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68) 세월을 아껴 우리가 해야 할 일 (엡5:16-21)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32

(68) 세월을 아껴 우리가 해야 할 일

(엡5:16-21)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9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고 지혜 있는 자로 살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라는 성경의 권고가 어떤 뜻인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성령 충만 이라는 것은 입에 거품이나 물고 쓰러지거나 전기가 오른 것처럼 몸을 떨거나 병이나 고치고 안수나 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 속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실 때, 그 뜻에 열심히 순종해 나가는 우리의 선택과 몸짓을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그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 내기 위해, 우리의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분투해야 함도 아울러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를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경주 하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기억도 안 나는 나의 배를 위한 분주한 삶을 사셨습니까? 우리는 지난주에 공부한 17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모든 언행을 “이게 정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일까” 하고 매번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데살로니가 4장 3절 “거룩”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거룩에 유익이 되는가, 아닌가를 늘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 보시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강조하면서 그 성령의 충만을 술 취함과 대조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엡5:18)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왜 성령의 충만과 술 취함과를 대조할까요?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술 취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술을 많이 마셔서 감당할 수 없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눅21:34)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롬13:13)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갈5:21)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벧전4:3)

3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성경을 잘 보면 거의 술 취함과 함께 “방탕”이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기술이 되어있지요? 이 “방탕“”아소티아“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말과 정확하게 동일한 단어입니다.

(눅15:13)

13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여기에서 “허랑 방탕”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아소티아”입니다. 이 “방탕”이라는 말은 단순히 “문란하고 지저분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탕”이라는 말은 “낭비하다, 허비하다”라는 말입니다. “아소티아”에서 부정 접두어를 떼면 “절약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방탕”이라는 단어는 “절약하다“의 반대말인 것입니다. 뭡니까? ”낭비하다, 허비하다“입니다. 이렇게 ”술 취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 라는 말이 아니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의 대표적인 것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술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술 취함은 규모 있고 단정한 삶을 무질서하고 혼돈 된 상태로 헝클어 버립니다.

여러분, 술은 각성제가 아닙니다. 술은 의학적으로 억제제입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알콜이 중추 신경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인간의 중추 신경이라는 것은 자율과 지혜력, 이해력, 판별력, 판단력, 균형을 관장하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알콜은 그 중추 신경을 마비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왜 용감해 지는지 아세요? 판단력과 판별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술이 취하면 아무 데서나 강아지처럼 소변을 보거나, 평소에는 겁 많고 얌전하기 그지없던 사람들이 옆자리에 있는 사람하고 째려 봤다고 다투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술을 즐겨 마실 때 제 친구들하고 강남의 어느 호텔 옆에 있는 포장마차에 자주 갔었습니다. 거기는 일반 사람들은 손님으로 받지 않습니다. 연예인들 매니저들하고 그 사람들이 관리하고 있는 연예인들이 조용히 이야기하기에 좋은 그런 장소로 이름이 난 곳이었기 때문에 아예 주인이 손님 타겟을 그렇게 바꾸어 버린 곳이었습니다. 제 친구들 중에 연예인 매니저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수들이나 탤런트들을 관리해서 보통 중소기업 수준의 수입을 올리는 친구들이었는데 그 친구들하고 가끔 그 곳에서 만났었습니다. 그런데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어떤 배우가 자꾸 제 친구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평소에 아주 깍듯하게 대하던 그 배우가 술이 너무 취해서 사람도 못 알아보고 계속 탁자를 발로 찼습니다. 그 배우가 이미 술이 많이 취해 있었기 때문에 제 친구들이 그 일행들보고 “빨리 집에 데려다 주라고” 타일렀습니다. 그 일행들이 겨우 업어서 데리고 나갔는데 한 30분 뒤에 누군가가 포장마차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서 우리가 먹던 찌개를 우리 일행한테 집어 던져 가지고 전부 김치찌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혼자 다 때려 부수더니 화장실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 매니저 하는 친구들이 그 배우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서 다음 날 MBC 방송국 로비로 데리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MBC 방송국 로비에서 무릎 꿇고 사과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배우는 그 날 MBC 방송국에 나와서 여전히 그 친구들보고 “안녕하세요.” 하면서 깍듯이 인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전 날의 일을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거예요. 술이 깨자 다시 예의 바른 총각으로 돌아온 거죠.

어떤 가수는 평소에는 아주 점잖다가 술만 마시면 자기가 술 마시던 테이블 위에다가 소변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분이 거의 매일 술을 마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매일 어느 술집의 테이블에다가 소변을 보는 겁니다.

예전에 어떤 여론 조사에서 보니까 여자들이 순결을 잃게 되는 원인의 1위가 술이었습니다. 예전에 노사연씨가 어떤 라이브 술집에서 노래를 하다가 어떤 여자가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노래를 하다 말고 마이크에다 대고 아가씨한테 “아가씨 소도 잡아먹을 때는 주인이 물을 많이 먹이는 법이에요, 정신 차리세요” 그러더라고요.

신문의 사건 사고 난에 나오는 수많은 살인 사건, 폭력 사건들이 대부분 무엇 때문에 기인합니까? 거의 술 때문입니다.

이런 게 다 왜 일어난다고요? 술이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고 판단력과 판별력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조정할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짐승과 인간이 다른 점이 뭡니까? 짐승은 자기 본능에 따라 행동하지요?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싸고 싶을 때 싸고, 교접하고 싶을 때 누가 보던 말던 교접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해력과 판단력과 판별력을 가지고 절제하고 누르고 인내하고 배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술은 바로 그 이성을 마비시켜 버림으로 사람을 일순간 짐승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그 시간들은 전부 허비되어지는 낭비되어지는 짐승의 시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술을 마시지 않고도 이렇게 술 취한 사람들과 방불하게 여러분의 시간을 허랑 방탕하게 낭비하고 사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이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술을 마신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시간을 엉뚱한 곳에 쓰게 되면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는 술 취한 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분들입니다. 성경은 그 모든 상실의 시간들을 가리켜 “술 취함”“방탕”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대조되고 있는 성령 충만의 삶은 어떤 삶이겠습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시간을 아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바로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술이 중추신경 억제제라면 성령은 중추신경 각성제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제가 제발 멍하니 살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멍하니 살려면 차라리 죄라도 지으세요. 그러면 나중에 회개라도 하지요. 이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여전히 눈곱도 안 떼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그런 사람들 얼마나 많아요.

정신들을 안 차려서 그래요. 멍하니 게으르게 사는 것은 술 취한 것과 똑같이 위험하고 무서운 해악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시간을 허비하는 삶“아소티아”를 술 취함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동네에 모빌 홈 단지가 있습니다. 비가 오면 언제나 물에 잠기는 그런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대부분 멕시칸 일용 노동자들이 그 곳에 모여 삽니다. 제가 새벽 4시가 못 되어서 늘 집에서 나오는데 그 시간이면 벌써 버스 정류장에 한 무리가 일을 하러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면 허름한 옷차림의 멕시칸들이 허리에 물병을 하나씩 차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무리 지어 돌아가는 모습을 매일 봅니다.

제가 그 모습들을 보면서 느낀 것이 “참 아름답다”입니다. “이 세상 무엇이 저 모습보다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시간을 열심히 소중하게 부지런하게 쓰고 또 내일을 위해 쉬러 들어가는 그 모습들이 얼마나 아름답다 못해 신성해 보이는지 모릅니다.

비록 가난해도,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그 주어진 환경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모습들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는 “술 취하지 말라, 시간을 방탕하게 허비하지 말라“”아소티아“라고 소극적인 절제의 권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아라.“라는 권고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마세요.

성경에서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은 그 것을 하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하라는 적극적인 권고가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녀석이 매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만 하다가 부모님한테 들켰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넌 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질만 하고 있어, 당장 헤어져” 그렇게 야단 칠 때 옆에서 역시 똑같이 공부 못하는 동생이 “난 연애 안 했는데” 그러면 그 아이가 칭찬 받나요? “차라리 연애나 하지, 넌 연애도 안 하면서 어떻게 공부도 못 하냐?” 그럴 거 아닙니까? “연애 하지마.”라는 말이 “공부 열심히 해”라는 말인 것처럼 “술 취하지 마라“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라.”라는 적극 적인 명령을 위한 발판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시간을 허랑 방탕하게 쓰는 대신에 "성령 충만“ 한 삶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과 자기 부인의 삶과 섬김의 삶과 그 분의 성품을 내 삶 속에서 구현해 내는 그 성령 충만한 삶을 열심을 내서 사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시간을 아끼고 아껴서 그 삶을 열심히 살아내셔야 합니다. 정말 복음을 안 사람들은 절대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지난달에 한국에서 80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신 할머니가 계셔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예수를 믿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 성경이 너무 읽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글을 모르시는 것입니다. 연세가 여든이면 “그냥 목사 설교나 열심히 듣다가 가면 되지 뭐“ 이렇게 물러나 앉으실 연세입니다. 그런데 ”내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오늘 성경 한 장은 읽고 죽겠다“는 궁금함과 열심이 그 속에서 솟구쳐 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연세에 증손자뻘 되는 아이들과 초등학교에 입학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을 이해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열심과 궁금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교회가 모이는 곳에는 안 빠집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예배에 참석하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보면 누가 그 열심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인지 이제 대충 알겠어요. 지금까지는 너무 많이 속았었는데 이제 누가 진짜인지 누가 쇼를 하고 있는지 대충 알 거 같아요. 예수를 정말 믿는 사람들은 알고 싶어 못 배겨요. 모든 스케줄을 교회가 모이는 것에 따라 변경합니다. 여기도 수요 성경공부에 오시기 위해서 일부러 쉬는 날을 수요일로 잡으신 분이 계셔요. 쏟아지는 비속에서도 버스를 타고 한 번도 안 빠지고 오시는 분들이 계셔요.

어제 오늘 새벽에 참 비가 많이 왔지요? 그런데 새벽 기도에 늘 오시는 15명이 한 분도 빠지지 않으셨어요. 제가 칭찬은 잘 안 하는 편이지만 그럴 때는 정말 그 열심에 감동합니다. 그래서 제가 새벽 기도 오시는 분 들 하고는 할 말 안 할 말 다 합니다. 제 식구 같으니까. 2년째 매일 새벽에 만나니까 이제 정말 식구 같아요. 그리고 늘 한결같은 그 분들의 진지한 표정이 저를 참 기쁘게 합니다. 그리고 저를 분발하게 하고요.

여러분, 정말 복음을 바로 이해한 사람들은 반드시 올바른 열심을 내는 쪽으로 삶이 바뀝니다.

절대 게으른 채 머물러 있지 않아요.

어제 한국 충남에 계신 어떤 성도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제가 그 분의 동의를 얻어서 여러분께 그 분을 좀 소개 해 드릴까 합니다.

그 분은 쉰이 넘으신 분이신 데 3대 째 예수를 믿는 집안의 장남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55년간 예수를 믿으면서 예배당에 가는 걸 기쁜 마음으로 간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답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때부터 가던 곳이니까 습관 적으로 55년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예배당엘 갔었지만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자녀 됨에 흥분되는 마음으로, 기대에 찬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예배당엘 가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식들마저 다 떠나고 하시던 사업도 자꾸 어려워지고 해서 매일 매일 술에 절어서 사셨고 급기야 자살을 결심했었답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 분이 저희 교회 설교 테잎을 몇 개 주셨답니다. 복사하고, 복사하고 또 복사가 되어서 음질이 형편없는 테잎이었는데 꼭 들어보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하나하나 듣기 시작하셨대요. 그러다가 저희 교회 웹 사이트에 들어오셔서 지금까지의 설교를 몽땅 다 들으셨답니다. 그리고는 “이게 기독교라면 내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 아니 죽긴 왜 죽어, 오히려 나의 이 구질구질한 삶이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증거인데” 그 것을 확실하게 알고 나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성경을 더 읽고 싶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기다려져서 매일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서 당신이 예배당 문을 열고 목사님을 기다리신 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 가는 삶이 너무 즐거워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매일 매일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교회 웹 사이트에 들어오셔서 우리 교인들 사진도 보시고, 서머나 교회에 무슨 새 소식이 있는지, 설교가 새로 올라왔는지 그거 확인하시면서 그 재미에 사신다고 합니다. 교회 가는 것이 즐겁고 사람들 만나는 것이 신이 나신 답니다. 영원히 나와 함께 천국에서 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좋으실 수가 없답니다. 사람들이 그 분을 행동을 보시고 처음에는 전부 미쳤는지 알았답니다. 삶이 너무 180도로 바뀌니까 사람들이 저 사람 그렇게 고생하더니 드디어 미쳤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답니다.

지난 주일에 시카고에서 비행기를 타고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도 오래 예수를 믿으신 분이셨는데 삶이 너무 힘들어져서 살아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죽음 그리고 작은 죽음들”이라는 설교를 듣게 되셨답니다. 그리고 갑자기 우리 교회 교인들 얼굴이 보고 싶으셔서 비행기 타고 시카고에서 오신 것입니다. 열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안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은 그 사는 모습이 확 달라집니다.

그래서 사도행전2장에서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시자 사람들이 그 성령 받은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들 술 취했나보다” 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행2:12-15)

12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13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14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성령 충만과 술 취함이 대조되어 있는 것은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이 완전히 다른 상이점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둘 사이에 유사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과 성령 충만한 사람의 첫 번째 유사점은 이렇게 평소의 그 사람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유사점은 술에 취하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에는 둘 다 중독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술이 나쁜 것은 그렇게 중추 신경이 마비되어서 이성을 잃고 짐승이 되는 상태가 반복적으로 지속된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술을 자주 마시던 사람이 술을 한 동안 못 마시면 손을 떤다든 가, 성질이 난폭해진다든 가, 하는 금단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다시 술을 마시면 그 증상이 가라앉고 하니까 자꾸 술을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도 중독성이 있습니다. 한번, 두 번 성령 충만한 삶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그 시간을 사모하게 됩니다. 매일 저녁, 술에 취해 잠이 드시던 그 충남의 집사 이 어떻게 매일 새벽 예배당의 문을 여는 분이 되셨을까요?

술 마시고 떡이 되어서 잠이 들었다가 쓰린 속을 부여잡고 후회와 절망 속에서 깨는 아침보다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시작하는 그 삶이 얼마나 좋은지 맛을 보신 것입니다. 성령 충만도 그렇게 중독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삶을 살지 않습니다. 아니 수 십 년 동안 예수를 믿었다는 사람들이 전혀, 한 번도 그 성령 충만한 삶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도 기쁘지가 않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흥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에게 억지로 연극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구분하는지 아세요? 여러분이 만일 어떤 종교 행위를 하고 나서 허탈함과 지침과 고단함 속에 빠지는 경우가 있으실 거예요. 예전에 제가 대학 다닐 때 “네비게이토”라는 기독 청년모임을 했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매년 여름마다 양평의 한 수양 관을 빌려서 대규모 전도 집회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회를 끝내고 나면 그 준비한 사람들 대부분이 탈진을 하고 허탈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건 잘 못된 것입니다. 술에 취해 방탕한 사람은 에너지가 소진되고 허탈감에 빠지지만 성령 충만한 사람은 갈수록 에너지가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신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을 했는데 허탈감에 빠지고 탈진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위대한 설교 가였던 조지 휫필드챨스 스펄전 같은 목사님들은 “왜 일 주일에 주일이 한번 뿐인가? 나는 매일 매일 설교하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실제로 거의 매일 집회를 인도하셨다지요. 여러분이 지금 읽고 계신 조셉 얼라인 목사님이나, 데이빗 브레이너드 같은 분들 보세요. 얼마나 매일 매일을 활기 있게 열심히 사십니까? 존 칼빈은 “걸어 다니는 종합 병원”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을 정도로 병약한 분이었습니다. 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저작을 보세요. 그 분들의 저작을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받아 적기만 하는데 그 사람의 한 평생이 걸릴 정도랍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왕성하게 만들었을까요? 성령 충만 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을 한다고 했는데 허탈감에 빠진다든지 탈진을 한다든지 한다면 그건 성령과는 아무 상관없는 자기 얼굴을 위한 일을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뭔 일을 좀 하고 나면 괜히 생색내는 사람들 많지요?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니들이 아니?”“아 너무 힘들어” 그건 술 취함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허망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술 취하지 않는 삶, 방탕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가?

여러분 왜 사람들이 술에 취합니까? 행복해 지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기뻐지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 말은 상대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맨 정신으로는 불행하고 행복하지 않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당연하죠. 어떻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 어떤 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나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추 신경을 마비 시켜서 그 괴로움과 상심을 잊어버리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함을 술 뒤로 감추기 위함입니다. 그 음주의 욕구를 잘 따라 들어가 보면 거의 대부분이 나의 채워지지 못한 행복과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나의 힘을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과시해 보고 싶어서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술을 안마시고도 살 수 있게 되었습니까? 저희 집 사람처럼 알콜 알러지가 있는 사람 말고 맨 정신으로도 그런 술 취함의 욕구나, 다른 것에 푹 빠져서 중독되고 싶은 그런 욕구를 어떻게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까?

내 안에 술이 줄 수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기쁨행복을 공급해 주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18:1-2)

1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출15:2)

2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세상 사람들은 술의 힘을 빌려 자신의 약함을 감추고 자신의 용감함을 드러내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렇게 하나님이 나의 힘이십니다. 우리는 그걸 알기에 어줍지 않게 술이나 마셔서 나의 약함을 가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 강력이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이미 온전한 기쁨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술에 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5:11)

11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빌4:4)

4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것으로 우리의 기쁨을 대신해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시4:6-7)

6수많은 사람이 기도할 때마다 "주님, 우리에게 큰 복을 내려 주십시오. 주님, 주의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하고 빕니다.

7그러나 주께서 나에게 안겨 주신 기쁨은 햇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요17:13)

13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기쁨을 이미 우리 안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소유한 자들은 다른 것으로 시간을 방탕하게 허비하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행복하게 만들려는 시도를 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날 기독교의 이름을 쓴 무당 종교의 문제점이 뭔지 아세요?

그게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모든 관심이 나의 필요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술에 취해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예수를 이용해서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이 기독교의 내용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레슬리 뉴 비긴이라는 영국 국교회의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탁월한 신학자이십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35년간 힌두교 교인들에게 선교를 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매 주 힌두교 사원으로 출근 하셔서 그 곳에 있는 힌두교 지도자들과 함께 그들의 경전인 “우파니샤드”를 “산스크리트 어”로 공부하고 요한복음을 헬라어로 공부하면서 서로의 경전에 대해 토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힌두교 사원엘 가면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벽에다 걸어 놓는데 그 속에 예수님의 초상화도 들어 있답니다. 그리고 그들도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 예수님이 초상화 앞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답니다. 힌두교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범신론의 기초 아래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이 모든 세상, 우주는 하나로 귀결되는 데 그 것을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범신론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이 우주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무엇 하나 신이 아닌 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도 결국 해탈에 이르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결국 범신론이라는 것은 무신론과 맥이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게 신이면 아무 것도 신이 아닌 것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 힌두교 지도자들 중에 죄와 용서에 대해 연구하는 유신론 적 교리를 갖고 있는 신학자가 있었답니다. 그 레슬리 뉴비긴 목사님께서 그 힌두교 신학자에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에 대한 교리를 잘 설명해 주었더니 그 힌두교 신학자도 “당신이 말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만 빼면 나와 당신의 교리는 정확하게 일치 한다”고 하더랍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는 자신도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레슬리 목사님께서 “그럼 당신도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냐?“라고 묻자 그 힌두교 신학자는 ”왜 꼭 그게 예수여야만 하는가? 예수가 나를 구원해 주지 않으면 저 많은 신들 중 나를 용서해 줄 다른 신을 찾아가면 되지 않는가?“ 하고 벽에 있는 그 종교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가리키더랍니다.

오늘 날 예배당 안에 이 힌두교 신학자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를 믿어서 여러분에게 얻어 지는 유익,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구원을 위해 예수를 믿으시지요? 틀린 답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구원”이라는 “우리의 필요”에 초점이 모아지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너무 “우리의 구원“에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을 두게 되면 우리는 나를 구원하시는 이가 어떤 분이신 지, 나는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 이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아무나 나에게 구원만 주면 나는 그 신을 좇아 갈 거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위험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섬김과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그 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공부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후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두문불출 하자 시내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불렀습니다. 금송아지는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준 하나님을 섬긴 자들이 아니라 자기들의 필요를 채워 줄 “아무 신, 불특정 다수 중의 하나”를 섬긴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어떤 힘 있는 존재에게 아부를 떠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의 필요가 하나도 채워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분을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 누구 신지를 알고 그 분을 섬기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분이 누구인지는 상관없고 그저 나를 지옥에서 구원해 주는 “어떤 신”을 섬기고 계십니까?

왜 이 구분이 중요하냐 하면 나중에 가면 이 둘의 목적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구원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구원 그 이후의 삶을 경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목적지가 되면 나는 나를 구원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늘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구원관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술 취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는 반면에 성령 충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삶 속에서 드러내려 열심을 내는 것처럼 신앙은 나에서 하나님으로 나의 눈과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신앙이 “나의 필요, 나의 구원” 이러한 감각적이며 제한된 한계 속의 신앙으로 변질이 된 것은 여러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만 가장 악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르네상스입니다.

기독교 역사 중 1,500년간은 오히려 지나치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비하되고 맹신이 판을 치게 되고 성직자들이 고위 관리처럼 대접이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르네상스, 문예부흥이 유럽을 강타하면서 지나친 신본주의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 강조되면서 성경의 계시까지도 인간의 이성의 심판을 거쳐야 계시로서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은 성경에서 가차 없이 신화나 설화로 매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는 극히 인간중심적인 종교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인본주의가 물질주의를 낳으면서 기독교는 급속도로 인간중심적이며 물질주의 적인 종교로 전락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에 와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보다는 ”나의 유익과 나의 구원, 나에게 쏟아져야만 하는 은혜” 이런 것만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항상 내가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부르며 믿음과 은혜를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의 중심은 항상 “나”입니다. “나의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 엄밀히 말해서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걸 우리는 “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감동한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 종교적 엑스터시나 감격은 어떤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있고 힌두교에도 있고 이슬람교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나의 필요”에 초점을 두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우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당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보이는 “나의 필요“를 구하는 사람들은 뭔가 감각적이며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그 것을 추구하지도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서 제일 안심하는지 아세요? “큰 것과 다수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감동 적인 것”들을 추구합니다. “은사를 강조 한다든 가, 선교를 강조 한다든 가해서 다른 이들은 쉽게 경험 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자부심을 줍니다. “나의 필요”가 주 관심인 사람들은 그래야 안심이 되거든요. 내가 눈에 보이는 뭔가를 해야 하나님 앞에 떳떳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의 필요”를 구하는 교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교회라고 간판을 붙인 곳에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종교를 통해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 버렸고 그들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기관들이 생겨나 버렸기 때문에 사람을 붙들어 놓아야 헌금이 들어오고 그래야 그 것들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프로그램들을 도입합니다. 윌로크릭 교회 같은 곳에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지요?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그 프로그램을 도입해 가면서 수십만 불의 로열티를 지불하고 들여갔습니다. “제자훈련, 새 신자 훈련, 열린 예배“ 이런 것들을 수 십 만 불 씩 주면서 들여가는 의도가 뭡니까?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입니다.

자식이 있는 많은 부모들이 어떤 교회를 찾습니까? 주일 학교에서 뭘 가르치든 그건 상관 안 하고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나 없나“”우리 아이의 시선을 잡아끌어 줄 교육 프로그램이 있나 없나“ 이런 것만 찾아다닙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뭘까요? 그들의 죄 성을 자극해 주는 프로그램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뭘 제일 좋아할까요? 죄 짓는 걸 가장 좋아합니다. 뭘 제일 싫어할까요? 고리타분하게 성경 가르치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저마다 아이들 예배 때 연극을 한다, 음악회를 한다, 운동을 한다, 미술을 가르친다, 난리들을 떱니다. 부모들은 그걸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들이 저마다 좋은 프로그램들을 유치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신비한 성령의 은사를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눈에 보이는 신비한 것과 자기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잠깐이지만 아주 안심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예배당도 크게 짓습니다. 우스개 소리 같지만 큰 예배당에 계신 하나님은 뭔가 나를 위해 더 큰 일을 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많아지고 예배당이 커지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나는 모두가 공인하는 안전한 공동체에 들어와 있다“는 안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경주해 나가야 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큰 교회나 인기 있는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일까요?

기독교는 공간의 종교가 아닙니다. 공간의 종교는 바알 신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바알은 그의 신전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바알을 섬기는 여 사제들과 성직자들, 혹은 일반 신자들이 그 신전에서 성 관계를 하면 바알이 흥분을 해서 비를 내려 주고 다산을 약속하는 그런 잡교입니다. 기독교는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공간의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왕상8:27-30)

27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9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때도 하나님이 그 성전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왕상8)

32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

34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36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39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44주의 백성이 그 적국으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주의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저희가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45주는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 일을 돌아보옵소서

사람들이 큰 것과 다수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될 때는 ”나의 필요, 나의 구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를 믿고 성숙해져 가면서 나의 관심의 초점이 옮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는 부모가 그저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를 잘 키워 주어야 하는 분으로 인식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면서 철이 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 부모에게 무엇을 뜯어낼까 보다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뭘 드시면 건강하게 오래 사실까? 뭘 챙겨드리면 기뻐하실까? 이런 것을 고민하게 되듯이 우리가 일단 예수를 믿고 성숙해 져 가면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15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나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이 우주의 중심이 지구인줄 알았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도 달도 별도 전부 돌아가고 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는 오히려 거대한 항성 주위를 돌아야 하는 행성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을 코페르니쿠스 적 변혁이라고 부릅니다. 천동설에서 하루아침에 지동설로 바뀌어 버렸으니 세상이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바로 그 코페르니쿠스 적 대 변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중심이었고 하나님이 나를 돕는 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중심이고 내가 그 분을 위해 존재하는 코페르니쿠스 적 대 변혁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입니다.

하긴 미국 전체 국민 중에 아직도 천동설을 믿는 사람이 33%나 된다고 하니 참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아직도 자기중심 적인 신앙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자기 인생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자꾸 힘을 키우려고 시도합니다. 재물과 명예는 물론이고 세상 적인 인기와 다른 이들의 인정, 이런 것을 추구합니다.

여러분은 아닌 것 같지요? 여러분이 “신앙이 좋다, 믿음이 깊다, 믿음이 뜨겁다“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한번 떠 올려 보세요. 여러분은 그 사람들의 무엇을 근거로 그들의 믿음을 좋다, 뜨겁다, 깊다, 라고 평가하십니까?

“교회 일을 많이 하니까” “기도를 잘 하니까” “예배 시간에 잘 우니까” “성경을 많이 아니까” 뭐 이런 것 아닙니까? 믿음은 크고 작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온전한 전체가 우리에게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딤후3:14)

15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갈3:23-26)

23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믿음은 예수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모두 같은 크기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걸 얼마만큼 내가 내 삶 속에서 누리는가가 바로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그 온전한 믿음을 자꾸 까 보면서 “아 나에게 이런 것이 주어졌구나.” 하고 감격하며 그 믿음을 통해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자꾸 드러내는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 항복해 들어가며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을 우리는 신앙이 좋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드러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자꾸 깨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고후4:6-7)

6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품고 있는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질 그릇이 깨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를 잘 믿게 되면 여러분의 삶이 본의 아니게 자꾸 깨지는 모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어떻게 저 상황에서 저런 인내가 나올까?”“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악한 사람을 저렇게 용서를 할까?”“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낮아지면서도 얼굴 하나 안 붉힐까?”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깨지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그 분의 속성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걸 거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신앙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도구요 방법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십자가는 십자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채워져야 할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그 분이 우리 안에 들어 와 계신 것처럼 십자가의 원리는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형벌의 모양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나를 죽여 원수를 살리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 아니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집대성하여 요약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는 그 십자가가 하늘나라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원수들에게 수난을 당하시고 그들을 용서하시면서 억지로 이를 악 물고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속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삶을 이 땅에서 그대로 재현해 내는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목표 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살다 가신 것처럼 계속 깨지며 부서지는 고통 속에 던져 지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지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게 보여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시죠? 그런데 우리는 그 분을 지금 뵐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배울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예수에 관해 자세하게 우리의 수준에 맞게 기록해 놓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요1:17)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5:39)

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여러분이 열심히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나”에서 초점을 옮겨 “하나님의 영광”으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고 가신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시간은 그리로 쏟아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마십시오. 시간을 아끼세요. 여러분의 배 만을 위해 시간을 헛되게 쓰지 마세요.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성령 충만은 성경을 통하여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합3:17-19)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빌3:8)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벧후3:18)

18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자, 이제 뭐가 진짜 중요한 것인지 아시겠지요?

;H�9PN�y �;yont-family:굴림;mso-ascii-font-family:굴림;mso-hansi-font-family:굴림;">신앙생활 하는 거 힘드시죠? 압니다. 저도 많이 힘이 듭니다. 우리는 이제 나방이나 곤충들이 빛을 보게 되면 저절로 빛이 비추는 쪽으로 근육이 수축이 되어서 불 속으로 들어가 타 죽는 것처럼 그러한 광극 성을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소원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습관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육신이 그 소원을 따라주지 않아서 늘 갈등하고 고민하고 슬퍼하고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여러분이 그렇게 갈등하고 고민하고 슬퍼하는 것 자체가 바로 여러분이 구원들 받으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힘을 내십시오.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또 해 보자고요.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와서 우리를 완성해 내실 것입니다.

���K �:���y �;y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죽으셨을까? 그게 역사적인 사실인 만큼 지금은 내가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이 많은 하나님의 요구도 반드시 내 안에서 이루어지겠구나.“ 그래서 복음입니다.

저는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예수님의 손을 놓지만 우리 예수님이 제 손을 절대 놓지 않으시기 때문에 저는 지금 이나마 온 것입니다. 제게는 지금 이 정도 온 것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저를 완전하게 완성해 내실 것을 저는 확고하게 믿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다소 혹독하게 몰아치는 것은 여러분을 자꾸 깨우기 위함입니다. 제가 간혹 분개하여 욕을 내 뱉는 것은 우리가 너무 우리 자신의 죄를 가볍게 여기고 넘어가는 것이 화가 나서 그러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건 제일 먼저 저에 대한 욕인 것입니다. “넌 목사가 되어서 어떻게 그렇게 네 죄에 대해 둔감할 수 있냐?”

그리고 여러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그렇게 저를 분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만나게 해 주신 것을 저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제게는 참 소중합니다. 그렇게 제게 소중한 분들이기에 단 한 분이라도 마귀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안타까움에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의 실수와 실패로 괴로워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것 잘 압니다.

우리 그럴 때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서로 거울이 되어 주며 쓰러지는 자를 세워주고 뒤쳐진 사람들을 기다려 주며 열심히 한번 가 보자고요. 여러분은 잘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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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단 마귀는 아주 매력 있고 달콤한 모습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본능이 욕심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탕자를 생각해 보세요. 그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을 때 그의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의 비위를 맞춰주며 나만 따라오면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그리고 삶이 행복해 질 거라고 얼마나 아부를 했겠습니까? 하지만 그 모든 유혹들은 탕자의 주머니를 완전히 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떠나 버렸습니다. 결국 그 탕자는 먹을거리를 위해 돼지와 다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결국 그런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온통 자기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행복이 영원할 거라 믿고 있겠지만 결국 돼지우리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 마귀의 유혹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단 일초도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없는 여전히 약한 존재입니다. 예전에 한국에 “다라 붕어 낚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라에다가 붕어 몇 마리 갖다놓고 100원씩 내고 낚시 하는 겁니다. 물론 잡으면 다시 놓아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붕어들이 금방 잡았다 놓아줘도 또 금방 미끼를 뭅니다. 그래서 윗입술이 아주 너덜너덜해 지죠. 우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 더러운 유혹에 빠져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의 삶을 살지 않도록 성령 하나님께 열심히 부탁하며, 의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그 죽은 옛 사람을 빨리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매일 매일 입으십시오.

�� 좋& �>���y �;y �냐고요? 맛있으니까? 그러나 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경호는 개를 좋아합니다. 맛있으니까. 자기에게 유익이 되니까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개를 키우려면 많은 손이 가기 때문입니다.

지영이는 개를 사랑합니다. 내가 그 개를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도 내야하고 똥오줌도 치워야 하고 오히려 객관적으로 볼 때는 나에게 손해입니다. 그렇지만 호야의 유익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수두룩할 것입니다. 나의 아내, 나의 남편, 내 자식, 내 형제, 내 자매 그렇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바로 그 사랑을 연습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쿠폰이 생겨서 월요일에 아이들과 함께 유니버설 스튜디오라는 곳엘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쇼의 90%이상이 전부 마귀, 귀신, 머미, 드라큘라 같은 흡혈귀 이런 것을 소재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준다는 것이 귀신 복장을 하고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놀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너무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구니까 나중에는 짜증이 나더라고요. 그러지 않아도 무서워 죽겠는데 자꾸 시커먼 놈들이 놀라게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아마 지옥인 것 같았습니다. 피 비린 내가 진동하는 어떤 곳에 수많은 벌거벗겨진 채 앉아 있었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제가 낮에 본 그 모든 귀신들이 전부 살아서 실물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퍼런 도끼를 들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 한 사람 씩 불러서 커다란 원판에 묶어 놓고 그 원판을 돌리면서 도끼로 그 사람들 퍽 퍽 찍었습니다. 팔 다리가 쩍쩍 찢어지고 피가 튀는데 묶여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억울하다는 듯, 이를 가는 겁니다.

조금 있으면 제 차례가 오는 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 공포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왜 내가 여기 와 있는 거지? 하나님 저 좀 구해 주세요. 제발 여기서만 벗어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순간 알람이 울려서 잠이 깼습니다. 그게 꿈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모든 게 새로워 보였습니다. 집사람이 옆에서 자고 있는데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 방에 가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모두 천사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그토록 무시무시한 사망에서 나를 건져 주신 것이구나, 참 실감이 가는 새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경고를 오히려 재미삼아, 놀이 감 삼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섬뜩하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나중에 우리는 그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심판에 던져지게 될 텐데 사람들은 태연하게 그 것들을 놀이 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기서 건져진 것입니다. 거기서 건져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서 건져주신 그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열심히 훈련하는 것, 그거 외에 우리가 무엇에 욕심을 두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보내는 이 일초 일초가 모여 일분이 되고 이 일분이 모여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모여 우리의 일생,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내는 이 일초, 일 분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을 어떤 것과 계속 바꾸시면서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생명을 무엇과 바꾸시면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할 교회와 여러분의 성숙에 더욱더 매진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더욱 더 진지해 지십시오.

(엡4:7,11,12)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