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61) 벗고 입기 (엡4:20-24)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24

(61) 벗고 입기

(엡4:20-24)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주는 “너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삶을 살지 말라“ 라는 권고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잠깐 복습을 하고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사람, 우리의 옛 사람은 어떻게 산다고 했습니까?

첫 번째로 그들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허망한 것 “마타이오테스”는 “초점이 없는 것, 텅 빈 것, 목표지점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행함이라는 단어”페리파테오“”전체적인 삶의 방식“을 말한다고 했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그들의 모든 삶의 방식이 다 텅 비고 허무한 것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두 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총명이 어두워져 미련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지혜 있고 똑똑한 줄 알지만 총명이 어두워져 미련한 짓만 행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우상에다가 아이를 바치고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고 하는 그런 미련하고 어리석은 수준에 있으면서도 인간들은 자기들이 지혜 있다고 착각하지요.

세 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마음에 화인을 맞아 마음이 굳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적대시합니다. 책방에 있는 수많은 반기독교 서적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고 했지요.

네 번째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방탕합니다. 이 “방탕”“아셀게이아”는 불필요한 것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생명과는 상관없는 불필요한 것들을 좇아 살다가 허무하게 삶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허무한 삶의 내용을 기술한 후에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마치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까지에서 인간들의 죄의 내용을 낱낱이 고발하고 나서 3장 21절에서 ”그러나 이젠“”누니 데“로 시작하는 것처럼 오늘 본문 20절도 ”누니 데“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예전에 그 로마서 3장을 공부하면서 얼마나 감격을 했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인간들의 처절한 실체를 샅샅이 훑고 난 뒤에 ”그러나 너희는“이라고 대 반전을 일으켜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습니까?

오늘 본문도 바로 그 감격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도 그렇게 허망하게 미련하게 목표 없이 시간을 허비하며 욕심을 좇아 방탕하게 살수밖에 없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를 배우지 않았느냐” 그게 20절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허망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허망한 그 세상 속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 세상 속에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어떻게 아직도 그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살 수 있느냐“ 이게 사도 바울의 권고의 요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도 똑같은 권고를 합니다.

(갈1:4)

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왜 예수님이 죽으셨어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려고,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그 세상에서 나온 상태라는 것입니다)

(시40:2)

2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벧전2:9)

9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17:14)

14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이렇게 우리는 그 세상 속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 것입니까?

(골1:13)

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빌3:18-20)

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0절을 보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이다”입니다. 그래서 그 하늘의 시민들은 이제 이 허망하고, 초점 없고, 방탕하고, 미련하고, 무감각한, 땅의 삶에서 벗어나서 하늘의 것을 생각하며 그 하늘의 것들을 위해 이 땅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18절 19절을 보시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원수”라고 나오지요?

어쩌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로 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땅의 것에 몰두하고 사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정부는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늘 정부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고후6:14-16)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이렇게 세상과 섞여서는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산 위의 마을입니다. 말 아래 있는 등불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밝게 세상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사람 들 앞에서 “나는 이렇게 순결하고 정직하게 삽니다.”라고 나팔을 불지 않아도 순결한 우리의 삶의 방식“페리파테오”가 사람들에게 드러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어두운 세상에서 “나온”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개화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세상에서 나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어서 거기서 나오라고” 열심히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회 복음이니 해방 신학이니 해서 그 사회를 한번 멋지게 변화시켜 보겠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시도인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에 존 번연의 천로 역정을 인용한 부분이 있어서 여러분께도 한번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존 번연은 우리 신자들의 삶을 너무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우리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게 기술해 놓은 사람입니다. handout에도 적어놓았으니까 한번 보세요.

“그 때에 나는 내 꿈속에서 그들이 광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때에 그들 앞에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그 마을의 이름은 ”허영“이라는 마을이었다.

마을에 가까이 가보니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그 시장의 이름은 “허영의 시장”이었다.

그 이름이 “허영의 시장”이라고 붙여진 것은 이 시장에 물건을 팔러오는 사람이나 그리로 물건을 사러 오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허영에 들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혜 자가 “모든 것은 다 헛되다.“ 라고 외친 그 허영들을 사고팔고 있었다.

그런데 이 허영의 시장은 근래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세워져 있었다.

그 시장의 세워진 내력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지금 두 정직한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천성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가는 것과 같이 5천여 년 전에도 사람들 중에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천성을 향하여 가는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바알세불이나 아폴리온과 레지온의 세 악한 마귀들이 그의 동류들과 한 짝이 되어서 이 허영의 마을에 온갖 허영을 파는 시장을 세워 놓고 연중무휴로 장을 열기로 고안을 하였던 것이다. 이 시장에서 파는 상품으로는 가옥, 토지, 직위, 명예, 진급, 귀족칭호, 국가, 왕국, 치정, 향락, 그리고 매춘부, 뚜쟁이, 아내, 남편, 어린이, 하인, 생명, 피, 육체, 영혼, 은, 금, 진주, 보석 등등 온갖 갖가지 오락물과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이 시장에서는 언제나 요술사, 사기꾼, 도박꾼, 연극, 바보, 원숭이, 악한, 장난꾼, 그 밖에 온갖 못된 놈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여기서는 도적질하는 사람, 살인하는 사람, 거짓 맹세하는 사람, 피처럼 붉은 얼굴을 가진 사람들을 돈이 없어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천성을 향하여 가려면 육적인 욕심의 상품으로 가득 찬 시장 거리를 지나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시장 거리를 지나지 않고 다른 길로 들어서서 천성을 향하여 가려는 사람은 불가불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만왕의 왕으로 계시는 예수님께서도 이 시장의 주인인 바알세불이란 마귀에게서 허영을 사라는 권고를 받으셨다. 그 마을 거리를 지나가시면서 예수님이 그 마귀의 권고를 귀하게 여기고 들었더라면 그는 이 시장의 주인이 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존귀한 분이라는 것을 아는 바알세불이 그를 모시고 이 허영의 시장 거리를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고 이 세상의 왕국을 보이면서 어찌하면 이 복된 예수님을 꾀어서 허영을 사도록 할까 꾀를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허영의 시장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에는 전적으로 무관심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허영을 사기 위하여 돈 한 푼을 안 쓰시고 그냥 그 시장을 떠나셨던 것이다. 그런데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순례자들은 이 시장을 통과하지 않고는 천성을 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과 신의(信義)라는 두 순례자는 이 읍을 지나야만 했다. 그들이 들어서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읍내 주위 전체가 법석을 떨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이 두 순례자가 입은 옷은 이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입은 옷과는 아주 달랐다. 그리하여 그들의 옷을 눈여겨 바라보는 시장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 두 순례자들을 바라보고 놀리기도 하고 더러는 이 사람들은 미쳤다고 욕설을 하기도 하고 이 사람들은 외국인인가 보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그 곳의 사람들이 이 두 순례자들의 말도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순례자들은 그 허영의 시장에서 쓰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그 시장의 사람들은 그 순례자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이 순례자들과 그 허영의 시장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했다.

셋째로 두 순례자가 이곳 상품을 경시하여 눈여겨보지도 않는 것이 이 시장의 장사꾼들을 화나게 하였다. 상인들이 사 달라고 소리를 지를 때마다 순례자들은 귀를 손으로 막고 “내 눈을 돌이켜 허망한 것을 보지 말게 해 주십시오”라고 울부짖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위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위를 쳐다보는 이유는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더 좋은 하늘의 것들을 사겠습니다.”라는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존 번연은 세상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정확하게 간파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존 번연의 말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외모를 치장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에도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세상 풍조를 좇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허영의 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자질구레한 것들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보물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사고 팔 것이 없습니다.

(골3:1-2)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이 허영의 시장에서 팔리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위엣 것을 찾는 삶을 살 수 있는가? 20절에 답이 나오죠? “너희가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웠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움으로 말미암아 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그 삶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기 전의 우리는 “not able not to sin"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죄인들은 모두 죄만 짓다가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굳은 마음을 갖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중의 어떤 한 무리에게 예수님을 배울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배울 수 있게 된 그 무리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워갑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딤전2:4)

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즉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거기 쓰인 접속사 “카이”가 여기서는 동격을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구원은 곧 진리를 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진리를 아는 것이다” 정말 우리가 지식적으로 진리를 알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우리 주변에 성경의 교리에 아주 능통한 사람이 결국 예수를 부인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요? 그럼 아는 게 곧 구원이라는 말이 단순히 지식 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안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 적인 습득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나에게 경험되어 체득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추구하던 세상의 가치가 덧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추한 것인지도 알게 되고 지금 영위하고 있는 삶의 저 너머를 궁금해 하게 되고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될 뻔했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이제는 이 허영의 시장에서 거래되는 이런 것들에 눈 두지 말자“”그리고 그 하늘나라 백성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 내자“하고 경험으로 체득하게 되는 것, 그 전체를 가리켜 ”그리스도를 배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죠.

(전7:25)

25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전9:3)

3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그러니까 그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초점 없이 허망하게 막 살아서는 안 되겠다“하는 곳까지 가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안다”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삶은 미친 짓이라는 것을 깨달으셨습니까? 그럼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배우신 분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에게 어떻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목사에게 배우나요? 물론 목사에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지식적인 정보에 불과 한 것입니다. 그럼 누구에게 배울 수 있습니까?

(요일2:27)

27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고전2:12-13)

12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십니까? 성령)

13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여러분은 성령께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에 있어서는 이 땅의 지식, 학벌, IQ 이런 것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버드 출신이라고 해서 예수를 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훌륭한 학자라고 해서 예수를 더 깊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IQ 200의 천재라고 해서 그가 다른 사람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를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이 직접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는 그저 밭이나 갈던 농사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 부분 무식한 어부들이었습니다. DL Moody나 리챠드 벡스터는 일자무식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윌리암 캐리, 존 번연 모두 무식한 구두 수선공들이었습니다.

DL Moody의 설교를 지식인들이 듣고 매번 50군데 이상의 문법과 맞춤법이 틀린 곳을 찾아내었답니다. 그런데 그 무식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난다, 긴다하는 지식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다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그렇게 이 땅의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골의 일자무식 할머니들의 신앙이 그렇게 좋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들이 조직신학을 아십니까? 성경 신학을 아십니까? 그런데도 그냥 “예수“하면 감격을 하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전에 제가 중등부 때 수련회를 갔었는데 그 때 우리에게 설교를 하러 오신 분이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신 우리 전도사님 할머니셨습니다. 그런데 옥색 명주 한 복을 입으시고 바위 위에 올라서서 얼마나 유창하게 복음을 설명하셨는지 모릅니다. 아마 제가 그 때 처음으로 ”진짜 복음“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짓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2:8)

8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죽으신 것입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되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십자가에서 모두 도말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그 죄 속에서 뒹굴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내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리라”하고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고전6:9-11)

9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남창 노릇을 하는 것)나 남색하는 자(동성연애)

10도적이나 탐람하는 자(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뒤에서 남 욕하는 것)나 토색하는 자(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전에는 그렇게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을 했었지만 성령 안에서 씻음을 받고 성령께 예수 그리스도를 배운 후에는 그런 것을 안 하는구나“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아도 여전히 삶이 지저분하고 너절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안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여러분, 성경 많이 아시죠? 그걸로 자랑도 많이 하셨죠? 그러나 그 지식이 우리 삶을 바꾸지 못합니다. 담배의 해악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 다니는 제 선배는 하루에 담배를 4갑을 피웁니다. 폐암 전문 내과 의사입니다.

알콜 중독이 얼마나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지 아는 사람들이 절대 그 지식으로 술을 못 끊습니다. 마약과 도박이 얼마나 가정을, 그리고 자신을 파괴하는지를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것을 안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몰라서 못하나요? 알아도 내가 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죠? 우리 경험해 봐서 알잖아요. 우리는 너무나 약합니다. 그래서 알지만 여전히 끌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성령의 도우심과 가르치심이 없으면 말짱 헛것입니다.

오히려 그게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많이 아는데 그 것으로 자기가 왜 술을 마셔도 되는지를 입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아무 구애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식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풍부한 성경 지식으로 왜 교회가 필요 없는 지를 설명합니다. 그건 저주입니다. 그렇게 성령 하나님과 관계없는 우리의 지식은 우리를 망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내 질 때 “이건 내가 내 지식으로 내 의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도우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혀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식적인 것이 아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듣지 않고 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알고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기본입니다. 그렇게 습득된 지식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게 삶 속에서 체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구절의 진의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21절을 보시면

(엡4:21)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바울은 우리가 배우는 그 진리가 “예수” 안에 있다고 설파합니다. 제가 전에 4 복음서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이 홀로 독립적으로 자주 쓰이지만 서신 서에서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주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이름 ”예수”가 독립적으로 쓰이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그 분은 부활하시고 승귀 하셔서 하나님 우편의 왕좌에 않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 예수의 이름으로만 그 분을 부르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 드렸지요? 그러면 여기 본분에 쓰인 예수는 어떤 예수이겠습니까?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만 쓰였잖아요. 이 말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 진리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의 역사성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들이나 사상들처럼 어떤 개념이나 이론으로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냥 여느 종교들처럼 그 가르침들이나 이론을 잘 습득해서 우리의 의지를 발동해서 잘 살아내면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라는 거짓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에 관한 기적과 이사들, 초월적인 것들은 단지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동원된 ”픽션“이라고 기독교의 진리를 몰고 가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 처녀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후에 실제로 골고다에 섰던 그 십자가를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물위를 걸으셨던 인간 예수를 우리는 믿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다섯 덩이의 떡 조각으로 2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신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믿습니다. 진리는 바로 그 인간으로 오셨던 “예수“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개념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이며 역사입니다.

그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기 위해 설정된 인물이 아닙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상징하는 어떤 가르침”이 나를 구원한 것 아닙니다. 바로 그 “예수”가 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진리“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베들레헴에 태어났던 인간 예수 안에 있는 진리”

(행4:11-12)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요14:6)

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어줍지 않은 세상 지식으로 엉터리 예수를 만들어 내는 마귀의 속임수에 속지 마십시오.

다빈치 코드요? 웃기지 말라고 하세요. 거기에 혹 하신 분들 계시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니까요. 저한테 오세요. 제가 성경을 가지고 구구 절절이 왜 그 책이 틀렸는가를 설명해 드릴 테니까 잘 들으세요.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에 흔들리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배우고 아신 분들은 여러분이 배우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든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벧전3:15)

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운 자, 지식 적으로만이 아닌 삶 속에서 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득한 사람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든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나는 기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행복합니다.” 이건 설명이 아닙니다. 이슬람 교인들도, 불교인들도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실제로 그들도 그들의 신앙으로 기뻐하고 행복해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들과는 다른 설명을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어야 했는지 그 분이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으로 살다가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으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될 뻔 한 인간이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떠한 소망이 있는지, 그래서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를 설명을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래서 난 구원받았고 그래서 난 기쁘다.“ 단순히 지식적으로만이 아닌, 진심으로 이 예수를 설명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운 자입니다.

계속해서 21절 후반부를 보세요.

(엡4:21)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진짜로 예수에게서 진리를 듣고 또한 그 예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방입니다. 그 에베소 사람들이 예수 님 생전에 예수님께 설교를 들었을 리가 만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희가 예수에게서 듣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 예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요5:24-25)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언제 어떻게 들으셨어요? 못 들었죠? 그럼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분명 예수님께서 “나의 음성을 들은 자들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살아나게 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서 승천하실 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약속을 안 지키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부활의 몸을 입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예수로 와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귀한 시간을 쪼개서 교회가 모이는 곳에 나와 앉아 계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라고 시인하게 되셨습니까? 고린도 전서 12장 3절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여러분은 누구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된 것입니까? 성령하나님, 성령하나님은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들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듣는다.”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22절을 보세요.

(엡4:22-24)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렇게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에게서 듣는 자들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와 세상의 윤리 도덕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윤리 도덕은 “옛 사람을 벗는”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 하지 마라, 저것 하지 마라” 이게 도덕의 진수입니다. 이건 아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입니다.

“왜 새벽기도 안 나와?” “왜 주일 날 자장면 사먹어?” 이런 것 가지고 목숨 거는 사람들 많지요? 기독교는 거기서 더 많이 가야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옛 사람을 벗는 것 뿐 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 있습니다. 뭘까요? “거룩”입니다. 그게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언제나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거지가 누더기를 벗어버리는 것은 새 옷을 입기 위해서입니다. 누더기를 벗긴 벗었는데 새 옷을 안 입고 계속 벌거벗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미친 사람” 되는 것입니다. 벗는 다는 것은 다른 좋은 것으로 입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셨습니다. 죄에서 건져졌다는 것은 옛 사람을 벗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냥 건진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딛2:14)

14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죄에서 나와서 선한 이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를 안 짓는 것에서 멈추는 것은 기독교를 반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섬김과 겸손으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구원과 거룩의 삶을 분리하는 것만큼 복음을 부인하는 죄악 적인 것은 없습니다. 모든 구분 중에서 가장 무서운 구분은 우리가 믿는 바와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고 핑계 대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누가 복음에 보면 사람에게서 나온 악한 귀신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악한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서 두루 지낼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다시 자기 있던 곳에 와 봤더니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어서 그 귀신이 다른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가서 사정이 전보다 더 악해졌다“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그저 도덕적인, 윤리적인 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소극적으로 정의해 버리면 우리는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바리새인 같은 모습은, 겉은 번드르르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옛 사람은 벗어버린 것 같은데 뭘 입지 않고 계속 벌거벗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건 아주 악한 위선이요, 외식이요, 쇼라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그게 교만으로 변해서 더욱더 악한 지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꼭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왜요? 아직 용서가 뭔지 포용이 뭔지 이해가 뭔지 인내가 뭔지 섬김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주일학교를 맡고 계실 때, 여름 성경학교가 끝나고 주일학교 교사들하고 전부 뚝 섬에 가서 회식을 하셨답니다. 일주일 동안 수고 하셨다고 서로 서로 격려하면서 밥도 먹고 수박도 잘라먹고 막 가려고 하는데 교사 중 하나가 벌떡 일어서더니 “이게 뭡니까?” 그러더래요. 그래서 다들 수박 먹던 거 물고서 그 청년을 쳐다 봤다지요. 그 선생님 왈 “우리가 먹은 이 밥 값이면 가난한 농어촌 교회 몇 군데를 도와 줄 수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수박까지 먹어야 합니까? 수박은 안 먹어도 살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죠. 다들 아무 말도 못했답니다. 그 때 선생님들이 수박 먹은 게 전부 얹혀 가지고 아주 우울하게 다들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꼭 그런 인간들이 있어요. 아니 수박 좀 먹으면 어때요. 그렇게 농어촌 교회가 안타까우면 자기가 좀 돕던가, 꼭 헌금도 안 하는 인간들이 그렇게 대놓고 사람들 무안을 준다고요. 자기가 보지도 못한 농어촌 목사님들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왜 자기 곁에 있는 선생님들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난도질을 합니까? 왜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해요. 그 때부터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상한 기류가 일기 시작했답니다. 선생님들이 회의 하다가 그 선생이 휴지라도 흘리고 가면 “우리가 이렇게 휴지를 흘리고 가면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얼마나 고생하시겠습니까?”, 그 선생이 조금만 늦어도 “아니 예수 믿는 사람이 시간관념이 그렇게 없어서 되겠어요?” 다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 아니죠. 옳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아내가 가스 불을 켜 놓고 나가는 바람에 집에 불이 났습니다. 울고불고 하는 아내에게 “그러니까 내가 가스 불 켜 놓고 다니지 말랬잖아” 그렇게 말하는 게 옳습니까? 아내가 잘 못했지만 “괜찮아” 하며 위로해주고 안아주는 것이 옳은 것이죠.

교통사고가 나서 조서를 받고 있는 친구한테 “그러 길래 평소에 속도위반하지 말랬잖아” 그러면 됩니까? “어디 안 다쳤니?” 가 옳은 것이죠.

교인이 사업이 망했는데 거기다 대고 “주일을 밥 먹듯 빼 먹더니 하나님한테 벌 받은 거야”

그러는 바람에 달마사로 간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제가 드린 hand out에 위 아래로 여백이 많지요? “왜 종이 아깝게 이렇게 빈칸을 많이 남겨 뒀어요? 다음부터는 맨 위에서부터 맨 아래까지 빼곡하게 써주세요”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만 옳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여백의 미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런 여백이, 융통성이 좀 있어야지요. 원리 원칙에서 머물러서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은 복음을 아직 반도 못 이해한 사람입니다. 상대방이 뭘 잘 못했다 하더라도 먼저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 하고 이해를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셔야지, 그냥 돌격해서 받아버리는 것은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남편이 아직 술을 못 끊고 있습니까? 어떻게 교회 다니는 인간이 아직도 술을 못 끊느냐고 바가지 긁지 마세요. 남편들도 다 살자고 그러는 거예요. 그 남편은 술을 마셔서 뇌를 마비시켜서라도 여러분 같은 아내하고 끝내 헤어지지 않고 살아 보려고 가끔 뇌를 마비시키는 거예요. 그게 잘하는 짓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좀 이해심을 갖고 보자는 겁니다.

“아무개 집사가 교회 앞에 와서 담배를 끄고 들어왔다“ 그럼 뒤에서 수군대지 말고 ”와, 아직 담배도 못 끊은 사람이 어떻게 꼬박 꼬박 교회를 오냐, 참 그 정성이 갸륵하다.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셔“ 왜 이리로 못 가시냐는 말이에요.

전부 자기네 목사를 닮아 가지고 때리고 부수려고만 그래요. 전 여러분에게 옳은 것을 가르쳐 드리기 위해 소리를 빽빽 지르는 거지, 절대 여러분을 무시하거나 미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끼리는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해 주시면서 서로 서로 잘 자라 가셔야 합니다.

너는 틀리고 나는 옳다는 것을 증명함으로 다른 사람이 정죄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 공부 이렇게 많이 하는데, 너는? 나는 새벽기도 매일 나오는데 너는? 나는 교회 봉사 이렇게 많이 하는데 너는?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 되는데 쓰여야 하는 것이지 분열을 가져 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벗은 자는 반드시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벗어버리고 입는다.”는 말 “아포 떼스따이”“엔 뒤 사스따이”는 둘 다 부정 과거 시제입니다. 이미 과거에 영 단번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22절의 ‘벗어 버리다’‘아포떼스따이’와 23절의 ‘새롭게 되다’‘아나떼우스따이’, 24절의 ‘입다’‘엔두사스따이’는 모두 결과를 나타내는 부정사 혹은 설명형의 부정사로 해석을 해야 하는 것으로 그 부정사들은 모두 21절의 ‘너희가 가르침을 받았다’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구원 받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과거에 옛 사람을 벗어 버렸고 새 사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미 다 일어나 버린 일인데 왜 우리에게 또 벗고 입으라는 요구를 하는가? 그 대답이 원문에는 나옵니다. 벗고 입으라는 단어는 부정 과거 시제지만 23절의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아나뉴스따이“는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진행의 의미“가 있다고 했지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이미 옛 사람을 벗어버렸고 새 사람을 입고 있는 사람이지만 현재의 삶 속에서 계속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already, not yet"의 교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로 한번 가보시죠.

(골3:9)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여기서도 분명하게 “옛 사람을 벗어 버려라”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미 옛 사람을 벗어 버렸고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신분적이며 운명적인 선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옛 사람을 벗어가야 하고 새로운 사람을 입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not able to sin"을 향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못 합니다. 오직 우리만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그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능력을 힘입어 우리는 우리가 이미 벗은 옛 사람을 매일 매일 벗어버릴 수 있고, 우리가 이미 입은 새 사람을 매일 매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에 보면 ”우리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선언이 있습니다.

(롬6:6)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For we know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so that the body of sin might be done away with, that we should no longer be slaves to sin--

우리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럼 이미 죽었는데 뭘 벗어버리라는 말인가?

여러분, 로마서 5장이나 고린도 전서 15장에 보면 우리는 날 때부터 아담 안에서 태어난다고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모두가 바로 “옛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 사람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이 옛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옛 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는 사람은 그 옛 사람이 죽은 사람만이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지 않은 사람은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모든 악한 것들은 이미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옛 사람은 살아있는 것처럼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것은 옛 사람이 아직 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붙어 있는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너무 오랜 시간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그 어두운 죄 속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그 습관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는 말입니다. 이미 죽은 그 옛 사람을 빨리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아냐, 네 옛 사람은 아직 안 죽었어.“ 이렇게 우리를 속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자포자기(自暴自棄) 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계시면 여러분의 옛 사람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단지 그 옛 사람의 습관이 여러분을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 죽은 껍데기를 얼른 벗어버리십시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노예들이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들 중 대부분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오래 주인이 시키는 것만을 하는 단순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하는 자유인의 삶보다 그렇게 노예로 사는 것이 오히려 더 익숙하고 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습관은 무서운 것입니다.

제가 전에 한번 말씀드렸죠? 군대에 있을 때 저를 몹시도 괴롭히던 고참이 있었습니다. “제대하고 사회에 나가서 저 놈을 길에서 만나면 저 놈의 모든 이빨을 새 걸로 갈아주리라”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제대하고 몇 년 후에 진짜 그 고참을 길에서 만났는데 때려 주기는커녕 “충성” 하고 경례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우리가 저지르던 그 못된 죄들, 악한 말들, 모난 성격들 다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죽은 시체를 우리는 매일 매일 벗어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벗으세요. 그리고 거룩의 옷을 입으세요. 용서의 옷, 인내의 옷, 섬김의 옷, 사랑의 옷 새 옷을 입으세요.

그런데 22절을 보시면 “그 옛 사람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의 삶은 전부 썩어져 가고 있고 썩게 만드는 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여러분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일에 소홀히 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이 하시는 일들도, 썩어져 가고 있는 일이고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썩게 만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인류가 문명을 발달시켜서 이루어낸 것을 스스로 자랑하고 있지만 우리는 결국 이 우주를 썩혀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휴가 때 어떤 곳을 선호하세요? 우리 영이가 캠핑을 자주 가는데 보통 어디로 캠핑을 갑니까? LA downtown으로 갑니까? 63빌딩 옥상으로 가나요? 사람들은 자기들의 쉼을 위해서 문명의 때가 조금이라도 덜 묻은 곳으로 떠납니다. 그래서 푸켓이나 미얀마, 피지 이런 미개한 나라의 휴양지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편한 삶을 위해 문명을 발달시켜 지상 낙원을 이루려고 하는 인간들이 정작 쉼을 위해서는 문명이 닿지 않는 곳을 선택합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문명은 결국 지구를 썩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덜 썩은 곳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삶이 바로 그 썩어져 가는 구습입니다.

(갈6:7-8)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 썩어짐의 끝이 어딥니까? 사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옛 사람의 삶, 썩어져 가는 것들을 추구하는 세상의 삶 속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2절은 그 썩어져 가는 구습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밝혀 줍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바로 욕심입니다. 이 “욕심”이라는 단어는 전에도 한번 설명해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원하고 원했다“ 가 오늘 본문에 ”욕심“으로 번역이 된 ”에피뒤미아“입니다. 그러니까"에피뒤미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먹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처럼 인간이 간절히 원하는 모든 것을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나쁜 의미의 단어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본능, 욕구가 있습니다. 식욕, 성욕 같은 자연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그게 나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게 나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 안에 나쁜 것을 창조하신 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러한 본능을 통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본능과 함께 두뇌와 생각하는 이지와 양심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본능들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인간의 마음으로 다스리고 통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본능들이 “에피뒤미아”가 바른 위치에서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이지와 이해의 통제를 받게 되면 그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고 이제 그 본능이 인간의 마음을 통제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본능이 주도권을 잡고 인간을 지배하게 되면 그 때부터 그 본능은 욕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정욕이나 본능이 이지를 침묵케 하고 양심과 하나님의 소리를 묵살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그 “에피뒤미아”라는 단어가 인간에게 쓰일 때는 나쁜 의미로만 쓰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욕심은 “유혹”이라는 것이 통제합니다. 22절에 보시면 “유혹의 욕심”이라고 나오지요? 이 “유혹” “아파테스”“기만, 속임수”라는 뜻입니다. 기만과 속임수는 누구의 무기입니까? 사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은 그 사단의 손아래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11:3)

3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그 사단은 아주 달콤하게 인간을 미혹합니다.

(잠2:16)

16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잠5:3-4,20)

3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4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20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

(잠6:25-26)

25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26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이렇게 사단 마귀는 아주 매력 있고 달콤한 모습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본능이 욕심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탕자를 생각해 보세요. 그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을 때 그의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의 비위를 맞춰주며 나만 따라오면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그리고 삶이 행복해 질 거라고 얼마나 아부를 했겠습니까? 하지만 그 모든 유혹들은 탕자의 주머니를 완전히 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떠나 버렸습니다. 결국 그 탕자는 먹을거리를 위해 돼지와 다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결국 그런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온통 자기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행복이 영원할 거라 믿고 있겠지만 결국 돼지우리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 마귀의 유혹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단 일초도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없는 여전히 약한 존재입니다. 예전에 한국에 “다라 붕어 낚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라에다가 붕어 몇 마리 갖다놓고 100원씩 내고 낚시 하는 겁니다. 물론 잡으면 다시 놓아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붕어들이 금방 잡았다 놓아줘도 또 금방 미끼를 뭅니다. 그래서 윗입술이 아주 너덜너덜해 지죠. 우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 더러운 유혹에 빠져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의 삶을 살지 않도록 성령 하나님께 열심히 부탁하며, 의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그 죽은 옛 사람을 빨리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매일 매일 입으십시오.

�� 좋& �>���y �;y �냐고요? 맛있으니까? 그러나 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경호는 개를 좋아합니다. 맛있으니까. 자기에게 유익이 되니까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개를 키우려면 많은 손이 가기 때문입니다.

지영이는 개를 사랑합니다. 내가 그 개를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도 내야하고 똥오줌도 치워야 하고 오히려 객관적으로 볼 때는 나에게 손해입니다. 그렇지만 호야의 유익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수두룩할 것입니다. 나의 아내, 나의 남편, 내 자식, 내 형제, 내 자매 그렇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바로 그 사랑을 연습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쿠폰이 생겨서 월요일에 아이들과 함께 유니버설 스튜디오라는 곳엘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쇼의 90%이상이 전부 마귀, 귀신, 머미, 드라큘라 같은 흡혈귀 이런 것을 소재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준다는 것이 귀신 복장을 하고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놀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너무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구니까 나중에는 짜증이 나더라고요. 그러지 않아도 무서워 죽겠는데 자꾸 시커먼 놈들이 놀라게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아마 지옥인 것 같았습니다. 피 비린 내가 진동하는 어떤 곳에 수많은 벌거벗겨진 채 앉아 있었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제가 낮에 본 그 모든 귀신들이 전부 살아서 실물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퍼런 도끼를 들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 한 사람 씩 불러서 커다란 원판에 묶어 놓고 그 원판을 돌리면서 도끼로 그 사람들 퍽 퍽 찍었습니다. 팔 다리가 쩍쩍 찢어지고 피가 튀는데 묶여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억울하다는 듯, 이를 가는 겁니다.

조금 있으면 제 차례가 오는 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 공포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왜 내가 여기 와 있는 거지? 하나님 저 좀 구해 주세요. 제발 여기서만 벗어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순간 알람이 울려서 잠이 깼습니다. 그게 꿈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모든 게 새로워 보였습니다. 집사람이 옆에서 자고 있는데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 방에 가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모두 천사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그토록 무시무시한 사망에서 나를 건져 주신 것이구나, 참 실감이 가는 새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경고를 오히려 재미삼아, 놀이 감 삼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섬뜩하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나중에 우리는 그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심판에 던져지게 될 텐데 사람들은 태연하게 그 것들을 놀이 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기서 건져진 것입니다. 거기서 건져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서 건져주신 그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열심히 훈련하는 것, 그거 외에 우리가 무엇에 욕심을 두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보내는 이 일초 일초가 모여 일분이 되고 이 일분이 모여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모여 우리의 일생,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내는 이 일초, 일 분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을 어떤 것과 계속 바꾸시면서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생명을 무엇과 바꾸시면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할 교회와 여러분의 성숙에 더욱더 매진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더욱 더 진지해 지십시오.

(엡4:7,11,12)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