를 겸손이요, 온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모델이 예수 그리스도시죠.

(마11:28-30)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을 쉬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쉼“이냐면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없애주시겠다는 물리적인 해결로서의 ”쉼“이 아니라 ”너희 마음의 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운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예수님의 멍에와 짐이 정말 가벼운 것입니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남의 죄를 짊어지고 배반당하고 수난당하고 급기야 죽임을 당하는 것이 쉽고 가벼운 짐입니까? 무겁고도 무거운 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그 짐을 가볍게 느끼실 수 있었던 것이죠? 온유함과 겸손함입니다. 우리가 온유와 겸손을 배우면 모든 상황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나를 위해서 살던 삶을 돌이켜서 남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삶을 사는 것이니까 억울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이 그 온유와 겸손이 무엇인지 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롬15:1-3)

1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겸손이요 온유함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 사는 사회 속에 똑똑한 사람, 성공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똑똑하거나 능력이 있다는 것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똑똑함과 나의 능력이 나의 부가 다른 사람의 누추함이나 열악함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그렇게 자기 자랑이나 자기의 증명용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진 것으로 다른 이들이 혜택을 입게 되는 것이 바로 겸손과 온유의 사람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고후8:9)

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자기의 부요를 풀어 원수들의 가난을 채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과 온유입니다.

또 한사람 겸손과 온유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민12:3)

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모세는 어떻게 이런 온유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무엇을 알았길래 이러한 겸손과 온유를 소유하게 되었을까요? 시편 90편을 보면 모세가 이렇게 온유한 사람이 된 이유가 나옵니다.

(시90:1-12)

1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2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3주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4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5주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는 한 포기의 풀과 같을 따름입니다.

6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7주께서 노하시면 우리 삶이 끝이 나고,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스러지고 맙니다.

8주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

9주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11주의 분노가 발산하는 능력을 누가 알 수 있겠으며, 주의 진노가 가져 올 두려움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12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모세의 겸손과 모세의 온유의 비결입니다. “인생은 짧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과 같다. 얼마나 짧은지 그 시간이 날아간다. 결국 인간은 순식간에 주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 지은 죄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자기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 계수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게 모세의 겸손과 온유의 비결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자기 자신을 위해 악착같이 죄를 지어도 그 시간이라는 것이 날아가는 것이라서 금방 지나가 버릴 것이라는 것을 모세는 안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이가 자기에게 손해를 입혀도 참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가지고 남을 누르거나 잘난 체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실존주의가 옳고 그름의 유일한 확인논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도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아야 잘 믿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나의 가진 것을 부어서 남의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겸손과 온유를 가르치셨습니다.

제 교회 후배 중에 대학교 때 사법시험에 합격한 친구가 있습니다. 일찍 검사가 되어서 권력의 맛을 일찌감치 향유하던 아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친구가 함께 야학을 하던 섬김의 집에 와서 간증을 하는데 “어느 날 밤에 친척집에 다니러 갔답니다. 볼일을 보고 밤늦게 나오면서 차를 후진 하다가 누가 불법주차 해 놓은 개인택시의 문을 받았답니다. 한국은 주차할 곳이 없으면 가로로 막아서 주차를 해 놓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본 사람도 없고 아파트 경비원도 졸고 있더랍니다. 그냥 도망갈까 하다가 그래도 자기가 그리스도인인데 물어 줘야 하겠다는 마음에서 아파트 경비원을 깨웠답니다. 그런데 그 아파트 경비원도 그 차가 누구 차인지 모르더랍니다.

그러면서 그냥 가라고 하더래요. 그래도 이 친구가 자기 연락처를 써서 앞 유리에 끼워놓고 왔대요. 자기가 차를 받았으니까 물어줄 테니 연락하라고.

다음 날 연락이 와서 나가봤더니 이 사람이 정비 공장에 가서 문 짝 뿐만이 아니라 범퍼하고 백미러, 그리고 안에 있는 인테리어까지 다 갈았더랍니다. 자기는 살짝 받은 거라서 얼마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수 백 만원이 나온 거예요. 그래도 끝까지 다 물어 줬대요.

끝까지 웃는 얼굴로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하면서 다 해결을 해 줬답니다.

그렇게 다 해결해 줬는데도 나중에 헤어지는데 자기가 너무 놀라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정신적 피해 보상까지 해 달라고 하면서 십 만원을 더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줬대요. 그리고 돌아서는데 “젊은 놈이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너 뭐하는 놈이야?” 그러더래요.

그래서 저 “서울지검 몇 호 검사입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딱 얼어붙어 가지고 아무 말도 못하더랍니다. 그리고 그냥 왔대요. 제가 뭐라고 그랬겠습니까? ”병신“ 그런 인간들은 혼을 내줘야지 어떻게 그렇게 당하고 오냐” 그랬습니다. 그랬으면 속은 좀 후련했겠지요?

아닙니다. 그렇게 참을 수 없을 때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모세의 시편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인생이 길어야 70이고 강건해야 80인데 그 인생은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꽃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날아가고 있다. 이제 곧 하나님 앞에 서서 내 저지른 모든 것이 드러날 텐데, 그 순간을 준비하자. 이게 겸손이고 온유입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의 에베소서 강해를 보니까 워치만 니의 제자 이야기를 예화로 써 놓으셨더라고요. 그 사람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는데 자기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저 아래 저수지에서 수차를 돌려서 겨우 겨우 물을 댈 수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한 번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거의 한 나절을 꼬박 그 수차를 돌려야 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논에 물을 대 놓으면 바로 아래 논 사람이 물꼬를 살짝 터서 자기 논으로 물을 다 대더라는 것입니다.

매번 그렇게 하고 나면 이 사람은 다음 날 다시 수차를 돌려야 하고 너무 힘들었대요.

그런데 아래 논 주인이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한데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 그냥 묵묵히 참았대요. 그런데도 너무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교회 사람들과 상의를 했답니다. 많은 분들이 “그냥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따끔하게 알려줘야 합니다.“그랬답니다. 그런데 그 중의 어떤 분이 일어서서 ”여러분, 우리가 옳은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일을 한번 해봅시다. 당신 논에 물을 대기 전에 먼저 그 사람 논에 물을 대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 논에 물을 대세요.“ 하시더랍니다. 아무 말 없이 수차례 그렇게 하고 나자 그 아랫집 사람이 예배당에 나타났답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요? 아닙니다. 이게 겸손이요 온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덕목이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을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긴 시련“ 그렇죠?

어떤 사람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인내를 배우고 싶습니다. 제가 인내를 배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주세요. 그랬답니다. 그랬더니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즉시 기도하시기를 “하나님 이 형제에게 지금 즉시 큰 환난을 보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시더랍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화가 나가지고 “목사님 제가 인내를 배우게 해 달라고 했지 언제 환난을 당하게 해달라고 했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이 로마서 5장3절을 읽어주셨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편할 수가 없어요. 겸손해야죠, 온유해야죠, 인내해야죠. 언제 편할 날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음 덕목이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우리가 공부를 할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어울리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 아셨죠?

남들이 다 엉터리로 산다고 해서 여러분, 우리도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피 흘리기까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경주해 내야 합니다. 다른 엉터리 같은 종교 행위 뒤로 숨지 마시고 ,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뒤로도 숨지 마시고 여러분의 손과 발을 움직여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지금부터 사십시오. 죄를 죽이고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관용과 사랑과 하나 됨을 지켜 내십시오.

바� �>� �y �;y ne-height:150%;layout-grid-mode:char;text-align:left;">바울은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한마디로 해 줍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key point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구원의 발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롬11:30-32)

30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비밀인 하나님의 구속 사, 이 모든 구원의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엘레오’라는 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가 죄인들에게 나타난 형태입니다. 은혜는 은혜인데 은혜 안에서도 특별히 죄로 인해 망가지고 더러워진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품어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을 ‘긍휼‘’엘레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죄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멸망, 저주, 불이익 등을 없애 주시는 것입니다.

(시51:1)

1(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다윗이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인 다윗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합니까? 긍휼을 구합니다. 긍휼은 그렇게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용서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103:8-14))

8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게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런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들의 죄를 아예 보지 않으십니다. 아니 그 죄까지도 품어 안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자기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고도 떳떳하게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해서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과 태도와 감정을 직접 하나님께 투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내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못 마땅함과 수치스러움과 지기 혐오를 하나님께 그대로 투사해서 내가 내 자신이 미워지면 하나님께서도 당연히 자기를 그렇게 미워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래넌 매닝스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향해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악을 용인하시지 않으시지만 우리 안에 악이 있다고 해서 그 분의 사랑을 감소시키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 긍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기분 때문이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로마서 전체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근거를 찾아내셔서 그 것을 근거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서 품에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죄는 자꾸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즉각 적으로 자기혐오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을 하나님께 투사해서 하나님도 나를 절대 용서치 않으실 거야“하고 불안해하고 숨게 만듭니다. 죄를 짓는 것은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혹 우리가 죄를 지었더라도 여러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 뜨거운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를 택하셨고 택하신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좀 더 뻔뻔스러워 지세요. 자기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이렇게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십시오. 이 복음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아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