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복음서

통전적 관점으로 본 예수님의 선교

은바리라이프 2012. 6. 19. 20:42

통전적 관점으로 본 예수님의 선교 


I. 서론
구약에서 하나님은 만민의 구원을 궁극적 목표로 가지시고 주권적으로 선교사역을 시행하셨다. 신약에 들어와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통전적인 선교사역을 수행하시면서 만민에게 하나님 나라를 허락하셨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예수의 주와 그리스도 되심으로 발현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구원을 완성하신 후에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대위임 명령을 내리시며 교회에게 선교의 사명을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통전적 선교신학이란 성경적인 선교신학을 의미하며 성경이 증거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경에 근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사역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사역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사임을 천명하셨고1) 성령은 공생애 처음부터 사역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셨다.2)(눅4:1) 따라서 예수님의 선교 사역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사역이었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을 면밀히 검토하고 당시의 시대적, 지리적 배경을 살피면서 예수님의 선교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고 한다. 특히 성경에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선교라는 단어의 개념을 정립하면서 이를 역으로 예수님의 선교사역에 적용하여 예수님의 선교사역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변화하는 신학의 관점으로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평가한다는 한계에 부딪치게 됨을 인정한다. 그러나 통전적 선교신학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사역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선교사역은 그분의 생애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교사역를 검토하기 위하여 성육신과 공생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속에 들어 난 예수님의 선교사역을 말씀전파, 치유사역, 버림받은 자의 구원과 제자훈련, 그리고 파송사역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그다음 선교사역을 통해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의미와 교훈,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표적과 이를 통한 교회의 사역을 전망해보고, 마지막으로 성령하나님의 사역에 속하는 대위명령의 의미와 발전적인 선교의 원동력으로 이 명령을 다시금 되새기며 선교사역에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한다. 


II. 선교의 정의 및 범위


"선교(mission)"라는 말은 가톨릭의 예수회에서 가톨릭이 아닌 사람들(개신교도를 포함)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면서 최초로 사용한 용어3)로 라틴어 "mitto"(mittere, missio)에서 유래되었다. 그 뜻은 '보내다, 파견하다'이다. 종교적으로 mission 이라는 말은 '사명과 위임을 주어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임무는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믿다가 신앙을 떠난 사람이나,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자를 파견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Mission 과 Missions는 구분되어 쓰여지기도 한다. Mission은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 세상에 보내진 교회로서의 총체적 사역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의미한다. 즉 세상을 사랑하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 세상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활동, 교회와 세상을 포함하며 이 사역에 교회가 참여하도록 특권을 주신 하나님의 성품과 활동을 말한다.4) Missions는 특정한 때, 장소나 필요와 같이 미시오 데이에 참여하는 특정한 형태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복음의 영향권을 벗어난 지역에 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선포하여 타종교 내지는 무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회심시켜 예수께 돌아오도록 하며 이들이 속한 단체나 나라에서 지역 교회를 세우는 일 즉 전형적인 해외선교의 사역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 인식론과 더불어 신학의 변화는 선교의 정의와 범위에 관한 많은 견해들이 생기게 하였다. 


A. 복음주의적 견해 

일반적으로 선교라 함은 하나님의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해외 또는 타문화권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 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모든 방법과 활동을 말한다. 이에는 전도자를 해외에 파송하여,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키며, 복음적인 사업을 수행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선교를 이렇게 단순히 '복음 전파'의 측면에서, 특별히 한 개인의 영혼 구원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을 고전적, 전통적 견해라 할 수 있다. 이를 또한 복음주의적 견해라고 하는데, 이에 의하면 선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교회 개척이며,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복음이 실제로 전달되지 않는 전도나 선교는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복음주의 입장에서 강조해 온 전통적인 선교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주제로 하는 성자 하나님 곧 기독론 중심의 선교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선교에 대해 복음주의적 견해를 가진 이들은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대해 교회가 직접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구조적 변화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전도의 결과로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복음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인간 성숙이 사회구조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주의자들은 선교 활동 중, 농업 기술 교육, 의료 봉사 및 일반 교육 등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고, 이런 활동들이 차츰 차츰 한 국가의 하부구조의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견해는 결국 성자 예수님의 영혼구원의 선교사역에 국한되고 만다. 


B. 에큐메니칼적 견해 

에큐메니칼 선교관은 선교를 '샬롬'과 '인간화'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다. 즉, 선교란 단순히 한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하는 인간들 사이 또는 그룹들 사이에 진정한 화해를 이루고, 나아가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곳에서 모든 인간들이 참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이해하는 견해이다. 이런 에큐메니칼적 선교관은, 복음주의적 선교관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반해, 복음이 전해져 있는 곳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종래의 선교관이 교회 개척이나 교회 확장에 목표를 둔, 교회 중심의 선교관이라고 비판하고, 교회는 '이 세상에 평화(shalom)를 건설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손에 들려 진 수단'에 불과하다고 한다. 선교(evangelism)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메시야(즉 그리스도)이시며, 선교의 목적은 곧 "샬롬"의 수립이라고 한다. 이런 뜻에서 선교는 세 가지 측면을 가진다. 케리그마, 코이노니아, 그리고 디아코니아가 그것이다. 케리그마는 그 샬롬의 선포요, 코이노니아는 그 샬롬에 동참한 사람들이 상호 교제와 친교 가운데 사는 것이며, 디아코니아는 겸손한 봉사로써 그 샬롬을 실증하는 것이다. 이 세 측면이 선교에서 통합될 때 그 선교는 올바른 선교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친교'나 '봉사'도 선교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기초로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곧 '선교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곧 교회가 선교의 출발점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출발점이며, 선교의 주도권 또한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따르면, 선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하고 계시는 것으로서, 교회는 선교의 도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기능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의 사건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일이다. 

샬롬과 더불어 선교의 목표로 받아들여진 개념은 "인간화"이다. 즉 사회 구조를 인간화하는 것을 선교의 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화와 교회 개척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하는 일과 사회 구조의 근본 변화를 선교의 목표로 삼고, 선교의 방향은 인종 문제 사회변혁, 학생 항거 운동 등에로 바꾸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선교에 대한 이해가 이와 같이 달라짐에 따라 구원에 대한 이해에도 변화가 온다. 전통적으로 구원이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새롭고 영원한 신분이라고 이해하여 온 데 반하여, 새로운 선교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구원'을 강조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인류는 가난과 압제와 질병과 비인간적인 노동과 인종차별과 기아 등으로부터 구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머지않아 가게 될 하늘에 있는 빵이 아니라 지금 당장 먹을 수 있는 빵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에는 복음 전파뿐만 아니라 친교와 봉사가 포함되어야 하며, 나아가서는 이 땅 위에서의 다방면에 걸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교관에 대하여 비판의 소리도 높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우선순위 1 번에 놓을 것인가 하는 것이 맨 먼저 제기되는 문제이다. 그렇게 볼 때 에큐메니칼 선교 이해는 '선한 사업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일 곧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그 일을 소홀히 하게 된다.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깊은 열정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열정은 없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도록 일깨우기보다는 교회 갱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전혀 복음에 접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고, 아직도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를 보내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C. 통전적 견해

맥거브란(Donald A. Mcgavran)은 선교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혀 충성을 바치지 않고 있는 자들에게 문화적 장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그들을 일깨워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와 구주로 받아들여 그의 교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복음 전도와 정의실현을 위해 일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일하는 것이다."5) 

통전적 선교신학이라는 말은 대립적인 두 명령인 전도와 봉사, 개인의 구원과 사회구원, 보수와 진보, 등의 어느 한 쪽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감당하는 선교신학이다. 이것은 성경의 어느 부분도 취사선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교의 어느 부분도 간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선교의 폭은 매우 넓어져서 단순한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교육, 문화 활동, 사회 활동 등 그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땅 위에서 이루실 뜻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면 모두 선교 활동에 포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며 그의 제자로서 교회의 일원이 되어 일하게 하는 데 있게 된다. 이러한 선교를 통전적 선교라 부른다. 이러한 통전적 입장에서는 사람의 구원을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전인적(全人的) 구원 즉 영혼과 육체 전체의 구원에 목표를 두게 된다. 그리고 통전적 선교는 사회에 관하여서도 일부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양극단의 사역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화해와 일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의 궁극의 목적은 복음을 통한 구원에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게 된다. 성부 하나님의 사역, 성자 예수님의 선교사역, 성령 하나님의 선교사역을 통합적 지향하는 것은 바로 이모든 사역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통전적 선교가 이루어질 때 분명히 역사와 사회의 모든 분야가 개선되고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통전적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특수주의의 성격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다는 보편주의적인 성격의 기독교 교리에 교차 또는 상호침투 해 있는 것처럼 기독교와 기독교 선교는 특수성 속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며 보편주의를 특수화함으로서 기독교적인 보편주의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결국 선교의 특수성과 보편성, 구심력과 원심력,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부르심과 보내심, 소명과 사명, 협력사역과 개별사역, 팀선교화 개체선교, 다문화 선교와 지역문화선교, 다종교 선교와 특수종교선교, 다종족 선교와 한 종족선교, 등 어느 것도 버리거나 택하지 않는 통전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


III. 예수님의 선교 배경


A. 예수님 선교의 시대적 상황의 통전성


1. 예수 이전의 상황

유대는 주후 6년에 시리아에 병합되었다. 그리고 70년에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파괴되었다. 이 두 시기 사이에 예수께서 설교하였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 기간동안 약소국가로서 애국심은 최고조에 달했고, 민족 정치와 민족 종교의 일치에 의해 더욱 불타올랐다.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는 로마의 통치에서 독립하려는 민족운동과 헤롯왕가의 학정에 반발하여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났으며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헬레니즘이 유대주의를 급속히 잠식하여 들어감으로서 유대지역의 헬라화가 초래되고 있었다. 

또한 종교적인 면에서는 약소국인 유대왕국이 한편으로는 로마에 굴복하면서 문화적으로 모방하려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와 종교적 전통을 키워 가려는 경향이 양립하게 되었다. 민족주의와 전통이 종교로 하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대민족은 종교를 더 강조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었다. 이 하나님과 그들은 이미 계약관계에 있었으며 그들이 필요한 때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위대한 구원자인 메시아를 보내주기로 되어 있었다. 

바로 그 시기가 당도한 것이다. 로마의 핍박은 더욱 심해졌고 그래서 유대의 구원자는 더욱 필요해졌다. 그러므로 당시 팔레스틴은 바로 메시야가 와야만 할 때와 장소였다. 결국 하나님은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야, 즉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며 유대인들 가운데 계시게 하셨다. 그러므로 티베리우스 통치 하에 있었던 예수가 오신 시대는 정말로 메시아적, 묵시적, 종말론적인 기대로 가득 찬 시기였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류를 구원할 때가 무르익은 것이다. 


2. 예수 당시 갈릴리의 상황 


a. 정치적 상황 

주후 1세기 팔레스틴은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서 분봉왕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이것은 주전 63년 폼페이우스의 팔레스틴 점령 이후 계속된 상황이었다. 로마의 평화정책으로 로마제국의 종주권에 대한 저항과 조공 의무 이행 외에는 분봉왕들이 정치적, 종교적 분야의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성전 체제는 로마제국의 비호와 제국에 대한 협조와 충성의 대가로, 정치, 경제 및 종교생활에 막대한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예수의 선교의 주 무대인 갈릴리도 이러한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 

b. 경제적 상황 

갈릴리의 주민들 특히 농민이나 노동자들처럼 하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헤롯왕가와 로마제국의 착취와 중과세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대지주와 부자 귀족들의 횡포와 경제적 수탈에 시달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전체제 하의 사제 귀족인 제사장들이 부과하는 종교세 등으로 농노와 다름없는 소작인이 되고 말았다, 이들은 결국 농지를 잃고 도시에 몰려들어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일일 노동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부정적인 사회, 경제적 상황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를 뒤덮고 있었다. 경제적인 희망, 정치적인 희망, 신분적인 희망 등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희망이 사라진 시기였다. 따라서 농민 폭동과 정치적인 개혁과 혁명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빈번히 발호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 되고 말았다. 


3. 예수 이후 초대교회 시기까지의 상황 


a. 긍정적 배경 

첫째, 이 시대의 일반적 배경으로서는 그레꼬-로망 세계 하에서는 잘 정비된 도로망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전반에 걸쳐 있었으며 이를 통한 편리하고 기동력 있는 이동은 초대교회의 선교의 지평을 넓히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둘째, 공용어의 사용 곧, 헬라어를 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함으로써 민족, 국가, 개인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해짐으로서 복음의 전달은 촉진될 수 있었다. 셋째, 새로움(novelty)에 대한 동경과 수용적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그레꼬-로망 문화는 그 기반부터가 수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의 각 지역 문화, 제도에 대한 개방적이고도 포용적인 자세는 비록 갈릴리의 한 구석에서 출발한 작은 운동에 대하여서도 역시 동일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였다 

b. 부정적 배경 

바울의 선교에 이르기까지의 초대교회 선교가 가진 선교의 한계 또는 장벽이 있었다. 초대 교회는 유대인에 비해서 수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으며 그들 구성원들의 학식의 정도는 내세울 것이 전혀 없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문화적인 혜택이나 경험도 거의 없었으며 선교를 위한 배후의 조직도 가지지 못하였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체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서 배척받는 소수자들(minority)이었을 뿐이다. 복음서의 제자들을 거쳐 바울에게 이르기까지 이 소수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데 많은 장벽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종적인 장벽 곧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뉘어 진 대립의 구도는 로마 세계 내에서조차도 융화되지 못하였고 타민족과의 융화를 거부하는 배타적인 민족적 선민의식은 선교의 영역이 확대되는데 결정적인 저해 요인이었으며, 다신론적 종교의 장벽은 유일신 사상으로 인해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초래하였다. 또한 고대 세계의 계층의 장벽은 빈자와 부자, 노예와 노예 소유주로 나뉘어 있었지만, 1세기 로마 사회의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정치적인 의심은 그들은 무정부주의자로 치부하여 로마의 권위에 도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처소에 남녀가 함께 있는 것으로 인해 야기된 도덕성에 대한 의심은 기독교 선교에 큰 장애가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인과 유대인들과의 관계 하에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보잘 것 없는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학벌, 명예, 경제수준, 정치적 권력 어느 것에서도 유대인들을 설득할 수 있을 만 한 요소가 없었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법 즉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민족주의에도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대다수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아니즘에 충실하지 않은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한 초대교회는 그들을 종교적으로 적대시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선교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B. 예수의 선교활동 지역과 시대의 통전성 


1. 예수의 선교활동 지역과 대상 

예수의 선교가 이루진 곳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의 일부지역이었다. 팔레스타인 전체에서 보면 갈릴리는 팔레스타인의 북쪽에 위치했으며 팔레스타인 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비옥한 땅이 많아 농업이 융성했다. 그런 까닭에 동부의 주요 지역들보다 인구가 조밀했다. 비록 예수가 주변의 소도시들을 방문하기도 했고 갈릴리 지역 자체가 이방인들의 유동이 잦았지만 예수 선교의 제1차 대상은 유대인이었다. 예수는 이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이 선포는 성전 지배층이나 이방인들에게 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서 소외되어 있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메시아적 대망이 있었고 실제로 그들의 편에 서있을 메시야가 필요했다. 그들은 언제고 예수의 선교의 한복판에 있었고 말씀을 받아들일 만 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2. 예수의 시대에 대한 관점 


a. 대중(오클로스)에 대한 관점 

예수 당시의 갈릴리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로 대변되는 오클로스를 의미한다. 당시 이 오클로스는 먼저 세리들과 죄인들이다. 예수는 그들의 친구였고 그들은 예수를 따랐다. 마태는 세리와 창기를 병렬시켜 세리와 함께 창기를 오클로스에 포함시킨다. 누가는 비유로써 세리들과 죄인들과 교제하는 예수의 행태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응수한다. 두 번째로 오클로스는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이다. 온갖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예수께 밀려왔다. 마가복음은 귀신 들린 자들과의 사건 속에서 계속적으로 예수를 치유자와 귀신 축출자로서 부각시킨다. 세 번째 오클로스는 온갖 병에서 고침 받은 여인들과 그 밖의 예수를 따르는 여인들이다. 예수의 네 번째 오클로스는 가난한 자들이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가난한 자들이라고 명시한 적은 없지만 위의 대부분의 민중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실제로 예수의 복음 수혜자는 가난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에 있어서 그의 식탁교제, 또는 세리들과 죄인들에 대한 관점과 태도는 그들에 대한 예수의 선하고 특별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b. 성전제도에 대한 관점 

오스카 쿨만은 성전 숙청사건에서 예수가 종교적 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 사실이지만 성전제도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숙청 사건은 무력으로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행동이자 예언자적 행동의 표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당시 종교인들이 생각했던 성전을 부인하고 종교적인 기존질서에 대한 도전과 혁명을 지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패한 성전 제사장들과 유대교인들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과 원하심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예수는 성전파괴자가 아니라 철저히 성전보호자의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그 성전이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 안에서 완성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이었다. 


3. 예수와 열방 개념 

우리는 복음의 기록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방인 선교를 중요시하지 않는 듯한 인상이 풍기는 구절들을 대한다. 제자들에게 전도하려 보내시면서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6)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고 가나안 여인에게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7)고 하셨다. 이러한 말씀들은 얼핏 우리들을 당혹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에 대하여 Johannes H.Bavinck는 그 당시에는 아직 복음 전파가 전 세계적 차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을 알리시는 것뿐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방선교에 대하여 단순히 시기상조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메시아 대망 사상으로 무장된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먼저 집중적으로 전한 후에 이방인 선교의 차례를 택하라는 선교 전략적 차원의 표현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때가 이르지 못했다기보다는 유대인 전도의 긴급성과 필요성을 강조한 것뿐이다. "구원은 유대인에게 속했다"(요4:22)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도 예수님이 유대지파를 통하여 오신 예언 성취의 메시아임을 증거 하신 것뿐이요 사마리아인들에게 구원이 없다는 선교 부정적 언급으로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 전도하신 사실이 예수님의 본의를 행동으로 증명하여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백부장을 만났을 때 구약의 예언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리라"(마8:11). 베다니의 마리아의 신앙을 높이 평가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되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26:13)고 칭찬하셨다. 또 "이 천국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마24:14)라고 말씀하셨다.


IV. 예수의 선교


A.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선교의 통전성 

1. 성육신 사건 

그리스도는 보내는 자이면서 동시에 보냄을 받은 자이기도 하다. 그는 하나님과 본질상 하나이면서도 "아버지"의 보내심에 따라 세상에 오신 자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세상에 인간으로 보냄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철저히 자신을 인간들과 일치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주장할 수 있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예수의 행동 저변에는 언제나 아버지께로부터 보냄 받은 자라는 의식이 늘 가득 차 있었다. 요한복음 3장부터 20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장에 걸쳐 이러한 사상이 나타난다. 특히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요4:34)라는 말씀에서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일과 그 목적이 세상의 구원에 있음이 명백히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자들을 택하여 보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 역시 제자들을 부르고 또한 그들을 세상에 보내는 일을 하셨다.8) 여기에서도 선교의 주체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나타난다.9) 

이렇게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택하신 이스라엘과 그의 종들을 통해서 인류에게 계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하셨던 보편적 구원10)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지상으로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교 사역을 감행하셨다. 성경은 예수님이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며11), 동정녀의 몸을 빌어서 오셔서12) 인간과 같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인류구원 역사의 중심이며 절정이다. 이는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쁜 소식이며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이며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온 인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은 첫째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함이며13) 둘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며, 셋째 마귀의 세력을 멸하기 위함이며14), 넷째 모든 사람을 이끌어서 죄와 악의 쇠사슬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이며15), 다섯째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다.16) 


2.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세상의 구원을 위해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가 이 세상에서 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펴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등 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심으로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리려 하셨다. 그것은 예수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기도17)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애굽에 피난을 가시고 갈릴리 나사렛 땅에 정착하면서 보낸 대부분의 생애는 선교적인 관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의 탄생은 먼저 유대나 이스라엘에 알려진 것이 아니라 이방족속의 지도자인 동방박사들에게 알려졌으며 가난하고 순박한 목자들에게 알려졌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이방 땅인 갈릴리에서 공생애의 대부분을 보내셨다. 이런 사실들은 그 분의 만민의 구주와 주로서의 당위성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민족적 편견에 사로잡힌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방인과의 교제를 시작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이 이방에 알려지면서 이방인들이 따르게 되는 것18)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유대인만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방 만민의 그리스도심을 증거 하시기에 충분하였다. 


3.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선교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인류에게 완전히 계시되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선교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의 활동의 정점에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이심이 알려지게 되자, 그는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하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을 선고하였다. 제자들 중 베드로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예수께 항의했을 때,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이라 하였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 하면서, 그의 항의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그 후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세 번씩이나 예고함으로써 죽음과 부활이 중요한 사역임을 밝히셨다. 

신약의 모든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정점으로 그의 전기를 구성하였고, 그 외의 신약의 저자들 역시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의 중심으로 받아들였다. 사도바울은 이 점을 의식적으로 교회에 알리는 사역에 집중하였다.19) 이러한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아들의 죽음과 부활이 지니는 선교 신학적 의의는 한마디로 선교의 절대적인 당위성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유효성과,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입증되었다는 점이다. 즉, 하나로 연결된 이 두 사건은 율법의 공의와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곧 사랑이 인류에게 계시된 사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며, 이것은 율법을 이룰 수 없는 인간에게 다함이 없는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 복음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며, 이것은 곧 율법의 모든 저주들로부터 해방이요, 참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피조물을 향한 구원의 원천이 되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고, 아들이 그 선교적 사명을 다 이룸으로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부족함 없이 계시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모든 선교이론과 활동과 상황에 가장 근원을 이루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과 부활, 그리고 역사의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의 약속은 불변의 복음이 되었고, 누구든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문이 열리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방선교를 통해서 온 인류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와 같은 신앙의 새로운 세계에 참여하고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하여 선교사에게 성령을 부어 보내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적 영성이 되는 것이다. 


B. 예수의 선교적 영성의 통전성 

1. 고난의 종의 영성 

예수의 선교영성은 고난의 종의 영성이며 섬기는 고난의 종의 영성은 무력성에 있다. 이 무력성의 뚜렷한 증거가 십자가의 죽음이다. 예수님을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일 중의 하나는 예수 생애의 마지막 부분이다. 왜 그가 그토록 약해 지셨는가 하는 것이다. 고난주간에 있었던 이야기에 나타난 사건들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과 예수를 동정하던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은 세속적으로 그가 승리할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신들을 해방시키실 줄 알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왕의 입성으로 환영했다. 또한 제자들도 그러한 이유로 자신들 중에 누가 크냐고 서로 질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현장의 분위기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다. 나귀는 연약한 짐승으로 더구나 세끼를 타셨다는 것은 그 연약함의 상징이었다. 이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장면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전능성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연약성과 고난으로 도우시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20)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힘이나 기적으로 나타내시지 않는다. 선교는 모든 입으로 이 무력성의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모든 무릎을 연약함의 상징인 고난의 종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는 것이다. 


2. 샬롬의 영성 

예수의 선교적 영성은 샬롬을 추구하는 영성이었다.21) 갈보리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한 번도 세속적인 승리를 추구 하지 않았었다. 그 분은 태어나실 때 이미 샬롬을 전제로 태어나셨다22). 그리고 예수의 공생애는 어두움과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증언되고 있다.(눅1:19)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우시면서 그들이 샬롬를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며 탄식하셨다.23)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누가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간다24)고 표현하고 있으며 베드로도 예수가 샬롬의 복음을 전했다고 말했다. 이렇듯 예수님은 샬롬으로 오셨고 샬롬을 전하시며 샬롬릏 이루셨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바로 샬롬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 샬롬의 공동체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샬롬을 주시고 그 샬롬 가운데 교회는 든든히 서가는 것이다. 이 샬롬은 언약의 성취와 관련이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의 평화 개념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곧 화해의 관계가 맺어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25) 예수님은 샬롬 그 자체시며26) 십자가로 원수된 것을 소멸하심으로써 인간과 모든 만물과 하나님 사이에, 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이룩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이 이루신 샬롬은 구약시대에 이미 약속된 화평의 언약27)의 성취이며 스가랴가 예언한 메시아의 샬롬28)의 실현이다. 따라서 선교는 이 예수의 샬롬의 영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샬롬은 온 세상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상황이다. 사랑과 화해로 원수와도 한 몸을 이루는 평화이다. 결국 이 예수의 샬롬을 전하는 것이 선교이기 때문에 그 방법도 샬롬의 방법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적 영성은 곧 샬롬의 영성이다. 


C. 예수의 선교방식의 통전성 

우리의 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의 연장이라면, 우리들은 예수님의 선교로부터 모범적인 실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선교에 있어서는 다음 세 가지 점들을 지적할 수 있으며 우리도 이 방식을 선교에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 

1. 동일시의 원리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격으로 말하자면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히7:26)분이시지만 그의 사역에 있어서는 의도적으로, 그리고 일관성 있게 자신을 죄인들과 동일시하셨다. 그는 자신이 회개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셨다.29) 그는 또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30) 그리고 그는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31)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을 늘 죄인과 동일시하셨다. 이것은 예수의 성육신 사건의 내용이며 타문화에 대한 내부자적인 삶의 태도이다. 예수의 선교를 이어나가는 오늘의 선교도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역에 있어서 동일시원리를 선교의 방식으로 삼아야 한다. 

2. 봉사의 3중적 형태(선포, 교육, 치유)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유대인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마4:23)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이다. 이러한 인간의 세 가지 요소들이 인간의 타락에 모두 관계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 요소들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관계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만족하셨던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몸과 마음도 치유해 주셨다. 즉 인간의 삶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분의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이었다.32) 따라서 오늘 날도 선교사역은 복음의 선포사역과 교육사역과 병원사역이 필수적인 방법으로 간주되고 있다. 

3. 성령의 능력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예수께 임하였다.(마3:16) 이렇게 특별한 형태로 기름 부으심을 받은 것은 그의 공생애를 위한 준비였다.(눅4:18).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다(행10:38).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였으며(히9:14),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도 역시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롬1:4)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교사역의 전 과정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우리의 선교 또한 성령의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가운데 수행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행1:8) 


D.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교사역의 통전성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지 않고는 예수의 선교사역을 말할 수 없다. 래드는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 가운데 그의 통치를 확립하기 위하여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로 말세에 묵시적인 방법으로 나타날 이 나라는 죄를 이기시고, 인간을 죄에서 건지시며 하나님의 통치에 그들을 부르시려 세상에 오신 예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세상에 임하였다”(1974 ; 91)라고 말하고 있다. 


1. 하나님 나라의 정의 

하나님 나라의 선교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이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현재적 활동의 특성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현재 세상에서 역사하시며 하나님의 통치는 그의 백성에게는 축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초대를 받아 그의 제자가 되면 그는 하나님 나라의 수혜자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들은 오직 선교를 통해서만 죄인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현재 우리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의 활동에서 나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목적인 잃은 양을 찾는 것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이고 종말론적 개념 아래서는 더욱 선교활동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복음의 증거와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일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한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과 그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을 회개해야 한다. 이 회개의 요구에서 우리는 신앙으로 인도되며 하나님 나라에 접근하게 된다. 이 회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로서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하셨으며 12제자를 파송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그 나라의 증거로서 권능을 행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첫째 하나님의 확신이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모든 세상의 절대적 주권을 지닌 주님으로 드러내시리라는 확신을 표현하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셋째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백성의 구원을 책임지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고통과 질병과 악과 죽음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이시다. 선교는 바로 하나님의 확신과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의지를 세상으로 알게 하여 그 나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2. 사회와 하나님 나라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그 나라의 실재에서 실재적인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졌다. 따라서 현재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와 사회발전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교제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자유, 평등, 정의의 선택은 그 나라에 속할 때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로 성육신된 사랑과 자유의 하나님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당하는 자들을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응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하였다. 

사회개혁이나 정치적인 개혁으로 하나님 나라를 표현하는 것은 성경적 관점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새로운 사회로서의 노력과 연관을 시키고 있다. 이 사회는 바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는 이를 위해서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먼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고는 인간 사회에서 교회가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언젠가는 새롭고 완전한 나라를 이루지만 그 때는 종말의 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인 성취는 하나님 나라 자체가 아닌 그 나라를 나타내는 어떤 표시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이 불완전한 사회에서 작용하지만 마지막 때에 가서 하나님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시고 깨끗한 사회를 만드신다.(계21:5) 하나님 나라는 위로부터 오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힘으로 아래로부터 사회가 개선되어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삶을 통해서 그 나라의 실체를 세상에 보여야 한다. 그 나라와 왕 되시는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은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선교사역에 힘을 쏟아야 한다.(마24:14, 막13:10) 


3. 하나님 나라의 교훈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교에 대한 중요한 주제를 친히 말씀하신다. 비유는 원래 여러 가지 진리를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진리만을 확실히 알려주기 위해서 택한 예수님의 설교방법이다. 


a. 사회 

교회는 어두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선교해야 한다33). 빛과 소금의 비유는 사회에서 천국생활을 함으로 증인 노릇을 하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각 세대에 그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이 비유는 의미가 없어진다. 

b. 추수 

주님은 풍성한 주님의 추수에 일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34) 이 비유는 세계 선교에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주님께서 직접 알려주신다. 복음화는 항상 낙관적으로 진행된다. 넓은 주님의 밭에는 추수할 것이 많고 일꾼도 많이 필요하다. 이 엄청난 가능성 속에서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c. 성장 

마태복음 13장에는 성장에 관한 4가지의 비유가 있다. 첫째 밭의 비유35)인데 이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작용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곳에는 열매가 맺혀지게 된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것만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열매에 관심이 많으시다. 결국 이 비유는 추수할 열매를 생각하고 씨를 뿌리라는 것이다. 선교는 지혜롭게 씨를 뿌리는 것이다. 두 번째 밀과 가라지 비유36)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함께 다른 나라도 확장을 서두른다는 의미이다. 이 참 것과 거짓 것은 마지막 날에 구별이 되는데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승리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그물비유37)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현실에서는 결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네 번째 누룩비유(마13:33)는 하나님 나라가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사회와 전 세계에 들어와서 퍼질 것을 말한다. 이것은 미래에 완전한 승리도 들어 날 하나님 나라가 현재 숨겨진 나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숨겨진 나라는 누룩처럼 이 세상에 그 세력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d. 가치 

천국은 보화와 같아서 그 가치는 다른 어떤 소유보다도 더 크다.(마13:40) 이것은 의사결정의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느냐 세상 나라에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가치관에 달려있는 것이다. 무엇에 가치를 두느냐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보신다. 하나님 나라가 나의 인생의 어느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나의 삶에 존재할 때 하나님 나라는 내 안에 이루러지는 것이며 선교사역 가운데 완성되어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러한 철저한 의사결정을 요구한다. 

e. 충성 

모든 삶은 청지기 직분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38) 착한 종은 충성된 청지기이다. 주인의 돈을 땅에 묻은 청지기는 신탁의 의무를 위반한 죄를 지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이 되게 하는 것은 예수의 이 땅에서의 사역의 모습이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구세주의 은사를 이 땅에서 열매 맺으신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사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열방의 선교를 위해서 쓰여 져야 함을 뜻한다. 

f. 열방 

혼인잔치 비유와 큰 잔치 비유39)는 그 나라가 이방인에게도 이른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종들은 두루 다니면서 다른 손님들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선택된 민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선교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집에서 제외된 자들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결국은 이러한 일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행하신 모든 사역이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되었다. 바로 이 증거는 선교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g. 제자의 기본요건 

망대를 세우는 비유와 전쟁에 싸우러 가는 임금의 비유40)는 제자의 도에 관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며 따라야 할 제자들은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 제자들은 현실의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통치를 믿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도 믿었다. 이 믿음에는 순교의 희생이 따르게 된다. 주님은 사람을 부르실 때 죽기까지 희생을 명령하신다. 예수님은 12제자를 선택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선교사역을 맡길 인물을 스스로 선택하셔서 제자를 삼으신다. 그리고 3년 공생애에 그들과 함께 사시면서 모든 제자훈련을 완전하게 시키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감과 능력을 주시고 땅 끝까지 보내신다. 그 제자훈련의 중심 내용이 바로 자신의 소유를 포기41)하는 희생인 것이다. 

h. 잃은 자를 찾으심 

읽은 양, 잃은 동전, 잃은 아들42)은 모두 예수께서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비웃었을 때 하신 말씀이다. 이 세 가지 비유는 잃은 것을 찾았을 때 큰 기쁨을 강조한다. 이것은 바로 잃은 자들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기쁨에 참영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다.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선교사역은 이 잃은 자를 경멸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기 교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강한 구원의 은총이 들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잃은 자들이 구원되기를 원하신다. 또한 이를 방관한 사람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이는 선교의 자극을 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잃은 자를 찾는 것이라면 선교는 언제든지 어느 환경에서든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예수님의 주된 사역이다. 


E. 예수의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통전성 

하나님 나라를 예수와 동일시하는 것은 곧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생활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시고43) 또 완성하신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다.44) 교회는 믿음으로 그의 은혜를 받는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몸45)이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거나 그 나라가 될 수는 없지만 그 나라를 증거 할 수는 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동일하지 않지만 중요한 관계가 있다. 교회 없이 하나님 나라가 인간 속에 보여 질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 없이 교회가 인간 속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둘은 명백히 구별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교회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위임받은 사람이 이끌어 나간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님의 선교활동을 따라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F. 하나님 나라의 표적의 통전성 


1. 기적을 통한 표적 

병든 자가 치유되고 귀신들린 자들이 자유하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은 구원의 표적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표적은 구원자체는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기적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야 하며 모든 사람이 경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표적은 단지 모델로 보여 지는 것이다. 그 의미는 하나님 나라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은 표적으로 끝나는 것이지 그것이 믿음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는 기적적인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실례들로 가득 차있다. 이것은 대부분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그래서 이 표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증거 하는 것이다. 이 기적들은 메시아 시대의 표적이며 예수님의 사역의 증거이다. 


2. 사단의 결박의 표적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죄와 어둠의 다른 나라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이 세상에 임하였다는 것은 그 반대로 어둠과 죄의 나라는 이미 패망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그 반대의 나라와 정면으로 맞서 이기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기적들은 십자가상에서 일어날 사탄 나라의 패배를 암시하는 표적이었다. 그리고 사탄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철저히 패배를 당했다. 귀신들은 언제든지 예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또 예수를 고백하기도 한다.46) 귀신은 예수가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안다. 귀신이 예수의 이름으로 쫓겨 감으로 사람들에게 참 평강이 임했을 때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아주 명백해지는 것이다.47) 사단의 나라는 이미 패망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이다. 따라서 사단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동시에 결박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사단은 결박당한 힘없는 존재일 뿐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권세를 제자들에게 전수하셨다.48) 이러한 사실은 선교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다. 선교는 세속적인 권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권세로 이루어지며 주님이 주신 권능은 사단이 이미 결박되었다는 것을 믿음과 기도로써 확신함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사단에게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는 사탄을 결박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힘입은 선교사역에서 증거 된다. 


3. 복음선포의 표적 

세 번째 표적은 복음선포이다.49) 예수께서는 요한이 보낸 제자들의 물음에 대답하여 이 표적을 말씀하셨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마11:5) 이 표적 외에 우리가 이 땅에서 구해야 할 다른 표적은 없다.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요한 계시록의 표적이 세상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 되었는가 만이 우리가 구할 표적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는 그리스도인의 복음 전파 즉 선교활동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미래적인 표적은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 표적이 이미 우리 안에 현재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선취하고 이 땅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표적의 발현을 위해서 모든 제자들을 땅 끝까지 파송하신다. 땅 끝까지 복음의 표적을 들고 나가는 행위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선취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역에 삶과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 부르심과 대 명령(The Great Commission)의 통전성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전 마지막으로 주신 지상명령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Make disciples of all nation)"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라"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분부의 핵심내용이며 이것이 예수님 자신에 의한 선교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에서 제자를 삼으라(make diciples)는 말이 주동사로 목적을 나타내고 있고, 가서(Going), 세례를 주고(Baptizing), 가르쳐 지키게 하라(Teaching)는 말씀은 분사로서 제자 삼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주어진 말씀인 것을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제자 삼는 그 일을 위하여 가고,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다. 신약에서는 5군데50)나 선교명령이 나타나 있다. 이 선교명령은 각각 그 강조점을 달리하고 있으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사죄를 받으며 모든 족속을 주의 제자로 삼아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이룬다는 본질은 동일한 것이다. 


A. 가라

"간다"는 말은 "출발하다(to depart), 떠나다(to leave), 지경을 넘어서 가다(to cross boundaries)"는 뜻으로 "사회학적, 언어적, 종족적, 문화적, 지리적 경계를 초월해서 간다"는 의미이다. "가면서"라는 말 가운데는 문화 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 상황화(Contextualization), 및 종족해석학(Ethnohermeneutics)의 필요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명령을 쫒아 다른 민족에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고, 통달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특별히 한 언어를 정복 할 때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펼쳐지게 되며, 그 문화권을 이해하게 되고 그 문화권의 사람들을 복음으로 섬길 수 있다. 또한 그 지역에 참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민족 중심사상(Ethnocentrism)을 버려야 하는데 이 사상은 다른 민족의 문화를 그들 자신의 문화적 가치관과 가정들에 의해서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기민족의 문화를 최상의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민족의 문화를 미개하고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적 우월의식을 뜻한다. 가는 것은 바로 주님이 하늘의 문화를 떠나 땅의 문화로 성육신하신 것처럼 그 문화에 성육신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는 말은 이 말을 따르는 주님의 교회가 모이는 교회로서 끝나면 안 되고 흩어지는 교회, 선교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촉구 하고 있다. 


B. 세례를 주라 

세례를 준다는 것은 "주님의 사람으로 인을 쳐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라, 주님의 소유가 되게 하라"는 의미이다. John McArthur는 "세례란 죄 사함을 받고(막16:16), 메시아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메시아의 주권에 굴복하겠다는 서약의 표(sign)"라고 언급하고 있다.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이미 하나가 되어졌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외적 표식 혹은 사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따라서, 선교명령의 문맥 속에서 세례는 구원과 동일한 의미로 나타난다. 

세례를 주는 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며, 메시아 왕국에 대항하는 죄, 죽음과 마귀의 권세를 묶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준다는 말은 지위의 변화를 의미한다. 죄의 노에가 세례를 받음으로 자유인이 되었다.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죄와 죽음과 마귀의 노예로 살던 영역에서 메시아 왕국의 영역으로 옮겨진 것을 확인하는 갓이다. 


C. 가르쳐 지키게 하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은 순종의 사람, 충성의 사람, 섬김의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 양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만 하고 거기에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해 주며,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숙한 성도가 될 수 있도록 양육의 사역이 뒤따라야 함을 보여준다. 

가르쳐 지키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순종의 사람이 되어져야 한다. 잘 가르침을 받고 잘 순종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참으로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다.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완전히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선교사역에서 이러한 가르치는 일과 지키게 하는 사역을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선교의 성패가 여기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다. 최종 목표가 제자를 삼는 것이라면 이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사역을 필수적인 사역이 될 수 있다. 


D. 모든 족속 

모든 족속이라 말은 모든 언어종족(every language group)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이다. 마 24:14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고, 마28:20에서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라고 말씀 하셨는데, 여기에 모든 "민족" 혹은 "족속" 이라는 말로 언어 종족(language group)의 개념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나 민족의 개념이 아니라 언어 종족 개념으로 이해되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약 25,000 언어 종족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 현재 13,000 언어 group이 복음에 노출되어져 있기 때문에 이제는 나머지 12,000 언어 group들에 선교사를 파송하면 지구상의 모든 민족 혹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빠짐없이 증거 되는 실질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E. 제자를 삼으라 

제자라고 하는 말에는 5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로 제자는 믿는 자(Believer) 라는 뜻이다. 이것은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의 복음 메시지를 받고51) 예수님을 메시야로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을 즉시로 "제자"라고 불렀던 사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손가락으로 나를 확인해보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52)고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가 되고,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가 되고,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는 자가 될 때만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고,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제자의 의미는 배우는 자(Learner)라는 뜻이다. 오순절 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던 3천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은 즉시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배우는 자로서의 모습을 가졌던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53) "제자"라고 하는 말의 원뜻이 "배우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멍에를 메고 자신에게서 계속해서 배우라고 말씀하셨다.54) 

세 번째 제자의 의미는 "따르는 자"(Follower)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55). 주님은 늘 주님을 따르는 자가 주님의 제자인데 주님을 따르는 자는 마땅히 자기의 인간적인 생각과 욕심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아야 할 것을 주님은 말씀하셨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는 그 말씀에 전적으로 다스림을 받고 그 말씀에 순종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56) 또한 주님을 따르는 자는 주님을 섬기는 자이고 주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이다.57) 

네 번째로 제자는 사랑하는 자(Lover)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사랑을 그 삶 속에 실천하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라는 뜻이다.58)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는 고린도전서 13장이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사도바울은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고 말씀하셨다. 

다섯 번째로 제자는 주님을 닮은 자(Imitator)이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성도를 예정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때가 되매 불러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예정과 선택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다.59) 고후 3:18절에서는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Transformation) 되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10장 24절과 25절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이렇게 제자가 주님을 닮은 자가 되기를 주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F. 사명자들에게 주는 약속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여기에 "볼지어다"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특별히 중요한 어떤 것에 주의를 집중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자주 사용 되어지는 감탄사(interjection)이다. "항상" 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모든 날의 전체, 우리가 살고 있는 각각의 날들 모두(all the days)"를 의미한다. 성도들에 대해서는 "그의 생애의 모든 날들"을 의미하고, 광의적으로 교회에 대해서는 "종말의 때까지"를 의미한다. 즉, "주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의 왕국을 완성하시고 통치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시는 그날 까지" 즉, "세상 역사의 종말의 순간까지"를 뜻하는 말이다. 함께 있으리라는 주님의 약속은 제자들이 선교사역을 위해서 언제 어디로 어떻게 가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삶에 대한 약속이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다. 따라서 사명자들에게 주는 약속은 바로 성령을 부어주심의 약속인 것이다.(행1:8) 이 약속을 붙잡고 모든 제자들이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나가는 것이다.


VI. 결론


성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타락한 인류와 피조물을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보존하시며, 의로 심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 행위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근거한 자기 보냄이다. 선교의 근본정신이 여기에 있다. 선교는 타자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보내는 자가 보냄을 받는 것이다. 보내는 자와 보냄 받는 자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그리고 보냄 받은 자는 피조물에 자신을 일치시킨다. 그러므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서는 통전성이 확실히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이 포함되는 선교사역의 통전적 선교사역이며 이의 기본적인 바탕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아니고서는 선교는 없다.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의 프락시스(praxis)다. 

복음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아 오셨다는 구절이 여러 군데 나온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제한된 대상을 명시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역사적으로 제한적인 약속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의 만민구원의 하나님의 선교사역과 긴장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적 정황 아래서는 오히려 단계적인 선교전략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재림을 통해 그 제한적인 것 같은 약속은 포괄적인 것으로 확정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포괄하며 전인적인 구원의 통전적인 선교의 모습을 교회에 보여주게 되었다. 따라서 복음서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 인류의 구원약속을 확증하였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친히 전 인류, 특히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선교를 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사역의 통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은 그의 선교사역의 목표를 하나님 나라에 두었으며 이 땅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이 하나님 나라는 예수그리스도의 통전적 선교사역의 핵심이며 모든 선교사역의 최종 종착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은 과거에 논란이 있었다. 복음주의, 보수주의는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하거나 유보하였다. 그러나 그 이유는 실용적 또는 정서적인 이유로 그 주장을 진보주의자들이 했기 때문이며, 실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때 목회가 복잡해지는 것은 하나님, 인간, 피조물의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고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계층문제, 사회적 이해관계 등 복잡하고 교회가 이에 대해서 한 마음, 한 뜻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저했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러한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받아드려야만 한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교의 방식은 동일시의 원리와, 봉사의 3중적 형태,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하나님 나라의 선교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 지상명령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범을 본받아 그들이 복음을 받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을 양육하고 재생산하는 그런 제자를 삼는 자들로서 사명을 다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죽음과 죄와 사탄의 모든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금 이 땅위에 재림하실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 선교명령에 기쁨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참고도서
1. 허버트 케인, 이재범 역, 선교신학의 성서적 기초, 도서출판 나단, 1991 
2. 김명혁, 선교의 성서적 기초, 성광문화사, 1985 
3. Roger E.Hedlund, 송용조 역, 성경적선교신학, 서울성경학교출판부, 1991 
4. 손윤탁, 성경적 선교신학과 통전적 선교관, 선교와 신학 7집,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2001 
5. 남정우, 선교역사의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 교회적 선교신학을 모색하며, 선교와 신학 7집,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2001 
6. David J. Bosch, 김병길, 장훈태 공역 변화하고 있는 선교(Transforming Mission),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7. Yohanes J. Verkuyl, 최정민 역, 현대선교신학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8. 선교학개론. 이광순. 이용원 공저, 장로교출판사. 1995 


각주
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2)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 이끌리시며"(눅4:1)
3) David J. Bosch, 김병길, 장훈태 공역 변화하고 있는 선교(Transforming Mission),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24쪽
4) David J. Bosch, 김병길, 장훈태 공역 변화하고 있는 선교(Transforming Mission),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36쪽
5) Arthur F. Glasser and A. McGavran, Contemporary Theologies on Mission p.26 이광순 이용원, 선교학개론, 한국장로교출판사, p.19 재인용
6)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마10:5)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마15:24)
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
9)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요15:16).
10)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12:2)
11)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12) 사7:14-16
13) 요1:18, 요14:6-11,
14) 마12:25-29
15)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12:32)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갸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17)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3)
18) 막3:7-8, 막4:24-25
19) "내가 너의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 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그리스도께서 만일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4). 
20)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러라"(마 8:17)
2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22)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평화로다"(눅2:14)
23)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뻔 하였거니와(눅19:42)"
24) "그리하여 온 유대와 길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행9:31)
25)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26) 엡2:14-18, 골1:15-20
27) "산들은 떠나고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사54:10)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겔37:26)
28) 슥9:9-10
29) 마3:13-17
30) 눅15:1-2
31) 눅23:32-33
32) 마12:22-29, 히2:14, 요일3:8
33) 마5:13-16
34) 마9:37-38
35) 마13:1-13
36) 마13:24-30, 36-43
37) 마13:24-30, 36-43
38) 마25:14-30
39) 눅14:7-24, 마22:1-14
40) 눅14:28-30, 눅14:31-33
41)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
42) 눅15:3-7, 눅15:8-10, 눅15:11-32
43)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44)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마16:16)
45) 엡1:23, 엡2:8,16 3:6
46) "더러운 귀신들도 언제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막3:11)
47)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ㅎ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 
48)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9)
49) "이 천국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0)
50) 마28:18-20, 막16:15, 눅24:44-49, 요20:19-23, 행1:8
5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행 2:41)
52)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53)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42)
54)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 29) 
55)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 이니라"(마 16:24)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56)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말씀하셨는데,(요 8: 31)
57)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58)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
5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 (롬8:29절