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복음서

주기도문

은바리라이프 2013. 4. 3. 06:04

주기도문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를 가리킨다(마 6: 9-13 ;눅 11: 2-4 ; Did 8:2). 이 주기도문 내용은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과 관련된 간구들, 그리고 기도를 드리는 자들의 육체적, 영적 필요와 관련된 간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도문은 누가복음에서는 단순한 형태 "아버지"로, 마태복음에서는 보다 긴 형태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유대교에서는 흔한 일이었다(예.사63: 16;렘 3:4).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아들로서(눅 2:49) 하나님께 대하여 ´아바´라고 부르셨고(막 14: 36;참조. 롬8:15;갈4:6), 그의 제자들에게 동일한 형태의 말을 사용하도록 권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그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강한 의미를 전해 준다(참조. 마 6 : 8,32;벧전 1:17).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의 연관성은 간구의 처음 내용에서도 발견된다(이는 종종 ´너희´ 간구라고 불리운다). 누가복음서의 두 가지(눅 11:2) , 그리고 마태복음서의 세 가지(마 6: 9-10) 간구들은 유대 예배식의 축복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이들의 내용은 이 유대적 축복에 비추어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인격을 통해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마 4:17;눅 11: 20;16:16),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간구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연관을 맺고 있다.


양식에 대한 간구(이는 ´우리´ 간구라고 불리 운다)에서 ´일용할´로 흔히 번역되는 단어는 난해하기 때문에 다양하게 해석되어져 왔다(예. “내일의 [RSV난외주], 오늘의, 미래의, 필요한, 계속적인, 매일 필요로 하는 것을 충분히 채워주는" 등) .죄 용서에 대한 간구에서 이 용서 받은 죄의 상징어로 사용되어 있는 ´빚´ (12절;참조. 18: 23-25 ;눅 7: 41-43,47-48)은 누가복음에서는 ´죄´로 번역되어 있다(눅 11:4). 마6: 14-15 의 기도 후에 언급되어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에 대한 이 본문의 내용은(참조. 18: 23-25;막11:25-26) 사실상 팔복 중 다섯 번째 복(마 5:7)에 대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의 간구(7:13;눅 11: 4)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는 오래 전부터 해석상 어려움이 있어 왔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셨지만(창 22:1 ;출 17: 7 ;신 33:8;대하 32:31), 악에 빠지도록 유혹하지는 않으셨다(약 1: 13).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실성 여부를 드러내기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신다(신 8:2). 그는 유혹의 세력을 억제케 하신다(욥 1:12;2:6 ;고전 10:13;참조. 왕상22:21-23).´유혹´(헬. ´페이라스모스´)은 광의적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로, "시험, 시련, 고난”,혹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겪은 어떤 체험(참조.4: 12)등을 뜻한다. 


이 간구의 두번째 부분인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누가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악´은 추상적인´악´, ´악한 자´ 곧 마귀나 적그리스도(유대주의는 이 악이 인간 속에 선과 더불어 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혹은 말세에 나타날 악(´시험´도 이 악을 가리킬지도 모른다)을 가리킬 수도 있다. 마6: 13의 몇몇 고대 및 후기 사본들에는 결론적인 송영(대상 29: 10-13의 축복에 근거)이 첨가되어 있는데, 「12사도의 교훈집」(Didache)에는 보다 짧은 형태(권세와 영광이 당신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나타난다. KJV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되어 있다. 


비록 가장 권위 있는 사본들이 이 송영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참조. 「12사도 교훈집」 [Didache]및 서방 역본)사용되어 왔으며, 주기도문에 있어서 매우 적절하고 소중한 결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송영이 마태복음의 원본에는 없다는 사실은 14, 15절이 12, 13절 다음에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어떤 학자는 주기도문이 산상수훈을 기도 형식으로 요약하고 있다고 올바로 지적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전히 세워질 때까지 하나님 나라의 법을 더욱 잘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이 기도를 늘 드려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시지 않고 “너희는 기도해야 한다”하고 하신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주기도문은 예수님 자신이 했거나 할 수 있었던 기도가 아니다. 첫째,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서가 아닌, ´나의 아버지´로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왜냐하면 그의 아들되심은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즉 그는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던 것이다. 둘째, 그는 하나님께 그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뜻을 항상 완전히 행하셨으며 결코 죄를 범하지 않으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에서 개인적인 간구들은 유대 종교적인 문헌에서 여러 번 발견되지만, 전체적으로 주기도문이 나오는 곳은 전혀 없다. 주기도문은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최상의 기도문으로, 짧은 내용 안에 참된 기도의 진수를 모두 담고 있다. ※ 참고 문헌J. Jeremias.´The Lord´s prayer in Modern Research,” EXPT, LXX-I,1959-60, pp 141-146


ㆍ하늘

셈족의 삼중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하늘은 궁창(firmament) 곧 기둥들에 의해 받쳐지고(욥 26: 11) 땅 아래의 물과 그 위의 물을 서로 구분하고 있는(창 1 : 6-8) 천막과 같은 둥근 천장이었다(참조. 사 40:22;시 104: 2). 이 궁창에 행성들과 별들이 매달려 있었으며(창 1: 14-17).그 창들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강수가 내려졌다(예. 창7: 11 ;수10: 11 ;참조. 욥38:22, 29),

때때로 이 용어는 단순히 창공(sky)을 의미하기도 한다(예. 시 147:8). 아카드어에서처럼 ´하늘과 땅´(天地)이라는 표현은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우주 전체를 가리킨다(예.창 1:1; 마 5 :18 ; 행 7: 49).

비록 후기 유대교는 하늘이 일곱 층인 것으로 상상하였지만(예. 레위의 증거, 2: 7-3:9 ;이사야의 승천. 6: 13;7 : 13 이하;참조. 고후 12: 2) 때때로 헬라어에서 복수형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헬.´우라노이´;마3: 16;24:29 ; 고후 5: 1;엡4:10) 이 히브리 용어의 복수형과 ´하늘들의 하늘´ (히. ´쉐메 핫솨마임´,신 10: 14;느9:6;참조. 왕상8: 27;대하6:18; 시 148 : 4)이라는 히브리식 표현은 단지 이 이름을 최상급으로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곧 우주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스라엘의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거처를 모방한 것이었다(히 8:5;9:24).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요(예. 마5: 16, 45;6: 1, 9), 그곳으로부터 인생을 살피시며(시 14: 2;33:13) 그의 규례를 주시는(신 4:36 ; 느 9: 13; 참조. 시 2:4) 과의 보좌이다(시 11:4;사 66: 1).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의 명령들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창21: 17;22: 11 ;마 18: 10), 이곳에서 하늘의 재판소가 열린다(왕상22 : 19-22; 욥 1:6 이하·;2:1 이하;슥3:1-2). 예수께서는 성육신하여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셨으며(요3:13 ;참조. 1:2),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시기 위하여(마 24 : 30; 살전 1: 10) 하늘로 올라가셨다(행 1:11).


신실한 자들을 위한 보상의 장소로서 하늘 개념이 구약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엘리야,왕하2: 11;참조. 창5: 24).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에서 하늘은 신자들의 기업(밷전 1: 4) 곧 신실한 섬김에 대한 보상으로(마 5: 12;6:20;참조. 골 1 : 5) 하나님에 의해 제공되는 거처이다(고후 5: 1-5; 참조. 요 14: 2;빌 3: 20).


하늘 그 자체는 마지막 날에 혼란을 겪고(예. 학2:6;막13:31 ;계 11: 7-12), 새로운 질서의 창조물 즉,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사65: 17;66: 22 ;벧후 3 : 13 ; 계 21:1).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유대인들의 경외심이 고조되었을 때에 ´하늘´은 때때로 그 대체어로 사용되었다(단 4 20;막 11 : 30 ;눅 15 : 18,21;요 3 : 27). 아마도 이 때문에 마태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에 해당되는 단어를 "하늘 나라´(kingdom of heaven;예. 마3: 2,"천국")로 표현한 것 같다.



아버지

자식을 낳거나 입양을 통해 어버이가 된 남자를 가리킨다. 성경적 용법에서 이 용어는 조부(예. 창28 : 13) 흑은 먼 조상(예. 왕상 15:11,24)도 나타내며, 사회적이거나 정치적 그룹의 시조를 의미하기도 한다(예. 창10:21 이하; 왕하19:12; 막11:10). 따라서 ´그 열조(one´s fathers)와 함께 누워 잔다´는 표현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예. 왕상2:10; 참조. ´열조에게 돌아가서´;예. 왕하22:20). ´아버지´(조상)라는 표현은 어떤 직무나 직업의 창시자 또는 대표자에게 적용되기도 한다(예. 창 4:20-21 ;램 35:6, 8 ; 마카비 1서 2:54). 나아가 이는 스승(예.왕하 2:12)이나 선지자(왕하 13:14), 또는 왕(삼상24 : 11 ; 왕하 5 : 13)에 대한 존경의 한 표현이다. 유사한 의미로 이 용어는 기독교 성직자의 한 호칭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아버지는 그와 함께 거주하며 그의 혈통으로 인정된 때 단위 가족의 가장이었다. 그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으며, 동시에 아들들의 아내를 선택해주고(창 24 : 4) 딸들의 결혼을 맺어줄(29 : 19,23,28 ;삿 1 : 12) 책임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종으로 팔 수도 있었다(출 21:7). 아버지는 공경(출 20 : 12 ;신 5:16 ;말 1 : 6)과 복종(잠 23 : 22)의 대상이었으며, 아버지를 심각하게 모독하거나 저주, 불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도록 되어 있었다(출21:15, 17;신21: 18-21). 반면에 아버지는 자녀들을 사랑하고 돌보며(신1:31, 호 11 : 1-3; 골3:21), 믿음 안에서 그들을 양육하고 훈계할 의무가 있었다( 신 4:9;6:7 ?잠 1:8 ; 13:24,19:18;엡6:4). 또한 그는 가족내에서 종교적 의식을 집행하였다(예. 출 12:1-14, 21-28). 그는 아들들에게 합당한 상속을 하고, 며느리들에게 빙물을 주어 자녀들의 미래를 준비하게했다(예. 겔 46:18 ;참조. 민 27:7-11 ;출 22:17). 그리고 아버지가 없는 고아에게는 특별한 배려와 도움이 주어졌다(예. 출22: 22;신 14:29;24:19-21 ;참조. 사49 : 23).


이스라엘의 역사 초기 때부터 하나님은 아버지로 여겨졌다(엘리압, 요압-"하나님은[나의] 아버지"-아비야, 아비엘-´나의 아버지는 하나님"-과 같은 인명을 참조). 여호와는 언약 관계에서 종주(s-uzerain ;예. 신 7:12-16)요, 또한 세상의 창조주(예. 신32:6; 말2:10)로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인식되었다(예. 사63:16 ; 렘 3:4; 말 1:6). 사람의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은 궁극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시며(말 1:6 ; 마 7:21-23), 그의 자녀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나타내 보이신다(출4:22-23,신 1:31, 렘 31:9,20; 마6:26-34 ; 18:14).


복음서들은 종종 그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나의 아버지´)와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너희 아버지´)를 구별하고 있다(참조. 요 20:17). 하나님의 ´독생자´(요 1:14, 18)로서 예수님의 독특한 본질과 그로 인해 그들이 공유한 권위(8:28-38,14:10)와 친숙성(1:18, 10:38) 때문에 인간은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다(1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온정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도록 권면하셨다(참조. 마6:8-9,32 ;롬 8:15,갈 4:6). (->아바) 후기 기독교 신학에서 아버지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제 1위로 여겨졌다(참조. 마2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