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세상을 책망하라
(엡5:11-14)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계속해서 사도가 가르쳐준 기독교의 교리를 실제적으로 적용시키면 어떠한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하는지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시면 다시 한 번 “너희는 열매 없는 일에 참여하지 말고 오히려 책망하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사도는 지금 계속하여 반복해서 어두움에 속한 자들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는 더욱 확고하게 왜 우리가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지 쐐기를 박는 첨언을 합니다. 뭡니까? 그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니까 절대 그런 것들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권고의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1:1)
1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 기자가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의 첫 번째 덕목은 세상 사람들의 삶과 생각과 그들의 충고를 따라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함께 서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복 있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앉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전5:1-2)
1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하기를 왜 너희 중에 더러운 일을 행하는 자들을 쫓아내지 않았느냐고 야단을 치고 있습니다. 2절에 “물리치다“”엑사이로“는 ”몰아내다, 쫓아내다”라는 뜻입니다. 너희 중에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 반드시 쫓아 내버리라는 바울의 권고입니다. 그리고는 13절에서 다시 악한 사람들은 내어 쫓으라고 강하게 권고를 합니다.
(고전5:13)
13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이러한 구절들을 근거로 중세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어두운 세상의 일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족도 생업도 다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서 아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수도원 운동이었습니다. 사독 계열의 사람들이었던 엣센파, 쿰란 공동체도 바로 그러한 이유로 평생을 결혼도 안 하고 토굴 속에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 그런 것일까요?
우리가 지금 읽은 고린도 전서 5장을 전체적으로 잘 보면 거기에 대한 답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신자들아 악한 자들을 내 쫓아라”라고 명령을 하고 있는 1절과 13절 중간인 9절을 보시면 바울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전5:9-10)
9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 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 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 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바울은 1절과 2절, 그리고 13절에서 음행 하는 자들을 다 쫓아내라고 말한 후에 9절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다 쫓아내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다 쫓아 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요한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배웠다시피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전투하는 군사“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그 말은 우리가 누구와 전투하는 군사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세상과 전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세상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세상 속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더러 세상과 싸우라고 명령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세상과 싸우실 힘이 부족해서 우리더러 함께 싸워 달라는 것입니까? 아니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세상과 싸우는 전투를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고, 이해시켜 주시고, 우리 안에 자라나게 하실 무엇이 있기 때문에 우리 더러 세상과 싸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런 구절들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한 쪽에서는 악한 자들을 쫓아내고 사귀지 말라고 하고 한 쪽에서는 ‘그러면 너희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우리가 읽었던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의 권고나 시편 1편의 권고들, 그리고 지금 본 고린도 전서 5장의 내용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살기 위해서는 아예 세상 사람들은 만나지도 말고 사귀지도 말라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선교사들은 전부 지옥 가겠네요? 만일 우리가 그렇게 진공 상태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야 한다면 누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합니까?
주님은 우리더러 분명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들은 우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절대 해 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전부 “그리스도인들아 너희들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너희는 이미 그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러니까 너희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삶을 살되 그들의 세계관이나 그들의 어두운 일에 절대 휩쓸리지 말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너희의 삶으로 예수의 향기를 전하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리와 창녀와 간음한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함께 앉아 먹고 마시고 하신 것처럼 세상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어두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온유함의 빛으로 몰아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 님 앞에서 세리 짓을 하지 못했습니다. 창녀들은 예수 님 앞에서 창녀 짓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은 예수 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밝히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렇게 세상에 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지만 우리가 세상 사람들 앞에 섰을 때 그들이 우리의 빛으로 말미암아 그런 어두움에 속한 짓들을 차마 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거라사 지방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고 난 후에 그 귀신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께 함께 가게 해달라고 했을 때 그 청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막5:18-20)
18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20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주님은 그 귀신들렸던 자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귀신들렸던 사람이 마귀에게 사로 잡혀서 고통을 당하고 비참하게 살던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뭐 하라고 하십니까? “주께서 네가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친속들에게 고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다시 세상 속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 속에서 세상과 싸우며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세상 사람들에게 입으로 삶으로 전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12절에 있는 “악한 자들을 책망하라”에서 “책망하다”“엘렝코”라는 단어는 단순히 “비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증거를 방편으로 납득시키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책망하라”는 말은 우리가 세상의 어두움을 대하게 될 때 그들을 비난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조명과 이해를 제공해서 그들이 “아 우리가 틀렸구나.”라고 스스로 깨닫게 만들어 주라는 의미입니다. 그게 “책망하다“”엘렝코“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보면서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들의 본질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를 알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을 보니 너무 깨끗해서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지가 이렇게 밝히 드러나는구나.“ 이게 ”책망하다”“엘렝코”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단순히 바리새인들처럼 그들 앞에서 우리의 깨끗함과 우월함을 보여주거나 죄에 대한 우리의 혐오감과 불쾌감을 보여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가서 사랑과 용서와 인내로 그들의 마음속까지 책망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책망을 받고 쓰러져서 아주 초죽음이 되도록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책망을 받고 그 따뜻함에 녹아서 그 책망하는 삶에 반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바로 “엘렝코”의 진의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게, 그리고 평화롭게 사는지를 보여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게 12절 말씀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에 참여하지 말고 오히려 책망하라”의 바른 해석인 것입니다.
그리고 13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빛에 의해 책망을 받은 것들은 모두 빛이 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엡5:13)
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정말 우리의 삶에 의해 책망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빛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경험상 안 그렇죠? 세상은 오히려 우리를 조롱하고 “왕 따”를 시킬지언정 절대 빛으로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통해 책망을 받고 빛으로 돌아서게 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택해 놓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불특정 다수인 이 땅의 모든 세상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받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우리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책망을 받아들이고, 그들만이 빛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이웃을 위해 손해보고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고 인내해 주고 섬겨 줌으로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우리를 정확하게 동참시켜 주시는 것이 바로 세상을 책망하는 삶이며 빛이 되어 빛을 비추는 삶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빛이 되어 바르게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책망하는 것이 절대 우리의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인 도장인 것입니다.
(갈3:17-18)
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이 말씀은 바울이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의 후손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은혜의 약속을 하신 것을 예로 들어서 율법이 절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5장에서 이미 은혜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을 의롭다 칭하셨습니다. 율법은 그로부터 430이 지난 후에 모세 때에 시내 산에서 비로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른 삶을 살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그 논리가 맞다 면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에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구원은 뭐냐?” 라고 논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에게 요구되는 열매이지 절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할례와 안식일을 예로 들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할례라는 것도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이미 의롭다 칭함을 받은 후인 17장에서 “너와 네 후손은 이제 생물학 적이며 생리학 적이며 인간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후손으로 나에 의해 택하여 질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할례라는 율법이 주어진 것이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출20:8-11)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엿새 동안 천지를 다 창조해 놓았으니까 안식을 하라고 하시지 “너희가 안식일을 지켜야 천지 창조가 완성 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이 개념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이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키포인트인 것입니다.
(신5:12-15)
12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보세요, “너희가 안식일을 열심히 지키면 내가 애굽에서 건져내 줄께“가 아닙니다. ”너희는 이미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니까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이스라엘이 노예였기 때문에 자유롭게 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 노예였던 그 곳에서 꺼내놓으시고 이제 너희들 자유롭게 되었으니 ”안식일을 지켜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라고 율법을 주신 것의 정확한 의미는 너희가 이미 영적으로는 나의 말대로 100% 살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런데 너희의 육신이 너희를 거스려 나의 말을 지키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영적으로 너희를 자유롭게 만들었듯이 지금 너희를 거스르고 방해하는 것들도 반드시 다 제거해 버리고 너희를 승리하게 만들 것이라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와 약속이 담겨 있는 은혜의 요구인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빛이 되어 살아라.“라는 하나님의 명령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예를 하나 들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출3:11-12)
11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80살에 나타나셔서 애굽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을 구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믿지 못하고 자기가 정말 이스라엘을 건져낼 수 있는지 하나님께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증거를 주시는데 12절의 말씀대로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라고 증거를 주십니다. 이건 증거가 안 되잖아요?
예를 들어서 “우리 아들이 이번에 대학에 꼭 붙을 거라는 증거를 보여주세요.”라고 했을 때 “오늘밤 네가 아들 방에 들어갔을 때 아들의 연필에 장미가 피어날 것이다” 이런 걸 증거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래 내가 증거를 보여 주마, 네 아들이 내 년에 신입생 MT를 가게 될 것이다” 이건 아들이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에 일어날 일이지 아들이 대학에 입학 할 것이냐, 아니냐의 증거는 못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가 “내가 진짜 그들을 구해 낼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세요” 그랬더니 “너희가 애굽에서 나온 후에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 이게 증거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은 모세가 애굽에서 “꺼내오나 못 꺼내오나“를 보시고 그 다음 계획을 세우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그 다음까지 궁극적인 목표 지점을 세우시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꺼내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경배하게 되는 것까지가 목표 지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내 목표는 이스라엘이 나를 경배하게 만드는 것인데 내가 그들을 꺼내 오는 것을 실패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켜라, 할례를 행하라는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 안에 “내가 너희를 반드시 안식하게 만들 것이고, 반드시 내 자식으로 만들어 낼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의지를 함께 넣어서 주신 것입니다. 그게 율법이 가진 내용이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배웠던 신약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계명도 역시 마찬가지이겠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 주셨는데 기억나시나요?
(마22:34-40)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러니까 구약뿐만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서신 서를 비롯해서 신약에서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모든 빛의 삶은 전부 무엇으로 요약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조금 전에 배웠던 율법의 내용을 접목시키면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은 영적으로 이미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고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빛으로 소금으로 책망하는 자로 살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은혜입니까? 부담입니까? 은혜죠.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바로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든 분명 그 목표지점에 도착하게 만드실 텐데 괜히 돌아가지 말고 바로 가자“ 이렇게 자세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집스런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량까지 만들어 내시고 마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빛으로 살게 된다 해도 우리가 자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끌고 가시는 길에 거의 반항만 하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간혹 우리에게서 그러한 빛이요 소금의 삶이 나오게 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근거로 남을 비난하거나 정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갈6:13-14)
13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는 절대 우리의 행위나 공로를 가지고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정리를 해 보자고요. 지금 에베소서 4장 이후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의 자녀답게 살라고 반복 하고, 반복 하고 강조하고 강조해서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 모든 요구는 전부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은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약속이 내포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반드시 어떤 사람으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까? 내가 아닌 다른 존재, 하나님과 내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지어져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마디로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고 남을 위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성경이 우리를 “빛이다, 소금이다, 세상을 책망하는 자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은 전부 다른 존재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들 아닙니까? 우리는 참 ”우리”라는 개념을 너무 쉽게 잊고 삽니다. 우리는 저마다 너무 “나”에게 몰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제일 사랑하셔야 하고, “내”가 제일 복도 많이 받아야 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제일 뛰어나야 하고 전부 “나”입니다. 그리고 고작해야 “나“라는 존재의 확장에 불과한 자식과 부모 혈육 정도만을 사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거라도 하면 다행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혈육의 정의를 완전히 다르게 하셨습니다.
(눅8:19-21)
19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21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누가 우리의 혈육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 즉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짜 혈육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라는 것은 행함을 동반한 들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8:47)
47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여러분, 우리가 “이 녀석은 엄마 말을 참 잘 듣는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이 그 아이가 청력이 좋다는 말입니까? 아니죠? 엄마 말을, 청력을 이용해서 들은 후에 그 말대로 하는 아이를 가리켜 “엄마 말을 잘 듣는 아이”라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자라는 것도 그 말씀을 듣고 잘 행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우리 형제자매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고작해야 혈연, 학연, 지연 같은 것으로만 편을 가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진짜 여러분의 형제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이 바로 여러분의 영원한 피를 나눈 형제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잘 하세요. 여러분은 바로 그 이웃을 사랑하도록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영원히 함께 살 사람들이니까요.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의 선배님께서 호남 출신이셨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경상도에 가서 목회를 시작하셨는데 경상도 교인들한테 호남 출신이라고 괄시를 좀 당하셨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께서 설교 때마다 경상도 욕을 했답니다.
가인이 왜 아벨을 죽였는지 아나? 가인은 경상도인기라, 사울이 왜 다윗을 그렇게 못 살게 굴었는지 아나? 사울은 경상도인기라... 그러니까 교인들이 화가 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장로님들께서 당회 때 목사님께 설교 때 경상도라는 단어를 아예 못 쓰게 결정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그렇다고 물러 설 분이 아니셨답니다. 그 다음 주에 목사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설교하셨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예수님께서 ”오늘 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서며 선생님, 내니이까? 라고 물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아니다, 너는 아니다“ 하셨다죠. 그 때 요한이 또 앞으로 나서며 ”선생님, 그럼 접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너도 아니다“ 그러셨답니다. 그 때 가롯 유다가 앞으로 나서면서 ”세임요, 냅니꺼?“ 그랬답니다.
그러니까 경상도라는 말은 안 했으니까 당회의 결정에 불 복 한 것은 아닌데, 결국은 또 경상도를 물 먹이고 만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우리”라는 개념은 고작 이 정도지요? 네 편 내편을 가르는 기준이 고작 이 정도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나에서 벗어나세요. 나의 연장인 이기적인 가족주의와 민족주의에서도 벗어나셔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여”라고 안 하시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전부 ”우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우리”로 살아야 합니다.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이 아닌 “우리“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래야 영원히 함께 살지요.
사도행전으로 가서 그 “우리”의 개념을 좀 더 확실하게 공부하고 넘어가지요.
(행15:19-20)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에 유대에서 내려온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우기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실제로 1차 선교 여행 중에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과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가 그 안건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제 1회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사도들이 그 논쟁에 대한 내용을 다 듣고 베드로가 바울의 손을 들어주고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가 바울과 바나바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방인들에게 우리도 지지 못할 그런 짐을 지우지 말고 몇 가지 유의할 사항만 편지로 써서 보내주자“ 하고 야고보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몇 가지 수칙을 언급하는 부분입니다.
그 첫 번째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아, 우상의 더러운 것을 피하라”입니다.
여기서 우상의 더러운 것이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방인들이 살던 고대사회는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전이 많았습니다. 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항상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게 신전 안에서 전부 소화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전에서는 그 고기들을 내다 팔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신전에서 나오는 고기를 “신이 먹던 고기”라고 해서 아주 비싼 값에 사서 귀하게 먹곤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는 부정한 것이니 손도 대지 말라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신자들은 그런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신자들은 그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마음대로 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 충돌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이방인 신자들에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안 받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서 유대인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는 먹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어겼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 말고 다른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좀 참고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도 똑같은 내용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고전8:4-13)
4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
5남들은 신도 많고 주도 많다고 하고, 이른바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다고 하지만,
6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생겼고,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또한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7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상을 섬기는 습관에 젖어 있어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때에는 자기들이 먹는 고기가 참으로 우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이 약하므로,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더러워졌다고 생각합니다.
8그러나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될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
9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0어떤 약한 사람이, 지식을 가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는 것을 보면,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그를 본떠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11그러면 그 약한 신도는 여러분의 지식 때문에 망합니다. 그리스도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12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그러므로 음식이 나의 형제자매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면, 나는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있지도 않은 것을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라고 해서 우리가 못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혹시 너희들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고기를 먹는 것을 보게 되면 “왜 저 사람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을까?” 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은 죄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다른 이들이 혹시 너희 들 때문에 그 일로 시험을 받게 될 여지가 있으면 “우리 평생 먹지 말자“라고 바울이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 것은 합법적이고, 윤리나 도덕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서 내가 손해를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어지는 바른 삶의 내용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0장에서 좀 더 명확하게 그 부분을 설명해 줍니다.
(고전10:23-33)
23"모든 것이 다 허용 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 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십시오.
25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생각하여 묻지 않고 먹어도 됩니다.
26"땅과 거기에 가득 찬 것들이 다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27불신자들 가운데서 누가 여러분을 초대하여, 여러분이 거기에 가려고 하거든, 여러분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나 양심을 생각하여 묻지 말고 드십시오.
28그러나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이것은 제사에 올린 음식입니다" 하고 말하거든, 그렇게 알려 준 사람과 그 양심을 생각해서, 드시지 마십시오.
29내가 여기에서 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 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입니다.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판단을 받습니까?
30내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하면, 내가 감사하는 그 음식 때문에 비난을 받을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31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32여러분은 유대 사람에게도, 그리스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교회에도,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
33나도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나 스스로의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이로움을 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 스스로의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이로움을 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는 “빛의 삶, 책망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빛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고후3:3-4)
3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작성하는데 봉사하였습니다. 이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 판에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쓴 것입니다.
4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런 말을 합니다.
(고후2:15-16)
15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16그러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17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장사꾼이 되었습니다마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보내신 편지입니다. 거기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있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적혀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삶으로 그 그리스도의 편지를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읽어주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요즘은 조화가 생화와 거의 비슷하게 나오기 때문에 만져보기 전에는 분간을 못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생화와 조화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생화에는 벌과 나비가 날아오지만 조화에는 먼지만 쌓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 연극을 하고 있다면 절대 세상은 여러분에 의해 책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 훌륭한 영화나 연극들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지 아세요? 연극이기 때문입니다. 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향기 잃은 조화처럼 그럴듯한 연극을 하고 있다면 절대 아무도 여러분을 보고 예수를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향기를 발하세요. 빛을 발하십시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자주 실패하고 넘어지고 나를 죽여 남을 살리기는커녕 남을 죽여서 나를 증명하는 삶을 살 때가 더 많을 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만들어 내실 것을 여러분은 믿으셔야 합니다.
누누이 반복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곧 당신이 이루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약속을 받은 자로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겠는가 말입니다.
신데렐라가 왕자에게 피 택(擇)을 받은 후에 여전히 부엌때기처럼 산다면 왕자가 그 신데렐라를 계속 사랑해 줄까요? 신데렐라는 왕비가 된 후에 왕비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간혹 “혹시 신데렐라가 왕자한테 이혼 당했기 때문에 그냥 그 동화가 결혼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만. 우리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잘라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신부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열심히 해 보자고요. 빛으로 사세요. 여러분의 삶으로 세상을 책망하십시오.
우리는 바로 그거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여기 청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열심히 여러분의 삶을 다듬어 가세요. 절대 선동 당하지 마세요.
얼마나 많은 청년 대상 집회에서 젊은 혈기에 호소하는 얼마나 많은 선동이 있습니까? 그 때 혈기에 이끌려 선동 당하지 마세요. 신앙생활은 그렇게 울컥하는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 번 그런 집회에 참석을 했었는데 그 때마다 선교사를 지망한다는 청년들이 두 손 들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새카맣게 몰려 나갑니다. 괜히 선동 당해서 엉뚱한 일만 하다가 정작 해야 할 일을 놓치지 마시고 해야 할 일들을 열심히 하세요. 어떤 일입니까? 빛으로 편지로 향기로 사는 삶, 그거 먼저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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