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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umavzw(2296, 다우마조) 기이히 여기다 wonder

은바리라이프 2013. 3. 22. 07:53

qaumavzw(2296, 다우마조) 

기이히 여기다 wonde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다우마조(Homer 이래)는 다우마(qau'ma, 2295: 경이적인 일, 놀라움)에서 유래했으며, '기이히 여기다, 놀다다, 경탄하다'를 의미한다.


이 어군(qau'ma, 2295, qaumavzw, 2296, qaumavsio", 2297, qaumastov", 2298)은 첫째로 놀람 즉, 비판적인 놀람이든 호기심을 지닌 놀람이든 간에 놀람의 의미를 지니며, 그 다음으로는 경탄 즉, 이례적인 것이나 신비로운 것, 예를 들면 종교적인 기적이나 신탁, 마술적인 행위나 방법들, 철학에서(아직 설명되지 않은) 특정한 현상들에 대한 경외나 두려움의 뉘앙스를 지닌 경탄의 의미를 지닌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다우마조는 70인역본에서 약 56회 나오며, 13개의 히브리 단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다우마조는 종종 프로소폰(얼굴 face)과 결합하여(히브리어, 나샤 파님처럼) '얼굴을 들다, 총애하다, 편파적이다'을 의미하며(잠 18:5; 욥 13:10), 신 10:17과 대하 19:7에서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편파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더욱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쾌히 청을 들어주는 친절한 마음씨'(예: 창 19:21, 하나님에 대하여 말함), '고려하여 취하는 것'(신 28:50) 및  '존귀한 자, 매우 총애를 받는 자'(왕하 5:1, 수동태)를 의미한다. 그 예를 얼마든지 들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용례에서 요지는 두려움의 요소가 다우마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우마조가 히브리어 상당어 샤맘(무서워서 굳어지다, 레 26:32; 욥 17:8; 욥 21:5; 단 8:27) 혹은 타마(깜짝 놀라다, 공포에 사로 잡히다, 시 48:6; 렘 4:9; 히 1:5)의 의미로 사용된 구절에서는 이와 다르다. 특히 후자의 구절들은 어떻게 놀라움의 개념이 공포의 개념으로 옮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에게 묘사하듯이,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두려움과 공포가 뒤섞인 놀라움이다.

다우마조의 개념의 범위는 70인역본 본문의 욥 21:5과 욥 42:11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 깜짝 놀라는 욥의 장면이 두려운 놀라움을 자아내나(욥 21:5),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경이적인 도우심도 또한 놀라움을 자아낸다(욥 42:11).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다우마조는 신약성경에서 4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공관복음.

① 대부분의 구절들은 이적 기사와 관련있는 공관복음서(특히 누가복음)에서 나온다. 이 용어는 기적이 그 목격자들에게 미치는 효과를 기술하기 위하여 사용된다(예: 막 5:20; 눅 11:14). 그러나 마 9:33에서 명백한 것은 신약의 구원 역사의 일부로서의 그 사건의 의의이다. 마 15:31도 마찬가지다. 이형(variant) 표기 에다우마산이 나오는 마 9:8에서는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자신을 내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가 친히 인격적으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기쁨에 찬 놀라움을 표현하는데 이용된다.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신 사건도 놀라움(기이함)을 야기시킨다(마 8:27; 눅 8:25).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으신 사건에서는, 이 용어의 의미가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여 '경배하여'("절하며")라는 말로 대체한다(마 14:33). 마 21:20에서 제자들이 무화과 나무의 시든 것을 보고 놀랍게 여기는 것은 아마도 마 21:21-22의 예수님의 응답을 고려해 볼 때, 의심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 같다. 예수님의 행동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도 놀라움을 야기시킨다. 눅 4:22에서 청중들은 비록 여전히 비평적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설교의 매력 뿐만 아니라 그 은혜로운 내용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세금에 관한 논쟁에서 예수님의 지헤로우신 대답에 청중들은 놀라움(기이히 여김)을 발한다(마 22:22). 눅 11:38(바리새인), 막 15:5(예수님께서 그런 설득력 없는 고소에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실 때의 빌라도), 막 15:44(예수님께서 그렇게 빨리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그가 들었을 때의 빌라도)에서 이 용어는 놀람(surprise)을 가리킨다.

누가복음의 유아 기사에서(눅 1장과 2장) 다우마제인이 4회 언급된다. 사가랴가 성소 안에서 오래 지체함과 그가 말을 못하게 됨이 백성들을 놀라게 하여(눅 1:21-22) 그들은 그것을 무언가 비상한 일이 일어났으며, 그가 환상을 보았다는 징조로 여겼다. 말을 할 수 없었던 부친이 세례(침례) 요한의 이름을 지을 때에도 백성들이 놀라와했다(눅 1:63). 목자들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눅 2:18)와 예수님의 부모가 성전에서 시므온을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들도 놀라움을 자아낸다(눅 2:33). 이 모든 사건에는 사람들로 기이히 여기게 하는 것이 있다. 누가의 부활절 기사는 이 단어를 두 곳에서 사용한다. 눅 24:12에서 베드로는 여인들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서 무덤이 비었음을 보았다. 이에 그는 그 된 일을 놀라와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누가는 눅 24:41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이 얼마나 기쁘고도 놀라웠던지 믿을 수 없었던 것을 묘사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의 모습이 두려움을 자아내었다는 사실이 눅 24:37에 이미 언급되었다(참조: 요 21:12의 암시). 그러나 이것으로 말미암아 부활절의 기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눅 24:41; 마 28:8; 참조: 요 20:20).

② 예수님도 두 번 놀라시는데, 한 번은 나사렛 사람들의 믿음 없음 때문이요(막 6:6). 또 한 번은 가버나움 백부장의 믿음 때문이다(마 8:10; 눅 7:9).


(b)  행 2:7에 따르면 성령이 오실 때 모인 유대인의 무리가 놀라고 기이히 여겼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앉은뱅이의 치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려운 놀람이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대제사장들에게 있어서 놀라움의 대상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과 또한 그들이 "학문 없는 범인"이라는 사실이다(행 4:13). 이 외에도 사도행전에서 구약성경의 기사들과 관계되거나(행 7:31; 참조: 단 8:27) 인용될 때에 이 용어가 나타난다(행 13:41; 참조: 합 1:5).


(c)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의 태도와 행동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는 뜻으로는 드물게 사용된다. 예수님께서 배우지 아니하고도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계심을 기이히 여김에 대해(요 7:15) 예수님은 그의 교훈이 그를 보내신 아버지로부터 옴을 지적하여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요 7:21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안식일을 범하면서도, 그들이 그가 안식일에 행한 일을 기이히 여기고 노여워함을 지적하신다(참조: 요 7:23). 예수님의 일들이 불가피하게 놀라움을 자아낼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요 5:20).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메 다우마세스("기이히 여기지 말라")라고 이의를 제기하신다(요 3:7, JB; 참조: 요 3:7). 니고데모는 거듭남에 관한 전혀 생소한 말에 감정이 상한 것은 아니고 단지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전 5:9)하고 질문할 뿐이다: 그는 믿음으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메 다우마세스가 요 5:28 이하와(청중은 죽은 자가 생명과 그들의 말로인 심판으로 부활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이히 여기지 말아야 하며, 아울러 이 말씀에 순응해야 한다) 요일 3:13에서도(여기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미워함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하니 그들이 능히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까닭임) 발견된다.


(d)  바울서신에서 두 구절을 언급하고자 한다. 갈 1:6에서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토록 속히 다른 복음을 좇는 것에 놀라워함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의 거짓 교리 선생들에 관하여 논하게 된다. 살후 1:10에서 수동태는 공동체가 함께 참여할 하나님의 영광의 종말론적 현시를 가리킨다. 여기서 이 단어는 "영광을 얻으시고"와 병행되어 있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참조: 왕하 5:1; 사 61:6).


(e)  유 1:16의 언어는 70인역본의 용법대로(아첨하다) 사람들에게 나타난 편파성을(다우마존테스 프로소파) 표현하는 유대 기독교적 언어이다(참조: 요 3:13).


(f)  요한계시록은 이 단어를 4회 사용한다. 계 13:1 이하는 적그리스도의 화신인 짐승이 바다에서 등장할 때에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른다'. 이 이상히 여김으로 인하여 그 짐승과 그의 배후의 권세자 곧 용에게 경배하게 된다.

계 17:8의 기이히 여김(놀람)도 이 경배를 말하는 것이다. 묵시적 묘사의 모델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Caesars) 숭배였다. 계 17:6 이하의 예언자의 기이히 여김은 이와 다르니, 이것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큰 바벨론"의 비밀에 관한 것이다.

(참조: G. Bertram; W. Mund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